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작가의 망령재림-237화 (233/268)

< 44. 빚쟁이는 밤에 잠도 못 잔다 [3] >

“제인 상단이라. 갑자기 망해버리는 바람에 이쪽에서도 꽤 골치가 아팠기는 했습니다만.”

“어찌 망한 것인지 알 수 있을까요?”

“재무관이 남은 장부를 살펴보았는데, 그나마 안 망하고 버틴 것이 용하다고 말하더군요. 그냥 엉망이었습니다.”

어음 남발과 과장된 거래 규모. 그로 인한 신용의 상승. 그리고 그를 악용해 또 어음을 발행하고…….

“그럼 제인 상단의 주인은 어찌 되었죠?”

“밤중에 도망쳤다 하더군요. 일단 수배를 내렸습니다만. 추적이 되지 않으니 용의주도하게 계획한 일이 아닐까 하고.”

“제대로 준비한 야반도주라는 거네요.”

“피해액이 이십오만 닢이라 하셨지요? 그렇다면 일단은 메어리 상단에 사람을 보내겠습니다.”

“메어리 상단이요?”

“일전에 상인이 찾아와 당돌하게도 제인 상단의 남은 재산을 갖고자 한다고 하더군요. 성의가 제법 두둑했으나 되었으니, 기존 일손을 전부 책임지라 했지요.”

영주 입장에선 가장 훌륭한 방안이었다.

상단이 하나 망하면 그에 따라 망하는 영민이 한둘이 아니다. 그에 대해 구제를 남의 손으로 벌인 것이었으니.

“본래는 경매로 금액을 충당해 손실분을 나눠야 했으나, 영주의 일이 일단 영지가 중요하다 보니. 덕분에 공자가 피해를 본 셈이니, 메어리 상단에서 일정 부분 지급하라 하지요.”

“금액이 금액이라 가능할까 모르겠네요.”

“일단 최대한 그쪽에서 변제를 하도록 하고, 그 금액이 많이 모자라게 되면 저희 가문에서도 일정 부분 메워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호의도 이런 호의가 없었다.

시엔이 고개를 숙였다.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뭘요. 우리 트리를 보살펴 주셨는데.”

“보살폈다고 하기는 좀 어폐가 있긴 한데요.”

“아닙니다. 마법을 가르치셨다 듣지 않았습니까.”

“가르친 정도도 아니에요. 트리예가 스스로 연구하다 막히는 곳이나 함께 고민하는 수준인데요.”

“그 정도면 충분히 돌보셨습니다.”

테린이 씁쓰레한 미소를 지었다.

“제 동생이라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트리예는 날 때부터 천재였습니다. 그 아이에게 세상에 어려운 것이 없었습니다. 스승을 붙여주면 반년이 못 가서 싫증을 내고 그만두더군요.”

그리고 나면 스승이란 이가 매달려 사정을 했다.

이대로 가르치면 세상에 큰 이름이 하나 나올 것이다.

최고의 재능을 가졌으니 배움을 멈추면 세상에 크나큰 손해가 나는 일이라고.

회화와 조각 같은 미술부터, 작곡과 수많은 악기들을 포함한 음악에 수학과 의학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대가들을 초청해 어린 트리예를 가르치고, 또 이후에 되려 매달려서 배움을 계속하자 애원하고.

심지어 무예 또한 그랬다.

팔 아프고 다리 아프다며 며칠 만에 때려치우기는 했지만, 유서 깊은 무가인 아르트레스였다.

막내딸의 심상치 않은 무재는 진작에 알아보았다.

시엔이 눈을 가늘게 떴다.

갑자기 동생 자랑이라고?

그냥 동생이라 하는 이야기 아닌가?

“세상에 어려운 일이 없는데, 남들은 힘들어하니 트리가 보기에 어땠겠습니까? 어느새 세상 모든 이들을 제 아래로 깔고 얕잡아보기 시작하더군요.”

“그건 이해하겠네요. 혹시 돌봤다는 것이 일신이 아니라 어떤 인성적인 측면에서 하시는 말씀이시라면…….”

“예? 우리 트리의 인성에 뭔가 문제라도?”

“방금 전에는 안하무인으로 남들을 업신여긴다고 하셨는데요.”

“그야 사실이잖습니까. 우리 트리가 너무 잘나서 다른 이들보다 우월하니 그럴 수밖에는요. 거기에 무엇보다 귀엽지 않습니까.”

“예?”

이거 중증이네. 시엔이 속으로 혀를 찼다.

그러거나 말거나, 테린이 말을 이었다.

