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작가의 망령재림-243화 (239/268)

< 44. 빚쟁이는 밤에 잠도 못 잔다 [9] >

여름에 첫 달도 절반을 훌쩍 넘겼다.

헬른포드 왕국은 아직도 늑대인간 토벌을 마치지 못했다.

1차 포위 섬멸 작전은 보기 좋게 실패했다.

2차 포위 작전은 반절의 성공이었다.

왕국의 두 소드 마스터가 출동했음에도 불구하고, 사실은 오히려 그렇기에 실패했다.

소드 마스터의 강대한 힘을 알아챈 늑대인간들이 포위망을 조이기도 전에 반대로 도망치며 뚫어버린 까닭이었다.

물론, 1차 포위 섬멸 작전 때와는 달리 병사들이 은제 무구로 무장하고 제대로 체계를 갖춘 훈련을 통해 손발이 맞는 상태였다.

그렇기에 늑대 인간 무리의 반절 정도를 토벌하는 데에 성공했다.

그래서 반절의 성공이었다.

“젠장, 빌어먹을 괴물 놈들이!”

앙흠 왕태자가 팔걸이를 내리쳤다.

그간의 피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었기에.

“전하. 교단으로부터 요청을 재고해 보심이.”

교단에서 토벌을 돕고 싶으니 국경을 열어달라는 요청이 들어온 지도 벌써 한 달 전이었다.

게다가 언제든 부르면 가겠다며 페벨룬 국경 방면에 주둔 중이기도 했다.

평상시에는 그냥 돕더니만, 이번에는 국경을 열어달라 요청을 한다.

그러나 당연한 절차였다.

그들은 평범한 사제들이 아니었으니까.

성전군. 그들은 교단의 군대였다.

군대는 허락 없이 타국의 영통에 발을 디뎌서는 안 되는 법이었다.

그것이 교단의 깃발을 들었다고 해도 마찬가지였다.

“안 되오.”

“전하…….”

“안 되오.”

앙흠은 요지부동이었다.

앙흠이라고 받아들이고 싶지 않겠는가.

교단의 군대는 괴물 사냥의 최고 권위자들이었다. 아무리 오러를 쓴다 해도 괴물은 괴물이었다.

그러나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좌대신, 이 상황에 교단의 지원군까지 받았다간 정말로 전쟁은 영영 끝장이 나는 것이 아니오.”

“하나, 전하. 이미 파종에 때에 혼란으로 제대로 작업이 이루어지지 못한 터에, 전쟁을 감당할 그런 국고가…….”

“그러니 더욱더 전쟁이지! 이제는 진짜 전쟁밖에 없단 말이오!”

그간 늑대인간으로 인한 피해가 너무 컸다.

게다가 피해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문제는 이미 대주기를 경고받았다는 사실이었다.

이웃 왕국들이 대비해 아무런 피해 없이 넘어가는 동안, 헬른포드는 아주 생난리를 겪고 있지 않나.

왕가의 지배력이 매 순간 깎여나가고 있었다.

백성들의 민심 역시 최악을 달리고 있었다.

거기에 파종 시기를 놓쳤으니 작년 가뭄에 더해 올해 농사도 이미 반토막이 났다.

이 상황을 타파할 비책은 하나뿐이었다.

전쟁.

전쟁을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줄 방책이었다.

귀족의 군대를 한데 모으니 왕가의 지배력은 더 공고해진다.

전쟁 속 민심은 내 왕국과 적들만 남는다.

게다가 반 토막 난 농사 역시 승전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였다.

애초에 전쟁은 약탈이니까.

그러니 교단의 도움을 받을 수가 없었다.

지금 교단의 도움을 받고, 이후 전쟁을 일으킨다?

교단은 당연히 평화를 외칠 터. 사실상 명분 없는 전쟁이 될 터에 교단의 개입은 확정이었다.

최악의 경우 성전군을 적으로 맞이하게 될 수도 있었다. 아주 끔찍한 일이었다.

교단의 군대와 싸운다고?

싸우기는커녕 병사들이 당장 창칼을 버리고 회개의 기도를 올리지 않으면 다행이리라.

푸욱 한숨을 내쉰 앙흠이 중얼거렸다.

“이제는, 이제는, 정말로 전쟁뿐이란 말이오…….”

좌대신이 우울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저 우울할 수밖에는.

왕태자의 말이 틀리지 않았기에, 더욱더.

* * *

수많은 상단의 대표들이 메어리 상단 본단 저택의 정문 앞을 지켰다.

상단의 주인이 직접 찾아오기도 했고, 그 대리인 자격을 가진 상급자들도 있었다.

