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작가의 망령재림-241화 (237/268)

< 44. 빚쟁이는 밤에 잠도 못 잔다 [7] >

부자의 상봉은 꽤나 극적이었다.

눈으로 보자마자 서로를 부여잡고 끌어안아 더듬으며 한 덩어리처럼 뭉친다.

아비와 자식이 일시에 울음을 터뜨리니 객실 안에 가득 찬 것이 통곡하는 소리였다.

그렇게 재회를 마치고 나서야 아비의 눈에 자식의 모습이 온전히 비쳤다.

정확히는 팔꿈치에서 멈춰 덩어리진 반쪽짜리 팔이 눈에 들어온 모양이었다.

“너, 너 팔이, 아이고, 세상에. 얼마나, 이.”

“아버지…….”

“하필이면 또 오른팔이, 어쩔꼬, 이걸 어째.”

슬픔와 안타까움 뒤에는 분노가 찾아온 모양.

벨가트가 영주 앞에 넙죽 엎드렸다.

“영주님, 그년들은, 제 아들을 이리 만든 그년들은 어찌 되었습니까?”

“그 여인들에 대해서는 걱정할 필요 없다.”

“그렇다면, 형은 언제쯤입니까? 이 눈으로 그 년들의 숨이 끊어지는 꼴을 똑똑히 보고 싶습니다.”

벨가트의 눈에 독기가 차올랐다.

테린이 쯧쯧 혀를 찼다.

“내 말을 잘못 이해한 모양이군.”

“예? 무슨 말씀이신지.”

“네가 그 여인들에 대해서는 걱정할 필요가 없다 말하지 않았느냐.”

“아이고, 이를 말씀이십니까. 나리께서 하시는 일이니 소인이 어찌 말을 덧붙이겠습니까요.”

벨가트가 급히 굽신거렸다.

범죄자의 처형은 영주의 일이다.

상인 주제에 주제넘게 그 권한을 침해하려 들어 기분이 상했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상인들에게는 심심찮게 있는 일이기도 했다.

뇌물을 받을 때는 뭐든 해줄 것처럼 관대하게 굴다가, 정작 청탁을 하면 네까짓 게 무엇이냐며 노하는 귀족이 한둘이 아니었으니까.

테린은 그저 차가운 눈빛을 보낼 뿐이었다.

“말귀가 어둡구나. 네가 걱정해야 할 이는 무고한 여인들이 아니라 바로 네 자식이다. 미천한 것이 감히 주인을 능멸하지 않았더냐.”

“능멸이라니요, 아닙니다, 아니에요, 무언가 오해하신 것이 틀림없습니다.”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구나.”

테린이 눈짓하자, 아르트레스의 기사들이 벨가트를 들어 내동댕이쳤다.

아악, 하고 둔탁한 비명이 터지는 가운데, 영주가 몸을 돌려 휙 하니 객실 밖으로 나가버리고 만다.

방 안에 남은 이는 갑옷을 차려입은 기사 몇 명과 벨가트 부자, 그리고 조용히 서서 지켜보던 시엔과 시종들뿐이었다.

벨가트가 주저앉아 황망히 문만 바라볼 때였다.

시엔이 그 앞에 쪼그려 앉아 눈높이를 맞췄다.

“이봐. 벨가트. 벨가트 메어리?”

“누구십니까?”

“나? 시엔 티란디스. 혹시 아나?”

“티란디스라면, 혹여 티란디스 상단의…….”

“모르는구나?”

시엔이 히죽 웃으며 말했다.

제인 상단의 어음이 무려 이십오만 닢 어치였다.

티란디스를 노린 사기가 분명하니, 범인이 시엔의 이름을 모를 리가 없고, 티란디스의 이름을 모를 수는 더더욱 없었다.

그런데 티란디스의 이름을 듣고 후작가보다 상단이 먼저 튀어나오지 않는가.

“내가 어음을 좀 가지고 있는데. 알지? 제인 상단이라고. 어떻게 돈 좀 받아볼까 하고 기껏 찾아왔더니 얌체 같은 녀석이 남은 걸 낼름 삼켰더라고.”

“저는 적법한 절차에 따라서…….”

