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5. 금과 쇠 [4] >
트리예는 아주 부지런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천성으로 아무것도 안 하는 것을 못 견디는 편이었다.
아주 잠깐이라도 무언가 손에 쥐지 않으면 제가 심심해서 버티질 못했다.
그러니 지금 한참 고생중이었다.
“좀 어때?”
“괜찮답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객실로 돌아온 시엔이 물었다.
슬며시 미소지으며 하는 대답이나, 안색을 보니 전혀 괜찮은 상태는 아니다.
흔한 뱃멀미였다.
멀미로 어지러우면 갑판에 나가 바람을 쐬고 먼 곳의 자연을 보며 속을 다스려야 하는 법이었다.
그러나 또 그걸 스스로 버티질 못하니 깨어 있어 책에서 손을 떼질 못했다.
가뜩이나 흔들리는 선내에서 책을 들여다보니 당연히 멀미가 더 심해질 수밖에는.
시엔이 보기에는 자처해서 하는 고생이었다.
그래서 딱히 걱정도 안 한다.
아직 몸이 덜 아파서 그렇지.
누렁이나 나림이 신성으로 원기를 돋워주지 않았다면 진작에 다 게우고 선상에 늘어져 있었을 터.
“그런데, 그건.”
“아. 이거?”
시엔이 산호 지팡이를 내밀었다.
세류가 하기에는 떼었다 붙였다 난리더니만, 그건 수호자만 되는 것이란다.
지팡이 대신 장곤을 쓰듯 휘둘러도 강철보다 단단하니 사람 한둘 대가리 깨기는 일도 아니라고.
거기에 쥐고 있으면 저주나 중독을 해소하고 좋은 기운을 내뿜어 사람의 건강을 지켜주고, 또 병색을 완화시키며 공기를 정화하고 잡충을 내쫓으며 행운을 불러들이고 미적으로도 아름다움에 손색이 없는 물건인데…….
세류가 설명하기로는 무슨 떠돌이 잡상인이 약을 파는 모습이나 다름없는 꼴이었다.
아주 생색이란 생색은 다 냈다는 뜻이었다.
대범하지 못하니 쪼잔다하는 말을 들어도 어쩔 수 없는 녀석이었다.
“바다 엘프 수호자가 왔더라고.”
“세상에, 세계수인가요? 통짜 세계수 지팡이?”
“끝내주지?”
시엔이 산호 지팡이를 내밀었다.
트리예가 받아드는 손이 덜덜 떨렸다.
시엔의 도발에 홀랑 넘어가 내밀었을 뿐, 사실은 살면서 한 번도 보기 힘든 귀물이요 보물이었다.
“하지만 바다 엘프가 이걸 어떻게…….”
“일 하나 해주기로 하고 나뭇가지랑 바꿨어.”
“그만큼 어려운 일인가요?”
“잘 모르겠네. 지금은 바쁘니 돌아오는 길에 처리해 주겠다고 했는데.”
정 안되겠다 싶으면 무르면 그만이었다.
해봤는데 안되겠더라 하고 다시 나뭇가지로 바꿔 돌려받을 수밖에는.
나뭇가지의 위력이 대충 산호 지팡이의 삼 분의 일쯤이지만 그래도 휴대가 간편하다는 장점 하나는 있었다.
산호 지팡이는 아무래도 길이가 있었으니까.
“일단은 너 해.”
“제가요? 소녀가 감히 그래도 될는지…….”
사양하는 듯한 말과는 말리, 활짝 핀 표정으로 품에 꼭 껴안는 것이 기뻐 죽겠다는 모습이었다.
“선배님, 지금 바깥에 바다 엘프들이 잔뜩. 앗!”
세올이 문을 벌컥 열며 들이닥쳤다.
선상 여행에 아주 신이 난 세올이었다.
정확히는 뱃사람 훔쳐보는 데에 신이 났다.
어째서인지 뱃놈들이란 웃통을 까고 햇볕에 까맣게 그을리기를 제 자부심으로 여겼다.
세올이 그 모습에 눈이 돌아가 대놓고 훔쳐보느라 방에 있는 때가 드물 지경이었다.
“선배님, 저거. 세계수, 맞지 않습니까?”
“어.”
“왜 쟤가.”
“아무래도 그게 나으니까.”
“이 세올에게는…….”
세올이 우는소리를 했다.