“사람이 살며 어려운 일이 하나 없는 것이 정상이겠습니까? 성취가 그저 당연한 일이라 보람도 기쁨도 없으니 걱정이 많았습니다. 솔직히 말해 그러한 삶이 삶이라 할 수 있는지 모르겠군요.”

그래서 어린 트리예는 세상에 흥미를 잃었다.

아이가 그렇듯이 울거나 보채기는커녕, 심지어는 놀지도 않고 그저 우두커니 숨만 쉬며 방에 틀어박혔다고.

그에 오라비들이 어떻게든 하고자 방면으로 노력했으나 돌아온 것은 앙증맞고 귀여운 욕설뿐.

저리 꺼지라던가, 병신 같은 저능아들이라던가.

이 대목에서 잠시 시엔이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오래 실종되었으나 사실 어디서 해를 입었으리라 생각하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돌아와서 보고 깜짝 놀라지 않았겠습니까. 표정이 생생하니 못 알아볼 뻔했습니다. 게다가 가장 존경하는? 존경이라. 그 트리가 존경한다니. 세상에.”

시엔이 말을 아꼈다.

꽤 거창한 오해인데.

테린의 말이 사실이라 해도, 트리예가 흑마법에 가진 흥미를 시엔이 이끌어준 것도 아니고.

“공자께서 그러한 부분을 채워주신 것 같아 드리는 감사이지요. 앞으로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테린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

“잠시 딴 길로 샜습니다만, 그래서, 예물은 언제 보내드리면 되겠습니까?”

“예?”

“사람을 시켜 알아보았습니다만, 페벨룬 왕국의 실세이시라지요? 저희 안느셰보다 두 배는 큰 왕국의 권력자이시고. 교단의 명예 성자이시니 인품은 두말할 필요 없겠고. 트리예가 존경한다 말했으니 마법사로서도 수위에 계시겠지요? 가슴 아픈 일이지만, 공자 정도면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군요.”

“인정한다니? 뭘 말이죠?”

“가문의 중대사라 하나…….”

“아니, 잠깐.”

시엔이 손을 들어 테린을 만류했다.

왜 갑자기 이야기가 이리 나와?

더 듣고 있다간 얼떨결에 사단이 나게 생겼다.

시엔이 항변하려 할 때였다.

타이밍 좋게도 문을 두드리는 소리.

“누구야? 중대한 이야기 중이니 나중에.”

“죄송합니다, 영주님. 벨가트라는 이가 급히 뵙기를 청하기에. 무척이나 다급한 용무라 합니다만.”

“벨가트? 벨가트 메어리?”

시엔이 흘러나온 이름에 관심을 가졌다.

메어리.

분명 제인 상단이 망하고 남은 것을 챙겼다던 그 상단이 메어리라는 이름이었지.

테린의 표정이 단숨에 일그러졌다.

“한낱 천한 상인 주제에 감히. 마땅히 갖춰야 할 예의가 있거늘, 이러한 오밤중에 방자하게도 영주를 보자고 한단 말인가? 내 영민을 구제할 기회라 오냐오냐해 줬더니 기어오르려 드는구나.”

방금까지만 해도 팔불출, 여동생을 대상으로 팔불출이라는 표현이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정신 좀 나간 모습이더니.

순식간에 준엄한 위엄을 흘린다.

하는 말을 들어보니, 이쪽도 만만치 않게 더러운 성격임이 틀림없었다.

“그것이, 아들이 납치당했으니 도움을 청한다고.”

“납치?”

“아들의 손목을 전달받았다고 하더군요.”

“아들이라. 그 정도도 감수하지 않았단 말인가? 수백만의 어음을 뿌린 상단이다. 그 잔여 재산을 독식하려면 그 정도는 각오하고 대비했어야지.”

“그러면, 물러가라 할까요?”

“흠.”

테린이 시엔을 돌아보았다.

대화 중 괜찮겠느냐는 허락을 구하는 것이었다.

시엔이 마침 상단주에게 용무가 있었으니,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게다가 대화가 이상하게 흘러가던 참이기도 하고.

“아이고, 나리, 도와주십시오!”

상단주들이란 어찌 전부 비슷비슷한 인상인지.

하는 일이 서류를 들여다보는 일뿐이나, 부유해 삼시 세끼 잘 차려 먹고 거기에 간식을 또 처먹고.

그러다 보면 살이 찌는 것도 당연하겠지만.

“어떻게 된 일이지? 범인으로 짐작 가는 이는 있는가?”

“그년들, 그년들이 틀림없습니다!”

“그년들?”

“예, 마법사 계집들 말입니다!”

벨가트가 지난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난데없이 나타난 여인 마법사들이 쳐들어와 돈을 내놓으라 행패를 부렸다면서.