이토록 많은 이가 몰려든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금화.

그 반짝이는 둥근 것이 그네들의 권력이었다.

같은 평민일진대 상류층으로 삶을 가르고, 심지어 그 금력이란 귀족조차 함부로 대하는 일이 없었다.

그러니 상인이 금화에 가지는 애착이란.

그리고 몰려든 상인들의 절박함도 그만큼이었다.

적게는 몇천 닢, 많게는 수만 닢에 이르기까지.

한때 그러한 금화의 대신이었으나, 이제는 아이의 낙서만도 못한 종이 쪼가리를 쥐고 모였다.

속으로야 제인 상단과 메어리 상단이 다르니 제 빚을 변제할 대상이 아님을 아나, 그래도 혹여나 몇 푼이나마 보상받을 수 있지 않을까 하고.

그래서 벨가트 메어리가 나타났을 때 그 군중이 일제히 몰려든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곁에 선 시엔이 보기에, 상인들이 몰려드는 꼴은 마치 고위 주문으로 되살린 시체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산 자를 맹목으로 증오하는 그 악귀들과.

어쩌면 그 결과 역시 같을지도 몰랐다.

상인 무리가 저마다 제가 상실한 금화를 받아내려 할 테고, 분노건 애원이건 손을 뻗고 매달릴 터.

벨가트의 좌우로 갑옷을 갖춰 입은 기사들이 아니었다면 분명 그리하였을 것이다.

황금의 빛은 사람의 이성을 현혹해 흐리지만, 잘 갈린 도끼창이 발하는 창날의 빛은 반대로 이성을 되찾아주기 때문이었다.

“이보시오, 메어리 상단주!”

“내 말 좀 들어주시게나!”

“잠깐, 아주 잠깐이라도 괜찮으니……!”

“물러나라.”

기사들의 엄포에 상인들이 감히 가까이 다가가지 못하고 목소리만 높였다.

개중 일부 담대한 이가 접근하려 하였으나, 기사의 투구 속 서슬퍼런 눈빛을 보고 곧장 간이 쪼그라들었다.

덕분에 사람이 갈라져 길이 저절로 터졌다.

그 사이로 벨가트가 정문 앞에 도착해, 사람들을 바라보고 섰다.

“더 물러나라. 더. 더.”

기사의 말에, 사람들이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더. 더. 더 물러나라. 기사의 말이 계속 이어졌다.

사람으로 세워져 반원의 형태로 둘려진 울타리가 두세 겹쯤 되는 위치에서 기사의 말이 멎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공터 가운데 벨가트와 시엔 등이 정문을 등지고 섰다.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모양새였다.

저마다 목청을 높이던 상인들의 악다구니가 점차 사그라들어 군데군데 수군거리는 소음으로 변했다.

벨가트가 불안한 눈빛으로 시엔을 돌아보았다.

“저, 나리……”

“왜? 인제 와서 못 하겠다고? 그럼 내가 할까?”

“이러면 정말로 끝장입니다요.”

“자백과 고발의 차이점을 알아? 전자는 사는데, 후자는 죽거든. 어떻게 할래?”

상인은 금화 때문에 죽지만 금화를 위해 죽지는 않는다. 발가트가 체념한 태도로 크게 소리쳤다.

“여러분, 저는 사기꾼입니다!”

순식간에 소란이 번졌다.

조용! 기사들이 더 권위 있는 소음으로 묻었다.

“제인 상단은 처음부터 파산을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어음을 팔아 비축한 재화를 빼돌리기 위함이었습니다! 저는 그 범죄에 함께 가담하였습니다!”

벨가트가 죄를 자백했다.

신용을 높이고 어음을 발행하고, 어음은 밖으로 현물은 안으로 비축하며 망할 때를 가늠하던, 바로 그 과정이 자세하게 풀려 나왔다.

그러나 상인들에게 굳이 자세한 사항까지 설명할 필요는 없었다.

파산을 위해 만들어진 상단.

상인이 그 말을 모를 리가 없었으니까.

“……제 역할은 제인 상단의 비밀 창고를 지키고, 또 그 재화를 전달하는 일이었습니다!”

“그건 됐고! 그래서 내 돈은!”

“맞아! 내 금화!”

“내 돈이나 내놔!”

듣던 상인 하나가 소리치자 돈 달라는 외침들이 버글버글 끓어올랐다. 한참이나 그렇게 시끄러웠다.

좌중이 진정하자 벨가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제 어리석은 범죄에 죄스러운 마음이며, 피해를 입은 여러분의 금화들을 돌려드리고 싶은 마음은 굴뚝과 같습니다.”

