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작가의 망령재림-238화 (234/268)

< 44. 빚쟁이는 밤에 잠도 못 잔다 [4] >

반면, 트리예의 입꼬리는 삐뚜름히 비틀어졌다.

턱을 치들고 내려다보는 눈동자, 명백한 비웃음이 담긴 입 모양.

아래로 두고 얕잡아본다는 표현이 그야말로 정확한 것이었다.

“너, 왜 여기에 있어?”

“그건 내가 할 말이지. 남의 집에 몰래 기어들어 와선, 집주인에게 할 말이야? 좀도둑이나 할 소린데. 어, 집주인님? 왜 여기에 계시나요.”

트리예가 뭉개진 목소리로 얼간이 흉내를 냈다.

얄밉다. 울컥한 뤼니헤가 소리를 빽 질렀다.

“그걸 말하는 게 아니잖아!”

“그럼?”

“여기에 왜 있냐고!”

“내 집이니까.”

지난 십 년 가까이 신경도 안 쓰다가 오늘에서야 겨우 귀가한 이가 할 말은 아니었다.

그러나 트리예는 당당했다.

뤼니헤가 되려 말문이 탁 막혔다.

트리예 아르트레스.

그리고 여기는 아르트레스의 영주성이었다.

그러니까 트리예의 본가가 맞았다.

뤼니헤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어느 날 실종된 년.

수작 잘못 부리다가 사람 잘못 만나 죽었거니 했던 녀석이 아무렇지도 않게 나타났다.

왜 여기에 있느냐. 그걸 묻는 말이 아니던가.

그걸 집에 있지 어디에 있느냐고 뭉개버리면 정작 당하는 입장에선 속이 터질 수밖에는.

“트리, 아는 이들이니? 혹시 친구들이야?”

“아니, 내가 끕 떨어지게 저런 것들이랑.”

듣고 있던 마법사 여인들이 울컥했다.

그러나 어쩌랴. 영주 앞에서 영주의 혈육을 들이받을 수도 없는 노릇이니.

게다가 영주의 눈빛을 보라.

그리 근엄하게 굴더니만, 지금은 아주 눈에서 꿀이 뚝뚝 떨어지다 못해, 아예 단지를 엎은 양 쏟아지고 있었으니.

“어쩌다 저런 걸 안에 들였는데?”

“메어리 상단주 자제 납치 혐의자들이야.”

“근데 감옥에 안 놔두고?”

“혐의점이 옅어서 일단은 객실에 구금하려고.”

“객실은 무슨. 그냥 감옥에 둬. 뭉쳐놓으면 무슨 짓 할지 모르니까 따로따로 넣어두고.”

트리예가 미소를 드러내며 여인들을 훑어보았다.

뤼니헤가 급히 손을 내저었으나, 이미 늦었다.

“야, 너, 잠깐.”

“오빠, 감옥 제일 안쪽에 있잖아. 거기는 아직도 그대로야? 그 벌레들 잔뜩 끓는.”

“거기? 요즘은 더 심해.”

설마. 뤼니헤의 표정이 핼쑥해졌다.

트리예가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그럼 저건 거기다 갖다 놔.”

그러자 테린이 곧장 눈짓을 보냈다.

누가 영주인지 헷갈릴 지경이었다.

기사와 병사들이 곧장 여인들에게 다가갔다.

뤼니헤가 질색했다.

“야, 잠깐만. 나 벌레는 진짜 질색이거든?”

“알아.”

“야야, 농담하자는 게 아니라.”

“애도 아니고, 언제까지 벌레 따위에 벌벌 떨어? 이참에 좀 익숙해지면 되겠네.”

“아, 농담 아니라, 나 진짜 벌레는 아닌 거 알지? 응? 잠깐, 이것 좀 놓고, 야, 트리예! 진짜 이딴 식으로 나온다 이거지? 나 뤼니헤야!”

결국 병사들에게 이끌려 질질 끌려가고 만다.

트리예가 문득 생각이 났다는 듯 다시 말했다.

“아. 개중에 멀대는 말고. 쟤는 귀빈실 줘도 돼.”

* * *

트리예의 인간 관계에 대해 잘 알지는 못했다.

그러나, 모르긴 몰라도 매우 협소하리란 정도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지금도 다른 시녀들과는 거의 교류가 없다시피 했으니까.

그러니 트리예가 아는 마법사, 거기에 여인들이 아니던가. 그 정체야 뻔한 것이었다.

“만화원의 마법사들이야?”