뭐든 좋은 게 생기면 계속 트리예에게만 맡긴다는 그런 투정이었다.
제국 오브는 아예 넘겨준 것이나 다름없고, 그도 모자라 큰일 생기면 곧장 세계수의 나뭇가지도 덥석덥석 손에 쥐여주니까.
그러나 딱히 편애는 아니었다.
세올이 원래 사람됨이 가벼워서 그렇지, 흑마법의 성취로 따지자면 트리예와 비교할 정도가 못 된다.
이미 마도사라 불릴 경지가 한참 지났으니, 성격만 아니었다면 제자 여럿 두고 한 종파의 스승으로 존경받을 수도 있었으리라.
애초에 세올이 타인의 껍데기를 뒤집어쓰고 있는 자체가 대단한 기예나 마찬가지였다.
사람이 무의식적으로 하는 여러 생체 활동들, 그 모든 것들을 의식으로 통제하는 와중임에도 저리 멀쩡한 인간처럼 보이지 않은가.
심지어 동시에 마법까지 쓴다.
그럼에도 함께 마법을 쓰면 둘이 비슷한 수준으로 보인다.
실상 트리예는 제 실력을 전부 끌어내는 것이고, 세올은 왼손 오른손 왼발 오른발로 저마다 다른 일을 하면서 마법을 쓰는 양이나 다름없는데도.
트리예는 아직 멀었으니 도구라도 더 좋은 것을 쥐어야 한 사람 역할을 할 수 있었다.
세올은 이미 세 사람 역할은 하는 중이었다.
과거 흑마법사가 세올을 데리고 있었다면, 이후를 기약할 필요도 없이 금방 제국을 무너뜨릴 수 있었으리라.
시엔이 이러한 뜻을 한마디로 표현했다.
“네가 선배니까 참아.”
* * *
이엔느 강 상류에서 하선한 후, 추천서를 앞세워 상행에 곧장 끼어들었다.
사실 용병단이라고 해도 대단히 수상한 꼴이었다.
추천서가 아니었다면 상행에 끼는 게 아니라 돈을 내고 합류해야 할 정도였으니까.
그럴듯한 인물이라곤 베른닐 혼자였다.
본래 껄렁하니 뭔가 기사다운 딱딱함은 없었으나, 용병인 척을 하자니 원래 용병이었던 것 마냥 딱 어울리는 꼴이었다.
그 외의 일행이야, 뭐.
시녀 넷은 그냥 아가씨들이고, 시엔은 척 보기에 도련님이었다. 누렁이는 늙은이나 기품이 있고, 또 파린은 애초에 어린아이가 아니던가.
그래서 노이드 상단의 행장 페아닌의 스트레스도 두 배였다.
자그마치 후작가의 추천서였다.
물정 모르는 도련님이라 아예 소문을 내지.
추천서는 일종의 청탁이며, 그렇기에 보증이었다.
내 얼굴 봐서 이 사람 좀 쓰시지요. 대신 문제가 생기면 책임은 지겠소이다.
이러한 뜻이었으니까.
그러니 귀족이 일개 용병에게 추천서를 써 주는 일이 매우 드물었다.
추천서를 써 줄 정도의 실력자라면 그냥 휘하로 거두고자 하지.
하물며 후작가쯤 되는 곳에서 추천장이라니.
타국의 귀족이니 무시해도 될까 싶은데, 하필이면 그 티란디스가 아닌가. 상단이 유명하니 무시해서 좋을 일이 없었다.
그러니 돈 주고 상전을 모시는 꼴이었다.
그리고 또 스트레스를 받는 인물이 한 명.
가일은 금패 용병이었다.
금패를 받는 용병은 천 명 중 한두명에 불과했다.
어지간한 실력으로는 받을 수 없는 인정이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일이 한 편을 노려보았다.
사내 한 명과 그를 둘러싼 여인들이었다.
“전쟁에도 나갔다고? 와, 그런데 멀쩡해 보이네? 어디 흉터 같은 건 없나? 난 흉터만 보면 그렇게 매력이 땡기던데. 좀 벗어 봐.”
“할타스로 간다고? 나돈데. 금은사슴정 2층 맨 끝이 내 방이거든. 자리 없으면…….”
여자 용병들의 추파를 듬뿍 받는 베른닐이었다.
