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작가의 망령재림-226화 (222/268)

< 42. 밀림 속으로 [10] >

시엔이 뒤를 돌아보고 질린 표정을 지었다.

쓰러진 수목들. 가지로 엮인 천장이 무너져 좀체 보이지 않던 하늘이 보였다.

겨우 일격이었다.

베히모스가 크게 휘두른 일격.

한 번 팔을 휘둘러 만들어낸 광범위한 파괴라니.

두 발로 선 것 중 가장 강대한 괴물이라고.

그야말로 정확한 표현이었다.

“어머니, 무사하셨군요!”

므잉의 거구가 쏜살같이 달려와 시엔을 살폈다.

“늪이 어느 쪽이야?”

“여기서 대략 남서쪽입니다.”

“좋아. 므잉도 빠져. 여우 수인 부락에 가서 일행을 모으고, 사흘 뒤 늪에서 합류할 수 있게.”

한 번의 교전으로 깨달았다.

어설프게 머릿수를 늘려 상대할 적이 아니다.

내 사람이랍시고 곁에 뒀다가 괜히 신경쓰여 화만 자초하는 꼴이었다.

라이뱅 그 치처럼.

잘 부탁하긴 뭘 잘 부탁해?

보호막 써 달라 부탁한 적도 없고, 제 안위보다 먼저 살펴야 할 이유도 없는 이다.

잘못되기라도 하면 빚을 대체 어찌 갚아야 하나.

원하지 않는 빚을 지우는 이라. 성가시게.

그때, 세올의 정신체가 정신세계로 스몄다.

-선배님, 성기사는 무사합니다. 땅이 무르고 갑옷을 입은 탓에 아래로 파묻히기는 했지 말입니다만.

“하긴, 그렇게 갈 인물은 아니긴 하지.”

시엔이 킬킬 웃음을 터뜨렸다.

“좋아, 나비! 나비, 무사하나!”

“시엔 님! 말씀하시어요!”

나비의 불쑥 나타나 뚝 떨어져 내렸다.

나비는 애초에 별로 걱정도 안 했다. 제 목숨을 간수하지 않는 편이긴 해도 원체 빠르고 날랜 녀석이라.

“저쪽에 라이뱅 경이 매몰되어 있는 상태야. 해골 하나가 지키고 있을 테니 찾아 구출해.”

“예, 알겠습니다!”

나비가 경쾌하게 대답하며 곧장 몸을 돌렸다.

해골이 지키고 있다는 표현에 의문을 표할 법도 한데, 전혀 한 점 의심도 없는 태도였다.

“세올, 들었지? 다시 가서 라이뱅 경 옆을 지켜 드리다 나비를 유도하고 나서 돌아와.”

-어, 선배님. 그런데 그 성기사, 이 세올을 보고 어찌 욕설을 하던지. 매몰되어 꼼작달싹을 못 하는 상황에서도 성창을 날려대는데……. 해명하려 해도 듣질 않습니다만.

세올과 교단이 애초부터 악연이었다.

이미 벌어진 일을 없던 것으로 할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니던가. 미움받을 짓을 했으면 미움을 사는 것이 정당한 일이었다.

“지은 죄가 있으니 어쩔 수 없지.”

-하지만 이 세올 역시 그놈에게 속아 한 일인데, 그놈이 소녀의 순정을 이용해 먹고…….

“당한 입장에선 어차피 매한가지지. 속았다고 네가 한 행동이 없던 일이 되던가? 알아서 처신해. 사실을 털어놓고 화해를 청하던가, 아니면 어차피 바닥에 깔려 계시다면서? 안 보이는 데서 나비만 유도하던가.”

-예, 선배님…….

세올이 다시 정신세계에서 존재감을 감췄다.

가서 화해를 청하건, 아니면 모르는 척을 하건. 어떤 선택이든 세올 스스로 결정할 일이었다.

그리고 나니 귓가에 바짝 붙어 속삭이는 목소리가 있었다. 가냘프나 걱정이 스민 말이었다.

“시엔, 라이뱅 경께, 무슨 일이라도…….”

“나무 밑에 깔려 계시는데, 갑옷 덕에 무사하다고 하는군요. 나비를 보냈으니 곧 빠져나오실 겁니다.”

“깔려 계시다니, 괜찮으신 거죠?”

