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4. 빚쟁이는 밤에 잠도 못 잔다 [5] >
이전에 트리예가 말하기를, 만화원의 꽃들에게도 위와 아래가 있다고 했다.
활동에 성과를 내보인 여인들만이 그놈의 곁에 있을 수 있다 했던가.
흐레이그 나이트는 트리예의 작품이었다.
그 연구가 곧 트리예의 성과가 될 예정이었으니, 정작 만화원에 대한 정보는 거의 가지지 못했다.
이참에 알아볼 기회였다.
시엔이 물었다.
“만화원이 대체 뭐 하는 집단이야?”
“만화원은, 음…….”
라이네스가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여인답지 않은 소탈한 태도였다.
“용병단?”
“용병단?”
“돈을 받고 의뢰를 처리해 주니까…….”
자신 없는 대답이었지만, 설득력은 있었다.
그러나 집단의 성격을 정의해 달라 묻지 않았다.
시엔이 다시 물었다.
“거기에 여인을 홀려서 부리는 이가 하나 있는 모양이던데. 그 목적이 뭐야?”
“세계 정복.”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즉답이었다.
시엔이 황당함에 눈을 깜박거렸다.
세계 정복이라니.
그 강대한 제국조차도 대륙의 절반에 그쳤다.
그나마도 역사에 기록된 가장 큰 단일 국가였으니 기록으로만 남은 무수한 강국도 통일이라는 업적에 한 번도 가까워지지 못했다.
왕국까지 갈 필요도 없다.
영지가 넓으면 그 땅의 영주조차도 온전한 지배력을 발휘하기 힘들었다.
세금을 피해 사는 자그마한 촌락이 대체 몇 개가 있을까.
티란디스의 영지조차 숲속에 숨어 사는 이가 있을 것이 분명한데.
물론, 정말로 있는지 몰라 확신에 가까운 의심뿐이지만.
하물며 대륙에서야.
라이네스가 시엔의 표정을 읽었다.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는 듯한.
라이네스의 생각에는, 이대로 입을 다물면 멍청한 놈이 허황된 꿈으로 난리를 친다 여기고 말 것이 분명했다.
라이네스는 그러길 원치 않았다.
방해꾼은 한 명이라도 더 있으면 좋을 것 같아서.
“그쪽이 생각하는 그런 건 아니고. 그이는 그렇게 멍청한 놈도 아녔어. 실제로 잘 되어가기도 했고.”
“그래도 한때 따랐다고 편을 드나?”
“편을 드는 게 아니고. 그저 멍청한 놈이 아니라는 거지. 그놈은 세상을 통치하려는 게 아니라, 그 위에 있고자 했어. 신. 신이 되려고.”
시엔이 눈살을 찌푸렸다.
“내가 여태껏 별소리를 다 들어봤지만, 이보다 더 멍청한 소리는 없었던 것 같은데.”
“아냐. 반쯤은 성공했었는걸.”
“반이나 성공했었다고? 어떻게?”
“종교를 하나 세웠었어. 사이비였지만.”
“웠었다. 과거형이네?”
“망했어. 의식의 부작용인지, 아니면 사념. 확실히는 몰라. 아직 사람의 믿음이 어떤 식으로 작용하는지 명확하지 않으니까, 변수가 있었는지.”
어째 짚이는 것이 있다.
시엔이 되물었다.
“그래서 교단을 공격했나?”
“응. 교단에 이유 없는 큰 재앙이 생기면 믿음이 흔들릴 테니까.”
“아무리 흔들어봐야 교단이 함께한 역사가 수천 년이다. 고작 그 정도로 흔들릴 것 같아?”
“작은 균열 몇 개면 되니까. 금이 간 바위처럼.”
멀쩡한 바위를 깨부수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이미 금이 간 바위는 쉽게 갈라진다.
금이 간 바위라는 관용구는 그러한 뜻이었다.
그러나 교단이 쌓아 올린 신앙이 높은 산과 같다.
세상에 천신께서 존재하심을 모르는 이는 없었으니까. 물론 부정하는 이는 간혹 존재했지마는.