“뭐. 그건 넘어가자고. 성의 좀 보여주고 뒷거래 좀 하면 뭐. 영지 일이야 영주가 허락하면 적법한 거 아니겠어?”

벨가트가 눈치를 보았다.

천치가 아니고서야 시엔이 호의적이지 않다는 것쯤은 알 수 있었으니까.

“달리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신지…….”

“네 아들 말야.”

“예?”

“생각해 봤는데, 아비가 사기꾼에, 어미도 사기꾼. 그럼 자식이 보고 배워 익힌 것이야 뻔하지. 그냥 세상에 해악을 끼치기 전에 치우는 게 낫지 않아?”

“무슨 말씀이신지…….”

“에이, 모르는 척 말고. 아이미 제인, 제인 상단주는 어디 있어? 네 아들한테서 들었으니 새삼 모른다는 소리는 말고.”

벨가트의 고개가 툭 떨어졌다.

이제야 상황을 파악한 모양이었다. 영주의 태도가 차가웠던 것도, 네 자식이나 걱정하라는 그 말도.

유난히 휑한 정수리가 시엔의 눈에 비쳤다.

그렇게 잠시 동안 침묵을 지키더니 다시 살그머니 대가리를 치민다.

“오해이십니다.”

“오해? 무슨 오해?”

“아이미 그 여자가 제 아내인 것은 사실입니다만, 저 역시 피해자란 말입니다. 그년이 가족을 버리고 야반도주를 해 버리는 바람에…….”

“그런 거야? 공범이 아니라 피해자다?”

“예, 그렇습니다. 그렇고 말고요.”

“흠. 좋아. 이것도 뭐, 일단 넘어가고.”

시엔이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아들 관리는 왜 또 그리 허술했어?”

“무슨 말씀이신.”

“같은 말을 몇 번이나 하려고? 내 말이 안 들려? 귓구멍이 막힌 모양인데, 칼로 좀 뻥 뚫어줄까?”

“아님, 아닙니다!”

“아니지? 이제부턴 무슨 말이냐는 소리 한 번만 더 해 봐. 어떻게 되나.”

“안 하겠습니다!”

시엔이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온 세상 빚쟁이가 다 찾아왔는데, 개중에 절박한 이가 한둘이 아닐 거야. 사람이 절박하면 못 할 짓이 없지. 자식을 노릴 거로 생각해 본 적이 없어?”

“그건…….”

“눈치 보지 말고. 앞이 안 보여서 눈을 굴리나? 칼이 귀뿐만 아니라 눈구멍도 틔워줘야 해?”

“아닙니다, 대비를 했습니다, 대비를 했습니다요.”

“어떻게 대비했길래 홀라당 털렸어? 아들이 별로 소중하지 않나 봐?”

“아닙니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합니다.”

“그런데 그리 허술하게 대비해서 저 꼴을 만들어 놨어? 어디 빼돌려 놓던지, 아니면 강한 호위라도 붙여 놓던지.”

“……호위는 대단한 실력자였습니다. 그 마법사들이 어떤 술수를 부렸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정도는 능히 막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대단한 실력자 좋아하네. 너, 네 자식의 납치를 손목을 보고 알았잖아. 실종된 것조차 모르고 있었다고. 물론 원한 때문에 잡자마자 손목부터 날렸다고는 해도.”

“무슨 말씀, 아니, 아닙니다. 그 말씀은.”

“마법사가 암살에 능할 리도 없고. 몰래 들어가 몰래 납치해 빠져나왔다는 뜻인데, 그걸 모를 정도면 그게 실력자야?”

“아닙니다, 그는 마스터였단 말입니다.”

벨가트가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항변했다.

시엔의 표정에서 웃음기가 싹 빠졌다.

“마스터? 소드 마스터?”

벨가트는 아차 싶은 표정이었다.

그러나 이내 결국 체념한 듯 대답을 붙였다.

“……그렇습니다.”

“소드 마스터가 호위로 붙었다고?”

“예, 맞습니다.”

“어떻게? 아니, 누가?”

왕국에 하나 아니면 둘, 많아도 넷 정도에 그치는 이가 소드 마스터였다.

마스터에 근접하다고 평가받는 이는 많지만, 정작 그 경지에 오르는 이는 얼마 없었기에.

