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작가의 망령재림-225화 (221/268)

< 42. 밀림 속으로 [9] >

여우 수인이 말하기를, 늪에서 히드라를 상대하는 일이 자살과 같다고 했다.

비록 웃기지 않는 농담에 불과한 말이었지만.

그래도 괜히 나온 말은 아니리라.

초대형종은 초대형종이 상대해야겠지.

“므잉, 히드라 못의 위치를 아나?”

“아마 남서 방향일 겁니다.”

“므잉이 안내하고, 나머지 흑랑들은 갈라진다.”

“어머니?”

“트리예, 세올의 몸을 들고 흑랑과 함께 피해.”

“몸만 말씀이시지요?”

“맞아. 세올은 영혼체로 복귀하고. 누렁이는 파린과 함께 피하고, 나비는. 흠.”

시엔이 나비의 움직임을 떠올렸다.

몸이 날래고 빠르니 제 한몸 건사하기에는 문제가 없으리라. 그렇다면 혹여 모를 상황에 손 하나라도 보태는 편이 좋다.

“나비는 남아 날 따른다. 바로 움직여! 지금!”

시엔이 준엄히 목소리를 높였다.

다들 모르겠다는 표정이었으나, 곧장 명령에 따라 자리를 이탈했다.

“뷔아? 몸 상태는 어떻습니까? 업히면 매달릴 수 있는 상태입니까?”

“어, 천천히 움직인다면요?”

뷔아가 손을 드는 시늉을 했다.

팔이 파들파들 떨린다. 체력이 돌아오려면 아직 한참이나 남은 상태이리라.

자칫하면 전력으로 도망쳐야 할 상황이 아닌가.

누군가를 등에 업고 격렬히 움직이려면, 업힌 이 역시 팔과 다리에 단단히 힘을 주어 매달릴 기운 정도는 있어야 했다.

“시엔 형제님? 진정하시지요. 어떤 상황입니까?”

라이뱅이 질문을 던졌다.

“베히모스입니다. 이쪽으로 곧장 오고 있어요.”

“베히모스라면, 아까 잡은 괴물이 아닙니까.”

“반도 못 자란 새끼였습니다. 어미가 오고 있는데 그 세 배쯤 되는 놈입니다.”

“세 배라니. 지상에 그만한 것이 있단 말입니까?”

“키가 크니 나무 위로 머리가 솟았더군요.”

라이뱅 경이 머리를 뒤로 젖혔다.

곧게 뻗은 수목을 따라 시선을 위로.

까마득한 높이에 가지로 엮인 수풀 천장을 제 눈으로 확인하고 이내 심각한 표정이 되었다.

사람이 크기를 잴 때 눈으로 보아야 가장 이해가 빠른 일이었다. 저 위로 머리가 뚫고 솟을 정도라고 하니 그제야 괴물의 위용이 어설프게나마 짐작되는 까닭이었다.

“새끼 베히모스가 건 저주, 일종의 표식이었습니다. 놈이 뷔아를 노리고 있어요.”

“그럼 당장 저주를 해체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새끼를 잃은 놈이지요. 섣불리 저주를 해체했다 날뛰기라도 하면, 대주기에 합류해 날뛸 수도 있을 겁니다.”

“허나, 성녀님, 아니 성인께선 교단의…….”

“라이뱅 경, 안 돼요.”

뷔아가 끼어들었다.

라이뱅이 잠시 갈등하는 듯하다, 다시 물어왔다.

“허면, 다른 방도가 있으십니까?”

“대수림에 히드라가 산다고 하니 그쪽으로 유도할 생각입니다. 같은 초대형종이니 베히모스가 싸워 죽으면 좋고, 아니더라도 상처를 입을 테니 그때를 노려야겠죠.”

성녀를 미끼로 쓰겠다는 말이었다.

라이뱅은 내키지 않는 표정이었다.

시엔이 덧붙였다.

“상황을 보아 안 되겠다 싶으면 곧장 저주를 해제하고 도망치도록 하죠. 일단 해 볼 수 있는 수단은 써 봐야 하지 않겠어요?”