“바위산에 생채기 몇 개 냈다고 둘로 갈라지나?”
“하지만, 산을 쪼갤 만큼의 커다란 정과 망치만 있다면 충분히 가능하니까.”
“어떻게?”
“그걸 설명하려면 먼저, 잊힌 역사에 대해 알아야 하는데.”
“그 역사. 대충 알 것 같은데.”
시엔이 웃으며 대꾸했다.
라이네스가 놀란 표정을 짓다가 트리예를 바라보곤 납득했다는 양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해가 쉽겠네. 세상에 무너진 제국의 잔당이 존재하고, 일종의 비밀 결사인데, 곧 머지않아 큰 혼란이 일어날 거야.”
“제국 의회 말인가?”
라이네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문득 생각이 났다는 듯 물어왔다.
“잠깐, 트리예는 거기까진 몰랐을 텐데.”
“개인적으로 얽힌 일이 있다. 그나저나, 큰 혼란이라고? 놈들의 계획을 아나?”
“자세한 건 몰라. 의회가 뭔가 큰일을 꾸미고 있는데, 그게 멀지 않았다는 것만.”
“그래서? 그게 신이 되는 것과 무슨 상관이야?”
“혼란이 극에 달하면, 그때 나타나 바른 역사를 알리며 세상을 구하려는 거야. 천 년 전에 제국을 단죄한 천신의 대리자, 천 년 후에 재림해 죄악을 심판하다. 그리고 그가 신이 되는 거지. 살아 있는 천신의 대리자.”
이건 또 무슨 개소리람.
시엔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귀가 영 맞지 않았으니까.
일단 시엔이 하나씩 묻기로 했다.
“신의 대리자가 대체 무슨 개소리야? 딱 누렁이가 하는 소리인데.”
“누렁이? 개소리라고? 어쨌든, 그게 재림교야. 그놈이 세운 종교인데, 천 년 전 악의 주구인 제국을 심판하기 위해 천신께서 내리신 대리자가 있었다, 뭐 그런 교리였거든.”
“천 년 후에 재림한다는 말은?”
“의회라는 집단이 천 년을 기다리기로 했다나 봐. 천 년 동안 기다려도 흑마법사가 재림하지 않으면, 영영 사라진 것이니 그때 다시 제국을 부활시킨다면서.”
“하. 그래서 지금인가.”
“응?”
“아냐. 그냥 혼잣말.”
가장 비통한 이로 되살아나 남은 것을 불태우겠다 그렇게 언어로 자신을 묶었다.
그러니 시엔의 몸으로 재림한 일이, 그리고 그 긴 시간을 뛰어넘은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었을지도.
제국의 잔당이 숨을 죽여 숨어버리면 찾아낼 방도가 없었을 테니까.
제국이 다시 깃발을 들어 올리는 때에 그 복수를 마저 이룰 수 있도록.
“그래서, 그놈이 흑마법사의 재림인 척, 사기를 치시겠다?”
“사기까지는 아닌데. 어쨌거나 그놈이 그 흑마법사의 후손이기는 하니까. 성유해의 힘을 빌리는 거니 과거 흑마법사의 재림이라고 해도 되겠고.”
“뭐?”
시엔의 표정이 기괴하게 일그러졌다. 대개 시엔을 상대하는 이가 짓던 그 멍청한 표정이었다.
그러나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워낙에 충격적인 말이어야지.
시엔의 머릿속이 물이 끓듯 버글거렸다.
후손이라니?
과거와 현재를 통틀어 여인과는 연이 없었다.
정확히는 그러한 자격이 없다고 여겼다.
왕국을 지키지 못한 왕자.
귀한 피로 태어나 그 권리를 여실히 누리고는 의무의 한 조각조차 이행하지 못한 천치, 바보, 얼간이.
신비주의자의 수련이 다 무엇이랴.
제국의 동향을 미리 알았더라면, 그 수많은 대군이 움직이는데 알아차리지 못했다. 애초에 알아차릴 수도 없었다. 왕국에 없었으니까.
