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작가의 망령재림-244화 (240/268)

< 44. 빚쟁이는 밤에 잠도 못 잔다 [10] >

사악한 언어가 울려 퍼졌다. 자신의 이름을 팔아 입으로 내는 언어 아닌 언어.

마법사가 속에 품은 심상이 벽을 넘어 원초의 이상향과 연결되었다.

뤼니헤가 히죽 웃었다. 사뭇 사나운 표정이었다.

방화광에게 마법은 폭발이었다.

또한 폭발은 예술이니 마법이 곧 예술이었다.

켜켜이 쌓인 주문이 마력을 이끌고, 정신 세계의 풍경이 곧 현상으로 나타난다. 마법의 완성이었다.

피부로 와닿는 굉음. 뒤이어 찬연히 피어오르는 불꽃.

새까만 연기가 한낮의 광량을 집어삼키며 뭉게뭉게 피어오른다. 한 박자 늦게 밀려오는 화끈한 열풍이 긴 머리카락을 잡아당기며 멀어져갔다.

살며 수천 번은 본 광경이나 앞으로 수천 번을 더 보아도 질리지 않으리라.

저택이 옆구리가 터져 나가 출입구가 새로 트였다. 사람이 아니라 마차라도 드나들 법한 커다란 입구였다.

만화원의 마법사들이 새 입구를 통해 당당히 걸어 들어갔다.

* * *

굉음이 저택을 뒤흔들었다.

벨가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뭐 해? 어디 가려고?”

시엔이 태평하게 말했다.

“뭔가, 문제가 생긴 것 같습니다. 그래, 그 마법사 년들이 다시 쳐들어온 것이 틀림없습니다요!”

“쳐들어오기는 무슨. 영주의 병사가 지키는 곳을 공격할 리가 있겠어? 군대를 적으로 돌리고 싶지 않고서야.”

“그렇겠지요?”

“심지어 아르트레스의 기사분들도 계시는 판에.”

벨가트가 그제야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러나 불안한 표정은 여전했다.

“그나저나 기사 이야기가 나와서 말야.”

“예? 갑자기 무슨 말씀이신지……”

“그냥. 원래 잡담이란 게 맥락이 없는 법이지.”

“예예, 그렇습죠.”

“기사는 가장 충직한 이들이지. 그래서인지 기사의 충성이란 협박 따위로는 살 수가 없어. 목숨줄 잡고 윽박질러봐야 그냥 죽이라고 할 치들이라서. 아니면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맞습니다.”

벨가트가 맞장구를 쳤다.

맞기는 대체 무엇이 맞는지 전혀 모르겠지마는, 원래 윗사람은 무슨 개소리를 하더라도 아랫사람의 대답은 항상 맞는 법이었으니까.

“기사는 그렇다 치고, 그럼 마법사도 빠질 수가 없지. 마법사는 본래 충성을 몰라. 하지만 그들이 충성을 약속한다면, 그건 신뢰할 수 있어. 왜냐면 마법사의 약속이란 그만큼의 가치가 있는 거니까.”

“예, 그렇습니다.”

벨가트가 또다시 영혼 없는 맞장구를 쳤다.

“그런데 적어도 하나 믿을 수 없는 작자들이 있단 말야. 누군지 알아?”

“그게 누구입니까?”

“상인들이지.”

시엔이 짓궂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상인이 충성하는 대상이란 오로지 거래뿐이니까. 황금으로 충성을 살 수 있겠지만, 금화가 떨어지고 나면 곧장 떠나가지.”

“그것이…….”

“목숨으로 충성을 사면? 그럼 또 다른 위협 앞에 금방 배신하고 말지. 한 번 살려줬다고 해서 주인이라 따르지만, 다른 이가 명줄을 잡고 협박하면 바로 굴복하고 만다니까.”

귀족이 상인을 함부로 하지 않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귀족이 상인을 멸시하는 것도 사실이었다.

황금이 본래 권력 중 하나이니, 상인이란 대륙에 존재하는 또 하나의 권력자 계급이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권리만 있고 의무가 없다.

지금도 보라. 존경받는 상인이 하는 짓들이란.

장부를 둘로 작성해 세금을 회피하며 제 마땅한 의무를 저버리는 치들.

그리고는 서로 회피한 의무가 얼마인지 목소리를 높여 떠들고 자랑했다.

빼돌린 세금의 액수가 곧 존경으로 통하는 놈들.

