소설리스트

후작가의 망령재림-254화 (250/268)

< 45. 금과 쇠 [9] >

용병 중 진짜 실력자들은 길드에 없다.

그런 강자들은 큰 용병단에 영입되거나 혹은 제 용병단을 세우려 했으니까.

실력 좋은 이가 굳이 수수료를 떼고, 또 그 행적을 고스란히 밝히면서 용병 길드에 남아있을 이유가 없기 때문이었다.

그도 아니면 한 지역구에서 비밀리에 의뢰를 받는 비밀 용병이 되거나.

이러한 비밀스러운 매검 집단 중에서도 특별히 비싼 이들이 있었다.

장사를 접어버린 전설적인 암살단이라던가.

만화원도 바로 그중 하나, 가격으로만 따지자면 가장 비싼 이들이었다.

어마어마한 금력 혹은 권력이 있어야 접근이 가능한 만큼이나 비싼 해결사들.

그리고 에던이 그 위력을 다시금 실감했다.

의뢰 이후 밥 한 끼 먹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곧장 임무 완료라니.

“업계 최고라 소문이 자자하더니.”

“별말씀을 다.”

“아닐세. 다 계산된 거였겠지.”

애초부터 도시의 상황을 전부 알고 있었으리라.

일부러 상행을 지켜주며 실력을 보여 고용을 유도했다.

지난 의뢰를 대차게 말아먹고 악명이 퍼지는 바람에 이렇게 접근할 수밖에는 없었겠지.

그리고 의뢰 내용을 미리 파악하고, 따로 인원을 타플강드의 창고 지대로 보내놓았을 터다.

그 후에 의뢰를 받고, 시간에 맞춰, 혹은 어떤 방식으로든 신호를 보내 면전에서 임무를 완수한다.

대단한 수완이 아닌가.

장대한 헛다리였지만, 에던은 그리 확신했다.

“어음은 받지 않는다고 해서 준비했다네.”

에던이 손가락을 튕기자, 비서로 보이는 직원이 급히 식당을 나섰다.

그리고 돌아오니 품에 작은 상자를 안은 채였다.

시엔이 잠시 고민했다.

이걸 받아도 되려나.

창고 방면에서 폭발이 일어난 것 같기는 하다.

그러나 폭발의 주체가 시엔의 의도가 아니었으니, 누가 그랬는지 혹은 정말로 타플강드의 창고가 날아갔는지 아니면 그저 그 근방인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타플강드 상단의 창고가 날아갔다고 해도, 시엔이 의뢰를 완수하지 못한 셈인데.

에던이 상자를 열었다.

붉은 주단에 놓인 것이 보석 몇 알이었다. 시엔이 조예가 있으니 확실한 상등품들이 확실했다.

“보증서도 함께 일세.”

시엔이 고민을 마쳤다.

거절하기에는 너무 큰 액수였다.

그리고 뭐. 모로 가도 목적지에만 가면 그만이다.

암살 의뢰를 받았는데, 대상이 사고사로 죽어버린 꼴이 아닌가. 어쨌거나 대상이 죽었다면 의뢰인의 입장에서도 불만은 없으리라.

혹여 폭발이 창고가 아니더라도, 나가 바로 살펴보고 남아있다면 그때 처리하면 그만이었다.

“혹시, 도시에 더 머무를 생각인가?”

“예. 개인적인 볼일이 남아서요.”

“그렇다면 의뢰 하나 정도는 더 맡을 수 있겠나?”

시엔이 에던 케이즈를 바라보았다.

케이즈 상단은 대륙 북부의 거상이었다. 자유도시 할타스에서는 타플강드 상단에 맞선 상인 연합의 대표이기도 했고.

그러한 인물이라 보통은 아니니라 생각했더니.

인제 보니 호구도 이런 호구가 없었다.

시엔이 히죽 웃으며 말했다.

“얼마든지요.”

* * *

폭발의 여파가 도시를 뒤흔들었을 때, 사람들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인부가 짐을 떨구고, 아이가 울음을 터뜨렸다.

하필 아침이라 사레가 들린 이가 다수 발생했다. 그 서슬에 깨져 나간 식기도 여럿이었다. 식기 상인들에게는 기쁜 소식이 되겠지만.

그리고 폭발과 그 관계자를 제외하고, 그 소란에 놀라거나 관심을 가지지 않은 이가 한 명 있었다.

창밖으로 거하게 피어오르는 연기를 그저 배경으로 남겨둔 채, 집무실에서 고개를 떨군 사내였다.

그리고 집무실의 문이 조용히 열렸다.