순간, 군중들 전체가 입을 다물었다.

그래서 준다는 거야 만다는 거야?

사기고 뭐고 일단 내 금화가 돌아오는지 아닌지가 중요했으니까.

“그러나, 제가 가진 것으로는 그 절반이 못 미치니……”

“뭐라는 거야!”

“이 사기꾼 놈이!”

욕설과 고함이 일시에 터져 나왔다.

지키고 선 기사들이 아니었다면 진작에 돌이 날아오고도 남았다. 아마도 폭풍과 같은 기세로 날아드는 돌의 비가.

시엔이 한 발짝 앞으로 나서 신성한 빛을 피웠다.

난데없이 피어오른 신성이나, 성이 난 상인들을 진정시키기에는 퍽 효과적인 수단이었다.

상인들이 시엔을 바라보았다.

웬 사제님이? 귀족가 도련님 아니셨나? 이러한 속삭임들이 저들끼리 오가는 정도라, 시엔의 말이 충분히 전달될 수 있었다.

“저는 시엔 티란디스라고 합니다. 페벨룬 왕국의 귀족이며, 미숙하나마 교단의 명예 성자로 적을 올린 몸이기도 하지요. 그러나 여러분께선 티란디스 상단의 이름이 가장 친숙하시겠죠? 그 주인이기도 하지요,”

상인들이 알겠다는 듯한 반응을 했다.

그러고 나니 개중 한 명이 손을 들었다.

시엔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입을 열었다.

“영세하여 아실까 모르겠습니다만, 알반 상단의 부단주를 맡은 카스타르라고 합니다.”

“알반이 영세하다니, 다른 분들을 노점상으로 만드실 생각인가요?”

“송구한 말씀 드려 죄송하게 생각하나, 죄인이 한 말에 궁금함이 있어 손을 들었습니다만.”

“네, 그러세요.”

“방금 저자가 말하기를 가진 것이 절반이 못 미친다 하니 그 배상이 어찌 되는지 궁금하여…….”

카스타르가 말끝을 흐렸다.

무려 금화 이십오만 개의 피해를 봤다고 하니 함부로 묻기가 조심스러웠던 탓이었다.

“사기꾼의 재산을 처분한 금액을 빚을 종합하며 일부분씩 나눠 가지는 수밖에요.”

“공평한 방안 같습니다. 그러나 그리하게 되면, 피해액이 큰 이일수록 더욱 큰 손해를 입지 않겠습니까?”

“흠. 그러면 달리 방안이 있나요?”

“피해액에 따라 그 배상 비율을 조정하면 어떠하겠습니까?”

“알반 상단의 피해액이 제법 되는 모양이네요.”

“크흠. 자리에 계신 어떤 분들에게는 야박한 소리일지 모르나, 저희가 가진 어음이 십이만 닢 정도 됩니다. 만약 공평히 반절로 나눈다고 한들 저희가 부담할 것이 육만 개의 손해가 되니…….”

“그러면, 어찌하면 적정한 비율일까요?”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이가 배상받을 비율이 가장 적은 이보다 세 배는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어떤 상인의 표정은 밝아지고 또 어떤 이들은 그 반대로 어두워졌다.

그리고 어두워진 낯을 한 이들이 여기저기서 손을 들었다.

시엔이 누구를 지목해 발언권을 주는 대신, 싱글거리며 말문을 텄다.

“저야 고마운 말이네요. 티란디스가 가진 어음이 이십오만 닢쯤 되는데. 그러니 제가 함부로 결정해서는 공정치 못한 일이라. 거수로 하지요. 공평한 비율로 나누자 하시는 분는 손을 드세요.”

그러자 대부분의 손들이 하늘로 뻗었다.

티란디스의 피해액을 들은 이후였다.

본래는 카스타르에 말에 찬동했던 이들도 마음을 바꿔 손을 들었다.

스스로 어지간하다고 여긴 액수였으나 듣고 나니 비율에 차등을 두면 오히려 손해를 보게 생겼다.

“좋아요. 다른 방안을 물을 필요는 없겠네요.”

그와 동시에 고마운 마음 역시 들었다.

시엔이 귀족의 신분이 있으며, 기사를 대동했으니 이미 영주와 이야기를 마쳤다는 뜻이었다. 그러니 혼자 결정해도 앞에서 감히 불만을 표하겠는가.

게다가 피해액이 이십오만에 이르면 배상에 차등을 두어 가장 큰 이득을 볼 터다.