“예, 시엔 님. 방화광이 뤼니헤, 천문관이 슈슈, 물길잡이가 나지리라고 하고, 땅지기가 라이네스.”

만화원의 마법사들이 기운을 숨기지 않았다.

따로 숨기지 않은 마법사를 상대로 시엔의 경지쯤 되면, 그냥 척 보고 쟤는 방화광이네, 하고 알아볼 정도는 된다.

멀대라 불린 키 큰 여인이 땅지기 라이네스였다.

키가 크기는 정말로 컸다.

시엔이 과거와 현재를 통틀어 본 여인들 중에서도 제일이다 싶었으니까. 위로 높은데 좌우로는 좁아 더더욱 커 보이는 체형이었다.

“라이네스라. 꽤 친했던 모양이지?”

“그럴 리가요.”

“그런데 왜?”

셋은 감옥에 하나는 귀빈실이니 그 대접이 확연히 차이가 난다.

아무리 트리예라도 모두와 냉랭하진 않았을 터, 그래서 친한 사이겠거니 했건마는.

“사내에 눈이 멀어서 뵈는 게 없는 것들이랍니다. 혹여 소란이 나도 하나쯤은 멀리 떨어뜨려 놓으면 행동이 많이 제약되지 않겠어요?”

“그게 다야?”

“지하에 땅지기를 두기도 그러하지 않겠어요?”

결국 달리 친분이 있어서는 아니라는 뜻이었다.

어쨌거나, 의도는 아니지만 만화원과 만났다.

안 그래도 손을 봐야 할 것들이 제 발로 기어들었으니 잘된 일이 아니던가.

그런 이유로 시엔이 귀빈실을 찾았다.

어느 귀족저라도 귀빈실이란 본디 호화롭기 그지없는 장소다. 가풍이 청빈하여 검약한 생활을 하는 가문이라도 귀빈실만큼은 정성과 금화를 다해 꾸몄다.

누가 방문할지 모르는 일이니, 격이 높은 손님은 그 응대에도 가문의 명예가 걸린 일이었으니까.

노크도 없이 트리예가 귀빈실의 문을 열어젖혔다.

제집이라고 아주 거리낌이 없는 태도였다.

그 서슬에, 라이네스가 깜짝 놀라 몸을 일으켰다.

그런데 왜 소파 아래에서 솟아나?

시엔이 잠깐 고민했다.

그야말로 솟아난다는 표현이 맞기는 했다. 키가 크니 몸을 일으키는 것만으로도 그런 느낌이었다.

그 모습에 트리예가 인상을 찌푸렸다.

“뭐야, 왜 바닥에 누워있는데?”

“너무 고급스럽잖아. 내가 써도 되나 싶어서.”

“아니, 그렇다고 바닥에 누워? 거지야?”

라이네스가 뒷머리를 긁적였다.

“카펫도 고급이라 푹신해서 편하던데.”

“거기는 발깔개거든? 소파에 앉으면 발은 어디에 둘 것 같은데?”

“그래도 다른 애들은 감옥에 있으니까.”

“이 답답이가……!”

트리예가 가슴을 쳤다.

시엔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친한 사이는 아니라더니만.

“연락이 끊겨서, 죽은 줄 알았어. 다들 죽었다고 하길래.”

“죽었으면 했던 거겠지. 경쟁자 하나 줄었다면서 좋아했을 꼴이 눈에 선한데.”

“그렇지는 않아.”

“적어도 뤼니헤 걔는 그랬겠지.”

“오.”

라이네스가 놀랍다는 듯 감탄사를 흘렸다.

“오는 무슨 오야?”

“딱 맞추길래. 그런데, 가문에 돌아간 거야? 여기 있을 줄은 아무도 몰랐는데.”

“잠깐 들른 참인데 너네도 참 재수가 없지.”

“그런 건가. 다시 돌아올 생각은 없지?”

“내가 미치지 않고서야.”

라이네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잠시 머뭇거리다 다시 입을 열었다.

“너 혹시 말야. 그 사람한테 뭔가 특이한 임무를 받았다거나.”

“그놈 이야기는 꺼내지도 마.”

“아. 그런 건가.”

“뭐가 그런 건데?”

“너도 알게 된 거지? 그 사람이 뭔가 나쁜 짓을, 잘은 모르겠지만 당한 것 같아. 꽃뱀? 아니, 사내니까 제비? 미남계? 여튼 뭐 그런 비슷한.”

시엔과 트리예가 서로를 돌아보았다.

시엔이 고개를 끄덕이자, 트리예가 재차 재우쳐 묻는다.