그런가 하면 도제라 하여 사람을 공짜로 부리고, 온갖 꼬투리를 잡아 인부의 급여를 깎았다.

상단의 마차에는 상품이 가득하나, 인부가 먹을 식량이며 잠을 잘 침낭과 천막 따위란 무거워 실을 자리가 없었다.

그리하니 인부가 먼 길 떠나며 제 등에 각자의 살림을 지고 또 마차를 지켰다.

귀족은 아래로 영민을 챙겨 함께 이롭도록 하는 데에 반해, 상인이란 온통 제 속만 챙기는 족속들이었으니까.

타인의 피눈물을 모아 황금을 제련하는 치들이다.

큰 상인이 날뛸수록 세상은 더욱 어지러워졌다.

그러니 본래는 귀족이 상단을 세워 휘하의 상인을 바르게 이끄는 것이다.

그러나 귀족의 업무가 바빠 여의치 않고, 거기에 영지에 특산이 있어 환경이 따라야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던가.

“그러니 너희는 틈새에 사는 것이지. 벌레마냥.”

면전에서 날아든 폭언이었다.

벨가트가 어찌 대답해야 할지 몰라 쩔쩔맸다.

시엔이 그 몰골을 바라보며 키득거렸다.

“슬슬 올 때가 되었는데.”

말이 씨가 된다더니, 시엔이 입을 떼자마자 문이 발칵 열렸다. 방 안으로 어깨를 펴고 들어오는 네 여인들. 만화원의 마법사들이었다.

벨가트가 얼마나 놀랐는지 의자에서 떨어져 바닥을 굴렀다.

“저, 저들은, 여기는 어떻게. 여기가 어디라고!”

“내가 후회하게 해준다고 했지?”

뤼니헤가 활짝 웃으며 손에 든 톱을 내밀었다.

“이게 네 새끼 손목을 자른 톱이야. 그리고 이젠 그 애비의 모가지를 자를 톱이기도 하고. 네가 누구에게 사기를 쳤는지 죽기 전까지 계속 후회해야 할 거야.”

벨가트의 안색이 창백하게 질렸다.

“도, 도련님!”

“왜?”

“절 지켜주신다 맹약하지 않으셨습니까!”

“그야 뭐. 타플강드 상단에게서 지켜준다고 하긴 했지. 쟤네한테서 지켜준다고 한 적은 없어.”

“그건, 사기, 사기입니다!”

“에이. 네가 그러면 안 되지. 넌 상인이잖아?”

“그게 무슨…….”

“내가 사기를 쳤다고 온 세상에 떠들고 다니던가. 그걸 다른 상인들이 들으면 내가 나쁜 놈이겠어, 아니면 네가 얼간이겠어?”

“그건.”

애초에 상인의 방식이 이런 것이었다.

시엔이 교묘하게 내용을 비틀었으니 오히려 수완이 대단하다 존경을 받았으면 받았지 비난을 받을 일이 아니었다.

계약 내용을 정확히 확인하지 않은 벨가트의 잘못이라 욕하고 비웃을 테니까.

“내게 목숨을 구걸하며 충성을 말했듯이, 저들에게도 똑같이 해 봐. 혹시 모르잖아. 받아줄지도?”

“그럴 수, 그갸갹.”

짧은 주문과 함께 번갯불이 튀었다.

벨가트의 눈동자가 위로 숨어 흰자를 드러냈다.

만화원의 천문관, 슈슈라고 했던가. 주문을 보아하니 제법 실력이 있는 마법사였다.

“그럼, 귀족 나으리, 저희는 이만 물러가겠어요.”

“가는 길에 그 녀석 아들내미 찾아가는 것도 잊지는 말고. 복도 왼쪽 세 번째 방에 있을 테니까.”

“아들? 그놈이 아직 살아있다구요? 어떻게…….”

“내가 그랬어.”

라이네스가 짧게 실토했다.

“너, 또, 아니, 됐다. 맨날 우리만 나쁜 년이지. 지만 착한 년이고. 요즘 안 그러더니, 또 이래.”

슈슈가 무어라 말을 꺼내려다, 결국 그렇게 혼자 결론을 내리고는 고개를 저었다.

들어보니 평소의 행실이 어땠는지 대충 짐작할 만하기도 하고.

만화원의 마법사들이 등을 돌렸다.

벨가트의 반쯤 탄 머리채가 붙잡혀 질질 밖으로 끌려 나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키가 큰 땅지기가 뒤로 돌아 꾸벅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공손히 문을 닫았다.