“전혀 문제없습니다. 문제라면 오히려 이쪽이 더 문제이니, 차라리 제 걱정이나 하시지요.”

시엔이 장난스레 대답했다.

심각한 일로 농을 던질 이는 아니다. 뷔아가 안도해 깊은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시엔의 말이 반쯤만 농담이었다.

이제 한숨 돌렸다 뿐, 여전히 베히모스가 뷔아를 노리는 중이었다.

아예 저만치 앞서나가 앞을 가로막고 있었고.

우회하더라도 베히모스의 가공할 속도를 생각하면 따돌리기는 무리이리라.

그렇다고 인제 와서 뒤로 물러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러니 베히모스를 뚫고 늪지까지 닿아야 한다.

일단 히드라와 싸움을 붙이고 나면, 빈틈을 노려 함께 상대해 볼 수 있겠지.

시엔이 마음을 다잡았다.

여차하면 대죄인을 소환하면 된다.

닿는 데까지는 해 보고 안 되면, 어쩔 수 없이.

시엔이 재차 앞으로 달려 나갔다.

* * *

나림이 신기한 듯 눈을 치떴다.

“와, 방금 지진이었죠?”

“지진? 지진이 아니라.”

“아. 또. 봐요!”

나림이 찻잔을 가리켰다.

찻잔이 받침과 부딪쳐 달칵달칵 소리를 냈다.

“와, 지진은 처음이에요.”

“보통 처음 지진을 본 이가 그런 반응은 아닌데.”

“왜요, 신기하잖아요?”

히예브가 히죽 미소를 지었다.

하여간 담대한 아가씨 같으니.

새삼 느끼지만 좋은 여자가 아닌가.

“뭐에요, 그 느끼한 표정은. 또 자자는 소리나 할 거면 이번엔 진짜로 쫓아낼 거예요.”

“이런, 선수를 치다니. 그런데 이건 지진이 아니라니까.”

“아니, 방금 봤잖아요. 지진이 아니면 뭔데요?”

“아가씨, 지진 겪어본 적 없지? 지진은 이런 식으로 안 울려. 그 전에 전조도 있기 마련이고.”

“그럼 뭔데요?”

“땅울림이지. 뭔가 육중한 것이 땅을 두드려서. 오우거나 미노타우로스 같은 대형종의 발구름인 것 같은데.”

나림이 코웃음을 쳤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말아요. 이 근방에는 괴물이 접근하지 않는다구요.”

“괴물이 괜히 괴물인가? 괴물이 움직이는 데에 별 이유가 없는 법인데. 한 마리 어슬렁거려도.”

“그렇다 쳐도, 일대 땅이 물러서 충격파가 전해질 수는 없어요. 질량이 아무리 큰 괴물이라도 발을 굴러 지반을 흔들기엔 어림도 없지.”

“그야말로 모르니 하는 소리로군.”

“뭐에욧?”

히예브가 혀를 쯧쯧 찼다.

“괴물의 발구름은 워 스톰프, 이쪽의 표현으로는 주술의 영역에 속한 거야, 아가씨. 그런 계산적인, 더하기 빼기로 가능하니 뭐니 한 게 아니라.”

“주술이라구요? 주술은 아직 명확한 현상이.”

그때였다.

나림의 입을 틀어막기라도 하듯, 쿠르릉!

시설 전체가 부르르 떨렸다.

그 서슬에 장식이 떨어지고 돌가루가 부스스 흩날릴 정도의 큰 충격파였다.

“이봐, 이래도 지진 같은가?”

“읏.”

“제법 묵은 대형종인 모양인데.”

“늑대인간을 풀어야겠어요.”

나림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히예브가 손가락을 흔들며 만류했다.

“아가씨는 그냥 쉬고 있으라고. 어차피 심심하던 차에, 간만에 몸이라도 좀 풀고 와야겠어.”

“괜찮겠어요? 제법 묵은 대형종이라면서요?”

“괜한 걱정이야, 아가씨. 내가 바로 사자 일족의 왕이니까.”

사자는 백수의 왕이라 부르는 짐승이었다.

사자 수인이 그러한 논리로 수인 중 제일이라고 주장했는데, 다른 수인들의 무시와는 별개로, 개인의 전투력 역시 수인 중 가장 강력했으니.

히예브가 휘파람을 불며 시설 밖으로 향했다.

오우거? 미노타우로스?

