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4. 빚쟁이는 밤에 잠도 못 잔다 [8] >
벨가트는 며칠 동안 아주 잘 지냈다.
영주성의 손님 대접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기사가 상시 붙어 지키며 좋은 방에서 묶고, 시간이 되면 아르트레스의 식사를 대접받았다.
심지어 손이 불편한 아들에게는 시종이 붙어 시중을 들어주기까지 했다.
또 상단의 직원들을 호출해 업무까지 볼 수 있었다.
영주성의 사용인들이 벨가트를 대하기를 공손하여 윗사람 모시듯이 하며, 그 모습을 부하 직원들의 앞에서도 숨기지 않았다.
그때의 상단 부하들의 존경스러운 시선이란.
이쯤 되면 벨가트 본인도 슬슬 헷갈리기 시작할 지경이었다.
죄인으로 끌려왔는지, 아니면 영지의 큰 상인으로 영주 곁에 머물러 있는 것인지.
그런 이유로 벨가트 메어리의 표정도 조금씩 풀려가기 시작했다.
시엔은 저녁 이후 객실에 잠깐 들러 책을 읽다가 말없이 떠나곤 했다.
명목상으로는 호위 기사들의 저녁 훈련을 대신해 자리를 지키는 것이라고.
벨가트는 그 시간을 매우 어려워했다.
그러나 요 며칠 몸이 편하고 대우가 훌륭하니 그 두려움도 많이 희석된 모양이었다.
“나리, 송구합니다만, 여쭐 것이 있사온데, 괜찮으시겠습니까?”
“흠.”
시엔이 읽던 책을 내려놓았다.
벨가트가 책의 제목을 훑었다.
-신경계의 외부 자극을 통한 신체 반응 이론.
상인이 보아 무슨 내용인지 알 길이 없으나, 일단은 의술서 비슷한 것으로 보였다.
웬 의술서인가 싶기는 했지마는.
벨가트가 괜히 책을 훑지는 않았다.
상인은 사람을 상대하여 이문을 보는 이들이었고, 그 화술에 있어서 여러 기책이 있었다.
이를테면 상대가 흥미 있는 주제를 찾아 대화하고 그렇게 본론 전에 분위기를 이끌어 상대의 호감을 사는 방법이라던가.
“의술에 관심이 있으십니까?”
“관심보다는, 전문이지.”
“아. 의술을 익히셨습니까?”
“왜, 신기하나? 귀족이 의술을 익혔다 하니.”
“그보다는, 대단히 어려운 학문으로 알고 있는데 참으로 대단하십니다.”
혀에 기름이라도 칠한 양 아부가 자연스럽다.
요 며칠 편했다고 아주 기가 산 모양이었다.
“이름 모를 후배 녀석이 쓴 건데, 제법 읽을 만하단 말이지. 순 얼간이들인 줄 알았더니 의외로 수준 있는 저서들이 있어.”
“후배라 하시면, 의사로 이미 적을 올리셨군요?”
“아니, 이건 의술서가 아니라서. 차라리. 기술서에 가깝지?”
“기술이라 하시면.”
“고문 말이야. 어찌하면 사람이 가장 고통스러운 상태를 끌어낼 수 있는지 잘 써 놨네.”
“그건, 그렇습니까. 좋은…… 책이로군요.”
벨가트의 대답이 애매했다. 어찌 대답해야 할지 모르니 아무 말이나 나오는 모양새였다.
시엔이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관심도 없으면서 있는 척할 필요는 없고. 그래, 뭐가 궁금하길래 내게 말을 붙였나?”
“그런 게 아니오라…….”
“됐어. 아무래도 영주님보단 내가 만만해 보였을 테니까. 영주님께 여쭙기는 무섭고, 그렇다고 이대로 가만히 있기에는 대체 어찌 돌아가는 상황인가 궁금해 죽겠고. 안 그래?”
“송, 송구합니다.”
벨가트가 바짝 고개를 숙였다.
어느새 피부가 따끔하니 땀이 배어 나오려 한다.
속이 훤히 읽혔으니 눈앞의 도련님이 예사 인물이 아님을 다시금 깨달은 탓이었다.
“그래서. 왜? 언제쯤 돌아갈 수 있냐고?”