“뭐야, 너. 그걸 알고 있었다고? 알면서도 지금 저것들이랑 어울리고 있는 거야? 정신이 나갔구나, 아주.”

“얼마 안 됐어. 작년에 페벨룬에서, 마법을 쓰다 부작용이 있었는데. 그때 알았거든.”

“자세히 말해봐.”

“성유해로 마법을 썼어. 주 제어를 팔란이 맡아서 두개골로 심상 연결에 성공했거든. 그러다가 사념을 잘못 건드린 것 같아.”

“사념?”

“천 년 전의 흑마법사 말야. 아무래도 두개골이다 보니, 사념이 남아 있었던 것 같아. 우리 모두 그의 정신세계에 딸려 들어갔는데.”

“그래서?”

“죽어도 죽지 않는 곳이었어. 온갖 마물에게 산 채로 뜯어먹히는데, 내 몸이 수천, 수만 조각으로 나뉘어 씹히고 녹아나는데, 고통만은 생생히 전해져서. 그 감각은 정말이지…….”

라이네스가 몸을 떨었다.

석연찮은 태도였다. 공포와는 다른, 어떤 기이한.

“라이네스?”

“아. 응. 어쨌든 그런 경험이었어. 팔란은 아직도 잠을 못 자. 밤마다 비명을 지르며 잠에서 깨는데, 땀을 얼마나 흘리는지 물에 빠진 사람 같더라.”

“그래서 팔란 대신 슈슈 그 멍청이가 왔나 보네.”

“거기에 알리아는, 알리아는 스스로 몸을 던졌어. 버티지 못했던 것 같아. 알잖아, 알리아는 원래 좀,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었으니까.”

“걔는. 그…….”

트리예가 말을 하다 눈빛을 보내왔다.

시엔이 허락의 뜻을 내비쳤다.

“알리아는 무사해.”

“어? 정말?”

라이네스가 사람 좋은 미소를 머금었다.

“그럼 다행이다.”

“머리에 충격이 있었는지 기억을 잊기는 했지만, 거기에 유아퇴행 증상이 심해서 지금은 어린애나 다름없는 상태야.”

“그럼 예전하고 다를 것도 없잖아.”

“뭐. 그렇기는 하지.”

그러다 문득, 라이네스가 되물었다.

“그런데, 알리아 소식은 어떻게 알았어?”

“뭐. 어찌어찌.”

“그런가. 무사하면 됐어.”

의외로 별 반문 없이 넘어가고 만다.

궁금하지 않다기보다는, 말하고 싶지 않으면 됐다는 그런 반응이었다.

이 키 큰 마법사는 그런 성격인 모양이었다.

“그래서, 그놈의 수작질에서 벗어나고서도 계속 만화원의 머저리들하고 붙어 있는 이유가 뭐야?”

“그냥. 뭐. 옆에 있다가 방해하면 좋겠다 싶어서.”

트리예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방해라고? 네가? 지금 옆에 붙어서 복수하려고 그러고 있다는 말이야?”

“복수까지는 아니고. 그냥. 가장 중요한 때, 가장 고대하던 순간에 내가 망쳐버리면, 표정이 어떨까 궁금해서.”

“하. 세상에.”

트리예는 정말로 놀랐다는 반응이었다.

“그 멍청이가 이제 좀 사람이 됐네?”

만화원의 여인들이란 기본적으로 앙숙이었다.

서로 물고 뜯으며 끌어내리지 못해 안달이었다.

사내는 하나인데 여인이 여럿 붙었으니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그러나 라이네스는 개중에도 모두와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모두와 친하지는 않더라도 최소한 적은 없는 사이였으니까.

그 말은 반대로, 여인들 중 그 누구도 라이네스를 경쟁자로 여기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했다.

만화원의 주인은 키가 작고 또 그에 민감했다.

라이네스가 그보다 머리 하나가 더 크고, 살결이 까무잡잡하니 그의 취향과도 거리가 멀었다.

거기에 사람이 담백하니 애교를 부리는 성격과도 거리가 멀며, 누군가에게 무얼 요구하는 일 자체를 어려워했다.

그래서 라이네스가 한 선택이란 묵묵히 제 할 일을 다 하는 것뿐이었다.

궂은일 별 성과 없는 임무를 도맡아 하고, 다른 여인들의 싸움을 중재하고 또 챙겨주고.

사실상 거의 하녀나 다름없는 취급이었다.

본인은 그게 또 좋다고, 그러다 보면 알아주겠지 하고 웃을 뿐이었다.

