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작가의 망령재림-252화 (248/268)

< 45. 금과 쇠 [7] >

마스터가 몸을 질질 끌어 물러났다.

나비가 또각또각 걸어 그만큼 쫓았다.

“괴, 괴물…….”

“괴물이 아니라 나비. 이름 예쁘죠? 주인님께서 지어주신 이름인데에.”

“이, 이러고도 네년이 무사할 줄 알아?”

“와아. 그거 되에게 오랜만에 듣는다.”

나비가 키득거리며 마스터 앞에 쪼그려 앉았다.

“있잖아요, 내가 빛을 만나기 전에는요오, 이름이 또 달랐거든요? 혹시이 검은 장미라고 아시나아.”

“검은, 장미.”

마스터의 동공이 가늘게 떨렸다.

나름 뒷골목 짬을 먹었다는 놈이라면 그 이름을 모를 수가 없다.

전설적인 암살자의 이름이었다.

무엇보다 암살 전에 예고장을 보내는 정신 나간 작자다.

이제부터 널 죽이러 가겠다고 대놓고 선언하고는, 비상이 걸려 잔뜩 몰려든 호위와 함정들을 뚫고 목표의 숨통을 끊었다.

여느 때라면 웃기지도 않는 사칭이라 여기겠지만, 그 사칭이 건달 수십을 간단히 도륙을 냈다.

이 정도면 사칭을 해도 자격이 있을 정도이니.

“검은 장미가, 왜……?”

“말했자나요. 너네 꼬맹이가 내 돈주머니를 훔쳤다니까요오. 든 거야 몇 푼 안 되는데, 주머니는 그분께서 주신 건데에.”

“제길.”

“좋은 말로 할 때 돌려주면 좋았을 텐데. 그러니 내가 직접 찾아야 하잖아요. 그러니까 문 좀 열어 줄래애?”

이 여자. 눈이 맛이 갔다.

검은 장미 본인이건 아니건, 뒷골목에 깊숙하게 발을 들인 여인이 틀림없었다.

이제 와서 발뺌을 한다고 통할 상대가 아니라는 뜻이었다.

게다가 목숨 걸고 비밀을 지킬 의리도 없고.

마스터가 순순히 뒷문을 열었다.

“좋아요. 참 착하다. 그치?”

나비가 마스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마스터가 슬금슬금 눈치를 보았다.

“나는 이제 가도 될지…….”

“으음. 어쩔까나아. 괜히 떠들고 다니는 녀석은.”

“절대로. 절대로 입을 열지 않겠다.”

“친구야, 머리가 있으면 생각을 좀 해 봐요.”

나비의 제 머리를 톡톡 건드렸다.

“아저씨가 소매치기라고 치고 또오 세상에서 제일 기술이 좋으면은. 나한테 뭘 훔칠 자신이 있나?”

“……제기랄.”

나비의 말대로였다.

세상 어떤 소매치기자 전설적인 암살자의 소지품을 훔칠 수가 있겠는가. 애초에 그녀가 허락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 일이 벌어졌으니, 애초에 나비가 의도하고 훔치도록 허락해 주었다는 뜻이었다.

마스터가 지그시 눈을 감았다.

“안 아프게 부탁한다.”

“그 정도야 뭐어.”

“고맙다. ……는 썅!”

마스터가 숨겨둔 단검을 꺼내 찔렀다.

그러나 손에 걸리는 느낌이 없다.

동시에 따끔하게 목을 스치는 무언가.

속에서 뜨거운 것이 치밀었다.

* * *

“요디야, 우리 요디야. 이 형이 실망이 크다.”

“아니에요, 제가 안 그랬어요…….”

“우리 요디가 안 그랬는데, 대체 왜 주머니가 텅 비었을까? 분명 싯누런 금화가 나오지 않았냐?”

“진짜예요, 그거밖에는, 그거밖에는 없어서.”

“하아. 이 애새끼 진짜 독종이네.”

두목이 제 머리를 마구 헝클어뜨렸다.

벌써 밤이 찾아왔다.