“예, 그렇습니다.”
“그야, 뭐. 조만간? 곧 풀려날 수 있을 거야.”
“아.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벨가트가 안도한 표정으로 큰 숨을 내쉬었다.
“왜, 그리도 나가고 싶나? 영주님께서 섭섭하시겠는걸. 그리 대접해 주셨는데, 정작 손님은 떠나고 싶어 안달이라니.”
“아니, 아닙니다. 그런 게 아니라, 소인이 생업이 있으니 오래 자리를 비울 수 없는 탓에…….”
“응? 생업? 상단 일 말인가? 그걸 왜 걱정해?”
시엔이 부러 고개를 갸웃거렸다.
진심으로 궁금하다는 양으로.
벨가트의 가슴이 철렁했다.
사람이 본래 오감 외에 직감이라는 것이 있는 탓이었다. 창에 꿰뚫린 듯 선뜩한 불길함에 심장이 쿵쿵 뛰었다.
“무슨 말씀이신지…….”
“밖에 마법사 여인들이 이를 갈고 있거든. 네가 성 밖으로 나가면 몇 발자국 못 가서 끝장이거든. 죽고 나면 생업이고 상단이고 무슨 상관이야?”
말문이 막힌 벨가트가 입만 공허하게 벌렸다.
시엔이 키득거리며 말을 이었다.
“물론 법도가 있으니 수배가 걸리기는 하겠지만, 그래도 그 마법사 여인들은 무사히 빠져나가게 될 거야. 애초에 영주님께서 잡을 생각이 없으셔서.”
“그럴 리가, 그럴 리가 없습니다.”
“왜? 요 며칠 귀빈 대접받으니 정말로 귀한 이가 된 것 같던가? 에이.”
시엔이 손을 내저었다.
“물론 잘못이야 벨가트 네가 했다지만, 어쨌거나 영주가 영지의 상인을 처형하면 모양새가 안 좋지. 그러면 어떤 상인이 아르트레스를 신뢰하고 새로 둥지를 틀겠어?”
상인의 죄로 인해 처형하더라도, 다른 상인들이 보기에는 좋지 못한 일이었다.
죄야 없으면 만들면 그만이었다.
영주가 상인을 죽여 그 재산을 갈취했다면 다른 상인이 그 자리를 채우고 싶지는 않을 터였다.
“그러니 생각해 봐. 영주님께서 죄지은 상인임에도 불구하고 용서함은 물론 융숭히 대접하셨지. 성의 식솔들이 모두 보았고 네 상단의 직원들이 또 눈으로 확인했잖아.”
“그럼, 이 모든 게 전부 다.”
벨가트가 이제야 상황을 온전히 파악했다. 제가 즐기던 처우가 실상 최후의 만찬이었음을 알았다.
시엔이 그 모습을 보며 슬그머니 운을 뗐다.
“물론 네가 살 방도가 아예 없는 건 아니지. 내 영주님께 간청을 드려 볼 수도 있고.”
“살려주십시오!”
벨가트가 납작 엎드렸다.
시엔이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제인 상단에 받아내야 할 빚이 이십오만 닢쯤 있는데 말이지. 어차피 나야 타국의 귀족이고, 내 돈 말고 다른 사정이야 별 관심 없거든.”
“제가, 제가 갚아드리겠습니다. 그러니…….”
“오. 네가? 제인 상단의 빚을 메어리 상단이 갚아주는 거야? 왜, 둘이 공범이라서?”
“그게 아닙니다, 제인 상단의 잔여 재산을 털면 가능한 액수입니다.”
“그거 봐. 이렇다니까.”
시엔이 혀를 쯧쯧 찼다.
별거 아닌 혀 차는 소리이나, 벨가트의 등줄기가 축축하게 젖어 들기 시작했다.
“그 건방진 주둥이가 입만 열면 거짓말이란 말야. 아내가 가진 상단이 망했고, 네가 나머지를 헐값에 삼켰는데 그게 사실 이십오만 닢 이상의 재산이라. 그게 공범이 아니면 대체 뭔데?”
“그것이……”
“그러니 솔직하게 말해. 둘이 짰지? 네 처가 자금을 모은 후에 빼돌려 망하고, 네가 몰래 삼키고는 빚쟁이들을 쫓아내려 했겠지. 맞아?”