“그러시다면, 좋습니다.”

“지금 제 딴엔 조심히 다가온다고 생각하는 모양입니다만, 이때 일시에 거리를 벌리겠습니다.”

베히모스의 몸집이 몸집인 만큼, 그저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나무를 부러뜨리는 와중이었다.

괴물의 지능이 가진 한계라고 할지, 아니면 새끼를 잃고서도 냉정한 상태라 위험하다고 해야 할지.

멍청한데 멍청하지 않은. 대체 뭐야?

시엔이 잡생각을 급히 지웠다.

이런 생각을 할 때는 아니었다.

“그럼, 뷔아.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무슨, 아아, 시엔, 자, 잠깐…….”

시엔이 뷔아를 안아 들었다.

순식간에 시엔의 품에 든 뷔아가 당황했다.

요즘 며칠 씻지도 못했는데!

안 그래도 은근히 거리를 벌리고 있던 참이었다.

냄새라도 나면 어떡해. 아니 분명 날 텐데. 그럼 내가 뭐가 되느냐고.

당장 눈에 보이지 않는 베히모스보다, 지금이 더 끔찍하기 짝이 없다.

“머리 조심하시고, 팔 모으십시오.”

“잠깐. 잠깐만. 왜 시엔이. 라이뱅 경……”

“교대로 든다 치면, 나중에 주문을 써야 할 제가 가장 먼저 드는 것이 맞을 겁니다.”

“형제님의 말이 맞습니다.”

“하지만. 저기 자매님도 계시고”

“나비는 몸집이 작아 위험하니까요.”

“그래도, 그래도.”

그때였다.

쾅, 우직, 쩌적쩌적. 굉음이 자리를 강타했다.

시엔이 급히 고개를 들었다.

가지로 엮인 밀린의 천장, 거꾸로 매달린 나무가 눈에 들어왔다.

위에서 아래로 자라는 나무는 현상계에 없다.

허공에서 자라지는 않았을 터이니, 괴물이 뿌리채 뽑아 던진 것이다.

밀림의 거목을 손으로 뽑아 던진다고?

가지끼리 얽혀 위에 매달린 나무. 쩌저적, 나무 갈라지는 소리가 요란하다. 가지가 휘고 부러진다.

그리고 그다음에는?

“뷔아. 입 꾹 다무십시오. 혀 깨뭅니다.”

뷔아가 울상이 되어 얌전히 팔을 모았다.

시엔이 라이뱅과 나비에게 눈짓하고, 이내 발을 박차 자리를 뛰쳐나갔다.

그리고 동시에 나무 한 그루가 하늘에서 내렸다.

* * *

베히모스는 살금살금 움직이는 중이었다.

제 딴에는 그랬다.

물론, 살금살금이란 표현이 어울리지는 않았다.

그 움직임에 걸린 나무가 연이어 쓰러졌다.

새가 날아오르며 또한 발을 디뎌 땅이 울렸다.

그러나 베히모스의 입장에선 그리 심각하지 않은 소음이었다.

사람이 곤충의 발소리를 듣지 못하듯, 저리 거대한 생물에게는 별거 아닌 소음이었으니.

그렇다고 해도 상당히 부주의한 사냥이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참으로 오랜만에 나서는 사냥이었으니까.

베히모스의 소굴, 수인이 말하기를 자살 구덩이에 항상 괴물이 몸을 던져 먹이가 있었으니까.

거기에 새끼를 치고 대동면에 든 것이 백여 년 전.

그러나 그 사실이 베히모스에게 별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천적 없는 최상위의 포식자가 가지는 그런 자신감과 느긋함이었다.

베히모스가 팔을 뻗어 나무를 움켜쥐었다.

사람 셋이 손에 손을 잡아 이어야 할 둘레를 가진 거목이나, 베히모스의 거대한 손에 착 감겨 잡히는 수준이었다.