트리예가 보기에는 바보 멍청이 얼간이일 뿐.

그런 애가 지금 복수를 입에 담았으니.

“너, 말만 그렇게 하고 또 바보처럼…….”

“아냐. 이제는 그런 거 안 해. 참 웃겨. 이젠 다들 친한 척도 안 해. 치워주고 대신하고 업어줘 봐야 그간 뭐 했나 싶기도 하고.”

“너, 진짜 사람 됐구나?”

라이네스가 멋쩍고 쑥스러운 웃음을 머금었다.

“좋아. 그래서, 여긴 왜 왔어?”

“돈 받으러. 어음이 있어. 제인 상단 꺼.”

“어음? 만화원은 어음 안 받잖아. 현물로만.”

“그랬었는데, 페벨룬 내전에 참가했다가 망하는 바람에. 마법에 실패해서 같은 편을 날려버렸다고 소문이 나서 의뢰가 뚝 끊겼거든. 그래서 아무거나 일단 받다 보니까.”

“거야 내 알 바 아니지. 돈 받으러 왔다고? 하는 거 보니 받진 못한 것 같고. 그래서 상인 아들내미 잡아다 손목 잘라 보냈다?”

“응.”

라이네스가 순순히 대답했다.

방해하겠다는 말이 허언이 아닌 모양이었다.

“그래서, 그 아들내미는 지금 어디에 있는데?”

“구하려고?”

“우리도 받을 돈이 좀 있는데, 제 혈육을 가져다주면 아예 외면하진 못하겠지.”

“그럼 뭐. 내가 빼돌려 놨으니까 데려가.”

“빼돌렸다고?”

“뤼니헤가 태우려고 해서. 그러면 재 날리고 마력 반응 나오면 또 조사 나와서 귀찮아지니 묻어버리는 게 낫지 않냐고.”

그래서 지금 땅 아래에 살아 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해도 돈 받기는 좀 어려울걸.”

“왜?”

“그 상인, 작정하고 사기꾼이던데. 원래 일가를 싹 잡아다가, 한 토막씩 보내려고 했는데. 그런데 정작 털고 보니 애 하나뿐이더라고.”

그래서 너희 엄마는 어디에 있니.

협박하고 구슬려 그 위치를 알아내 잡으려다 알게 된 정보가 가관이었다.

“아이미 제인, 애 엄마가 제인 상단주였어.”

“제인 상단? 망했다며? 아니, 애초에 그럴 수가 있어? 붙어먹은 연놈이 부부인데, 하나가 망하고 한 놈이 모르는 척 남은 재산을 삼켰다고?”

“우리도 어이가 없어서 알아보니까, 메어리 상단주는 아내와 사별했다고 알려져 있더라고. 그러니 애 엄마에 대해선 부부와 아이만 알고 있던 거지.”

* * *

만화원의 마법사들은 이미 손아귀에 들어왔다.

제아무리 눈에 뵈는 게 없더라도 영주성에서 감히 소란을 피우기는 어려울 터였다.

그보다는 상단주의 일이 더 거슬렸다.

“애초부터 공범이었던 거네.”

돈을 빌리고 잠적한다.

흔하디흔한 사기 수법이었다.

제인 상단이 한 일을 요약하면 이랬다.

물론 수십만 닢 단위의 사기였으니 대륙사에 또 있겠나 싶을 정도가 아니던가.

그러나 그 배짱은 인정해 줄 만했다.

상단주란 직책이 신원이 확실하니 그리 챙긴 재화가 남은 삶을 보장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일을 벌였다. 마땅한 이유가 있으리라.

삶을 보장할 방법이 있거나, 아니면 삶을 보장할 필요가 없을 수도 있고.

이번 경우에는 메어리 상단이 그 방법이었으리라.

이미 수십만의 현물을 챙기고선, 고작 남은 부스러기 조금 챙기겠다고 위험을 감수할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어쩌면 제인 상단주는 이미 죽고, 그 재산을 챙기려는 벨가트 메어리의 수작일 수도 있고.

아니면 이후에 상단을 팔고 아주 먼 곳으로 떠나 아내의 새 신분을 만들어 살 계획일지도 몰랐다.

시엔이 키득키득 웃음을 터뜨렸다.

어느 쪽이든 상관없었다.

인질이 있으니 물어보면 입을 열 테고.

그로 인해 어떤 참사가 벌어지더라도 죄를 뒤집어쓸 녀석들이 또 준비된 참이었으니.

< 44. 빚쟁이는 밤에 잠도 못 잔다 [4]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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