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3. 봄이 가다 [2] >
헬른포드는 그야말로 몸살을 앓고 있었다.
국경을 돌파한 늑대인간들 때문이었다.
그 숫자가 이천에 불과하니, 헬른포드가 막아내지 못할 것은 아니다.
아니어야 했다.
적어도 그 많은 늑대인간들이 전부 오러를 쓰는, 전에 없던 흉악한 괴물이 아니었다면 그랬을 터다.
게다가 괴물의 움직임이 묘했다.
본래 괴물은 본능이 앞서니 적을 가리지 않았다.
흉폭함으로 눈이 뒤집혀 공격에 나서고, 그러다 적이 강대하여 두려움이 앞서면 도망친다.
그것이 괴물의 생리였다.
그러나 이번 괴물 떼는 달랐다.
높은 성벽을 마주하면 우회하여 피해버리고 중소 규모의 만만한 촌락에만 달려들었다.
그러다 큰 군대가 접근할라치면 미리 알아채 숲으로 내달음친다.
사람의 군대가 네 발로 뛰는 것들을 따라잡을 수가 없는 노릇이 아닌가.
괴물 주제에 제법 전략적인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는 사실도 끔찍하기 그지없으나, 무엇보다 위험한 것이 오러였다.
오러가 그저 무기에 둘러 절삭력을 높이는 정도에 그치지 않았다. 혈액처럼 신체를 돌면 뼈와 근육이 강해지고 그 힘이 확연히 달랐다.
소규모 정찰대나 부대가 습격당하면 그대로 몰살이었다.
개중 하나가 살아남아 보고라도 올릴 수 있다면 다행일 정도였으니.
전투력도 전투력이거니와 속도는 또 어떤가.
네 발로 달려 사람보다 빠르고 말보다 느리다.
그러나 지형에 상관없이 움직인다는 점이 참으로 성가시다. 일단 등을 돌리면 추격할 방도가 없다.
앙흠 왕태자는 애꿎은 천문관을 원망했다.
빌어먹을 천문관 놈들.
엉터리 점괘 때문에 이게 무슨 고생이란 말이냐.
물론 구태여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다.
결국 그의 잘못이었으므로.
페벨룬에서 대주기를 알렸을 때 대비했어야 했다.
앞으로 치를 전쟁에 눈이 멀어 위험을 방치했다.
항상 최악을 상정해야 하니, 조금이라도 준비하여 대비했다면 피해가 이리 막심하지는 않았으리라.
사람은 제 잘못을 받아들이건 아니건 일단은 변명거리를 찾는 생물이다.
앙흠이 천문관을 원망하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천문관들의 무고함이 밝혀진 것은 나중이었다.
“페벨룬은 아예 침공을 받지 않았다고?”
“예, 첩보에 따르면, 아예 괴물이 접근조차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현재는 각 변경백들이 우리 쪽과 남부의 국경을 틀어막고 혹여 괴물의 월경을 대비하는 중이라 합니다.”
“젠장!”
앙흠이 전략판을 내려치고, 좌대신이 중얼거렸다.
“……점괘가 맞았군요.”
교단의 군대가 피해를 입을 것이냐고 물었다.
교단의 군대가 페벨룬에 주둔하고, 페벨룬이 침공을 받지 않았으니 당연히 피해를 볼 일이 없다.
맞는 점괘가 나온 것이다.
앙흠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내가 전쟁에 눈이 멀었나 보오.”
“폐하뿐만은 아니니 너무 상심치 마시지요.”
좌대신이 위로를 건넸다.
페벨룬은 이미 스스로를 방어할 여력이 없다.
그렇기에 이미 승리한 것이나 마찬가지인 전쟁을 준비하며, 그렇기에 벌써 승리한 것처럼 그 이후를 꿈꿨다.
게다가 실제로 대주기가 일어나면?
페벨룬이 알려 피해를 막고 나서 전쟁을 선포할 수도 없는 노릇이 아니던가.
제아무리 전쟁이 욕심으로 벌이는 무도한 행위라 하나, 명분이 제대로 서지 않으면 내외로 문제들이 생기기 마련이었으므로.
그나마 다행이라면, 전쟁이 코앞이라 군대를 소집해 훈련 중이었다는 사실이었다.
기이한 대주기를 맞아 진압할 병력을 즉각 움직일 수가 있었기에.
“포위섬멸작전은 어떻게 되어가고 있소?”