왕국에만 있었더라면.
왕국의 존속을 울며불며 매달리며 자비를 간언할 수 있지 않았을까.
목줄을 차고 짐승처럼 다뤄지는 한이 있더라도.
그러나 그조차 하지 못했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한심하기 짝이 없는 놈이다. 세상 어떤 여인이 이런 놈을 좋다고 달라붙겠는가.
눈이 먼 맹인이 아니고서야, 아니, 맹인이더라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사람의 가치를 다하지 못했으니 뭐.
하지만, 왕국의 생존자가 있었을까?
혹여 왕실의 생존자가 있었더라면, 그렇게 혈통이 이어져 후손이 남았더라면.
“내 후손이라고? 그놈이?”
되묻는 시엔의 목소리가 떨렸다.
라이네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당신의?”
“나의.”
“갑자기 무슨 소리야? 왜 당신이…….”
시엔은 굳이 말로 설명하지 않았다.
한마디 말보다는 한 번의 경험을.
어둠이 풀려나왔다.
진득하니 끈적이는 검정. 새까만 것이나 맹독처럼 선연하니 세상 어떤 색보다 화려한 어둠이었다.
무저갱처럼 심연의 저편을 드리우는 극흑.
상상할 수 없을 만치 강대한 마도사가 속을 드러내는 정신세계의 확장이었다.
평범한 이라면 눈치챌 틈도 없이 휘말릴 것이오, 동일한 어둠을 다루는 흑마법사라면 감히 저항하지 못해 빨려 들어갈 것이다.
라이네스는 땅지기다.
이를 악물고 버텨 그 어둠에 저항할 수도 있었다.
비록 거미줄에 걸린 나방이 하는 양으로 결국 묶여버리고 말 헛된 몸부림일지라도 잠시간은.
그러나 라이네스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익숙한 어둠이 닥쳐들자 그녀는 기꺼이 그 품에 뛰어들었다. 온전히 빗장이 해제된 정신이 시엔의 심상 세계에 몸을 던졌다.
“나는…… 아니, 뭐야, 왜 이래?”
근엄하게 말을 꺼내려던 시엔이 기겁하며 심상을 닫았다.
정신 세계란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었다.
시엔이 높은 경지로 단숨에 심상을 풀어 제압하는 방식을 쓰기는 했지만, 본래 타인의 것을 제 안에 온전히 가둘 수도 없었다.
그저 잠깐의 심상 공유였다.
물론 마법사가 상대를 제 정신 세계로 끌어들이고 나면, 찰나에 불과하더라도 세상 가장 끔찍한 경험 정도는 심어줄 수 있겠지만.
그러나 라이네스가 스스로 뛰어든 일은 달랐다.
정신 세계를 물주머니에 비유하자면, 개인이라는 주머니 안에 정신이라는 물을 채운 것이었다.
시엔이 물주머니의 입구를 벌려 작은 물주머니를 안에 품었다. 그랬더니, 갑자기 작은 것이 제 마개를 열기 시작했다.
참신한 자살 방법이었다.
둘이 가진 세계의 밀도, 물주머니의 압력 차이가 현격하니, 곧장 내용물이 새어 다시는 돌이킬 수 없을 테니까.
그리고 나면?
물과 기름처럼 다른 내용물이라 섞이지도 않고, 다시 주머니로 돌아갈 수 없으니 그저 그렇게 안에 머무를 수밖에는.
아예 개인의 틀이 사라져 버리고 나면, 그저 존재만 남아 영원히 타인의 심상 속을 떠돌아야 했다.
그리고 나면?
어떻게 되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검은 통 안에 넣고 밀봉한 물고기와 같았다.
넣었으니 그 안에 있음을 아나, 이후로 아예 관측 불가능한 존재만이 남았다.
물고기 본인만이 알 것이나, 바깥에 경험을 전할 수단은 없었으므로.
세올처럼 수다를 떨며 의지를 전할 수도 없다.
세올은 리치의 라이프베슬 자체가 유해에 깃들어 흡수된 것이라 단단한 유리구슬 안에 든 셈이며, 그렇기에 안으로도 밖으로도 드나들 수 있었으니.