“불로 지져도 몰라, 바늘로 찔러도 몰라, 물을 그리 처먹어도 아는 게 없어. 대체 우리 요디는 아는 게 뭐야? 어디로 빼돌렸다고 묻잖아.”

“저는 몰라요, 진짜예요, 믿어주세요…….”

“하. 이거 진짜. 물건이네.”

두목이 고개를 저었다.

“야. 이거 어쩌냐?”

“여기서 더 했다간 진짜 뒈집니다. 세상에 이리 독한 새끼가 있나. 캬아.”

고문 기술자가 혀를 내두르며 말했다.

“죽는 건 안 되지. 죽는 건 말야. 그러면 내 돈도 같이 날아가니까. 하. 이걸 어쩐다. 그냥 확 죽여?”

“포를 떠다 애새끼들한테 먹이는 건 어떻습니까. 너네가 처먹는 게 배신자 고기라고 하면 당분간은 군기가 빡 들 겁니다만.”

“하으. 시발. 그래. 내가 졌다. 내가 졌어.”

두목이 고개를 저으며 몸을 일으켰다.

어차피 돈의 회수는 글렀다. 그러면야 배신자의 처형으로 군기라도 다잡아야 할 판이었다.

“살려주세요! 제발 살려주세요!”

요디가 다급히 외쳤다.

“아니, 좋은 길 놔두고 뒈지려는 게 너였잖냐. 이 형이 우리 요디를 얼마나 아꼈는데. 큰 사람 된다고 팍팍 키워줬는데 배신이나 하고. 음?”

두목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방금 무슨 소리 안 들렸냐?”

“무슨 소리 말씀이심까?”

“무슨 긁는 소리 같은 게.”

기기기긱. 두목의 말을 끊고 금속 부대끼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고문실의 철문이었다.

누군가 밖에서 철문을 칼로 긋는 듯한.

“어떤 새끼야? 그냥 노크를 하려면 노크를 하지.”

“누군지 보겠습니다.”

고문 기술차가 철문의 눈구멍 덮개를 밀고 너머를 들여다보았다.

“뭐야, 누가, 어헉.”

고문 기술자가 화들짝 놀라 엉덩방아를 찧었다.

“두, 두목, 밖에, 밖에……!”

“뭔데?”

“밖에, 밖에.”

“뭐, 귀신이라도 봤냐? 담은 콩알만 해가지고는.”

두목이 혀를 차며 눈구멍에 머리를 가져다 댔다.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붉은 드레스를 차려입은 여인이었다. 그 뒤로 산더미처럼 쌓인 무언가가.

두목이 깜짝 놀라 철문에서 떨어졌다.

“이런, 썅! 뭐야, 저 미친년은!”

여인의 뒤로 쌓인 것이 온통 시체들이었다.

그것도 시체를 네모반듯하게 쌓아놓고는, 머리를 잘라 가장 위에 한 줄로 세워 놓았다.

-아. 아. 들려요? 들리나아?

“누, 누구냐!”

-아까 광장에서 제 주머니를 도둑맞았는데, 혹시 그쪽에 있지 않나요오?

“무슨 개소리를……!”

-거기 소동화로 대충 마흔 개 정도 들었을 텐데. 원래 금화도 한 개 들어있었는데, 그건 꼬치 하나 사 먹느라 써 버렸거든요오.

두목과 고문 기술자가 하얗게 질렸다.

두목이 요디의 머리채를 와락 잡아챘다.

“너, 미친 새끼야, 대체 누굴 건드린 거야?”

“……처음부터 그거밖에 없었다고 했잖아요.”

“X발 니똥 굵다! 사람이 오해 좀 할 수도 있지.”

“흐, 흐흐, 오해요? 오해? 오해!”

“이 새끼가 미쳤나!”

두목이 요디를 내팽개쳤다.

-저기요오, 듣고 있나요오. 아무도 없나? 그러면 불이나 질러야겠다. 시체도 처리해야 하고.

“잠깐, 잠깐! 듣고 있다! 듣고 있다고!”

두목이 깜짝 놀라 외쳤다.

고문실은 지하에 막힌 방이었다.

밖에서 불을 지르면 살아나갈 방법이 없다.