슬쩍 열린 문틈으로 한 사람이 스며들었다.

응당 사람이 가져야 할 인기척은 전혀 없이, 그저 움직이나 어떤 소리도 진동도 없는 유령 같은 모습이었다.

불청객이 사내를 바라보았다.

분명히 시선 안에 들었는데도, 멀거니 흐린 초점은 손님의 방문을 알아채지 못한 기색이었다.

불청객이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겨우 입을 열었다.

“발라스 의원님.”

발라스의 눈동자가 그제야 색을 되찾았다.

“아. 자네 왔는가.”

“괜찮으십니까?”

“나는 괜찮네.”

발라스가 그리 말하고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또 한참이나 침묵이 계속되었다.

“아니. 괜찮을 리가 없지. 괜찮을 리가 없어.”

발라스가 침묵을 깨며 말했다.

“의원님…….”

“생각해 보면, 나림에게는 항상 엄격한 애비였지. 그래. 아이가 열다섯 때였던가. 하루는 너무하다며 울고불고 난리를 치더군. 제국의 순혈, 그 자격을 위해 한시도 공부를 쉬는 일이 없었으니까.”

“기억합니다. 제게도 항상 그 말을 했으니까요. 삶이 팍팍하고 조금도 쉬는 시간이 없다고. 아침에 눈을 떠서 밤에 잠을 자기까지, 이게 사람 사는 꼴이냐 절 보기만 하면 불평을 토했지요.”

한 사람을 추억하며, 두 사내가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래서 그리 우는 아이에게 내가 어찌했는지도 아나?”

“그건 못 들었습니다만.”

“쓸모없는 아이는 필요 없으니 버리겠다고. 먼 숲에 홀로 놔뒀다네. 물론 사람을 시켜 지켜보도록 했고, 꼬박 하루를 보내고 거둬들였지만.”

발라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 이후로 내 앞에서 힘들다는 소리는 한 번을 안 꺼내더군. 내가 잘한 일이라 여태까지 그리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제는 그저 후회뿐이야.”

“……”

“이리 갈 줄 알았다면 짧은 생이나마 즐거운 일만 하고 좋아하는 일만 시키며 그렇게 즐기도록 했을 텐데. 그 아이가 죽어가며 얼마나 나를 원망했겠나? 이렇게 끝나버릴 삶, 대체 왜 고통받았냐고.”

그 강건하던 대의원은 온데간데없었다.

자식 잃은 애비는 그새 폭삭 늙어버렸다.

손님이 발라스를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그렇지는 않았을 겁니다.”

“그럴 리가.”

“아닙니다. 방금의 이야기는 저 역시 처음 듣는 이야기였으니까요. 나림이 그 일을 원망했다면, 제게 수백 번은 더 불평을 토했을 겁니다.”

“그저 두려웠을 수도 있지. 이 애비가.”

“자책하지 마십시오. 나림은 항상 노력했습니다. 새 시대의 지배층이 되기 위해서. 그리고 발라스 의원님 당신께 인정받는 딸이 되기 위해서요. 그게 나림의 진심이었습니다. 의원님을 위해서요.”

발라스 의원의 눈구멍에 습기가 차올랐다.

촉촉한 시선이 손님을 바라보다, 마침내 눈물 한 방울을 툭 떨구고 말았다.

“……고맙네. 쟈룬 자네도 힘들 텐데. 못난 애비가 제 심정만 떠들었군.”

“이럴 줄 알았다면, 진작에 솔직한 마음을 고백했을 텐데. 항상 소꿉친구니까, 좋은 친구라서. 그리 좋아한다 한 마디를 못 전했습니다.”

의회의 전달자, 쟈룬이 후회를 토해냈다.

둘 모두 사랑하는 이를 잃었다.

또다시 침묵이 찾아들었다. 긴 침묵이었다.

“……자네가 온 건, 대계를 확인하기 위함인가?”

“아닙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다른 이에게 대계를 넘겨주십사 부탁드리려 함입니다만.”

“아니. 안 될 말일세.”

“그건 생명력을 대가로 하는 술법입니다! 의원님께서는 무사하지 못할 겁니다!”

발라스가 고개를 저었다.

“그게 무슨 상관이겠나? 어차피 살아봐야. 미래를 넘겨줄 아이가 사라졌으니, 나 역시 오래 살아봐야 무슨 소용이라고.”

“의원님! 일단 시작하면 멈출 수 없음을 아시잖습니까!”

“멈춰서는 안 되는 거겠지. 도중에 멈추면 큰일이 벌어진다고 했던가? 걱정은 말게. 그때 가서 죽음이 두려워 멈추려고. 다들 그걸 우려하던가?”