좋은 운동거리가 아니던가.

곧 저녁이니 식전 운동으로는 딱 맞겠지.

그는 사자왕. 사자 수인의 떠돌이 왕이었다.

내가 바로 일족의 가장 강대한 이다.

그 어떤 괴물이 감히 사자왕의 앞을 막을 쏘냐.

히예브가 히죽 웃으며 바깥으로의 문을 열었다.

그리고 곧장 문을 닫았다.

“흠. 헛것을 봤나?”

히예브가 중얼거렸다.

어쩐지 보이지 않아야 할 것이 보인 기분인데.

히예브가 다시 문을 열었다.

사자 수인의 시선이 지상에서 저 높은 곳을 향해 타고 오르다, 이내 고개를 저으며 문을 닫았다.

사자왕이 아니라 사자황제, 아니, 사자신이 직접 나서도 저건 좀 아니다.

웬 베히모스가 집 앞에 자리를 잡고 말야.

히예브가 도로 나림에게 되돌아갔다.

나림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히예브? 벌써 처리하고 왔어요? 아니지, 아무리 히예브라도 벌써 처리하진 못했을 텐데. 놈이 도망이라도 쳤나요?”

“이봐, 아가씨.”

히예브가 대답 대신 다른 소리를 했다.

그 표정이 진지했기에, 나림이 그에 응했다.

“왜요?”

“아까 분명히 이 근방에는 괴물이 접근하지 않는다고. 그렇게 말했지?”

“예. 맞아요.”

“그걸 내가 이해하기로는 너희 인간들이 늑대인간을 만지듯이 뭔가 기이한 짓을 벌였으리라고. 그리 생각했단 말이지.”

히예브는 그런 뜻으로 받아들였다.

애초에 늑대인간이 오러를 쓰게 만든 인간들이다.

그러니 괴물이 접근하지 못하게 만들기는 더 쉬운 일이 아니겠는가 하고.

나림이 무슨 소리냐는 듯 대답했다.

“아뇨, 저희가 따로 뭘 하지는 않았어요. 사실, 그 반대에요. 이쪽에는 원래 괴물이 접근하지 않고, 그래서 시설을 차린 거니까요.”

“내가 알기로 보통 그러한 경우는, 뭔가 대단히 강력한 괴물이 이미 영역을 차린 이후일 텐데?”

“잘 아네요? 과거 베히모스의 영역이었어요.”

“베히모스. 그래. 베히모스. 베히모스의 영역임을 알면서도 이쪽에 살림을 꾸렸다고?”

“과거 베히모스의 영역이었다니까요? 베히모스는 백 년 이상 관측되지 않았구요.”

“그래서, 베히모스가 나타나면 어쩔 셈인가?”

“베히모스는 존재하지 않아요.”

히예브가 이마를 주물거렸다.

담대한 게 아니라 그저 멍청한 계집인 게 아닐까.

히예브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리 단언하는 이유는 모르겠다만. 그래도, 혹시라도 나타난다면? 처리할 수 있겠나?”

“예비대로 남겨둔 늑대인간의 숫자가 오백이고, 새로 배양이 완료된 개체가 이백이에요. 도합 칠백의 오러를 쓰는 늑대인간 앞에서, 베히모스가 문제겠어요?”

히예브가 그제야 진지한 표정을 풀었다.

“다행히도 담대한 편이었구나.”

“갑자기 무슨 소리예요?”

“크게 실망할 뻔했단 소리지.”

사자 수인은 담대한 이를 좋아한다.

그러나 담대함과 어리석음은 종이 한 장 차이다.

위험을 이미 알고 그 위험을 극복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이만이 담대할 수 있었다.

어리석은 이가 비슷한 모양으로 날뛰니, 곧 위험 자체를 모르기에 제 위기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뜬금없이 무슨……”

히예브가 나림의 말을 잘랐다.

“그건 그렇고. 그 칠백. 지금 당장 풀어야겠는데.”

“예?”

“베히모스 말야. 요 앞에 와 있더라고. 잔뜩 화가 나서는. 제 영역에 작은 것들이 함부로 발을 디뎠으니 그럴 만도 하지.”

나림의 표정이 멍청하게 풀렸다.

“방금, 뭐라구요?”

“베히모스가 왔다니까.”

“그 베히모스요?”

“그래. 그 베히모스.”

나림이 황망히 눈을 깜박거렸다.