“갑자기 무슨 짓이야?”
질색을 하는 시엔과는 달리, 라이네스가 아쉽다는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시엔 티란디스. 흐레이그 공방전에서. 맞지?”
“남의 뼈로 장난질 치던 녀석들 중 하나였나?”
“맞구나. 알리아가 무사하다는 것도. 그렇겠네.”
라이네스의 눈빛이 친근하기 그지없다.
목석같던 무표정이 갑자기 사근사근하니 녹았다.
마치 연인이라도 바라보듯 그윽한 표정에, 시엔이 더욱 혼란스러워졌다.
뭐야, 왜 이래? 거두는 게 늦어서 조금 섞였나?
생판 모르는 타인이 이러하니 꽤 소름이 돋는다.
시엔이 손을 내저었다.
“됐고. 내 후손이라는 게, 무슨 뜻이야?”
“말 그대로 당신 후손인데. 당신의 자식이 자라 결혼하고, 또 아이를 낳고, 또 그렇게 자라서.”
“아니. 이건 또 뭔.”
내 자식? 시엔이 이마를 주물거렸다. 무슨 자식?
“천 년이 지나면 없던 자식도 생기나?”
“왜, 그, 당신과 황녀 사이에서.”
“황녀? 무슨? 아니다. 자세히 좀 말해봐.”
라이네스가 이야기를 풀었다.
과거 흑마법사가 제국군과의 전투로 크게 다쳤다.
치료는 엄두도 낼 수 없는 환경.
상처는 곪아 썩어가고, 목숨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깨달은 흑마법사는 황도로 향했다.
어차피 죽을 목숨, 황궁을 공격해 황제와 그 핏줄을 아예 끝장내기 위해서였다.
흑마법사는 어찌어찌 황도로 숨어드는 데엔 성공하였으나, 부상이 심해 쓰러져 정신을 잃었다고.
“잠깐. 이야기가 좀 이상한데.”
“어디가?”
“상식적으로 생각을 해보면, 당시 제국에서 가장 엄중한 태세를 갖춘 요새가 황도인데, 부상을 입고 그리로 향했다고?”
“최후의 일격 같은 느낌으로…….”
“무슨 최후의 일격 같은 소리. 그리고, 어찌어찌 숨어들다니. 게다가 부상을 입은 몸으로 그게 가능할 것 같았으면, 제일 먼저 황궁부터 깨고 시작했겠지.”
“생략하고 넘어갔지만, 여기에는 과거 흑마법사가 구해준 남매가 있었는데, 그 할애비가 하수도지기로 있었기에……”
“흑마법사가 제국인을 구했다고?”
“그는 천신의 대리자고, 제국의 악을 멸하는 것이 그 소명이고 선량한 이를 마수에서 구해야 하……”
“그냥 생략하지. 다음은?”
개소리도 적당히 해야 들어 줄만 했다.
시엔이 빨리 넘겼다.
라이네스의 이야기가 계속되었다.
그때 지나던 여인이 그를 발견하고 거두어 간병해 돌보았다. 남녀가 한 데 머무르며 오래 붙었으니 당연히 애정이 싹틀 수밖에.
특히 전쟁으로 피폐해진 세상, 불쌍한 이를 헌신적으로 살피는 그 모습에 흑마법사 역시 자연스레 마음을 뺏기고 말았다.
그러나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사실, 그녀는 제국의 황녀였다.
전쟁으로 피폐해진 황민을 돌보기 위해 몰래 시찰을 나온……
“무슨 황녀씩이나 되서? 게다가 누굴 돌봐?”
“그만큼 심성이 고운 여인이었다는 거지.”
“민심을 잡고 싶었으면 대놓고 나와 활동했겠지. 몰래 나오는 이유는 또 뭔데?”
“황제와 귀족들이 사악하기 짝이 없으니, 황민의 고통와 눈물을 무시했거든.”
“아니, 그게 말이 되는. 아니다. 계속해 봐.”