* * *

벨가트 저택에 마법사들이 침입했다.

벨가트와 그 아들이 현장에서 살해당했으며, 출동한 영주의 병사들에 의해 현행범으로 체포되었다.

그리고 재판 결과가 다음 날 공표되었다.

복수 법령에 따른 영주의 재량 판단, 그리고 상인으로 구성된 참여 배심원단의 압도적인 찬성표를 받아 보석으로 석방되었다.

반이 못 미치는 금액만을 회수한 상인들의 원한 역시 보통은 아니었으니까.

잘 죽었다며 침까지 뱉는 자가 부지기수였다.

아르트레스 영지에서 할 일도 끝이었다.

그리고 복귀에 오르려는 참이었다.

“트리야, 진짜 갈 거니……?”

“가지 마. 이제 겨우 만났는데, 또 헤어지면.”

“이대로는 못 보낸다, 우리 막내. 하루만, 아니 이틀, 아니다, 일주일만 더 있다가 가면 안 되겠니?”

“셋째 얼굴이라도 보고 가야지. 너 왔는데 못 봤다고 하면 진짜 울어버릴지도 모른다. 너 펠베인 성격 알지? 농담 아니다?”

“아, 진짜, 이런 것 좀 하지 마! 진짜 싫어!”

트리예가 질색하며 빽 소리 질렀다.

얼굴이 새빨간 것이 진심으로 싫어서 하는 소리였다.

그러나 배웅하러 나온 트리예의 오빠들에게는 그렇게 보이지 않은 모양이었다.

“울음 참으려고 일부러 그러지 않아도 돼.”

“돌아오고 싶으면 언제라도 돌아오렴.”

“안 되겠다. 내가 같이 가서…….”

“하지 말라고!”

십 년 조금 넘어 나타난 여동생을 또 떠나보내려니 얼마나 애틋한지. 아주 난리가 났다.

시엔은 테린 영주와 인사를 나누는 중이었다.

테린이 시엔의 손을 꼭 붙들고 말했다.

“공자님, 우리 트리 좀 잘 부탁드립니다.”

“알아서 할 하는 후배니, 걱정 안 하셔도…….”

“우리 트리, 식탁 앞에서 입맛이 없다며 자리를 뜰 때가 있습니다. 입맛이 없는 게 아니라 식탁에 고기가 없어서 그렇습니다. 하루에 두 끼는 고기를 먹어야 해요. 고기 없으면 말라 죽는 애니까 꼭 좀 챙겨주세요.”

“두 끼가 아니라 세 끼 다 먹고 있으니 걱정…….”

“우리 트리가 마음이 참 여립니다. 겉으로야 틱틱 대고 언사가 기분 나쁠 수 있어요. 그런데 그게 다 속이 연약해 나오는 방어일 뿐임을 아셔야 합니다. 실제로는 혼자 상처받고, 상처가 많은 아이예요.”

“아니, 그건 또 무슨…….”

마음이 여린 사람이 멀쩡한 이들을 수백 단위로 녹여다가 마물을 제조하겠는가.

그 트리가 내가 아는 트리가 아닌가?

“그리고 우리 트리가 원체 몸이 약한 아이예요. 힘쓰는 일은커녕 체력이 달리니 신경을 좀 많이 써 주세요. 전속으로 시녀 둘은 붙여서 시중을 들게 해주시겠습니까? 아니다, 둘로 모자라니 셋, 아니 넷은 붙여서.”

“아니…….”

지금도 시녀인데 시녀에게 전속 시녀를 또 붙여달라니. 시녀 하나 두는 데에 새끼 시녀를 넷을 붙이면 대체 누가 시중을 받는 꼴인지.

분명 트리예가 현재 시엔의 전속 시녀로 가문에 머무른다고 말했던 것 같은데.

“그리고 미인이라서 잠을 참 좋아합니다. 해지면 곧장 자러 가고, 그러고도 밥만 먹으면 두어 시간씩 낮잠도 잡니다. 그러니 창을 막아서 푹 잘 수 있도록 암실도 준비해 주시고…….”

시엔이 뭐라 말하려 했으나, 테린 영주는 반론을 들을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구구절절하게 이어지는 잘 부탁드립니다가 도대체 끝날 기미가 없다.

어째 듣다 보니 트리예가 점점 못 쓸 여인이 되어가고 있었다.