“그것이…… 그게…….”
벨가트가 어물거렸다.
사실상의 자백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타플강드 상단은 뭐야? 뭔데 소드 마스터씩이나 보내면서 네 아들을 지켜주려 했을까?”
“저어…….”
시엔이 한숨을 푹 쉬었다.
“타플강드 상단이 무섭기는 어지간히 무서운 모양이지? 영주님보다 더.”
“아닙니다. 그게 아니오라.”
“그럼 죽어야지. 혹시 아나? 타플강드 상단에서 네 의리를 높이 사서 묘비라도 세워줄지.”
“나리께선, 나리께선 모르십니다. 상계에서 타플강드를 거스른다는 것이 어떠한 뜻인지…….”
“나야 모르지. 그런데 상계에서? 어차피 상계로 돌아갈 수도 없잖아.”
“나리께선 모르십니다…….”
이쯤 숨통을 좀 틔워 줄까.
시엔이 벨가트의 어깨를 툭툭 두들겨 주었다.
“너도 참 요령이 없다.”
“소인은 그저.”
“나 같았으면 이렇게 된 바에 재산을 바쳤겠다.”
“그 말씀은…….”
“빼돌린 재산이 얼마쯤 돼? 타플강드 상단이 두렵다면 내가 그들로부터 보호해 줄 테니까.”
“타플강드는 일개 상단이 아닙니다. 대륙 재화의 절반을 차지한, 소드 마스터들마저 손에 쥐고……”
“그래 봐야 하찮은 상인이지.”
“그 정도가 아니라…….”
시엔이 콧방귀를 뀌었다.
“내가 바로 시엔 티란디스야. 내가 누군지 몰라? 교단의 명예 성자이자, 이건 비밀이지만 곧 페벨룬 최초의 대공이 될 사람이거든.”
“절 지켜주실 수만 있으시다면…….”
“내 이름을 걸고 맹세하지. 타플강드 상단의 위협으로부터 널 지켜주겠다고.”
“하지만.”
“내 이름으로도 모자라나? 그렇다면 천신께 걸고 맹세하지.”
시엔이 신성한 빛을 피웠다.
가급적이면 써먹지 않으려고 해도, 워낙에 요긴한 수단이어야지. 게다가 거짓을 말하는 것도 아니니 천신께 폐가 될 것도 아니고.
벨가트가 멍하니 신성을 올려다보았다.
솔직히 믿기지 않았다.
신성을 가진 이가 할 언동과 행동이던가. 그러나 눈으로 직접 보았으니 의심의 여지가 없다.
“……비밀 창고가 있습니다. 어음과 귀금속으로 육십만 어치 정도는 될 겁니다.”
“좋아. 잘 생각했어.”
시엔이 씩 웃으며 벨가트의 어깨를 톡톡 두드려 주었다.
* * *
“제인 상단이 숨겨놓은 재산이 육십만 닢에 이르던데요.”
“방금 뭐라 했습니까?”
“금화 육십만 개요. 애초부터 작정하고 만들어진 상단이라, 그간 꾸준히 재화를 비축했다네요.”
시엔이 간단히 설명을 풀었다.
어음으로 신용 규모를 키우고, 제가 발행한 어음으로 현물을 사 모았다고.
아예 작정하고 망하려고 만들었으니, 발행한 어음이 백만이 넘어가나 실상 상단의 수익은 전혀 없는 상황이었다.
어음 거래가 불합리하며 또한 큰 상인이 나오기 어려운 이유였다.
인맥이란 대개 물려받는 것이니, 손에 한 푼 없이 남의 돈을 빌려 제 돈처럼 쓸 수 있는 자들이 많기 때문이었다.
“용케도 뜯어내셨군요.”
테린이 감탄했다.
상인이라는 치는 생각보다 더 다루기 까다롭다.
황금을 제 목숨과 같은 것으로 여기는 탐욕스러운 족속들이었으니까. 애초에 상행이 제 목숨을 걸고 하는 일이 아니던가.
성벽 밖에 나선 상행이 도적과 괴물로부터 안전한 날이 개벽 이래 하루도 없었다.