귀족가의 여식들과는 아예 그 수위가 달랐다.
“저 빌어먹을 놈이.”
가일이 이를 으득 갈았다.
저 자리가 내 자리였어야 하는데.
특히 베른닐의 팔뚝을 껴안고 매달린 여인이 그를 더욱 분노하게 만들었다.
“자기. 오늘 불침번 들어가지? 나랑 좀 같이 서. 불침번도 서고, 다른 것도 좀 세우고.”
“아니, 뭘 세운다고…….”
“알잖아?”
“흐으음. 도려, 아니 단장님이 허락해야 하는데.”
은전의 팔야. 이 지방에서는 이름 날리는 용병이었다.
백 보 밖에 있는 은화를 활로 쏘아 맞추는 그 실력으로 유명했다.
그리고 또 예뻤다.
가일의 오랜 짝사랑이기도 했다.
‘불침번? 안 자고 뭘 하려고? 안 돼!’
가일이 결국 참지 못하고 성큼성큼 나아갔다.
“어이, 거기. 적당히 좀 하지?”
“나 말인가?”
베른닐이 저를 가리키며 물었다.
“용병이 용병질이나 할 것이지, 아주 여자 끼고 놀고 자빠졌네. 그래서야 쓰나?”
“그래서?”
“내가 바로 가일이다. 이름 정도는 들어봤겠지?”
베른닐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유명한가? 아가씨, 저걸 아시나?”
“벽두의 가일. 머리 쪼개는 가일이라고. 꽤 유명한데. 못 들어봤어? 자기 먼 데서 왔나 봐?”
“나름 이름 좀 있나 보네. 그래서, 뭐가 불만인가. 우리 덩어리는.”
가일이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말했다.
“네놈 같은 녀석들이 세상에서 제일 싫거든.”
“나 같은 녀석?”
“얼굴만 믿고 설치는 새끼들 말이다.”
그러자 여자 용병들이 일제히 야유를 보냈다.
“추하게 질투나 하고.”
“저리 안 꺼져? 왜 와서 지랄이야, 지랄은.”
베른닐이 능글거리며 마침표를 찍었다.
“아가씨들께서 불편하시다잖아. 좀 꺼지지?”
가일의 인상이 더욱 험악해졌다.
“이런 개잡놈이. 말로만 하니 웃기냐? 대갈통을 쪼개버릴라. 뒈지고 싶어서 아주 지랄을.”
“그래서. 한 판 붙어 보자고?”
베른닐이 엉덩이를 툭툭 털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기, 싸우려고? 저게 저래도 실력은 찐인데.”
“그러다 면상에 기스라도 나면 어째.”
“걍 무시해. 똥 밟았다 치고.”
여자 용병들이 만류했다. 만류뿐인가. 베른닐의 앞을 막아서니 서늘한 눈빛으로 가일을 쏘아보았다.
“빌어먹을 년들, 너네 기둥서방이라도 되냐!”
“왜, 저만큼 생겼으면 기둥이라도 받들지.”
“못생긴 게.”
“이런, 샹, 이 새끼야, 계집 뒤에 숨으니 좋냐?”
“숨기는 무슨. 내가 숨었나? 여기 아가씨들이 해준 거지.”
“나와, 한 판 붙어, 새꺄.”
“지금은 일해야지. 있다가.”
베른닐이 머리를 쓸어넘기며 말했다.
근래에 베른닐이 검을 섞은 상대는 왕실근위대의 선배님들 아니면 검위공, 그도 아니면 카레네였다.
개중 한 명도 베른닐의 아래가 없으니 매일같이 얻어맞고 찔리고 날아가 구르는 일뿐이었다.
실력이 부쩍 늘어봐야 뭐하나. 왕실근위대의 선배님들과는 격차가 크고, 카레네 아가씨는 종일 수련만 하니 점점 격차만 벌어지는 참이었다.
그러니 한 번쯤은 좀 약한 놈을 패고 싶었다.
이름난 용병이래 봐야 결국 용병이겠지.
진짜 실력이 있으면 진즉에 귀족가에 붙들려 기사 노릇을 하지 용병으로 남을 이유가 없다.
가일 역시 이를 드러냈다.
용병의 별명이란 병신같거나 멋지거나 둘 중 하나였다.
전자의 경우는 쉽게 붙지만, 후자의 경우는 진짜 실력으로 쟁취하는 것이었다.
