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5. 금과 쇠 [1] >
“돈은?”
시엔을 맞이한 로우드가 가장 먼저 한 말이었다.
시엔이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그래. 나는 잘 다녀왔다.”
“미수금은?”
“이십오만 개. 보증서 챙긴 귀금속으로.”
“이자도 없이?”
“이자는 무슨. 다른 상단은 내가 십이만 개나 챙긴 줄 알 텐데. 원금 보존을 다행으로 여겨야지.”
“후우. 좀 살겠군.”
로우드가 자리에 축 늘어졌다.
아닌 게 아니라 이제 좀 살겠다는 태도였다.
“그렇게 안 좋아?”
“이제 겨우 한숨 돌렸다. 가서 뭘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티란디스의 신용을 믿겠다며 당장 만기의 어음은 연장할 수 있었으니까.”
“왜. 피까지 뽑아서 줬더니. 그건 어쩌고.”
시엔이 제 귀한 피를 여섯 병이나 뽑아줬다.
마탑에서 눈이 돌아갔을 테니 급한 불 끄기는 충분했을 텐데. 이제 한숨을 돌리나 싶었는데.
“마탑 놈들이 작정하고 후려치려 들더군. 넷이서 경매를 붙여 값을 좀 높이려고 했더니, 저네들끼리 값을 정해서 싫으면 말라 아주 배짱이었다.”
“이것들이?”
시엔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그래서? 어떻게 했는데?”
“어떻게 하긴. 그 자리에서 바로 한 병 던져다 깨 버렸지. 그랬더니 그제야 허리가 좀 굽더군. 사실 아까워서 나도 울 뻔했는데.”
이쪽이 못 팔아서 아쉽지 않으니 몽땅 버리기 전에 알아서 기라는 뜻이었다.
마탑이 연대해 벌인 어설픈 카르텔은 바닥에 흩뿌려진 용의 피 한 병과 함께 산산조각이 났다.
“볼 만했겠는데.”
“그 표정을 네가 봤어야 하는데. 바닥이라도 핥을 기세였어.”
로우드가 통쾌하다는 듯이 웃었다.
“가만, 그런데 왜 엄살이야? 결국 팔았다는 말이잖아.”
“마탑이라기에 현물로 지불할 줄 알았다. 의외로 마법사란 족속들이 가난한 모양이던데. 결국 어음이라.”
“그건 그렇지.”
마탑이 돈을 잘 벌기는 하지만, 그만큼 또 쓰는 녀석들이었다. 값비싼 귀한 재료가 가득해도, 그야 마법사 아니면 값을 쳐줄 것도 아니었으니까.
“현물이 그리 모자라다고?”
“마탑 공사만 아니면 모자랄 일도 없지. 거기에 특수 부대 하나가 늘었고. 있던 어음도 만기 전에 파는 판에. 네가 벌인 짓이잖나.”
“아. 그게 있었네.”
“잊고 있었냐. 뒤처리만 내 몫이지.”
로우드가 툴툴거렸다.
“게다가 카레네가 기사단을 하나 새로 짠답시고 이미 여럿 받았어. 견습 기사가 마흔이 늘었으니.”
“아니, 누구 맘대로 기사단을 짜? 애초에 지금 네 개 기사단 이상으로 편제를 늘릴 수도 없는데.”
귀족가의 군대란 그 숫자가 정해져 있었다.
지금의 편제도 사실 여러 편법으로 늘려놓은 상황이었다.
왕비의 총애가 아니었으면 진작에 왕성에 불려가도 이상하지 않은 상태였다.
“이제 곧 대공가가 될 테니까. 실력자들 모아서 친위 기사단 하나 짜고 견습 뿌려 결원 채우도록 해서 미리미리 준비한다고.”
“뭐. 카레네도 잘하고 있기는 하네. 맨날 칼이나 휘두르는 줄 알았더니.”
“너나 카레네나 일만 벌이지. 이런 상황이니 기왕이면 다른 상단도 좀 들렀다 받아와다오. 현물로.”
“이미 늦었어. 꼬리 자르고 튀었겠지.”