“이름은 밝히지 않았습니다.”

“네가 속은 거겠지. 소드 마스터가 어디 구한다고 구해지는 인력인 줄 알아?”

“아닙니다, 오러 블레이드를 똑똑히 보았습니다.”

“오러를 씌운 거겠지. 그 정도는 유명한 용병들도 할 줄 알아.”

“아닙니다, 저도 한때는 검을 잡았습니다. 둘의 차이 정도는 구분할 수 있습니다요.”

“좋아. 그게 사실이라 치고. 소드 마스터를 어찌 구했는데? 마스터를 부려 먹는 황금이 한두 푼으로 되지 않았을 텐데?”

“마스터를 금화로 부리겠습니까? 이전부터 친분이 있던 사이라 도움을 청해…….”

“방금은 이름을 모른다면서? 이름도 모르는 사이에 친분? 이거 안 되겠네. 아직도 여유가 있으니까 헛소리를 하고.”

“그건.”

“생각해 보니 팔이 하나만 짧으면 균형이 안 맞아 힘들지 않을까? 나비, 저 불쌍한 애 좀 도와줘.”

“네! 시엔 님!”

나비가 발랄하게 대답하며 단검을 꺼내 들었다.

지켜보던 기사들이 움찔거렸다. 분명 변경백저에 들기 전에 몸수색을 했는데, 왜 또 무기가 나와?

그러나 최대한 편의를 봐 드리며 명령을 따르라 이미 언질을 받은 기사들이었다.

제지하는 대신, 돌아가면 몸수색을 맡았던 녀석을 가만두지 않겠다고 조용히 속으로 날만 갈았다.

나비가 생글생글 웃는 낯으로 소년에게 다가갔다.

벨가트가 바닥에 몸을 던졌다.

꿇는 것 하나는 달인의 경지처럼 보였다.

“잘못했습니다! 부디, 부디, 자비를…….”

“어찌할까요?”

“잠깐 기다려 봐. 아니지, 손가락 하나 정도는.”

“제발…….”

시엔이 생각하는 척을 하다 손을 내저었다.

나비가 다시 시엔의 뒤에 다소곳이 자리를 잡고 나서야, 벨가트가 겨우 한숨을 돌리며 상체를 일으켰다.

“자. 그래서, 소드 마스터를 어디서 구했어?”

“그것이…….”

“왜, 말하기 어려워? 하긴, 소드 마스터와 연결을 해줄 정도의 어딘가라면 일개 상인이 입에 담기는 무섭겠지. 안 그래.”

“그렇, 습니다.”

“왜, 그걸 말하면 큰일이라도 나나?”

“예…….”

“아들이 죽는 것보다 더?”

“제발, 제발 자비를 빌겠습니다……”

벨가트가 다시 납죽 엎드려 빌기 시작했다.

시엔이 혀를 차며 나비를 부르자, 그제야 번쩍 고개를 들어 비명을 지르듯 소리쳤다.

“타플강드! 타플강드 상단에서 보내줬습니다!”

* * *

타플강드 상단은 그 큰 규모만큼이나 수많은 새끼 상단을 거느리고 있다고 했다.

제인 상단과 메어리 상단 역시 마찬가지였다.

타플강드 상단이라.

분명 대륙 제일의 상단이고, 또 나림이 말하기를 제국 의회의 자금줄이라고도 했다.

그러고 나니 여러 의문이 한 번에 풀렸다.

허술하고 심약한 놈.

시엔이 본 메어리 상단주였다.

그리고 그런 인물은 사기를 못 치고, 또 안 친다.

능력이 달리고 그걸 또 본인 역시 알기 때문에.

그런데 또 부부가 나란히 사기꾼임에도 확실했다.

제인 상단주가 파산하고 혼자 도망쳤다고 치자.

발가트가 굳이 그 본단을 차지하고 남은 재산을 회수하려 들었다.

여기까지는 그럴 수 있다고 쳐도, 소드 마스터가 끼어들면 이야기가 이상해졌다.

소드 마스터까지 고용할 정도의 위험을 알고서도 제인 상단의 잔여 재산을 챙길 필요가 있었을까?

