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작가의 망령재림-221화 (217/268)

< 42. 밀림 속으로 [5] >

대수림의 초입을 지나자마자 온도가 부쩍 올랐다.

초봄의 서늘하고 건조한 대기는 사라진 지 오래.

옷을 뚫고 휘감는 질척한 습기에 가만히만 있어도 끈적한 땀이 배어 나온다.

들이쉬는 숨에는 짙은 녹음과 그 한편 어딘가에 썩은 시취가 섞여 신경을 찌르고, 눈으로 보이는 모든 곳이 녹색으로 막혀 답답하기 그지없다.

그저 있는 것으로도 불쾌한 장소.

밀림은 본래 그러한 곳이었다.

그런가 하면 그 식생 또한 가혹했다.

땅에서 쫓겨난 괴물들이 숨어든 땅.

멀쩡한 대지는 인간들이 차지했다. 괴물이라 공격해 씨를 말리려 드니 결국 인간이 들지 않는 오지에 몰려들 수밖에.

그리고 트롤 한 마리가 인간의 냄새를 맡았다.

성인 키의 두 배 높이에 커다란 대가리를 달고, 옆으로도 비슷한 넓이를 가진 비대한 괴물이었다.

인간에 대한 적개는 괴물의 본성이다.

트롤의 눈에 흉성이 어렸다.

제 영역을 침범한 것도 모자라 그 주체가 인간.

거대한 손이 뿌리째 뽑은 나무통을 쥔다.

그리고 그 증오스러운 적, 인간에게 향하려던 딱 그 찰나였다.

못 보던 생물 하나가 수풀 사이에서 톡 튀어나와 으르렁거리며 저를 올려다보는 탓이었다.

크기는 트롤의 손바닥 반절만 한 새까만 것.

폭신한 검은 털에는 윤기가 좔좔 흘렀다.

그흥?

트롤이 얼빠진 의문성을 냈다.

작은 짐승. 대식가인 트롤에겐 간식조차 안 되는 앙증맞은 것이었다.

빼액. 검은 털 무더기가 빼액빼액 소리를 질렀다.

산새 같기도 하고, 쥐 같기도 한 그런 소리였다.

트롤은 어이가 없었다.

저 작은 것이 위협한답시고 빽빽거리는 꼴이라니.

크허, 푸허헉! 트롤이 웃음을 터뜨렸다.

트롤의 육중한 몸통이 들썩거리는 사이, 검은 것이 또 하나 툭 떨어져 빽빽거리기 시작했다.

트롤은 계속 웃음을 터뜨렸다.

하나나 둘이나.

그리고 이내, 온 사방에서 삐약삐약 군집 특유의 떼성이 울려 퍼졌다.

수풀을 뚫고 통통 뛰며, 혹은 나무 위에서 툭 떨어져 내리고, 어떤 것은 연약한 땅을 뚫고 아래서 솟아나기도 했다.

트롤이 분노했다.

하찮은 동물이 떼로 몰려든들 무엇하겠는가.

질긴 피부와 불가사의한 재생력은 트롤이 한 영역의 패자로 있게 만드는 강력한 무기. 숲의 맹수도 피해가니 감히 덤벼드는 법이 없거늘.

크아아-

트롤이 포효했다.

허공을 향해 벌어진 아가리로부터 가공할 성량이 터져 나왔다.

괴물의 워 크라이. 어지간한 맹수조차 오줌을 지리며 줄행랑을 놓는 함성이었다.

크압, 크엑! 컥! 콜록!

트롤의 포효가 뚝 끊겼다.

아가리에 이물질이 들어가면 트롤 아니라도 소리를 멈출 수밖에.

트롤이 목을 붙잡고 꺽꺽거리다 이내 겨우 걸린 것을 토해냈다.

침으로 흠뻑 젖은 검은 털 뭉치. 빽빽거리던 것과 같은 종이다.

트롤이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검은 것들이 일제히 달려들었다.

콩콩 뛰는 귀여운 모양새이나, 숲의 음영으로부터 한없는 숫자가 몰려드니 검은 땅거죽이 파도치며 달려드는 모양과 같았다.