베히모스가 팔을 당기자, 거목이 뿌리째로 뽑혀 허공에 들린다. 수천 년간 묻혀 있던 흙들이 비처럼 땅에 뿌려졌다.

베히모스의 팔이 허공으로 치솟았다.

투창이라도 하듯 직각으로 꺾여 뒤로 당겨진 팔.

그리고 이내 베히모스의 팔이 활줄처럼 튕기고, 거목이 허공을 갈랐다.

파스스스스. 폭풍 속의 숲과 같은 소리가 울렸다.

투창은 실패.

나무의 가지와 가지가 엮이니 방어막과 같았다.

날린 나무 역시 가지가 그래도 달리니 서로 얽혀 도중에 추진력을 잃고 허공에 매달리고 말았다.

보통의 괴물의 사고와는 달리, 베히모스가 실수를 알아차렸다. 그냥 던져서는 맞지 않는다. 그러면?

베히모스의 손톱이 나무의 밑동에 파고들었다.

아무런 저항 없이 파고드는 손톱을 누군가 본다면, 푸딩에 수저가 들어가는 꼴을 떠올렸으리라.

쓰러지는 나무를 잡아들곤, 다른 손으로 둥치를 쥐고 끝까지 힘을 주어 잡아당겼다.

나무의 가지가 수수깡처럼 부러져 지상으로 떨어져 내렸다.

그렇게 완성된 것이 온전한 투창이었다.

끝은 날카롭게 벼려지고, 뒤로 잔가지는 없는.

베히모스가 제 작품을 바라보고 입꼬리를 늘렸다.

만족스러운 작품. 이제, 던진다.

그런데? 멀다?

투창을 만드는 사이, 고새 적의 거리가 멀어졌다.

이 순간에도 계속해서 멀어지는 중이었다.

사냥감이 도망친다!

크허엉! 베히모스의 입에서 노성이 쏟아졌다.

마음이 급해진 괴물이 적을 향해 투창을 쏘았다.

그리고 다리를 잔뜩 굽히고, 다시 펴며.

베히모스의 거체가 하늘을 날았다.

* * *

쾅! 굉음이 덮친다.

가까이에 터진 거대한 소음. 삐이이이. 상처 입은 고막이 못 부는 피리처럼 듣기 싫은 소리를 낸다.

화산이 터지듯 대지가 터져나갔다.

순식간에 밤처럼 어두워지는 사위.

흙과 자갈이 비처럼 쏟아진다.

피부를 두들기는 거친 입자.

그것들이 달라붙어 불쾌감이 치솟았다.

그러나 불쾌감보다 앞서는 것이 위기감이었다.

전까지 없던 기둥이 땅에서 솟았다.

아니, 솟은 것이 아니다. 날아와 꽂혔다.

땅가죽이 뒤집히고 원형의 크레이터가 파였다.

맞았다면 시체조차 남기기 힘들었으리라.

육체를 벗고 시엔의 정신 세계에서 시야를 함께 지켜보던 세올이 호들갑을 떨었다.

-세상에! 선배님, 보셨어요? 나무가! 나무가!

“정신 사나우니 말 걸지 마.”

“……그게 아니라.”

“뷔아? 뷔아에게 한 말이 아니라.”

“시엔, 위. 위를.”

“뷔아? 뭐라 하십니까?”

뷔아는 소리칠 기운이 없다.

어물거리는 목소리가 입가를 맴돌 뿐이었다.

시엔이 머리를 낮춰 귀를 기울이니 삐이이 하는 이명 속에서 필사적인 목소리를 겨우 알아들었다.

“위에, 위에…….”

“위?”

시엔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밀림의 천장 위. 뚤린 잎사귀 사이로 거대한 것이 가까워진다. 무언가 거대한 것.

시엔이 품 안의 뷔아를 거칠게 끌어당기고, 힘을 주어 땅을 박찼다.

동시에 쾅! 뒤편에서 몸을 후려치는 듯한 굉음.

크워어어! 귀가 아닌 신체로 느끼는 괴성이 바로 뒤에서 터졌다.

분명 제법 거리가 있었다.