“현재 일곱 개 군단 사만의 군세가 전개 중이고, 사흘 후에 남하하며 포위진을 완성해갈 것입니다.”
“괴물 이천을 잡는 데에 사만의 군대라니. 이런 역사가 이전에도 있었소?”
“제가 알기로는 없었습니다.”
“이제는 있겠군. 허어. 이런 망신도 망신이 없어.”
결국, 사태를 해결할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대대적 포위를 통한 섬멸전.
늑대인간이 소규모 교전에 절대적인 위력을 가지고, 진퇴가 자유로워 쫓지 못한다.
그러니 두꺼운 포위망으로 감싸, 조여 섬멸하는 수밖에는.
“전에 오러를 쓰는 괴물이 없었으니, 망신이라 할 것은 아닙니다. 이때 잘 처신하면 오히려 대륙이 저희를 보아 배우고자 할 테지요.”
“나쁜 사례로도 남을 수 있겠지. 반면교사라. 하.”
앙흠이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 * *
상자 안은 고통스럽다.
적응은커녕, 매 순간이 고통스럽기 짝이 없었다.
밤이 되어도 고통에 잠 못 이루니 하염없이 눈물만 줄줄 흘렀다.
마신 물이 전부 눈으로 나오는 것만 같았다.
그렇게 아파하다 어느 순간 기력이 다해 정신을 잃으니, 잠이 아니라 기절에 가까운 꼴이었다.
그러다 아침이 오면 전신이 욱신거리고 쓰리다.
독한 몸살을 앓듯 모든 근육이 욱신거리는데, 그보다 더한 것이 뼈의 고통이었다.
나림 역시 공부하여 인체를 알았으니, 여기저기 골격이 비틀려 신경이 짓눌리고 있음을 알았다.
때로는 아는 것이 더욱 두려움이었다.
이대로면 살더라도 평생 후유증에 시달려야 했다.
골격 자체가 변형되어 신체가 무너질 터.
다리를 절고 팔을 떨며 허리가 굽겠지.
안면이 굳어 일그러진 채 펼 수 없게 될 거야.
누렁이라는 기이한 이름의 사제가 이따금 신성을 쏟아주어 다행이었다.
그렇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는지는 뻔한 일이었다.
나림이 누렁이에게 거역할 수 없는 이유였다.
그간 나림의 일과는 단순했다.
종일 상자에 들어가 신학 교리를 들었다.
그러다 사위가 어두워지면, 오늘 들은 이야기를 직접 말해 보라 질문이 돌아왔다.
제대로 대답하면 상자에서 나와 신성으로 치료를 받고, 이후에 따뜻한 식사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나면 나비라는 여사제가 몸을 씻기고 향유를 발라주며 깨끗한 옷을 입혀주었다.
상자에서 고통받던 시간이 꿈처럼 느껴질 정도로, 혹은 식사와 목욕이 꿈만 같은 시간이었다.
그러나 질문에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면, 상자를 열어 입에 관을 쑤셔 넣고 역한 스프가 흘러드는 것이 전부였다.
사람의 목이 본래 한 번에 넘기는 양이 있고, 또 머리가 꺾여 불편하니 그게 제대로 넘어가랴.
걸리고 막혀 스프가 코로 역류하니 머리가 깨지는 것만 같고, 기침으로 몸이 떨려 좁아터진 상자에 부딪혀 여기저기 멍이 들어 쓰라렸다.
그런 이유로 나림은 필사적이었다.
교리를 듣다 이해가 가지 않으면 질문하여 묻고, 그래도 안 되면 다시 듣고 또 듣기를 청하며 머릿속에 단단히 새겼다.
그렇게 시일이 지나고 나니, 나림이 대답을 하지 못한 날이 벌써 상당히 오래전의 일이었다.
그렇게 저녁을 마치고 의복을 정제한 날이었다.
이제는 때가 되면 얌전히 상자 안으로 들어가니, 좁은 곳에 억지로 몸을 쑤셔 넣는 동작도 익숙하다.
누렁이가 그 모습을 보며 빙그레 웃었다.
“죄인께서 많이 뉘우치신 듯하여, 그분께서 보다 은혜를 내리셨으니 감사히 받도록 하시지요.”
“은혜라 하시면…….”
“죄인께서 기거할 새로운 거처입니다.”
그렇게 말하며 가져오는 것이 새 상자였다.
전의 것보다 좌로 우로 높이로 한 뼘씩은 더 큰.