“그리 드리는 말씀이 아니잖습니까!”

쟈룬이 바락 외쳤다.

발라스가 문득 물었다.

“아. 자네는 모르는가?”

“무얼 말씀이십니까?”

“내가 어째서 죽음만이 기다리는 임무를 맡았는지. 혹여 자식 잃고 자포자기하여 자살을 하려고 한다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쟈룬이 입을 꾹 다물었다.

발라스 의원이 허허 웃으며 말을 이었다.

“몰랐나 보군. 이건 자살이 아닐세.”

“그러시면.”

“이미 의원님들께 말해놓았네. 나중에 새 세상이 열려 사서에 기록되기로, 대의를 위해 제 생명을 바친 열사의 이름이 남게 될 걸세. 나림 발라스가 말야.”

“그건……”

“새 세상의 반석으로 나림의 이름이 남아 영원히 전해지겠지. 역사로 기록되어 영구불멸 칭송받는 이름이 될 테고. 내가 원하는 건 그뿐일세. 해 줄 수 있는 것도 그뿐이고.”

“그건 다른 이를 시켜도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의원님께서 목숨을 바치지 않으셔도 역사 기록은 충분히 하실 수 있는…….”

“아니. 내가 해야 의미가 있다네. 내가 목숨으로 해주어야 의미가 있어.”

쟈룬이 그제야 깨달았다.

발라스 의원이 죽어야 하는 임무에 직접 나선 것은 삶의 의지 상실 따위가 아니었다.

그저 딸을 위해, 해줄 수 있는 것이 그것뿐이라서.

그렇다면 더는 말릴 수도, 자격도 없었다.

쟈룬이 설득을 단념했다.

“이해해 준 모양이군.”

발라스가 빙그레 웃었다.

“그래. 모자란 의원과 대화나 좀 나누어 주겠나? 한때 예비 사위와 예비 장인으로서. 먼저 떠난 이를 함께 추억하며.”

“예. 기꺼이.”

“아침은 아직인가? 이러지 말고 식사나 하며 이야기하세. 그러고 보니 나림 그 아이가 참으로 미식가였지.”

쟈룬이 마주 웃으며 대답을 붙였다.

“맞습니다. 얼마나 입이 까다로운지, 그러면서 또 안 먹으면 몰라. 맛이 없으면 없는 대로 먹으면서, 그러고 나면 온종일 불평이었습니다. 음식이 맛이 없다는 소리를 어찌 그리 다양하게 할 수 있는지.”

* * *

창고로 가는 길에 시엔이 고기를 우물거렸다.

연신 우물거렸다.

이쯤 되면 오히려 의문이 들 정도였다.

이게 소고기인지, 아니면 소고기인 척하는 헝겊 떼기인지. 씹어도 씹어도 대체 녹아나질 않으니.

하기야, 겨우 동전 몇 개짜리 꼬치구이였다.

소고기는 비싼 것인데, 이리 싸게 노상에서 팔고 있으니 그 질이야 뻔하겠지.

흔히 쇠심줄이라 하던가. 괜히 쇠심줄이라는 말이 나오는 것이 아니었다. 이리도 질긴 것을 보면.

겨우 하나 빼 먹었는데 턱이 아플 지경이었다.

시엔이 꼬치구이를 옆으로 내밀었다.

사실 나 먹기 싫은 것이 남 먹기도 싫은 것이라.

시엔이 꼬치를 넘기는 것이 먹어 처리하라기보단 흔한 거지나 지나는 꼬맹이한테 넘기라는 뜻이다.

“이런 은혜를…… 주인님, 감사히 먹겠습니다.”

“어. 그래.”

꼬치를 받아든, 나림이 감격하며 외쳤다.

그리고는 한 점 빼어 무는데, 열심히 오물거리고 또 오물거리며 턱을 부지런히 놀렸다.

막상 먹을 때는 별로였는데, 나림이 먹는 양을 보니 또 맛이 있어 보인다. 시엔이 궁금해 물었다.

“어때?”

“너무 맛있어요.”

음식의 참맛을 알고 싶다면, 굶으면 된다.

그리고 나림은 많이 굶었다. 아사 직전까지.

“얘는 혀도 맛이 갔네. 이것도 너 먹어.”

“네, 작은 주인님.”

파린이 그리 중얼거리며 제 꼬치도 내밀었다.

양손에 꼬치를 든 나림은 세상 가장 행복한 표정이었다. 어쩐지 짠한 모습이었지마는.

폭심지로 다가갈수록 거리는 어수선해졌다.

