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작가의 망령재림-240화 (236/268)

< 44. 빚쟁이는 밤에 잠도 못 잔다 [6] >

방금의 참신한 자살 시도와 뜬금없이 내비치는 호의가 꺼림칙하기 그지없었다.

따르는 이를 품는다는 것도, 적어도 상대의 의중을 파악하고, 진심을 아는 전제가 필요했다.

적어도 누렁이와 그 부산물들처럼 차라리 정신이 나간 상태기라도 하면 모를까.

“데려가만 주면, 뭐든 다 할 수 있는데.”

“뭐든 다 한다고?”

“응. 뭐든지.”

라이네스가 큰 키만큼이나 길쭉한 다리를 꼬고, 그 위에 팔꿈치를 올려 턱을 괴곤 눈을 게슴츠레 뜨며 말했다.

“마법사가 약속을 함부로 내뱉어서야. 왜, 키메라 실험에 실험체로 쓰겠다고 하면, 그리할 텐가?”

에두른 거절이었다.

그러나 라이네스의 눈빛이 번뜩였다.

“키메라 실험체?”

시엔이 대답 대신 트리예를 바라보았다.

트리예의 눈치는 데리고 있는 이들 중 제일이다. 곧장 원하는 대답을 쏟아냈다.

“내 연구. 일단 라이네스 네 속에 든 장기부터 짐승과 괴물의 것으로 하나하나 바꿔보고. 사람의 몸이 본래 다른 것을 배척하니 속부터 부패해. 트롤의 척수를 이식해 해결하려 해 봤지만…….”

“재생력으로 부패를 치료하는 거야?”

“그리 간단하진 않아. 내부의 부패는 해결되지만, 고통은 어쩔 수 없으니까. 얼마 안 가 정신이 파괴되어 공격성만 남은 괴물이 되고, 신경을 제거하면 멍청한 인형이 되고 말더라.”

흐레이그 나이트의 제조 원리였다.

그 멍청한 인형 위에 성유해로 온존한 주문, 피의 전이를 영구 각인해 정제한 피로 불사성을 더했다.

그러나 성유해는 보편적이지 못한 편법이었다.

그러니 아직 제대로 된 인간 키메라 제조의 완성은 한참이나 먼 일이었다. 거기에 시엔이 금지한 탓에 연구가 중지되기도 했다.

지금의 연구 과제는 의체 키메라, 강신체를 이용한 유사 신체와의 합성물이었다.

트리예의 협박에, 라이네스의 눈빛이 흔들렸다.

이때다 싶어 시엔이 쐐기를 박았다.

“실험체 신세도 좋다면야.”

“좋아. 오히려 더 마음에 들어.”

시엔이 질린 표정으로 트리예를 바라보았다.

“이거 대체 왜 이래?”

“소녀 역시 모르겠어요. 좀 멍청할 뿐이지 그나마 얘가 제일 정상이었는데.”

“이게 제일 정상이라고?”

“적어도 이전에는 안 이랬답니다. 대체 어쩌다 애가 이렇게 되었는지…….”

이리 나오니 더욱 수상하기 짝이 없다.

오히려 그놈의 수작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트리예의 협박에도 거둬달라 말하니, 만화원에서 심으려는 첩자일지도 몰랐다.

모르면 물어보면 된다. 시엔의 방식이었다.

“대체 뭐야. 왜 그렇게까지 하려 들지?”

“그냥. 당신의 악의를 봤어. 흐레이그 공방전 때.”

“내 악의?”

“성유해를 매개로 원초 세계를 소환했을 때, 그걸 덧씌운 게 당신이지? 나는 어둠 속에 있었어. 죽고 또 죽고. 몇 번이나 죽었는지 몰라.”

“죽다 못해 정신줄을 놨나?”

라이네스가 고개를 저었다.

“그냥. 고통을 받아들이고 나면, 더 원하게 돼. 그때 나는 수백 번, 어쩌면 수천 번을 죽었어. 산 채로 물어뜯기고, 떨어져 나간 모든 조각 살점 하나하나 씹히고 녹아나던 그 고통이 아직도 잊히질 않아.”

“그런 이론이 있기는 했지.”

생물이 감당할 수 없는 고통에 노출되면, 정신이 붕괴되어 죽어버리고 만다.