“어서 들어가 보시지요.”
나림이 새 상자에 몸을 끼웠다.
한 뼘씩 큰 것이나 막상 들어가니 이전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여전히 몸을 끼우나 예전과 같이 억지로 쑤셔 넣는 느낌은 아니었다.
뼈를 짓누르는 고통도 없고, 관절의 한계를 넘는 아픔도 없다.
거기에 이전 상자의 쿰쿰한 악취는커녕, 은은한 목향마저 감돌지 않은가.
“마음에 드십니까?”
“예, 정말로요!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나림이 기뻐 진심으로 감사를 표했다.
“제게 감사할 일이 아닙니다. 대리자께서 내리신 은혜이지요. 감사하며, 함께 기도드리겠습니다.”
“기도드리겠습니다.”
나림이 비좁은 상자 속, 뒤틀린 자세를 하고서도 요령 좋게 손을 모아 눈을 감았다.
누렁이가 한없이 인자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렇게 시일이 계속 흘렀다.
* * *
올봄은 비가 많았다.
작년의 가뭄을 채우기라도 하겠다는 양, 부슬부슬 내려 싱그럽고 촉촉하니 숲을 간질인다.
초봄의 싸늘함은 가신 지 이미 오래.
훈훈한 춘풍이 부나 싶더니 어느새 한낱의 태양이 뜨겁게 내리쬔다.
앙상했던 수목들은 초록으로 새 옷을 차려입고, 봄꽃이 군데군데 무성하니 겨우내 어찌 버틴 날것들이 시야 한 군데 이상을 차지하며 나풀거렸다.
여름이 찾아올 준비였다.
그간 대수림 방위는 정말로 별일이 없었다.
오죽하면 왕국의 군대가 조금씩 조금씩 빠져나가 이제는 거의 교단의 성전군만 남았다 할 정도였다.
이러면 교단이 뻔뻔하다 항의해도 할 말이 없다.
그러나 이미 왕국이 사내를 많이 잃었다.
귀족들이 농번기에 일손을 쓰기 위해 하나둘씩 빼돌리다 보니 이러한 상황이었다.
군의 총사령인 델피르 왕자가 굳이 막지 않으니 최근엔 아주 노골적으로 군대를 뺐다.
남은 병사들만 경계를 서느라 죽어나갔다.
그러나 이 추태에는 왕비의 묵인이 있었다.
교단에 면목이 없더라도, 왕국이 우선이라고.
어차피 대신전이 한창 건설 중이니 이미 대가를 지불했겠다, 아예 드러눕겠다는 뜻이 아닌가.
사태가 이리 돌아가나, 총사령인 델피르는 사실 별생각이 없었다.
요즘이 짧은 인생에 가장 즐거운 시간이었으니까.
공부는 반으로 줄었고, 남는 시간에 시엔을 졸라 덤으로 붙은 파린과 함께 숲을 쏘다니며 놀았다.
벌레를 잡고 설익은 과일을 따 먹고, 때로는 향초를 캐기도 하고 나무를 타며 시내를 찾아 물장난을 쳤다.
중간부턴 뷔아도 끌고 나왔다.
명분이야 왕자께서 혹여 다칠 때에 곁에 있어 주면 좋겠다 했지만, 사실 시엔도 신성을 쓸 줄 아니 딱 그저 둘러대기에 불과했다.
어차피 경계, 또 경계. 그리고 이상 무, 이상 없음인 대수림 방어에 할 일이 없어 심심한 모양이라 그리 권유했을 뿐이고.
시엔이 생각하기엔 델피르는 좀 더 놀아야 했다.
어차피 왕위 계승은 멀었고, 광증이라 갇혀 지낸 어린 시절을 즐거움으로 대신해 지워야 했으니까.
사람이 덜 자랐을 때 그 인격이 만들어지니, 내 왕께서 더욱 즐거움을 알 필요가 있었다.
게다가 왕자의 나이대엔 이리 놀아야 한다.
귀족이랍시고 어려서부터 술이나 홀짝거리고 또 기사들과 사냥만 다닐 게 아니라.
과거 현자가 왕자에게 베푼 일이었고, 신비주의자들이 함께해준 추억이었다. 그때가 참 좋았는데.
그래야 추후에 성군이 되시리라.
그러다 보니 요즘 예법 선생의 시선이 날카롭다.
왕자께서 하실 행동이 아니라던가.
반면 호위인 검위공의 눈빛도 요즘 이상했다.