베르닐이라는 이름을 들어본 적도 없으니, 보나마나 금패 무서운 줄 모르는 애송이…….
그때였다.
쐐액, 소리와 함께, 베른닐이 손을 휘둘렀다.
잡고 나서 보니 화살이었다.
가일의 입이 벌어졌다.
방금 뭐야? 화살을 손으로 잡았다고?
쐐액. 얼이 빠진 사이, 가일의 코앞으로 화살 한 대가 스치고 지나갔다. 그제야 번쩍 정신이 든다.
“습격이다!”
“젠장, 습격! 새끼들아! 습격!”
여자 용병들이 소리치며 몸을 날렸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행렬의 사방에서 화살이 날아드니 땅과 마차에 박히고 일부는 사람에게 파고들어 비명이 터졌다.
습격자들이 좌우로 밀려들었다.
“온다! 막아!”
베른닐이 앞으로 뛰쳐나갔다.
화살 한 대를 검면을 들어 막아내고, 그 반동을 부드럽게 이어 벤다.
복면을 쓴 머리통이 공중을 날았다.
“죽어!”
강도의 칼이 일직선으로 뻗었다.
베른닐이 살짝 몸을 틀며 발을 뻗었다.
강도의 칼이 옆구리로 빠지고, 뒤이어 부츠의 강철코가 발목을 콱 찍었다.
만세를 부르며 땅과 부딪치는 강도. 뒤의 용병이 목을 베 곧장 마무리를 지었다.
마차 위에 누워있던 시엔이 몸을 일으켰다.
“웬 강도 떼야?”
곧장 주문을 외우니 시엔의 머리 위로 검은 구체가 떠올라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는 시엔의 시선을 따라 검은 화살들이 구체에서 쏟아져나왔다.
강도 하나가 머리에 맞아 박살이 나고, 그 뒤로 땅을 굴러 피하는 놈이 하나.
그러나 직각으로 꺾인 화살이 땅으로 향하니 역시 대가리가 터졌다.
하나. 둘. 넷. 다섯.
시엔이 세는 숫자가 빠르게 늘어났다.
그러다 시엔이 그냥 입을 다물었다.
어둠 화살의 투사체는 그리 빠른 편도 아니고, 칼로 베면 곧장 사라지는 작품임에도 막는 놈이 하나 없었다.
셀 필요도 없는 잔챙이들이다.
“마법사다!”
“마법사부터 치워!”
한 놈이 감히 검을 겨누며 소리친다.
시엔이 특별히 어둠 화살을 듬뿍 보내 보답했다.
여덟 발의 어둠 화살이 어깨와 허벅지에 두 발씩 박히더니 쓰러져 사지가 덜렁거렸다.
쐐애애애. 화살 날아드는 소리가 요란했다.
날아들던 화살이 시엔과 일정 거리를 두고 튕겨 바닥에 우수수 쏟아졌다.
시엔이 화살 날아온 방향을 삿대질했다.
“나비. 저쪽.”
“예, 시엔 님!”
나비가 곧장 마차에서 뛰어내렸다.
자세를 낮춰 달음질치니 한 발짝에 사람 키만큼 훌쩍훌쩍 나는 듯했다.
강도 하나가 급히 끼어들어 앞을 막으니, 무용수처럼 회전하며 옆구리로 스쳐 지나간다. 그 와중에서도 칼침을 한 대 팍 놓았다.
강도의 허벅지에서 피가 높이 치솟았다. 대퇴부의 대동맥을 정확히 베였다. 이미 죽은 목숨이었다.
트리예는 여느 때처럼 독서 중이었다.
그러나 습격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보인 반응은 여느 때와는 완전히 달랐다.
눈을 빛내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으니까.
트리예의 전직은 굳이 따지자면 비싼 용병이었다.
길드를 통하지 않을 뿐이지, 파견 나가 하는 일이 습격 아니면 호위였으니까.
그리고 습격을 당하는 편에 서면, 대개 안전한 곳에서 게으름을 피웠다.
그녀를 고용할 정도의 고용주라면 잔챙이 정도는 마법사 없이도 충분히 막을 테니까.
그럼에도 트리예가 빠르게 움직인 이유는 뻔했다.
새 지팡이를 시험해 볼 기회라서.
트리예가 빠르게 타겟을 찾아 눈알을 굴렸다.