애먼 이에게 돈을 찾는 일이라고 잘 타일러 돌려보내는데, 정작 돌아온 말은 후회하게 될 거라고.

“그리고 이것이 제게 온 것입니다요.”

테린이 편지를 받아들었다.

피로 쓴 혈서. 내가 후회하게 해 준다고 했지?

테린이 인상을 찌푸렸다.

“잔혹한 이로구나. 난폭한 마법사가 영지에서 날뛰게 둘 수는 없는 노릇이지. 인상착의는?”

“일단 네 놈이었습니다. 하나같이 미인이라 할 것들이라 눈에 잘 띌 겁니다요. 하나는 붉은 머리에, 키는 저와 비슷하고, 개중에 멀대같이 큰 계집이 있어 피부색은 어두우니 특히 눈에 띄는데…….”

벨가트가 네 여인을 묘사했다.

“네 아들은 어디에 있었지?”

“세럼 거리의 푸른 지붕 저택입니다.”

“편지를 전해준 이는?”

“모르겠습니다. 상자째로 담을 넘겨 날아들었으나 던진 이를 찾지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아직 도시에 남아 있을 가능성이 높군. 당장 병사들을 풀어 수색하도록 하지.”

“하이고,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벨가트가 아예 바닥에 엎드려 절을 올렸다.

시엔이 그 꼴을 보며 생각했다.

역시나 성격이 나빠. 트리예의 성깔이 괜히 나온 것은 아니리라. 어쩌면 집안 내력일 수도 있고.

본래 인질이 잡혔다고 하면 이토록 서둘러 움직여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범인과 연락을 유지하면서도 최대한 은밀하게.

포위망을 조금씩 좁혀 인질의 위치부터 확정하고 그 안위부터 살핀 이후.

그다음에야 범인을 잡는 데에 신경을 써야 하는 법이 아니던가.

영주쯤 되는 이가 모르지 않을 테니 일부러였다.

대뜸 인상착의를 듣고 병사를 풀었으니, 인질이야 어찌 되건 일단 영지 내에 위험 분자를 솎아내겠다는 심산이었다.

자식 잃은 아비야 당장 급하니 울며불며 매달려 도움을 청하고, 또 곧장 움직이라 명령을 제 눈에 보았으니 희망을 품어 잘 되어 간다 여기겠지만.

시엔 역시 편지를 살펴보았다.

써진 것은 한 문장뿐.

손가락에 피를 묻혀 쓴 글씨라 투박하고 큼직하니 종이를 가득 메우는 것이었다.

시엔이 종이를 돌려 뒤편을 살폈다. 뒤는 백지.

후회하게 해 주겠다.

그 목적이라면 손목이 아닌 머리를 보냈을 터다.

손목을 보냈다는 것은, 그를 제외한 나머지 부분을 제가 가지고 있다는 주장이기도 했으니까.

그러나 무언가를 요구하지 않으니 또 기묘하다.

아마 빠른 시일 내에 다시 연락해 오거나. 혹은.

생각해보니, 무슨 속셈인지 알 것도 같았다.

시엔 자신이 같은 일을 벌였다면, 바로 이러한 식으로 이루어졌을 테니까.

그렇다면, 마법사들을 붙잡아봐야 매양 쓸데없는 일이 될 테지만.

그러나 손님이 끼어들어 이래라저래라 하는 꼴도 영 나쁜 모양새였다. 그러니 일단은 지켜보기로.

* * *

핸즈필드가 큰 도시라 하나, 마법사들의 용모가 또 워낙에 눈에 띄는 것이었다.

여인 넷이 몰려다니며 하나같이 빼어난 미인들이었으니.

여인이라면 모를까 도시의 사내가 한 번 보고서 곧장 뇌리에 새겨 잊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타는 듯한 적발은 더 눈에 띄고, 개중 키가 큰 여인이 있다고 하니 더더욱 눈에 띄었다.

그런 이유로 마법사들이 잡혀오는데는 긴 시간이 걸리지도 않았다.

병사들이 출동해 조사를 할 것도 없이, 물으면 묻는 대로 대답이 술술 나왔으니까.

아, 그 여인들이요? 광장에서 본 것 같은데.

사슴정에서 점심 먹다가 봤지요.

저쪽에 숙소를 풀었던 것 같기도 한뎁쇼.

금세 그 소재가 파악되었다.

그 이후 병사들이 들이쳤으나, 아무런 저항 없이 얌전히 따라왔다고.

그리고 나선 심문이 시작되었다.

“납치요? 그게 무슨 말씀인지요.”

“발뺌을 할 작정인가? 벨가트 메어리가 그대들을 납치범으로 고발했다.”