어쩐지 흐뭇한 표정에 시엔을 바라보니 고마움이 철철 넘쳤다.
그 표현으로 항상 대련을 청하지만 않았다면 더욱 좋았을 터다.
그렇게 한참 흐드러진 봄이 져 갈 때쯤이었다.
자고 일어나니 이상하게 몸이 가볍다.
신체가 바뀐 뒤로야 항상 그랬지만, 기묘한 활력이 도니 여느 때와는 확연히 다른 상쾌함이었다.
시엔이 명상하며 내부를 관조하고 나서, 그 원인을 알아챌 수 있었다.
신성이 또 늘었다.
신성이야 누렁이와 나비 두 미친 것들이 있어서 조금씩 늘고 있었지만, 이리 급격히 확 늘어나진 않았는데.
또 그 미친 것들이 일을 벌였나?
시엔이 잠시 고민하다 이내 털어버렸다.
단단히 정신이 나간 녀석들이나, 시엔에게 해가 될 일은 절대로 벌이지 않는 이들이기도 했다.
신성이 늘면야 흑마법사로서는 미묘한 기분이지만 그래도 뭐 좋은 게 좋은 거라고.
그리고 저녁때가 되어서야 그 이유를 알았다.
“시엔 님, 죄인이 입을 열겠다고 합니다.”
“아. 맞네. 그게 있었지. 두 달이 조금 넘었나? 오래도 버텼네.”
죽음을 받아들이고 입을 열게 하거나, 혹은 억지로 삶을 연장해 고통받게 하라 명령해 두었다.
그간 어찌 되어가냐 물어보면 실험하는 것이 잘 되어 간다는 대답이 돌아오곤 했다.
그런 것치고는 시일이 너무 걸리니 대체 무얼 하나 싶기도 했는데.
그러나 누렁이와 나비가 하는 일이란 어지간하면 관여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컸다.
알아봐야 머리만 아플 테니까.
그리고 나림이 천막에 들었다.
시엔이 인상을 팍 구겼다.
일단 혈색이 참 좋았다.
수척하니 뺨은 움푹 패였지만, 발그레하니 수줍은 듯 상기된 색채는 병자가 약자의 얼굴이 아니다.
그리고 등에 진 상자는.
아니, 왜 상자를 지고 있어?
“이 미천한 죄인이 감히 인사를 드려요.”
사근하니 공손하기 짝이 없는 태도였다.
내가 뭘 본 거지? 시엔이 눈을 의심했다.
사실 나림은 죽고 없고 세올 녀석이 몸을 차지해 장난을 치는 게 아닐까?
세올 주제에 내게 장난칠 담력이 없기는 하지마는.
그러나 곧 나림에게 깃든 신성을 알아챘다.
그리고 나니 분노가 밀려들었다.
죽음을 택하거나 고통을 연장하라 명령했다.
광신도를 하나 더 늘리라 한 적도 없고, 제국의 잔당, 그것도 순혈이라 말한 것을 거둘 생각일랑 추호도 없었으니.
시엔이 누렁이를 노려보았다.
“너,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명령대로 행했을 뿐입니다.”
“나는 분명, 삶을 포기하고 입을 열게 하라 하지 않았나?”
“명령대로 행했습니다, 도련님. 묻고자 하는 것이 있으시다면 무엇이든 저 죄인에게 하문하시지요.”
누렁이는 늘 그렇듯 공손히 대답을 붙였다.
그리고는 나림을 바라보니, 여인이 입을 열었다.
“묻고자 하신다면 성심껏 답변드리겠습니다.”
“너. 내가 분명 정보의 대가로 고통 없는 죽음을 내리겠다 했다.”
“어쩜 이리도 자비로우신지……. 미천한 죄인이니 그저 죽으라 하셔요. 기꺼이 죗값을 치르겠습니다.”
순간 소름이 훅 끼쳤다.
누렁이는 명령을 충실하게 이행했다.
삶을 포기하고 입을 열게 하라.
새삼 누렁이의 이름을 잘못 지었음을 깨달았다.
저건 푸근한 목양견이나 파수견이 아니다.
그저 주인의 뜻에 따라 무엇이든 하는 사냥개.
그것도 흉악한 이빨과 덩치를 갖춘 짐승이었다.
대체 무슨 짓을 하면 사람이 저렇게 돼?
시엔이 이마를 감싸 쥐었다.
< 43. 봄이 가다 [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