신체가 그를 막기 위해 감각을 속여 쾌락으로 대체하려 든다던가.

검증된 이론은 아니었다.

정작 그 이론을 내세웠던 마법사가 검증을 위해 인두로 스스로를 지져보고는, 아픈 것은 아픈 것, 그저 고통스러울 뿐이라며 이론을 철회했으니까.

덕분에 물리적으로 낙인이 찍히고, 사회적으로도 얼간이 자해꾼이라며 낙인이 찍혔다.

결국 마법사는 은퇴해 잠적했다.

그러나 이론은 남았다.

극히 일부분의 사람에게는 그러한 감각의 대체가 발달되어, 그에 한정해서 검토할 가치는 있다나.

“덕분에 내가 원했던 것들이 별것 아니라는 것도 알았어. 그냥, 그에 비하면 장난질에도 못 미치는 그런. 그리고 나니 시시해졌어.”

“그래서 그 매혹 비슷한 수단에서 풀려났다?”

“응. 그이, 그놈이 어차피 해줄 수 없는 거니까. 그리고 나니 의문이 들더라고. 내가 왜 그랬을까.”

“그럼 날 따라오겠다고 하는 게.”

“맞아. 당신이야. 세상에 온전히 당신만이.”

라이네스의 눈빛이 뜨겁다.

시엔이 이마를 주물거렸다.

“이제 받아줄 거야?”

“일단 다른 이야기부터 듣지. 그놈. 너희들이 그 녀석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 이유가 달리 있나?”

“예전에는 몰랐는데, 지금은 알 것 같아.”

“왜지?”

“가짜였으니까. 이름에는 힘이 있고. 그이는 그냥 두려웠던 것 같아. 함부로 입에 담다 진짜가 재림하지 않을까, 하고. 내 생각에는.”

“잠깐. 그럼 설마 그놈 이름이.”

“맞아. 레이슈노프. 당신의 진짜 이름.”

어이가 없어 말문이 막혔다.

그러니까 그놈이 이름을 사칭하며 제 행세를 하고 돌아다녔다는 뜻이 아니던가.

“한심하기는. 뭐, 이전에 진작 알아봤지만.”

화를 낼 일은 아니었다.

바보에게 화를 내는 이는 없는 법이었다.

인간 폭탄을 이용한 교단 습격 시도 때부터 알아보기는 했다. 어디 한 군데 모자란 얼간이라고.

그렇지만 심지어 제 이름조차 남의 것을 빌리는 멍청이라고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는데.

빌린 이름으로 한 행동이 대체 무슨 소용이라고.

종교를 세웠지만 신성은 얻지 못했으리라.

시엔은 겨우 두 명의 믿음으로 신성을 틔웠으나, 그 녀석은 대륙에 재림교인지를 퍼뜨렸어도 끝내 불가능할 터였다.

세올과 트리예 또한 마찬가지였다.

단단히 걸린 현혹이 시엔의 말 몇 마디, 어둠 한 번에 풀려버리고 말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시엔의 이름을 빌렸으니, 진짜 앞에서 흔들려 쉽게 깨질 수밖에는.

사칭이란 그러한 것이었다.

진짜 앞에서 어떠한 힘도 없이 녹아내렸다.

“불쾌하다면, 내가 처리할 수 있어. 아직도 내가 저를 사모하는 줄 알 테니까. 그 대신에.”

“됐어.”

시엔이 라이네스의 말을 끊었다.

“하지만.”

“어차피 녀석의 목적 자체는 꽤 기특하긴 하니.”

적의 적은 친구라고 했던가.

녀석 역시 의회의 목적을 방해할 셈이었다.

그게 증오에서인지, 그저 제 목적을 위해서인지는 모르겠지마는. 그러나 그게 뭐 중요한가?

쓸모가 있을 때는 써먹어야지.

나중에 쓸모가 다하고 나서 처리하면 된다.

이름을 사칭한 녀석을 살려둘 생각은 없다.

그러나 시엔에게는 전혀 해롭지 못한 녀석이었다.

남의 이름을 빌렸으니, 결국 오러건 마법이건 그 어떤 미지의 수단이건 간에 시엔에게 닿지 못한다.

“그럼 나는. 당신이 아니면.”

“그만.”

시엔이 낯선 여인의 열렬한 구애를 막았다.