“저희는 그 일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답니다.”

붉은 머리의 마법사, 스스로 뤼니헤라 밝인 여인이 대답했다. 말뿐만 아니라 표정도 대단히 억울한 모양새였다.

거봐. 내 이렇게 될 줄 알았다니까.

증거가 없으면 붙잡아봐야 무용이었다.

얼굴에 철판 깔고 아니라 우기면 어쩌겠는가.

억지로 고문해 입을 열 수도 없는 노릇이고.

“거, 거짓말! 내 아들, 내 아들 내놔! 개 같은 년 같으니!”

“이런, 상단주 님. 납치범이라니. 하는 말씀을 들어보니 아드님 일인 모양이세요. 안타깝게도.”

“너, 너, 이, 개 같은, 빌어먹을, 죽일!”

벨가트가 자리에서 길길이 날뛰었다.

온갖 욕설이 튀어나오는 가운데, 듣다 못한 테린이 손을 들어 벨가트의 발광을 막았다.

“그만.”

“하오나, 영주님…….”

“시끄럽다. 그 경박한 입을 다물지 않으면 당장 쫓아내겠다. 누구 앞이라고 감히.”

테린의 눈에 노기가 서렸다.

영주 앞에서 할 행동은 아니었으니까.

벨가트가 바로 쪼그라들었다. 심기를 거스르기라도 했다간 아들이고 납치고 뭐고 없던 일이 될 수도 있을 테니까.

“내 듣기로 메어리 상회에서 난동을 부렸다던데.”

“물론 실력 행사를 조금 하기는 했지만, 어쩔 수 없었답니다. 만나려고 해도 본단에 틀어박혀 나오는 일이 없고, 앞에서 틀어막고 약속을 잡으라 내쫓고, 약속을 잡으려고 해도 연락이 닿지 않으니.”

“난동 혐의는 인정하는가?”

“예, 불미한 일을 벌여 송구합니다.”

“흠. 그에 대해서는 메어리 상단주에게 피해액을 배상할 수 있도록.”

“명이시라면, 그리하겠습니다.”

뤼니헤가 고분고분 공손히 대답했다.

“벨가트.”

“예, 나리!”

“이 여인들이 범인이라는 다른 증거가 있는가?”

“저년이 분명 떠날 때에 말했습니다요! 후회하게 해 줄 거라고. 그리고 편지에 써진 글귀가 그렇지 않습니까!”

“흠. 이 또한 인정하는가?”

“영주님, 저희가 받아야 할 금화가 사만 닢에 이른답니다. 물론 상회가 망했으니 전부 돌려받지는 못하더라도, 적어도 남은 재화를 나누어 가지는 것이 옳다는 것을 압니다. 그걸 혼자 삼킨 악덕 상인에게, 그 정도 악담이야…….”

후회하게 해 줄 것이다. 후회하게 될 거다.

이만큼 흔한 악담도 달리 없었다.

그리고 정말로 그리되는 상황도 드물었고.

테린이 잠시 생각하는 듯하다 말했다.

“일단 판결을 내리겠다. 불미스러운 일이 있고, 그대들이 그 혐의를 받고 있다. 결정적인 증거는 없으나 동기는 충분하니, 일단은 영주성에 구금해 둘 것이다. 다만, 죄상을 알 수 없고, 도주할 염려가 없어 보이니, 따로 손님 방을 내어주겠다.”

“저희는 그에 따르겠습니다.”

“나리, 하지만……!”

“벨가트. 이들의 혐의를 입증할 수 있나?”

“그것은.”

“아니라면 군말 붙이지 말아. 일단은 날이 늦어 밝는 대로 병사를 풀어 도시를 수색해 네 아들을 찾아보도록 하지. 되었는가?”

“……알겠습니다.”

일개 상단주가 무슨 힘이 있겠는가.

속 타는 애비는 그저 머리를 떨굴 뿐이었다.

* * *

마법사 여인들은 감옥에서 풀려났다.

방을 내주어라 한들 결국 백작저 안이라서, 함께 이동하여 안으로 드는 참이었다.

남의 집 귀한 딸을 대놓고 시녀로 부릴 수도 없는 노릇.

밀린 회포를 푼답시고 끌려간 트리예가 잔뜩 지친 표정으로 나타났다.

“아. 시엔 님. 그리고 그쪽은…….”

트리예의 표정이 팍 상했다.

“뤼니헤? 라이네스에, 여기는 왜 기어 들어왔어?”

동시에, 네 여인의 표정 역시 당혹감에 물들었다.

< 44. 빚쟁이는 밤에 잠도 못 잔다 [3]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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