* * *

“어으, 꿉꿉해.”

뷔아가 불평을 토하며 주변을 경계했다.

벌써부터 더운 모양인지 그 갸름한 턱선에 땀방울이 맺혀 똑똑 떨어지는 상태였다.

연신 꿉꿉하니 더우니 죽겠느니 곡소리가 나오는 입과는 달리, 날 선 시선이 연신 주변을 더듬었다.

밀림에야 이전에도 몇 번 들어간 적이 있고, 결코 방심할 공간이 안 된다는 사실을 알기에.

맹수와 괴물들.

밀림의 시계는 극히 제한되고, 포식자들은 바로 그러한 특성을 이용할 줄 아는 영악한 녀석들이다.

재규어와 같은 녀석은 나무 위에서 뚝 떨어지며 사람의 목뼈를 채고, 수풀에 몸을 숨겨 덮치는 종류며 의태하는 놈들까지.

덥고 습하여 숨이 턱턱 막히는 가운데, 바짝 긴장해 사방을 경계하며 움직이는 중이었다.

체력 소모는 배 이상, 과장 섞어 땀이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마신 물이 전부 피부로 배어 나오는 것만 같이.

이미 푹 젖은 성복이 배로 체력을 빼앗는 가운데, 무엇보다 힘을 빼는 요소는 따로 있었다.

“으, 덥다. 힘들어.”

“선배, 좀 놔요. 누군 안 힘들게? 매달리지 말고.”

“야. 노쇠하고 연로한 선배가 힘들어서 좀 잡겠다는데. 어디서 눈을 부라리고.”

“그래요, 선배 나이가 많다 이거지.”

“누, 누가 나이가 많아.”

“어린 후배님 괴롭히지 말고 나잇값 좀 하세요, 선배.”

“나잇값? 야! 너! 말 다했어?”

“아직 다 안 했는데요? 소리칠 기력 있으면 혼자서 좀 걷지.”

바짝 신경을 곤두세운 뷔아와는 달리, 긴장감 없이 티격태격하는 여인이 두 명.

시엔의 시녀들이었던가.

붉은 머리를 한쪽이 검은 쪽의 옷자락을 붙잡고 늘어진다.

세올, 그리고 트리예라고 했던가.

시엔과 같은 마법사라고 들었는데, 연신 투닥거리며 말싸움을 하는 중이었다.

누구는 혹여 모를 습격에 귀를 쫑긋 세우고 집중하는 와중에, 한쪽에선 저러고 있으니 기가 찬다.

결국 뷔아가 한 마디 입을 열고 말았다.

“그, 자매님들.”

“앗. 읍.”

“……예, 성녀님.”

그저 말을 걸었을 뿐인데, 명백히 경계하는 눈빛이 돌아온다.

어째서인지 저 둘은 항상 그랬다.

어쩌다 인사라도 할라치면 못 본 척 못 들은 척 성큼성큼 걸어 도망을 쳐 버리더라.

“두 분 사이가 좋으신 것은 알겠지만, 때가 때이니 조금만 더 주의해 주심이. 밀림은 위험한 곳이랍니다.”

“위험? 하지만 선배님 계시니까…….”

“물론 성녀님께서는 그러하시겠지요. 밀림에 다소 익숙하신 모양이시지요?”

세올이 입술을 내밀며 토를 달고, 트리예가 특유의 비꼬는 표정과 어투로 대답을 붙였다.

뷔아의 이마에 힘줄이 도드라졌다.

사실, 바짝 경계를 세운 이는 뷔아와 라이뱅 경뿐이었다. 나머지는 무슨 소풍이라도 나온 이 마냥 태평하기 그지없었다.

투닥거리는 둘 말고, 나머지 시녀 하나와 집사라는 늙은이 또한 매한가지였다.

교단의 식구 같기는 한데, 물어보니 별개의 종파를 섬긴다 했다.

나비와 누렁이. 이름부터가 정상이 아닌 이들.