어째 주변에 제정신인 녀석이 없나 싶다.

“일단은 모른 척 만화원으로 돌아가.”

“나중에 데리러 올 거야?”

“일단 의회부터 처리하고. 녀석에 대해, 그리고 의회에 대해 더 알아볼 수 있을까?”

“응. 당신이 원한다면 얼마든지. 연락은. 티란디스로 보내면 될까.”

“의심받지 않는 선에서 알아서 처리해.”

“어차피 의심은 못 해. 그 능력 때문에. 답장만 내가 사서함을 구해 연락할 테니까.”

여인을 현혹하는 능력이 있으니 저를 속일 것이라곤 꿈에도 생각하지 않는 녀석이라고. 라이네스가 덧붙여 설명했다.

시엔이 짝 손뼉을 한 번 쳤다.

“좋아. 그럼 나중 일은 나중에 생각하고. 지금은 피차 받을 빚이 있으니, 그것부터 해결해야지.”

시엔이 뒤이어 물었다.

“그래서, 그 상인 아들놈을 어디다 묻었는데?”

* * *

상인의 아들은 제 아비와 닮기는 했다.

파묻힌 눈코입이며, 풍채가 딱 그랬다.

시엔이 그 꼴을 보고 안심했다.

만약 비쩍 마르고 흉터가 잔뜩 난 녀석이었다면 오히려 곤란했을 테니까.

사랑받은 자식은 부모의 죄 또한 물려받을 자격이 있었다.

부모의 재산으로 부귀와 영화를 누렸다면, 그 죄악 역시 물려받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으니까.

오로지 그렇지 않은 자식들만이 부모의 죄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다.

“정신이 드나?”

“여기는…….”

“손목이 잘렸거든. 워낙에 대충 자르고 또 대충 처리해 놔서 곪았다. 덕분에 더 짧아지긴 했는데.”

소년을 꺼내왔을 때는 이미 몸이 불덩이였다.

손목의 절단면을 보니 대충 톱으로 잘라낸 것이 분명했다.

그리곤 지혈을 한답시고 불로 지져놓은 것이 전부였으니, 상처가 곪아 썩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니 어쩔 수 있나.

팔꿈치 관절 아래의 뼈를 분리해 빼고, 남은 살과 근육을 치우고 혈관을 이어 제대로 봉합했다.

덕분에 팔목까지 남았던 팔이 팔꿈치까지로 짧아졌지만, 그래도 죽는 것보단 나은 일이었다.

“내 팔, 내 팔이……”

소년이 남은 손으로 제 팔꿈치를 더듬었다.

수술 이후에 신성으로 아물게 했으니 뭉툭한 끝이나마 제대로 붙어 통증은 없었다.

“호되게 당했던데. 생각보다 깊게 묻혀서 파내는 데 고생 좀 했다.”

“누구야? 그 마녀들은? 당신도 한패야?”

“생명의 은인에게 못 하는 말이 없군.”

“아…….”

소년이 고개를 푹 숙였다.

어깨가 가늘게 떨렸다.

만화원의 여인들이 손목을 자를 때에 마취 따위를 했을 리도 없다.

칼이 아니라 톱을 썼으니 산 채로 썰리는 경험이 예사 것은 아니었으리라.

“그, 여기는 어디인가요?”

“영주성.”

“아.”

소년이 눈에 띄게 안도한 기색을 보였다.

“그런데, 그 여인들에 대해서는 아나?”

“모르겠어요. 갑자기 나타나서는…….”

“질문이 아니었는데.”

“예?”

“질문이 아니었다고. 몰라서 묻는 게 아냐. 네가 왜 그 꼴을 당했는지 말해주려는 거지.”

“그게 무슨…….”

“네 어미가 아이미 제인, 맞나?”

“어…….”

소년이 대답 대신 눈알만 데굴데굴 굴렸다.

시엔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왜, 네 아비가 비밀로 하라 그러더냐? 내 이미 알아본 것이 있으니 함부로 거짓을 말했다간.”

소년이 시엔의 눈치를 보았다.

늘씬한 체구에 고운 손. 기사는 아닌 것 같고.

상인의 아들이니 물건을 보는 안목은 있었다.

이 장소. 화려하진 않으나 묵묵히 자리 잡은 가구들이 실상 값비싼 명품이라는 것도 알았다.