타플강드 상단의 수작을 밝혀 큰 타격을 입혔다.
하나가 터져 그 모양인데, 시엔이 복귀하는 동안 남은 다섯 개야 진작에 수습하고도 남았을 시간이었다.
“……회수할 방법이 없을까? 이백만 중 이십오만이야. 자그마치 백 칠십오만 개. 그 돈이면 마탑과 기사단 두 개씩은 더 짜겠군.”
시엔이 킬킬 웃음을 터뜨렸다.
얘는 영주를 했어도 잘 해낼 상이다.
덕분에 시엔이 마음 놓고 영지를 비운 채로 돌아다닐 수 있기도 했고.
카레네야 앞뒤 안 보고 무작정 돌진하다 제 목숨 날리고 더불어 영지도 날릴 상이지마는.
“그래서 말인데, 영지를 잠깐 비워야겠어.”
“또? 재무관 업무도 바빠 죽겠는데, 네 결재까지 대리하려면…….”
로우드가 앓는 소리를 했다.
사실 아닌 게 아니라 이미 안색이 안 좋다.
카레네가 행정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으니 사실상 주요 업무를 전부 도맡아 하고 있는 참이었다.
“타플강드에 좀 방문해 보려고.”
“언제 출발하나?”
로우드가 언제 그랬냐는 듯 말을 바꿨다.
“기왕이면 이자 쳐서 받아왔으면 좋겠군.”
“그야 물론. 듬뿍 쳐야지.”
시엔이 서늘한 미소를 지었다.
물론, 무작정 찾아간다고 해서 금화가 나오지는 않으리라.
그러나 일단 손해를 입었으면 배상을 받아내던가, 아니면 배 이상의 손해로 돌려주어야 했다.
전쟁의 중간은 없는 법이었으니까.
어중간하게 끝맺은 전쟁은 종전이 아니라 휴전에 불과하니, 내 손해를 메꾸거나 상대에게 그 이상을 돌려주거나.
그렇게 확실히 마무리를 지어야 하므로.
* * *
어쩐지 앳된 분위기의 청년이었다.
평균보다 작은 키도 그러했지만, 이목구비 자체에서 오는 어떤 인상, 철없는 아이와 같은 그런 느낌이 나이보다 더 어리게 보이게 만들었다.
청년은 멍하니 침대에 누운 채였다.
해가 중천에 뜬지가 오래인데도 그저 할 일 없이 누워 눈알만 데굴데굴 굴렸다.
왜냐하면 실제로도 할 일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청년의 얼굴에는 불만이 가득했다.
요즈음에는 정말로 마음에 드는 일이 없었다.
싸구려 침대의 거스러진 촉감부터 좁아터진 방, 눅눅한 여름의 더위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청년에게 여기가 사실은 도시의 최고급 여관이 가진 최고의 객실임은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문득 목이 탄다.
청년이 침대 옆 탁자의 물병으로 시선을 돌렸다.
더운 여름임에도 불구하고 얼음이 들어 뿌옇게 김이 서린 물병. 그리고 그 옆에 벌레가 한 마리.
“끄아아악!”
벌레는 정말로 싫다. 불호보다는 공포에 가깝다.
청년이 기겁하며 뒤로 기어 물러났다. 침대 위에 있었기에 그 끝에 닿아 우당탕 아래로 떨어져 바닥을 구른다.
“젠장! 빌어먹을! 젠장! 빌어먹을! 젠자앙!”
청년이 거칠게 분노를 터뜨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불합리하기 그지없었다.
그는 세상 가장 귀한 이다. 이따위 싸구려 여관방에 처박혀서는 안 되는 이였다.
원망할 대상은 얼마든지 있었다.
무능한 부하들, 개 같은 배신자들, 그리고 병신 같은 세상.
물론 그중에 청년의 잘못은 없었다. 잘못한 것은 그가 아니었으므로.
그러자 여관의 문이 발칵 열렸다.
“자기? 괜찮아?”
만화원의 천문관인 팔란이었다.
예전과는 달리 퍽 수척한 몰골이었다.