거기에, 불이라는 말을 듣고 나니 기름 냄새가 훅 끼쳤다.

미친년이 아예 바깥에 기름을 쏟아부었구나!

두목이 급히 소리쳤다.

“원하는 게 뭐냐? 뭐냐고!”

-내 주머니 돌려줘요.

“알겠다. 주면, 주면 되잖냐! 야, 주머니 그거 어디다 뒀냐?”

“두목이 찢어버리지 않았슴까.”

“아, 씨.”

-뭐에요? 남의 물건을 가지고. 훔친 것도 모자라 찢어버렸다고요? 아 열 받는다. 너무 열 받는다아. 확 불이나 질러버려야지.

“잠깐! 잠깐만! 보상하겠다! 내 전부 보상하지!”

-어떻게요?

“돈! 돈 주면 되잖나!”

-나 돈 많아요? 우리 주인님께선 자상하기도 하셔서. 다달이 두둑히 주시는데요오. 쓸 데가 없어서 다 우리 스승님 드려요. 우리 스승님은 고아원 운영하시느라 돈 많이 필요하시니까.

그딴 거 하나도 안 궁금한데.

두목이 식은땀을 흘렸다. 목소리만 들어도 안다.

저건 단단히 미친 년이었다.

-아. 그럼 이렇게 해요. 나랑 어디 좀 같이 가요. 우리 주인님께서 궁금한 게 많으신데, 가서 대답 좀 드리면 되겠다아. 아니면 확 불 질러버리고.

“알겠다! 알겠으니까!”

-정말이죠? 약속하는 거죠오?

“오냐! 약속하겠다!”

-그런데 문은 안 열어?

두목이 고문 기술자와 눈빛을 교환했다.

네가 먼저. 시선 끌면 내가 처리할게.

고문 기술자의 안색이 더 나빠졌지만, 이내 방법이 없음을 깨닫고 고개를 끄덕여 동의했다.

고문 기술자가 걸쇠를 풀고 철문을 밀었다.

기이이. 육중한 철문이 바닥을 긁었다.

그리고 문이 채 절반도 열리기 전이었다.

고문 기술자가 그대로 쓰러져 바닥을 뒹굴었다.

열리다 만 문으로 나비가 파고들었다.

“이런 X발년이!”

두목이 단검을 꼬나쥐고 달려들었다.

조직을 이끌 정도면 보통 단검술로는 안 된다.

그러나 상대가 상대여야지.

쭉 뻗은 팔에 무언가 휘감기며 묵직함이 느껴졌다.

뼈가 똑 부러져 살과 옷을 뚫고 빠져나왔다.

비명을 지를 새도 없이 무언가 옭아매니, 꼼짝달싹 못 하고 곧바로 제압된 꼴이었다.

그리고 또 또각.

남은 팔이 부러져 덜렁거렸다.

그리고 나니 무릎 위로 올라온 타인의 정강이가 관절 반대 방향으로 잡아당기기 시작했다.

다리를 망가뜨릴 작정이구나! 두목이 직감했다.

“아, 안 돼!”

“돼.”

귓가에 속삭이는 달콤한 음성.

무릎이 압력을 버티지 못하고 반대로 꺾였다.

“끄아악!”

두목이 비명을 지르며 바닥을 굴렀다.

양팔이 부러지고 다리 하나가 박살이 났다.

몸을 비틀면 더 큰 고통이 밀려드니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부들부들 떨며 거품을 물었다.

나비가 그제야 기지개를 쭉 켰다.

“이제 정보도 다 구했고.”

원래 건달들의 정보력이 참 뛰어난 법이었다.

일단 하나 잡아가 보고, 정보가 모자라면 같은 일을 한 번 더 하면 된다. 그래도 모자라면 또 하나 잡아가면 그만이고.

“아차. 이러다 죽겠다.”

나비가 두목의 상태를 확인하고 신성을 일으켰다.

별다른 처치가 없이 그저 신성뿐이었다.

양팔은 뼈가 튀어나온 채로 아물고, 다리는 관절이 반대로 꺾인 채로 단단히 붙었다.

한편에서 죽어가던 요디가 그 광휘를 보았다.