그런가 하면 성벽 안에서도 위험은 마찬가지였다.
위로는 귀족들로부터 아래로 비렁뱅이에 이르기까지 상인의 재산을 탐냈다.
그러니 참된 상인이란 제 목숨보다도 황금을 더 귀중히 여기는 놈들이었다.
그리하여 큰 부귀와 영화에도 결코 만족하는 법이 없고, 역경과 고난에도 탐욕을 버리지 못했다.
그러니 상인의 목숨을 취하기는 쉬워도, 재산을 뜯어내기란 쉬운 일이 아님을 알았기에.
“제 목숨보다 값진 것이 있겠어요? 다만, 이 금액은 제가 알아서 쓸까 하는데요.”
“전부 말입니까?”
“영주님이 원하신다면 공범으로 끼워드릴 수도 있지만, 그리 추천하고 싶지는 않아서요. 타플강드 상단이 끼어든 일이라, 겨우 몇십만에 발을 들이셨다간 영지의 자금이 아예 말라버릴 수도 있구요.”
어음이 한 방향뿐이랴.
수신인이 제인 상단으로 되어있어 금화를 반환해야 하는 어음 역시 휴지가 되었다.
갑자기 부채가 사라진 행운아들도 있는 것이다.
기이하게도, 그 행운의 절대다수가 타플강드 상단이었다.
이번 사기극의 배후에 타플강드가 자리 잡았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타플강드 상단이라. 대륙 제일의 상단이라지요. 일개 상단이 그러한 힘이 있겠습니까?”
“티란디스가 일시에 잃은 금액이 백만이 가볍게 넘습니다. 저희야 다행히 나올 재원이 있지만야, 아르트레스는요?”
아르트레스는 변경백이기도 했다.
그리고 세상에 부유한 변경백은 없었다.
일시에 백만이 넘는 피해를 입힐 수 있는 상대를 함부로 적대하기는 아무래도 어려운 일이었다.
그렇다고 당장 눈앞의 금액을 포기하기에도 액수가 보통이어야지.
“공자의 전리품 중 아르트레스의 몫을 요구하면 어쩌시겠습니까?”
“에이, 설마 제가 혼자 다 먹겠어요? 나름 명예 성자라는 이가 그래서야. 딱 손해분만큼만 챙기고, 나머지는 다른 피해자들에게 나눠줄 생각이에요.”
“손을 벌리는 것도 부끄러운 일이 되겠군요.”
테린이 한숨을 푹 쉬며 말했다.
“피해자들에게 나눠준다라. 그저 선행을 베푸실 이는 아닌 것 같은데. 타플강드 상단의 소행임을 알리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여도 되겠습니까?”
“네. 비밀 장부도 있으니 뭐.”
장부를 적지 않는 상인은 없는 법이었다.
특히 떳떳하지 않은 경우에는 더욱 그러했다.
장부로 남겨 서로 간의 약점을 챙기는 셈이었다.
그리고 약점은 아주 비싼 것이었다.
상인이 말하기로야 장부를 적지 않는다고 하지만, 그걸 믿을 정도로 순진해서야 사기를 당해도 뭐라 할 자격이 없는 셈이다.
“제게는 그들을 적대하지 말라 하고는?”
“저는 이미 늦었습니다. 그들이 이미 제게 칼끝을 들이밀었거든요. 그러니 끝장을 봐야겠죠, 뭐.”
“아르트레스는 빠져야겠군요. 확실히 선을 그어 주시지요.”
테린이 깔끔하게 물러났다.
“그보다는, 죄인의 처리는 어찌하려는지요? 다른 귀족은 모르겠으나, 아르트레스는 절대로 원한을 잊지 않을 겁니다만.”
타플강드 상단의 위협에서 지켜주겠다고 했다.
다른 위협까지 막아준다고 한 적은 없었다.
예를 들면, 사악한 마법사들의 습격이라던가.
애초에 상인은 믿을 만한 작자가 아니다.
거기에 얽힌 것이 제국 의회였으니 더욱더.
시엔이 상쾌한 미소와 함께 대답했다.
“어쩌긴요. 죽어야죠, 뭐.”
< 44. 빚쟁이는 밤에 잠도 못 잔다 [8]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