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5. 금과 쇠 [5] >
시엔이 여상히 대답했다.
“그거 가짜야.”
“예? 무슨 말씀이십니까?”
“소드 마스터 아니라고. 가짜 마스터야.”
“하지만, 오러 블레이드를 봤지 말입니다.”
“그뿐이지. 설마 마스터가 너랑 싸워서 지겠어?”
“제가 이길 수도 있는 거 아닙니까.”
“마스터가 할 일 없이 강도질이나 하고.”
“할 수도 있지 말입니다. 정 심심하면.”
베른닐이 툴툴거렸다.
잔뜩 신이 나 시엔에게 마스터를 잡았다고 자랑했는데, 돌아오는 말이 이따위였다.
때문에 흥분이 팍 식어버리고 나니, 그제야 상황이 파악된다.
확실히, 마스터의 실력이 아니었다.
기교에서도 속도에서도 힘에서도 전부 모자라기 짝이 없는 놈이었다.
그저 오러 블레이드 하나.
“그래도 오러 블레이드를 두 번이나 흘리지 않았습니까. 사실 말이 두 번이지, 계속하라면 계속할 수도 있었지 말입니다.”
“검위공이 잘 가르치시긴 하셨나 보네.”
시엔도 오러 블레이드를 보았다.
라이네스가 말할 때는 반신반의였는데, 제 눈으로 직접 보고 나니 그건 오러 블레이드가 맞다.
오러가 주는 예리함과는 차원이 다른, 그러한 잘 벼려진 오싹함이 있었으니까.
“오다가다 듣기로는 소드 마스터를 만드는 놈들이 있다더라. 무식하게 오러를 때려 박아 오러 블레이드만 틔우는 방식일까? 보아하니 검술로는 어설픈 것들이던데.”
“오러량과 마스터와는 별 상관이 없습니다. 과거 바람의 검성과 같이 순수 기교파의 기인들도 존재하지 않습니까.”
시엔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검위공께선 어디쯤 계시는데?”
“기교파 쪽에 계십니다. 응용파 녀석들이 하는 게 검술이 아니고 오러술이라 불러야 한다고 하시지 말입니다.”
검술 안에서 그 한계와 저변을 넓히고자 하는 것이 기교파의 기원이며, 아예 검술을 버리고 딴짓을 하는 것이 응용파의 멍청한 짓이라나.
물론 검위공이 기교파에 속하니 다분히 편파적인 판정이 들어간 의견임은 틀림없었다.
“그런데, 오러 블레이드를 길게 늘려서 빙빙 돌면 그걸 어떻게 막아? 그 길이가 사람 키 두 배 정도 되면 네 말대로 그게 궁극의 검술 아닌가?”
“된다고 하면 그렇지 않겠습니까. 아무리 뛰어난 마스터라도 두 뼘 정도가 한계지 말입니다.”
“그럼 검을 긴 거 쓰면 되지.”
“세 바퀴쯤 돌면 오러 탈진을 일으킬 겁니다.”
“한 바퀴만 돌아도 싹 반토막이 나는 거 아냐?”
“에이, 가능하겠습니까? 오러가 피아를 가리는 것이 아닌데. 아니면 홀로 그만큼 파고들어야 하는 상황이지 않습니까. 여럿 잡고 화살 맞습니다.”
“그렇게 되면 검술이 아니라 궁술에 제압당하는 거 아냐?”
“어…….”
베른닐이 눈알을 굴렸다.
시엔이 피식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검위공이 기교파라고 하니 베른닐도 마찬가지일 터.
반대 파벌의 의견이라 무조건 나쁘다며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하니 결국 허점이 드러날 수밖에는.
“뭐. 그런 게 중요한 건 아니니까.”
수준 미달의 소드 마스터는 이미 그 존재를 주워들었다.
만화원의 라이네스가 말하기로는 메어리 상단주의 저택에 호위로 붙어있었다고 했으니.