머리칼은 윤기를 잃고, 피부의 광택도 다 가셨다. 눈 아래에는 짙은 그늘이 지고 총기를 띄던 눈빛 역시 까맣게 죽었다.
몇 달째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한 결과였다.
팔란이 걱정스러운 눈빛을 쏘았다.
그녀야말로 환자의 몰골이었다. 그런데도 오히려 놀고먹어 개기름이 줄줄 흐르는 청년을 염려하고 있었다.
“벌레, 시발, 벌레가 있다고!”
“자기도 참.”
팔란의 지친 얼굴에 한줄기 미소가 깃들었다.
나직하게 울리는 주문과 함께, 한 줄기 번개가 방을 가로질러 탁자로 이어졌다. 팔란이 걸레를 들어 탁자 위를 훔쳤다.
정확히 벌레만을 태워 나무 위에 흔적이 남지 않았으니 팔란의 경지를 대충 짐작할 만했다.
“치웠어?”
“응. 이제 없어.”
“X발, 여기는 도대체 못 있어 주겠어! 허구한 날 벌레가 나온다고!”
“조금만 참아, 자기. 애들이 돈 받으러 갔으니까. 그 돈이면 작은 저택을 하나 사도 되고.”
“작은 저택? 감히 내게 작은? 나는…….”
“알겠어. 그럼 큰 저택으로 하자.”
청년이 그제야 만족스럽게 웃었다.
어음을 환전해 회수하러 간 동료들이 전부를 돌려받는다고 쳐도 겨우 사만 닢이었다.
그러나 전부는 무슨.
팔란이 생각했을 때, 반절만 받아와도 잘한 일이었다.
그 돈으로 집을 사려면 큰 저택은 어림도 없다.
그러면 어쩔 수 없이 대여해야 할 테고, 그렇게 또 잠시 머무르면 돈이 줄줄 새니 다시 여관방을 전전하는 신세가 되리라.
진짜, 더는 못 해 먹겠네.
팔란이 그리 생각했다. 그리고 놀랐다.
응? 내가 무슨 생각을 했지?
팔란이 청년을 바라보았다.
저 철없는 아이와 같은 천진함이 그이의 매력이 아니던가. 그이를 보기만 해도 미소가 떠오르는데.
“요즘 잠을 너무 못 자서 그런가…….”
팔란이 그리 중얼거리는 때였다.
바깥이 시끌시끌하다.
떠드는 것들이 하나같이 아는 목소리들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문이 벌컥 열리며 방안으로 여인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우리 왔어!”
“돈 받아왔어! 이만 닢이야!”
“이거 받느라고 우리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각자 제가 힘들었다 목소리를 높이는 와중, 과묵히 선 여인 하나가 팔란과 눈을 마주쳐온다.
다른 여인보다 머리 하나가 크니 눈길이 자연히 가는 탓도 있었지만.
“팔란. 괜찮아?”
“그냥. 조금 피곤해서.”
“아직도 잠을 못 자? 정 힘들면 수면제라도.”
“약으로 잠들면, 악몽에서 깨어날 수가 없더라.”
“음? 그거.”
라이네스의 눈빛이 순간 번뜩였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이내 거칠게 머리를 흔들어 턴 라이네스가 다시 걱정스러운 표정을 했다.
“아니다, 좀 쉬어야지. 괜찮아? 부축해 줄게.”
“응. 고마워.”
팔란이 비틀비틀 걸음을 옮겼다.
청년의 주변을 꿰찬 여인들이 쫑알쫑알 떠드는데, 어쩐지 그 내용이 귀에 전혀 들어오지 않았다.
피곤해서. 너무 피곤해서.
라이네스의 부축을 받은 팔란이 옆방으로 자리를 옮겨 침대에 누웠다.
그러나 막상 눕고 나니 눈을 감기가 두려웠다.
졸음이 밀려와 쏟아지는 듯하나, 그 이후 또다시 악몽이 찾아옴을 이미 알고 있기에.
그렇게 누워 감지도 못할 눈을 억지로 뜨고 있는 와중이었다.
“뭐라고? 타플강드?”