신성한 빛. 신성.

“사제님, 살려, 살려주세요…….”

“뭐야, 너. 용케 살았구나아?”

“살려주세요, 제발.”

“어휴, 꼴 좀 봐. 너어. 고생이 참 많았구나.”

“저는, 저는.”

고생이 참 많았구나. 그 따뜻한 한마디에 요디가 치미는 울음기를 참지 못했다.

이제 살았다는 안도까지 함께하니 꺼이꺼이 통곡이 터져 나왔다.

“뭐. 쓰레기가 고생도 좀 할 수 있지. 너, 훔치는 기술이 대단하더라. 살려줘도 또 그러고 살겠지?”

“끄흑, 예?”

스승님이 말하기를, 악한 이를 훈계하면 열 명 중 하나가 참회하며 좋은 사람이 된다고 하셨다.

남은 아홉은 똑같이 패악을 부린다고.

그러나 악한 이 열 명을 참해 치우면 그로 인해 앞으로 백 명 이상의 선량한 이가 행복할 수 있다.

그리고 악한 이 열 중 하나.

참회하여 갱생이 가능한 이는 천신의 뜻으로 인연이 닿는다고도 하셨다.

과거 죄인이었다던 스승님이나 나비 자신처럼.

이번에 새로이 동생이 들기도 했고.

그러니 쓰레기를 보면 망설임 없이 치우라고 하셨더란다.

구원 가능한 이는 우리가 판단하는 것이 아니니 그분의 뜻으로 자연히 이루어지리다.

“어휴. 기름 냄새. 더는 못 있겠다.”

나비가 일어나, 두목의 멀쩡한 다리를 질질 끌고 고문실을 빠져나갔다.

“잠깐만요! 사제님! 제가 잘못했어요! 제발!”

처절한 애원이 나비의 뒤를 쫓았다.

그러다 돌아오는 것은 지하에 메아리친 목소리. 그리고 잠시 후 후끈하게 들이치는 화염이었다.

* * *

“아이는 괜찮을 겁니다. 며칠 정도 충분히 쉬고 잘 먹으면, 허어……. 나림 자매님?”

“예, 선생님.”

나림이 곡물 포대에서 한 바가지 퍼내 주머니에 담아 내밀었다.

꼬질꼬질하고 더러운 꼴의 늙은이가 떨리는 손으로 쌀 주머니를 받았다. 고생만큼이나 자글자글한 눈가 안쪽으로 촉촉하니 물기가 차올랐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늙은이가 연신 중얼거리며 아이를 안고 떠났다.

이야기를 나누어 보니 그리 늙은 여인도 아니다.

겨우 마흔이 좀 넘었다고 하는데 보기엔 백발의 노인이었다.

빈민의 삶이 그만큼이나 참혹한 때문임을.

“다음 분 모시도록 하죠.”

“예, 선생님.”

나림이 천막을 들춰 다음 환자를 들였다.

정강이가 대가리만큼 부어오른 환자였다.

“허어. 어쩌다 이리되셨습니까.”

“창고에 노무를 다니다가, 삐져나온 못에 살짝 찔렸는데, 열은 오르고 발도 붓더니마는…….”

“철독이 붙었는데, 거기에 곪았습니다. 환부를 깨끗하게만 하셨어도 이리되지는 않았을 것을.”

“하이고요, 이 개미굴에 깨끗한 물 구하기가 마실 것도 으림이 읍어서. 강가마다 상인 놈들이 건달을 시켜다 물을 파는데……”

“물을 판다는 말씀이십니까?”

“아주 배라먹을 놈들입니다. 다리가 이래 여러 날 일도 못 하고 그러니 동전 몇 개도 없고. 그래두 성자님같은 분이 오셔서 다행입니다. 천신께서도 무심치는 않으시지.”

“성자라니요. 가땅치도 않습니다.”

“저희같이 인간도 못 되는 비렁뱅이들이야 이리 공짜로 봐주시는 것만 해도 성자님이고 성녀님이십니다. 신전 문턱도 못 넘은 놈이 하는 소리라두.”