사기를 못 칠 놈이 어설프게 일을 벌이다 꼬리를 잡혔다.

본인의 의지가 아니라, 누군가 시킨 일이라면 그 허술함도 납득이 되는 일이었다.

그렇다면 의회가 수작을 벌였다는 건데.

가만히 있으면 목을 쳐줄 판인데, 그조차 기다리지 못하고 보채는 꼴이었다.

이걸 어찌 조지면 좋을까.

그러나 그건 일단 나중의 일이었다.

시엔이 귀빈실의 소파에 파묻혀 입을 열었다.

“소드 마스터가 호위로 있었다던데. 왜 말해주지 않았지?”

“소드 마스터? 그런 건 없었어.”

라이네스가 무슨 소리냐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없었다고? 상단주는 그리 말하던데. 내가 보기에 거짓말은 아니었어.”

그러자 라이네스가 곰곰이 생각에 빠졌다.

“이상한 게 하나 있기는 했는데.”

“뭔데?”

“오러 블레이드 비슷한 걸 쓰는 녀석은 있었어.”

“오러 블레이드면 오러 블레이드지. 비슷한 건 또 뭐야?”

“지금 생각해 보면 오러 블레이드였던 것 같아서.”

“소드 마스터가 있었다고? 그걸 해치우고 납치해 갔단 말이야?”

소드 마스터쯤 되면 오러를 자유자재로 다뤘다.

초인이 휘두르는 가공할 병기도 병기지만, 신체에 둘러 강화하는 능력이 기사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실내처럼 좁은 장소에서, 가까이 마주하면 마법사 넷 정도는 간단히 목을 벨 수 있었으리라.

“생각해 보니 검날 위로 손가락 하나 정도? 오러가 더 솟았던 것 같기도 하다.”

“그럼 오러 블레이드가 맞는데.”

“실력이 아주 엉망이었거든. 그걸 제대로 휘두를 새도 없이 번개 주문 맞고 한 방에 죽었어. 피할 생각조차 못 하던데.”

“한 방에? 그쪽 천문관이 그런 실력자였다고?”

오러를 신체에 두르면 주문에도 내성을 가지는 편이었다. 특히 천문관의 번개들이 잘 막혔다.

소드 마스터를 한 방에 죽이려면, 일반적인 주문으로는 턱도 없는 일이었다.

“그건 아닌데. 그래서 우리도 소드 마스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어. 죽기 전에 오러가 검 끝 방향으로 흩어지는 줄 알았지.”

호위는 검을 뽑자마자 천문관의 벼락에 얻어맞고 죽었다.

검이 찬란히 빛난 것도 잠시, 곧장 숨통이 끊어져 오러가 허공으로 흩어졌다면서.

“그럼 그놈이 소드 마스터였던 것 같은데.”

“하지만 검을 뽑는 자세부터가 엉성하기 그지없었는걸. 제대로 된 실력도 없었는데.”

“당황해서 그랬겠지. 실력 없는 놈이 어떻게 오러를 깨치고 또 마스터의 경지에 올라?”

“아닌데. 그냥 오러를 다룰 줄 모르는 사람처럼.”

라이네스가 말끝을 흐렸다.

이 키 큰 여인 역시 제정신이 아니다.

제발 데려가 달라고 애원을 할 정도였으니 거짓을 말하지는 않을 테고, 그녀가 보기에는 정말로 그랬다는 뜻이었다.

오러를 다룰 줄 모르는 소드 마스터라니.

돈을 쓸 줄을 모르는 부자, 장사를 모르는 상인은 간혹 있어도 소드 마스터가 그러할 수가 있을까.

부자나 상인이야 그 낭비와 손해를 뛰어넘는 재력만 있으면 상관없다 치고. 오러가 무슨 재화처럼 따로 들어올 수 있는 것도 아닌…….

시엔의 눈썹 사이에 골짜기가 패였다.

의회가 최근에 벌인 일이 오러를 쓰는 늑대인간을 만들어낸 것이었다.

괴물에게 오러를 틔울 수 있는 판에, 사람에게는?

혹시 인공적으로 소드 마스터를 만들 수 있다면.

< 44. 빚쟁이는 밤에 잠도 못 잔다 [7]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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