벽을 넘는 고성이 귓가로 스몄다.
“그 빌어먹을 반역자 놈들! 매국노 새끼들! 배은망덕한 쓰레기 새끼들! 천륜을 져버린 인간 말종 놈들이 감히 또 나를 노렸다고!”
청년이 여실히 분노를 토해냈다.
본디 화가 많은 청년이지만, 이번만큼이나 강렬한 색채를 내뿜은 적은 없었다.
타플강드? 그 대륙 제일 상단? 그 이름이 왜?
보아하니 보통 원한이 사무친 것이 아닌데.
“이대로는 안 되지! 이 새끼들이 또다시 날 건드렸어! 전부 가서 그 쓰레기들을 싹 치워버려! 성유해고 뭐고 다 가져가서 쓸어버리란 말야!”
전부 가서.
팔란이 그 부탁에 자신이 포함임을 알았다.
그러면 가야지. 가야 하는데.
어쩐지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그런데 굳이? 내가 왜? 이렇게 힘든데.
가기 싫다. 그이의 부탁임에도 불구하고.
“팔란? 레이가 난리를 치는 것 같은데. 안 가?”
“그냥. 좀……. 쉬고 싶어. 다 필요 없고.”
그렇게 말한 순간이었다.
어쩐지 마음이 편하다. 지금 잠들면, 그 악몽을 꾸지 않을 것만 같은 그런 직감이 든 까닭이었다.
“그래. 그럼, 쉬어. 좀 자야지. 그리고 만약 깨어나면, 아직은 모른 척해 줬으면 해.”
“응……”
뭘 모른 척해 달라는 건지.
모르겠지만, 안도와 함께 수마가 밀려들었다.
팔란이 마침내 스르륵 눈을 감았다.
* * *
“언제 출발하려고? 타플강드 본단이 할타스 자유도시에 있으니까, 미리 통행의 기별을 넣으려면.”
“기별은 됐어.”
시엔이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이미 내 이름으로 난리를 쳤으니 거기는 적지나 마찬가지야. 기별 넣고 갔다가는 생난리가 날걸.”
“몰래 가겠다고? 길이 험해. 그러다 다치기라도 하면. 승격을 앞두고 네가 변이라도 당하면…….”
“변은 무슨. 군대가 몰려와도 질 자신이 없는데.”
“보통 그런 식으로 말하냐. 여튼, 몰래 가겠다면 난 반대다.”
로우드가 고개를 저었다.
시엔이 히죽거리며 물었다.
“우리, 할타스 자유도시로 향하는 상행이 있나?”
“아. 상행에 끼어 갈 생각이군. 그러면 또 이야기가 다르지.”
로우드가 턱을 쓰다듬는 척을 했다.
“거기까지는 안 가지. 이엔느 강 유역까지 가면 도하부터는 우리 소관이 아닌데. 아마 거기서 북쪽 지방으로 쭉 갈라지니까 할타스로 향하는 요정목 상행이 있기는 하겠지.”
“그럼 대충 가명으로 추천서나 좀 써 줘. 소규모 용병단이라 하면 되겠지.”
“사람 수는? 얼마나 데리고 갈 생각인데?”
“일단 베른닐. 그리고 세올과 트리예도 가야겠고. 누렁이랑 나비. 그리고 파린 녀석이 달라붙겠지.”
“총 일곱인가?”
“아. 나림도 데려가야겠네. 걔는 편도로. 여덟짜리 한 장이랑 일곱짜리 한 장씩 쓰면 되겠네.”
“좋아, 그럼 당장…….”
깃펜을 들어 잉크를 찍던 로우드가 멈칫했다.
그리고는 인상을 구기며 되묻는다.
“생각해 보니, 추천서를 왜 내가 쓰지? 재무관의 이름이 담긴 추천서보다는 영주 대리가 쓴 추천서가 더 강력하지 않나?”
“아. 맞네.”
계속 부려 먹다 보니 자연스레 다 시키게 된다.
시엔이 멋쩍게 고개를 끄덕였다.
< 45. 금과 쇠 [1]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