그 뒤에 의회가 있었으니 이번 습격 역시 의회의 수작임이 틀림없다.
그런데 왜?
가장 먼저 든 생각은 감히 나를 노렸나 하는 것이었으나, 금방 머릿속에서 쓱 지웠다.
시엔이 여기에 도착할 거라는 보장이 어디 있다고 습격을 준비했겠는가.
철저한 것과는 거리가 멀더라도 신분을 감췄고, 도련님의 야유회쯤으로 보이는 무리를 굳이 누가 팔아먹어 이득을 얻고자 하지도 않았을 터다.
그렇다고 단순히 강도질이라 하겠다고 마스터를 둘이나 보내지는 않았으리라.
그저 상대가 워낙에 나빴을 뿐이었다.
가짜 마스터라 해도 시엔 일행이 없었다면 참사가 벌어졌을 것이 뻔했다.
그렇다면 상단 행렬 자체의 파괴가 목적이었겠지.
그러면 왜? 모르면 물어보면 그만이었다.
* * *
시엔이 상행의 책임자, 상장에게 다가갔다.
시엔을 본 상장이 호들갑을 떨며 고개를 숙였다.
“아이고, 마법사님이셨군요! 아니었더라면 정말로 큰일 치를 뻔했습니다. 추천서가 범상치 않더라니, 과연! 정말로 감사드립니다.”
“뭘요. 그냥 절반쯤 해치운 게 전부인데요. 아니. 치료도 조금 했지만. 사람 좀 살린 게 뭐 대순가.”
상장이 순간 말문이 막혔다.
겸손한 것 같은데 거만한 말이 날아왔다.
강도 떼는 말 그대로 떼로 몰려들었다.
길바닥에 널린 시체만 대충 백여 구에 가까웠다.
개중 시엔 일행이 해치운 강도가 반절이 넘었다.
“보아하니 보통 강도는 아니던데. 화물 중에 귀한 것이 있던가요? 비밀리에 몰래 호송 중이라던가.”
상장이 그제야 시엔의 의도를 알아챘다.
겸손한 듯 생색은 다 내니 좋은 말로 순순히 실토하라는 그런 압박이었다.
상장의 마음이 편해졌다.
그는 떳떳했으니까.
“그런 건 소설책에나 나옵니다요. 귀한 화물이면 애초부터 호위를 늘려 강도건 괴물이건 덤빌 엄두도 안 나도록 단단히 싸매 지키지요. 그보다 더한 귀물이면 애초에 상단에게 일감이 떨어지는 일도 없는 법입니다.”
비밀리에 호송할 화물은 밀수밖에는 없다.
아니면 그렇게 지켜야 할 정도면 국보급은 할 텐데, 애초에 그만한 보물은 일개 상단이 맡아 운송하는 일이 없었다.
귀족들의 군대가 들고 나르지.
시엔이 멍청한 질문이었음을 깨달았다.
듣고 보니 그랬다. 괜히 비밀리에 호송한답시고 규모를 줄이면 만만해서 오히려 더 습격받기 좋은 꼴인데.
“아니면 강도 떼와 원수진 일이라도 있나요?”
“원래 모든 상인의 원수가 강도인데, 그 반대는 잘 모르겠습니다. 강도들이야 하나둘 잡은 것이 아니니 개중에 이를 가는 놈이 제법 되기는 하겠지만, 본래 그놈들이 원한을 갚겠다 뭉쳐 나설 정도로 의리 있는 애들이 아니기도 하여서.”
그도 일리 있는 말이었다. 강도로 사는 놈이 동료고 친구고 원수를 갚겠다며 목숨을 걸 리가 있나.
“할타스는 처음이시군요?”
“태가 나나요?”
“원래 할타스는 강도가 극성입니다요. 물론 이런 규모는 저도 처음이긴 합니다만. 큰길로 다녀도 두세 번씩은 습격을 받으니 또 나타났구나 별 감흥이 없을 정도이지요.”