그런 이가 손을 들어 결정하자 하였으니, 일부러 영세한 이들의 편을 들어주기 위한 것이었다.

피해액이 큰 이들에게는 좋은 소식은 아니었으나, 공통적으로는 또 이러한 생각들이었다.

신성을 뿜고 교단의 명예 성자가 어쩌느니 하더니 과연 사람됨이 보통이 아니시구나.

게다가 티란디스 상단의 주인이 저런 이다.

상인으로서야 실격인 셈이다만, 반대로 그 성품을 보아 상단의 신용만큼은 확실하겠구나, 하고.

상인들이야 전혀 모르고 있었지만, 사실 시엔은 피해액을 양보할 마음 따위야 추호도 없었다.

이미 비밀 창고를 털어 손해액을 다 챙겼다.

저들에게는 나머지를 분배해줄 생각이었고.

애초에 영주가 영지의 재산을 우선해야지, 타인의 재화를 챙겨주어서야 자격이 없지 않겠는가.

다른 피해자들이 더 갖고 못 받느냐에 대해서는 이러든 저러든 관심 밖의 일이었다.

그러나 맹랑한 녀석 하나가 욕심을 부렸다.

이때 대충 나서면 저들의 마음을 살 수 있었다.

물질적 정신적 빚을 지우는 셈이니 공짜로 이득을 봤다. 이게 웬 횡재인가 싶기도 하고.

시엔의 속도 모르고 상인들의 눈빛이 달라졌다.

시엔이 트리예에게 눈짓하자 곧 들고 있던 서책을 공손히 넘겨주었다.

“배상 문제는 그렇게 하고, 여러분, 여기 장부가 한 권 있는데요. 제인 상회의 비밀 창고에서 찾은 비밀 장부입니다.”

“비밀 장부라 하시면…….”

“제인 상회가 횡령한 재물과 그 반출에 대해서인데, 이에 따르면 재물의 절반이 한 상단으로 흘러들었네요.”

“공모자가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어디입니까?”

“타플강드 상단, 이라고 적혀있네요.”

소음이 다시 번졌다.

타플강드 상단. 대륙 제일의 상단으로 세상 사람 모두가 익히 알고 있는 곳이 아니던가.

“그리고 여기 죄인의 증언 역시 그러하구요.”

“예, 맞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공모자가 아니라 그 배후입니다! 애초의 제인 상단의 설립이 타플강드의 비밀 출자로 이루어졌습니다!”

상인들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어떤 이는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이기도 했다.

카스타르가 정색을 하며 물었다.

“그, 사제님, 그리 확언하실 수 있으십니까?”

“달리 확인해볼 방법도 있죠. 자, 여기 타플강드 상단에서 나오신 분? 손 좀 들어보세요!”

상인들이 서로를 돌아보았다.

이 많은 상인 중에 손을 드는 이가 없었다.

“대륙 제일 상단이니 활동하는 데에 어음 거래가 한둘이 아니었을 텐데, 놀랍게도 이 자리에 한 분이 안 계시네요?”

있을 리가 있나. 도둑이 제 발 저리다고 했다.

어설프게 꼬리를 남기느니 아예 접점이 없는 것으로 치고 싶었겠지.

사실 더 치밀한 놈들이라면 자리에 한둘은 있을 법한데, 덕분에 조금 아쉽기는 했다.

곧 벌어질 마법사의 난동에서 애먼 피해를 입어 죽을 녀석이 하나도 없다니.

“이상하지 않나?”

“제인이 그래도 중개로는 이름이 꽤 큰데.”

“타플강드가 제인 어음을 한 장도 안 가졌다고? 그게 말이 되나?”

“그냥 자리에 없는 거 아닌가? 돌아갔을 수도 있지. 타플강드에게 몇만 개쯤 푼돈일 수도 있고.”

“누구 그쪽에서 나온 이를 모르나?”

상인이 모이면 일단 뭉치기 마련이었다.

상인이란 서로가 경쟁자이지만 또한 동업자이기도 하니 작은 상단은 큰 상단을 만나 비비고, 큰 상단은 또 저들끼리 할 이야기가 있었다.

이름이 나오지 않았으면 의심할 것도 없다.

그러나 듣고 의심하고 보니 수상한 일이었다.

시엔이 거기에 쐐기를 박았다.

“여러분들도 장부 좀 읽는 분들이니, 분배 전까지 필사하여 가질 수 있도록 해 드리지요. 직접 확인하실 분은 찾아오도록 하세요.”

< 44. 빚쟁이는 밤에 잠도 못 잔다 [9]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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