하는 일도 없고 할 줄 아는 것도 없고 입맛은 까탈스러운데 그렇다고 성격이 좋은 것도 아니지만 그래도 잘 부탁드린다고.

혹시 위하는 척 멕이는 것이 아닐까.

그런 의심이 들 정도였으니.

그러나 그렇게 하나하나 부탁한다며 손을 붙잡은 테린의 표정이 애틋하기 짝이 없었다.

전 연인이라도 보내는 마냥 촉촉하게 물기 차오른 눈빛에, 그리고는 나중에는 결국 눈물 한 방울이 또르르 떨어져 뺨을 가로질렀다.

“아, 큰오빠!”

짝! 결국 트리예에게 등짝을 호되게 얻어맞았다.

테린은 얻어맞고도 감격한 눈치였다.

“트리야. 그간 손이 매워졌구나. 성장했어. 예전에 그 고사리손이 언제 이렇게 커서…….”

“시엔 님, 어서 가요. 이 진상들은 그냥 이러라고 놔두고. 세상에, 진짜 이래서 오기 싫었는데.”

시엔이 공감의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 * *

대륙 상계에 큰 충격이 들이쳤다.

자가 파산이라는 사기 수법이 드물지 않았으나, 피해액으로 따지면 거의 백 년 만의 사건이었다고.

문제는 이 범죄가 단독 소행이 아닌 거대 상단, 그것도 현 대륙 제일 상단인 타플강드가 관여했기 때문이었다.

제인 상단의 비밀 장부에 따르면, 타플강드에서 발행한 어음 증여액이 기백 만에 이르렀다.

그런가 하면 파산 직전 현물화한 재화가 반 이상 타플강드로 흘러 들어간 정황도 포착되었다.

그를 바탕으로 대대적인 자금 세탁 및 파산 주도가 있었다고,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었으니.

거기에 다른 의혹이 끼어들었다.

한낱 한 시에 여섯 개 상단이 망했으며, 여섯 전부가 타플강드의 새끼 상단 혹은 영향력이 큰 곳들이었다.

당연하게도, 타플강드 측에서는 사실이 아니라는 해명을 발표했다.

타플강드가 제인과 메어리를 새끼 상단으로 두고 영향력을 행사한 것은 맞으나, 부부 관계인 상단주 두 명이 공모해 벌인 일이라 본 상단과는 관련이 없다는 그러한 내용이었다.

오히려 저네들 역시 피해자 중 하나라고.

그리고 함께 망한 다섯 상단에 대해서는 저들과는 상관없는 자금 경색으로 인한 것이라면서.

그러자 동부를 본단에 둔 상인들의 연합체, 동부 상인 연합에서는 타플강드 동부 사업 장부를 공개해달라 요청했다.

자금과 현물의 이동 경로가 비밀 장부에 남았으니 타플강드의 장부와 맞춰보면 그 비위 사실을 정확히 판단할 수 있었으니까.

그러나 타플강드는 사업상의 비밀을 지켜야 한다는 명목으로 이에 불응했다.

무고를 주장하면서도 정작 그 결백을 입증할 증거는 내놓지 못하겠다고.

사실, 상인이 제 장부를 건넬 리가 없다.

동부 상인 연합이 그를 모르고 내놓으라 한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타플강드가 배후인지 아닌지도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타플강드를 공격할 명분을 얻었다는 사실이었으니까.

동부 상인 연합뿐만 아니라 대륙의 모든 상인들이.

상계란 매일매일 하루가 전쟁이 아닌 날이 없다.

조금의 이득이라도 더 보고자 치열하게 싸우는 곳이 상계이니, 그간 대륙 제일을 제쳐보자 절치부심 노력하던 거상들이 일시에 행동을 개시했다.

타플강드의 어음은 신용을 잃었다.

모두가 대금으로 받아주지 않으니 자연스레 추락할 수밖에는. 그러니 쓸 수 없는 어음이었다.

상인들이 타플강드에 직접 반환을 요구해 현물로 교환하는 행렬이 이어졌다.

타플강드의 보유금이 탈탈 털렸다.

거기에, 대륙 동부에서의 영향력까지 상실했다.

타플강드의 거래선이 족족 끊기고, 휘하에 있던 새끼 상단들이 이참에 아비를 갈아탔다.

워낙에 덩치가 커 이 정도로 쓰러지지 않았다.

그러나 더는 대륙 제일의 상단도 아니었다.

< 44. 빚쟁이는 밤에 잠도 못 잔다 [10]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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