누렁이가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공짜라니. 세상에 공짜가 있겠습니까?”

“사는 이야기 좀 들으시고 치료를 받으시니 그게 공짜지 아니랍니까.”

“어쨌거나 이제 치료값이나 좀 하시지요.”

“무슨 이야기를 해 드린다. 그래. 창고에 노무를 다닌다 말했는데, 실은 즈이같은 놈들이 호시탐탐 그 안을 살핍니다. 죄인 건 알면서두 배곯고. 특히 자식새끼 배에서 소리가 나면 그게 애비 가슴이 찢어지는 소리랑 같어.”

“부자의 정이 그러한 것이 아닙니까.”

“여튼, 그리 안을 들여다본다 아닙까. 혹여 바닥에 떨궈진 곡식 낱알이라도 있음 좀 주우려고. 또 거기 쥐가 많아서. 쥐새끼 한 마리만 잡으면 오늘은 그래도 고기 한 조각 메긴다고 아주 그날은 어깨가 쫙 펴는데.”

“쥐고기가 또 별미라지요.”

“근데 그러니까 안을 보니까 곡식은 없고 온통 꽉 닫힌 상자뿐인데. 우리네들 모여 몰래 하나만 열어 보자, 잠깐 감독쟁이 눈을 피해 열었더니 시퍼런 칼들이 잔뜩인 게 아닙니까.”

“칼이 말씀이십니까?”

“그게 타플강드 쪽 노무 갔을 때였나. 그쪽이 그래 일당이 제일 쎄니까. 아마도.”

“창고에 칼이라니 퍽 수상합니다만. 후에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 같아 어디인지 아시겠습니까?”

“물새 4번이었던가. 떼까치 4번이었던가. 정확히는 아녀두 날것 4번이었는디.”

누렁이가 나림과 향한 곳이 도시 외곽이었다.

천막을 치고 빈민을 치료하니 치료비 대신 근래 보고 들은 것 중 특이한 이야기를 해 달라고.

그렇게 밤이 늦도록 치료가 이어졌다.

또 한 환자가 나가고 나서, 나림이 물었다.

“선생님. 저들이 어찌 이리 고통을 받을까요?”

“주인이 없기에 그러하단다. 천신께서 귀한 피를 내리심에 평민들을 다스리라 하셨지. 자유라 하여 주인을 모시지 않으니 저들의 삶 또한 포기한 것이나 마찬가지란다.”

“그러면 저 안에 부유한 이들은요? 저들 역시 주인을 모시지 않는데도요.”

“세속의 기준으로 그리할 것이나 그들의 영혼이 이미 썩어 악취가 나지 않느냐. 저들이 죽어 갈 곳이 어디겠느냐. 오히려 이곳의 비천한 이들보다 더 가여우니, 이들은 삶이 비참하여 주인께서 나타나 따르라 하면 따를 것이 아니냐.”

“앗. 저 부유한 이들은 아예 일말의 구원조차 없는 것이로군요.”

“그리하여 자유도시에 신전이 없단다. 저들이 입으로 천신을 따르나 마음으로 그러지 아니하기에. 교단의 형제와 자매들이 모두 알아 신전을 세우는 일이 무용하기에.”

누렁이가 준엄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러니 너를 어찌 여기에 데려왔는지 알겠느냐?”

“예. 선생님. 저 역시 저들과 같은 죄인, 아니 그보다 더한 죄인이라. 더욱 헌신하여 그 값을 치루라 하심이 아니세요.”

“허허. 네가 영특하니 참으로 기쁘구나. 나비 그 아이가 청순하고 순진하기는 하나 경전에는 뜻이 없어 걱정이었는데. 내 떠나고 나서도 네가 나비를 도와 함께 형제와 자매를 이끌어야 한단다.”

“그런 말씀 마셔요. 오래 사셔야지요.”

그러다 문득 나림이 물었다.

“그런데, 나비 자매님께서는…….”

“글쎄다.”

누렁이가 허허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래도 천성이 선량하고 순수한 아이이니. 필시 어딘가에서 세상을 이롭게 하고 있지 않겠느냐.”

< 45. 금과 쇠 [7]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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