흑마법사는 그녀를 통해 희망을 본다.
세상 가장 높은 곳에 가장 선량한 이가 있음을.
흑마법사는 오랜 번민 끝에 새로운 삶을 살기로 마음을 먹었다. 흑마법사가 아닌, 황녀의 연인으로 사는 그러한 삶.
그녀를 도와 황위에 올리고, 그로써 가장 선량한 이가 가장 높은 곳에. 그리하여 대륙의 평화가 올 것이라 믿었기에…….
시엔이 입을 꾹 다물었다.
무슨 개소린가 싶은데, 아예 다른 사람 이야기라 들으니 나름 재미도 있었던 탓이었다.
무뚝뚝하니 사내 같은 말투를 가진 라이네스지만, 의외로 이야기에 소질이 있어 사람의 흥미를 끄는 맛이 있었으니까.
“……그러나 그 평화는 오래가지 못했어.”
흑마법사의 정체가 탄로 나는 이야기가 흥미진진하게 펼쳐졌다.
황녀를 사모하던 제국의 귀족.
또 그를 사모하던 시녀.
또 그녀를 사모하던 하인.
그리고 시녀의 치매 걸린 노모.
황녀의 친구지만, 입만 싼 푼수데기 연인 한 쌍.
정체를 감춘 흑마법사를 사모한 또 다른 여인.
이 질투와 질투와 질투로 얼룩진 음모와 운명의 장난 같은 우연들, 그리고 황녀와 흑마법사의 허술하고 순진한 대처들이 답답하게 쌓였다.
결국 흑마법사의 정체가 밝혀지고, 그 둘은 사랑의 도피를 하게 되는데…….
라이네스가 목이 마른지 물을 찾았다.
시엔이 물을 건네며 재촉했다.
“그래서?”
황녀는 친구 관리를 좀 더 엄격히 해야 했다.
아니면 애초에 그런 연놈들을 사귀지 말던가.
결정적인 말실수.
그리고 하필이면 그때 자리를 비운 흑마법사.
황녀는 납치되고, 흑마법사는 그녀를 구하기 위해 홀로 황궁으로 향했다.
그리고 종막.
황제는 흑마법사와 황녀를 모두 죽일 계획이었다.
그러나 막판에 개심한 연적들, 제국의 귀족과 또 다른 여인이 힘을 모았다.
그들의 도움으로 처형 직전 풀려났으나, 그래도 너무 늦었다. 이미 제국의 모든 군대가 포위하여 도망칠 수 없는 상황.
그리고 흑마법사는 스스로를 희생해 황녀의 도주를 성공시켰다.
그리고 시간은 지나.
흐드러지게 핀 코스모스 꽃밭에서, 배가 확연히 부른 황녀가 서서 아련히 저 먼 곳을 바라본다…….
결국 이야기를 다 듣고만 시엔이 감상을 통했다.
“이 무슨 막장스러운.”
“물론, 직접 겪은 입장에서는 많이 와전된 감이 없지 않아 있겠지만.”
“와전은 무슨. 아예 소설을 쓰셨네.”
시엔이 키득거리며 대답했다.
“그래서, 그놈이 내 후손을 자처한다고?”
“어, 아닌가? 하지만 성유해를 가지고 있고.”
“골동품이야 어디서 챙길 수도 있고.”
“음. 그럼 전부 지어낸 이야기였나?”
“애초에 제국인이라면 단 한 놈도 살려둔 역사가 없다. 황녀 같은 게 눈앞에 얼쩡거리면 불태우거나 산 채로 마수 밥으로 던져줬겠지.”
재미있는 이야기였지만 그뿐이었다.
그나마 재미라도 있으니 들었을 뿐이고.
“가장 중요한 때에 망쳐 버리려고 그놈 옆에 붙어 있다고 했던가.”
“그랬는데 음. 이젠 상관없겠다 싶기도 하고.”
“왜?”
“당신을 따라가고 싶어. 안 될까?”
시엔이 즉답했다.
“안 돼.”
< 44. 빚쟁이는 밤에 잠도 못 잔다 [5]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