한데로 향하는 구경꾼이며 그를 헤치고 달려 나가는 소방대와 경비대 등등.

시엔 일행도 그사이에 끼어 움직였다.

에던의 새 의뢰에 착수하기 전에, 타플강드의 창고 상태부터 살피기 위함이었다.

애던의 새 의뢰는 간단했다.

타플강드의 비밀 창고를 파괴해 달라는 것이었다.

이전 사보타주 의뢰의 연장선이었다.

비밀 창고의 위치를 모른다는 점이 달랐지만.

사실, 에던이 알고자 하면 할 수 있었다.

상인이 금전과 물품을 추적하면 비밀 창고 정도야 알아낼 수 있다.

그 대신 상대방 역시 비밀 창고를 조사한다는 사실을 알아채게 되니, 역시 마찬가지로 보복이 돌아올 수밖에는.

그러니 상인들의 암묵적인 룰로서로의 비밀 창고를 모른 척, 그리고 알려고 하지 않는 것이다.

에던이 생각하기에 이 유명한 용병 집단이 충분히 그 비밀 창고의 위치를 알아낼 정보력을 가진 것 같았다.

그리고 시엔도 이미 몇 군데는 알았다.

비밀 창고라 해도 사람이 들고 나기 마련이고, 또 그렇게 음지에서 움직이는 데에 건달이 빠질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리고 건달 두목 둘에게서 정보를 뽑는 와중에 건진 장소가 몇 군데였다.

그러나 당장 착수하기 전에, 일단 보상부터 받은 기존의 의뢰가 문제가 없는지부터 살펴야 했다.

진짜로 창고가 날아갔는지, 아니면 그 근방인지.

아니라면 이번에는 제대로 날려버리면 되고.

그렇게 타플강드의 창고 지대로 향하는 중이었다.

“앗, 너, 너!”

누군가 삿대질하며 아는 체를 했다.

어쩐지 들어본 듯한 목소리였다.

시엔이 바라보니 후드를 깊게 눌러쓴 이가 다급히 달려들었다.

그리고는 상당히 절박한 기색으로 팔을 뻗어 시엔의 팔을 잡았다. 잡으려 했다.

잽싸게 팔을 빼낸 시엔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전에 아르트레스 영주성에서 본 얼굴.

진짜 만화원의 방화광, 뤼니헤였다.

“네가 여기, 세상에, 천신이시여. 나랑 좀 가자, 급해!”

심지어 천신을 찾기까지 했다.

만화원이 이전에 교단을 여러 번이나 적대했던 것을 생각하면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닌가.

그러나 급한 것은 그녀이지 시엔이 아니었다.

“우리가 그리 반가운 관계던가?”

“젠장, 도와줘! 급하단 말야!”

“좀 진정하고. 왜 그러는데?”

“치료가, 치료가 필요해. 많이 다쳐서, 날 구하려다가, 젠장, 피가 계속 나는데. 나는.”

시엔이 뤼니헤의 손을 바라보았다.

방화광이라 붉은 옷에 붉은 장갑을 끼었다.

붉은 천에 불그스름하니 얼룩이 졌다. 인제 보니 다름 아닌 핏자국이었다.

시엔과 일행이 신성을 쓰니 곧장 알아보고 치료를 요청하는 모양.

그러나 사람을 잘못 찾았다.

뭐 좋은 관계라고 치료까지 해주겠는가.

“우리가 그런 관계는 아닌 것 같은데.”

“젠장! 좀 도와줘! 사람이 죽어 간다고!”

“방화광이 하는 소리로는 좀 이상하지 않아?”

사람 태우기를 즐기는 족속이 누구 죽는다고 호들갑이라니. 시엔이 코웃음을 쳤다.

“큭, 안 도와줄 거면 비켜! 젠장, 라이네스…….”

뤼니헤가 시엔을 거칠게 밀치고, 시엔이 자연스레 피했기에 시도에 그쳤지만.

그리고는 다시 다급히 발을 놀렸다.

놀리려고 했다. 시엔이 입을 열어 붙잡기 전에는.

“잠깐. 라이네스? 그 키 큰 녀석?”

“그래, 그년! 빌어먹을, 사람만 좋아서는……!”

“어디야?”

뤼니헤가 기묘한 표정을 지었다.

“뭐 해? 급하다며? 앞장서.”

시엔이 재촉했다.

그 땅지기의 정신 상태가 좀 이상해 보이기는 했지만, 그대로 자처해 심긴 첩자를 죽게 놔 주기도 뭐한 노릇이었으니까.

< 45. 금과 쇠 [9]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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