“그 말부터 했어야죠! 전원, 비상! 비상!”

그리고는 빽빽 소리를 지르며 다급히 뛰쳐나갔다.

* * *

시엔은 모든 감각을 한껏 끌어올린 상태였다.

순진무구의 시술로 이미 인간을 초월한 감각이다.

그러나 두뇌 자체는 그대로이니, 초월한 감각을 다루는 데에 있어 그 피로함이 보통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베히모스가 언제 어디서 어떻게 공격해 올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으니까.

위력적인 투창이 날아들 수도 있고, 아니면 펄쩍 뛰어올라 급강하를 시도할 수도 있었다.

그러니 잔뜩 날이 선 상태로 그저 남서를 향해, 베히모스와 조우하기 전에 늪지대와 조금이라도 더 거리를 좁혀놓아야 한다.

바로 그러한 판단이었다.

오후의 태양이 벌써 보이지 않고, 높은 가지들의 틈새로 빨간 하늘이 비쳤다.

정글의 밤은 성급했다.

해가 지기도 전에 사위는 벌써 자정처럼 어둡다.

-선배님, 이 세올, 이제 돌아왔습니다!

세올이 정신 세계로 스며 귀환을 알렸다.

시엔은 고개를 떨듯이 끄덕거려 대답을 대신하고 그저 앞으로 계속 달려나갈 뿐이었다.

가볍다곤 하나 한 사람을 품에 안은 상태다.

업은 것도 아니고 손으로 들었다.

그리고 상체를 숙여 뛰고 있으니 그 체중을 온전히 팔심으로 견뎌내는 중이었다.

거기의 밀림의 땅이 평탄하지 않았다.

굵은 뿌리는 튀어나와 단단하고, 흙은 푹신하여 밟아 아래로 꺼진다.

덤불 따위가 자칫 발목에 걸리기 십상이라 거기에 신경도 써야 하는 판이었다.

평지에서 서너 시간 뛰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다. 그러나 밀림이었다.

아무리 몸뚱이가 특출나 튼튼한 시엔이라도 가쁜 숨이 터져 나올 수밖에는.

안겨있는 뷔아의 마음이라고 편하지 못했다.

뚝뚝 떨어지는 땀에 아닌 게 아니라 성복의 옆구리 즈음에 낙하해 축축하니 피부에 달라붙었다.

어깨쯤에 머리를 기대고 있으니 안은 이의 호흡이 점차 가빠짐을 실시간으로 알기도 했고.

아, 씨. 멍청이 같으니라구.

힘을 조금이라도 남겨뒀다면 이리 고생시키지 않아도 될 것을. 적어도 업혀 매달릴 정도로만 체력이 남았더라도.

그러나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일정 수준을 이상으로 키운 신성 주문은 갈수록 막대한 양의 신성을 빨아들였다.

이리될 줄 알았더라도 조절하긴 쉽지 않았을 터.

그러니 그저 고맙고 또 미안할 뿐이었다.

애초에 그저 저주를 풀기만 했어도 베히모스에게 쫓길 일도 없었을 텐데.

그러나 저주를 풀지 않는 이유가 또 무엇이던가.

원수를 놓친 베히모스가 분노에 날뛰어 다른 곳에 괜한 화풀이를 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하여간 사람도 좋지.

이래서야 안 좋아하고 배기겠냐구. 나쁜 놈.

“저기, 시엔.”

“예, 후우. 뷔아.”

“잠깐 쉬다 가요. 숨 좀 돌리고.”

“지금, 조금이라도 더, 거리를 벌리는 편이.”

“많이 지쳤잖아요. 시엔. 이때 베히모스가 덮치기라도 하면 더 위험하잖아요.”

시엔의 발이 조금 속도를 늦췄다.

듣고 보니 맞는 말이다. 늪지에 닿는 데에만 정신이 팔려 본인의 상태를 놓쳐서는 안 되었다.

“그리고 저도 여기저기 안 쑤시는 데가 없어요.”

사실 안겨 있는 쪽이라고 그리 편안하랴.

그러나 저 아프다고 하는 투정이 아님을 알았다.

네 힘들다고 안 멈출 테니 제가 아프다고 선수를 쳤으리라.

이렇게까지 말하는 데야 고집을 피우기도 뭐하고.

< 42. 밀림 속으로 [10]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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