그걸 한 번 뛰어 좁힌다고?

시엔의 품에 바짝 당겨지니 뷔아의 머리가 귓전에 자리를 잡아 뒤를 보는 상태.

바로 귓전에 속삭이는 뷔아의 목소리.

“뒤에, 뒤에.”

“또 무슨.”

시엔이 오른편으로 고개를 돌리다 뷔아의 머리를 톡 들이받고, 급히 반대편으로 돌려 뒤를 살폈다.

나무 사이에 선 회백색 기둥.

기둥이 내려앉는다. 기둥 위, 거대한 몸통이 성채처럼 지상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좌로 무언가가 쫙 펼쳐진다. 잿빛 장벽.

장벽이 아니다. 베히모스의 팔뚝.

잠시 멀어지는 듯싶더니. 그리고.

장벽과 같은 베히모스의 팔이 땅을 훑듯이 휘둘러진다. 빽빽한 나무들이 연달아 부러지며, 잿빛의 장벽이 급격히 가까워졌다.

“점프!”

시엔이 비명처럼 고함을 질렀다.

동시에 땅을 짓밟으며 높이 날아올랐다.

다리 아래로 스치는 잿빛 털뭉치.

그 수많은 수목을 전부 부러뜨리며 공간을 휩쓸었다.

잡목 따위가 완전히 쓸려나가 깨끗해진 땅.

그 위로 착지하며 시엔이 생각했다.

걸리는 모든 수목을 부러뜨리며 팔을 휘두르려면, 대체 얼마만큼의 완력이 필요할까.

잠깐, 수목을 부러뜨리며?

시엔이 급히 눈동자를 굴렸다.

사방에 온전히 선 나무가 없다.

본래는 직선으로 곧게 땅에 박혀 있어야 할 것들이 무너져내리다. 하늘이 내려앉고 있었다.

이런 젠장.

시엔이 급히 마력을 끌어올렸다.

그리고 그보다 빨리, 희뿌연 막이 펼쳐졌다.

밑동 잃은 나무들이 그 위를 덮쳤다.

신성 보호막? 뷔아는 신성을 소모해 탈진 중인 상태. 그렇다면 누가? 라이뱅 경?

시엔이 급히 주변을 훑었다.

그리고 저편, 은빛 갑옷을 입은 사내와 눈이 마주친다. 라이뱅의 입술이 움직였다.

‘우리 뷔를 잘 부탁드립니다.’

성기사의 위로, 나무들이 쏟아져 내렸다.

“젠장, 세올, 봤지? 라이뱅 경을 살펴!”

-예, 선배님!

이내 정신 세계에서 리치가 빠져나간다.

시엔의 주문 또한 완성되었다.

머리 위 허공, 흰 것이 뭉쳐 긴 척추가 일직선으로 앞으로 뻗어 나아갈 길을 확보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규모가 큰 주문이다. 급히 준비하여 그리 단단하지 않으니 나무가 뼈와 부딪치며 뼛조각이 온 사방으로 휘날린다.

점차 무너져내리는 통로. 시엔이 속도를 높였다.

시엔의 몸이 무너지는 숲의 반경 밖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동시에 뼈 통로 역시 와르르 무너진다.

그러자 다시 사위가 어두워졌다.

고개를 드니, 또다시 펼쳐진 밀림의 천장 너머로 거대한 것이 허공을 가로지른다.

뒤편으로부터, 오후의 태양을 일식처럼 가리며 저 먼 어딘가를 향해서 활공하는 베히모스의 거체.

아예 앞질러서 가는 길을 차단할 셈인가.

그렇다고 뒤돌아 무너진 숲을 통과하기는 어렵다.

우회하더라도 뷔아에게 표식이 새겨져 있는 상황.

괴물이 앞을 가로막기는 어렵지 않으리라. 나름 머리를 잘 굴리는 괴물이었다.

그러나 당장 후속 공격은 없으리라.

시엔이 자리에 멈춰 숨을 가다듬었다.

< 42. 밀림 속으로 [9]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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