확실히, 호위들의 반응이 빨랐다.
잡담하며 시시덕거리던 놈들이 습격이란 외침 하나에 복창하며 바로 소식을 알리고, 당황하는 기색 없이 방패를 들고 무기를 뽑아 자리를 잡았다.
시엔이 이끄는 군대가 항상 그러했으니 당연하게 생각했던 것이, 떠올려 보면 용병들이 보일 모습은 아니었으니.
“그리 강도가 많다구요? 치안이 그리 안 좋은데 영주는 뭘 하구요? 군대를 몰아쳐 치울 것이지.”
“할타스가 아닙니까. 자유도시.”
“아. 맞네.”
자유도시가 이름으로만 자유지, 실상은 다스리는 영주가 없는 도시를 말함이었다.
대륙에는 국경과 국경 사이의 빈 땅이 많다.
말이 빈 땅이지, 두 왕국이 서로 자기네 땅이라 우겨 분쟁의 여지가 있는 지역이기도 했다.
일단 자기네 땅이라 우기기는 하는데, 딱히 지형과 자원으로 이득이 없는 경우.
무리하게 군대를 일으켜 차지하기에는 실익이 없으니 그냥 비워둔 채로 남은 그런 자투리였다.
그런 곳에 사람이 모여 마을이 서고 그게 성장해 도시가 되면 바로 자유도시의 탄생이었다.
드물게는 왕국 내에서도 벌어지는 일이라, 영지와 영지 사이에 하나씩 끼어 있는 경우도 있고.
“저희네 상단도 할타스가 거점입니다만, 요즘에는 아예 귀족 나으리를 모셔오는 것이 낫지 않나 싶습니다. 할타스령에만 들어오면 곧장 강도 떼들이라. 국경만 넘으면 강도는커녕 강도 그림자도 얼씬거리지 않는 판에.”
“그래도 세금은 안 내잖아요.”
“세금 좀 내도 안전한 게 낫지 않겠습니까요.”
그리고 주인 없는 땅의 한계가 이러했다.
주인이 없으니 군대도 없고, 군대가 없으니 치안 역시 엉망이었다.
강도가 들끓어도 치워줄 주인이 없으니 그냥 개인이 알아서 방비해 처리했다.
애초에 군대가 아니면 누가 도적을 토벌하겠는가.
해봐야 시민들이 돈을 모아 용병을 써야 할 텐데, 애초에 강도의 열 중 아홉이 용병패를 가졌다.
토벌하라 의뢰하면 모여들어 돈만 삼키고 돌아가 강도질을 계속할 것이 뻔했다.
“그럼 원한도 아니라는 말인데. 그러면.”
시엔이 주변을 살피는 척을 하며 소리를 낮췄다.
상인이 눈치껏 바짝 상체를 끌어당겼다.
“혹시 타플강드 상단과 충돌이 있었나요?”
상장의 눈이 휘둥그레 크게 떠졌다.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요? 타플강드 놈들이 습격을 사주했다는 말이신지.”
“증거를 대라 하면 곤란하겠지만요.”
상장의 인상이 찌푸려졌다.
그 와중에도 눈빛 어딘가에는 납득의 뜻이 비치니 제 속에 생각하기로도 무언가 짚이는 것이 있기는 한 모양이었다.
시엔이 그 모습을 보며 히죽 웃었다.
사실, 습격이야 뭐 아무래도 좋았다.
의회의 목적이야 알 바 아니나, 이렇게 귀띔하는 척 이간질을 했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상장이 가서 보고할 때에 이런 이야기를 할 테고, 그럼 타플강드 상단의 적이 하나 늘어날 테니까.
적의 적은 아무리 많아도 과하지 않은 법이니.
* * *
가짜 마스터라고는 하나 오러 블레이드를 두 번이나 막았다. 상대의 검술이 형편없었다고 해도 대단한 성취였다.
베른닐이 식사를 마치고 야영지를 돌아다녔다.