영주성이라는 말을 들었으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영주성에 있어 앞에 선 청년이었다.

입고 걸친 것 중 단 하나라도 귀하지 않은 것이 없다. 영주성에 계신 도련님인가보다 할 수밖에는.

그리고 귀족 도련님 앞에서 거짓을 말할 정도로 담이 크지는 못했다.

“……예. 맞습니다, 나리.”

“좋아. 일단 네가 왜 그 꼴을 당했는지부터 설명해 주마. 네 어미가 사기를 쳤다. 금화로만 수십만이 넘어가는 금액이다. 이건 알고 있나?”

“몰랐습니다. 하지만, 어머니께선 그럴 분이 아니십니다, 뭔가 오해가 있으신 것이…….”

“자식에게 제가 사기꾼이라 말할 어미가 세상에 어디 있겠냐. 그래서 그 빚쟁이들이 전부 몰려와 영지에서 난리를 피우고 있다.”

“그럴 수가.”

“그리고 널 납치한 여인들 역시 그 빚쟁이들 중 하나다. 사기당한 금액이 사만 닢에 달하더군.”

그러자 소년이 분한 음성으로 버럭 소리쳤다.

“그 마녀들! 그 마녀들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왜 찾는데?”

“그 마녀들이 제 손을, 손을…….”

소년이 몸을 떨었다. 공포와 분노가 섞인 떨림.

“그 여인들은 무죄야.”

“예? 어째서입니까!”

“네 어미는 사기꾼이다. 사기꾼은 일단 손목을 자르고 시작하지. 네 어미가 도망쳐 자취를 감췄으니 대신 대가를 치르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이다.”

“그건. 그럴 수가.”

“거기에 더해, 금액이 금액이다. 전부 배상하지 않으면 목을 베야겠지. 그러니, 처형은 보름 후다.”

소년의 눈이 커졌다. 살이 찐 눈두덩이 사이에서 용케도 저만큼이나 커진다 싶을 정도였다.

시엔이 자리에서 일어나 소년의 어깨를 툭툭 쳐 주었다.

“그러니, 네 어미가 나타나길 기도하고 있으렴.”

* * *

“들으셨지요?”

“이, 고얀, 빌어먹을 것들.”

아르트레스의 영주, 테린이 이를 부득 갈았다.

한참이나 씩씩거리던 테린이 겨우 평정을 찾았다.

“공자가 아니었으면 그대로 당할 뻔 했습니다.”

“마법사들의 공로가 컸죠, 뭐.”

“맞습니다. 복수법에 따라, 가능한 사적 제제의 한도입니다. 여인들은 무죄 방면하도록 하지요.”

테린 역시 분노할 수밖에는 없었다.

아이미 제인이 도시에 터를 튼 상단이라, 아르트레스 가문이 봐준 편의가 한둘이 아니었다. 물론 그만큼의 세를 걷기는 했지만.

그런 상단이 하루아침에 망하고, 일손은 길거리에 나앉으니 새로 상단을 들였다. 알고 보니 둘이 한통속이라 영주를 제대로 능멸한 셈이었다.

“벨가트 메어리를 소환하세요. 보름 내에 죄인을 내어놓지 않으면, 아들의 목을 치겠다고 하시죠.”

“그리하는 것이야 어렵지 않지요. 하나, 영지의 법을 지키면 그만이지만, 공자는 받아야 할 금화가 있지 않겠어요?”

“받아내야지요. 그렇지 않으면, 피로 대가를 치르던가. 티란디스에게 사기를 치면 어찌 되는지 널리 알리는 것인데, 응당 그래야지요.”

“훌륭합니다. 티란디스의 앞날이 참으로 맑군요. 트리예를 맡겨도 안심할 수 있겠습니다.”

“은근슬쩍 그리하시면 곤란한데요.”

“글쎄요. 남여라는 것이.”

테린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건 또 왜? 시엔이 고개를 저었다.

“그러니 영주님께 드릴 부탁이 있습니다만.”

“대충 짐작이 갑니다만. 내 맞춰볼까요? 조만간 영지에서 마법사가 날뛰어도 눈을 감아달라는 부탁이지요?”

말이 잘 통하니 역시 보통 인물은 아니다.

시엔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44. 빚쟁이는 밤에 잠도 못 잔다 [6]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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