너무 약한 놈이라야 시험도 안 된다.
이왕이면 강한 놈을 찾아 마법을 써야 산호 지팡이의 위력을 실감할 수도 있고, 개시로도 적당한 제물이 되리라.
마침 한 놈이 눈에 들어왔다.
검에 어린 찬란한 오러.
트리예가 본 기사들 중에 저만한 오러는 못 본 것 같았다.
샤 르흐 셰 느 트리예…….
사악한 진언과 함께 마력이 올올히 풀려나온다.
심상 세계에 새까만 사슬 족쇄가 쉭쉭거리며 흐느적거린다. 그리고 현상에 녹아나니 사슬의 그림자가 뱀의 형상으로 땅을 헤엄쳐 나아갔다.
곧 강도의 그림자를 콱 물어 휘감으니, 막 용병을 밀치고 검을 내리치려던 강도의 움직임이 그대로 정지해 멈췄다.
용병이 눈을 꼭 감았다.
제게 떨어져 내리던 빛의 칼날. 아 죽었구나 X발.
그랬는데 어째 고통이 없다. 슬그머니 눈을 뜨니 온통 눈이 부시다.
아 역시 죽었나?
그러자 날아드는 욕설.
“미친놈아! 구경났냐!”
동료 용병의 고함과 함께, 눈앞의 빛이 멎었다. 복면인의 목에 도끼를 박은 동료가 눈에 들어왔다.
“뭐야, 너도 죽었냐?”
“미친놈. 있다가 저기 마법사님께 감사드려라.”
베른닐은 아주 오랜만에 마음껏 날뛰는 중이었다.
검위공의 훈련 방식은 오러를 배제한다.
일부러 무른 나무로 깎아낸 목검으로 대련하는데, 목검이 부러지는 순간 지옥행 체력 단련의 시작이었다.
오러는 신체를 강화하는 데에만 운용하고, 순수한 검술의 기교로 연약한 목검을 살려내야 하는 그런 수련이다.
그러니 오러를 쭉쭉 뽑는 전투가 얼마나 재미있겠는가.
거기다 강도 떼라 살릴 필요도 없고. 한칼에 팔다리를 뎅겅뎅겅 자르니 흥이 날 수밖에는.
그러던 와중이었다. 갑자기 날아드는 매서운 검기에 팔이 저절로 움직여 공격을 흘려냈다.
지지익. 오러와 오러가 부대끼는 특유의 소리가 퍼졌다.
“어떻게?”
“뭐가 어떻게냐! 잘이다, 임마!”
베른닐이 바락 외치며 달려들었다.
희게 빛나는 칼날이 수직으로 떨어졌다. 강도가 칼을 들었다.
베른닐이 검로를 비틀어 공격을 거두며 훌쩍 물러났다. 베른닐이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어떻게?”
“뭐가 어떻게냐!”
강도가 똑같이 대꾸했다.
베른닐의 강도의 칼을 바라보았다.
찬연히 빛나는 흰색의 오러. 밝은 낮 태양 아래에서도 눈이 부신 광채.
오러 블레이드. 마스터의 상징이다.
“아니, 무슨 마스터가 강도질을 다 하고……”
“닥쳐!”
강도가 다시 달려들었다. 투박한 검로. 그러나 그 칼날이 오러 블레이드라면 이야기가 조금 다르다.
베른닐이 반사적으로 반응했다. 충돌하기 직전, 베른닐의 검날이 미묘하게 역동작으로 후퇴하며 밖으로 기울었다. 지지직, 오러 블레이드가 검날을 타고 애먼 곳으로 빠졌다.
마스터의 몸통이 순간 비었다.
베른닐이 팔을 뻗었다. 멱살을 쥐어 잡아당기고는 이마로 콱 치받았다.
베른닐은 이마에 징을 박은 가죽 보호대를 찼고, 마스터는 복면뿐이었다.
그 차이가 승패를 갈랐다.
마스터가 휘청거리고, 베른닐이 검이 상대의 허리로 들어가 반대편으로 빠져나왔다.
한 사람이었던 것이 두 조각으로 나뉘어 속에 든 것이 쏟아졌다.
그리고 나서야 베른닐이 깨달았다.
내가 소드 마스터를 베었구나.
내가…… 내가!
베른닐이 포효했다.
< 45. 금과 쇠 [4]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