그리고 마침내 목표를 찾았다.
“이봐, 덩어리.”
“누가 날 그따위로, 억. 너는.”
“한 판 붙자며?”
“어. 그게.”
가일이 눈을 깔았다.
베른닐이 화살을 손으로 잡았을 때, 이미 제 상대가 아님을 알았다.
사실, 화살을 손으로 잡는 것은 의외로 할 만한 묘기였다. 가일도 하려면야 할 수 있었다.
다만, 그러려면 일단 궁수가 어디에 있는지 미리 알고 또 지켜보며 시위를 놓는 때를 알아야 했다.
그래야 날아드는 화살의 궤적을 알고 휘둘러 잡아챌 수가 있었으니까.
그나마도 전부 성공한다고는 못하고, 몇 번 시도해 한 번 정도는 할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베른닐은 뜬금없이 날아드는 화살을 붙잡았다. 그런 건 아무나 가능한 묘기가 아니다.
게다가 베른닐이 싸우는 모습을 보지 않았던가.
싸우는 모습을 보면 대충이나마 상대를 아는 법.
베른닐의 검술은 용병이 쓰는 것이 아니다.
명확한 체계와 식이 잡힌 제대로 된 검법이었다.
즉, 용병처럼 실전으로 외워 휘두르는 게 아닌, 제대로 된 검사라는 뜻이었다.
그런 상대와 싸우는 건 자살이나 마찬가지였다.
제대로 된 검술과 아닌 것의 가장 큰 차이는 반격에 있었으니까.
기술으로 정립된 반격 기술은 지금에 있어서는 선공이 오히려 불리하다 소리가 나올 수준에 이르렀다.
게다가 그 도적. 오러를 일으켜 찬란한 빛을 뿜어내던 도적 두목을 단 두 합 만에 반토막을 냈다.
용병이 보기에 마스터인지 아닌지는 모르는 일이나 제가 감히 상대할 수준은 아닌 것은 안다.
“헤헤, 제가 형님을 몰라뵙고.”
“짜식이. 싱겁기는.”
베른닐이 가일의 대가리를 툭 치며 돌아섰다.
그러고 나니 패거리가 보는 눈빛이 기묘하다.
가일이 인상을 구기며 으르렁거렸다.
“뭐, 새끼들아. 용병질 하루 이틀 하냐? 쎈 놈이 형님이지, X발. 꼬우면 한 판 붙던가.”
패거리들이 눈을 깔았다.
* * *
이후로 너댓 번의 습격이 더 있었다.
이전처럼 대규모의 조직적인 습격은 아니었다.
그냥 흔한 잡강도들이라고. 별 사상자 없이 술술 넘겼다.
오히려 칼 맞은 용병들이 한심하다 욕을 먹는 분위기였으니 오죽할까.
그만큼이나 치안이 아주 개판이었다.
첫 습격 이후로 시엔 일행은 극진히 대접받았다.
마법사가 흔하지도 않거니와 보여준 무용이 보통의 것이어야지.
무엇보다 누렁이와 나림이 결정적이었다.
부상자를 돌봐 신성을 일으키니 귀한 사제님들이 누추한 곳에 계신다며 난리들이었다.
용병들이 본래 오늘만 사는 인생들이라도, 사제 앞에서도 그렇지는 못했으니까.
사실은 그렇기에 오히려 더욱 극진한 편이었다.
덕분에 불침번에서도 열외로 쳤다.
암묵적인 합의였다.
누구도 시엔 일행에게 다가가 불침번은 언제 서시겠냐고 물어볼 엄두를 못 냈으니까.
자처해서 번을 선 베른닐만 제외하면 그랬다.
베른닐이 늘어지게 하품을 내뱉었다.
“흐아. 그아아아…….”
“그러게 뭐하러 고생을 자처해?”
“고생이 아니라. 뭐. 그런 게 있습니다.”
베른닐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 45. 금과 쇠 [5]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