그런데 또 신성을 품은 이들이고 정중하고 깍듯하니 뷔아를 보고 성녀로 모시니 이단도 아닌 것이.

“야, 미친 것아. 나. 저거.”

“허허, 작은 도련님, 무엇을 말씀이십니까?”

“저거.”

“나비 자매님?”

“예, 스승님!”

나비가 홀연히 나무를 타 손가락 세 마디만 한 풍뎅이를 낚아챈다.

밀림이라 벌레들도 큼지막하니 보통이 아니었다.

누렁이의 품에 안긴 파린이 손에 풍뎅이를 쥐고 살피다, 뒤이어 제 입속으로 덥석 털어 넣고 만다.

아그작 아그작, 꿀꺽. 파린이 인상을 썼다.

“맛이 없잖아.”

“허허, 그러셨습니까?”

“텁텁해. 미친 것아. 물.”

“예, 작은 도련님.”

그리곤 누렁이가 대어 주는 수통에 입을 붙이고 꼴깍꼴깍 잘도 삼켰다.

대체 어디서부터 지적을 해야 하나.

벌레는 왜 먹고? 미친 것이라는 호칭은 뭐고.

뷔아의 진이 쪽 빠졌다.

시엔이 성녀의 걷는 양을 보다 말을 붙였다.

“많이 더우신 모양입니다만.”

“쬐, 쬐끔?”

“당장은 시원한 것 같아도 결국 더 더울 겁니다. 잠깐 쉬었다 가죠.”

“안 그래도 괜찮은데.”

“아직 초입부터 힘을 뺄 이유는 없겠지요.”

결국 마른 땅에 일행이 축 늘어졌다.

일행 중 그나마 멀쩡한 이가 시엔과 파린이었다.

시엔이야 몸뚱어리가 어찌 되었는지 땀 한 방울이 안 나는 상태고.

그렇다고 덥고 축축하니 불쾌한 심정은 마찬가지인데, 대체 사람 몸을 어떻게 만들어 놓은 것인지.

어린 용은 딱히 더위를 타지 않는 모양새였다.

“어머니, 휴식에 좋은 때가 아닙니다. 이 근방은 아세발이의 영역입니다.”

“아세발이?”

“오래 묵은 트롤입니다.”

“괜찮아. 트롤 따위면, 뭐.”

“오오, 트롤 따위입니까.”

므잉이 감탄을 터뜨렸다.

오오, 어머니께서는 트롤이야 따위로 넘기신다.

강자존이라고 할 수준은 아니지만, 수인이 강자를 존중하는 기질은 저 본능 단위에서 나오는 것이다.

므잉이 안심했다. 무리의 어머니께서 괜찮다 하시면 뭐 괜찮겠지 하고.

이전에 본 그 무지막지한 엘프 수호자조차 저보다 더 강한 이라 하였으니. 수백 자루의 검을 동시에 다루는 엘프 검사보다 강하다면야, 말 그대로 트롤이야 따위로 넘길 하찮은 괴물일지도.

그와는 별개로, 겨우 몇 시간 지났다고 퍼져 주저앉은 인간 일행들에게는 영 기대가 안 된다.

늑대 수인들은 원래 저들 살던 땅이라 운동 거리도 못 되는 상황이었다.

힘이 남으니 휴식이라 취할 일이 없다.

그러니 괜히 주변을 싸돌며 쓰러진 나무를 찍고 땅을 헤집으며 뭘 그리 줍느라 야단이었다.

무얼 하나 했더니, 아직 어린 늑대 수인 하나가 시엔에게 다가와 양손에 올린 것을 공손히 내밀었다.

“반시누에에요, 어머니.”

“호오. 간식 같은 건가?”

“예, 어머니. 실하니 달고 맛있어요.”

밀림에서는 체력 소모가 큰 만큼 계속해서 뭔가 주워 먹는 편이 좋았다. 주워 먹는다 해도 대개는 벌레들이었다.

풀과 버섯은 영양가가 없어 안 먹느니만 못한 것들이 대부분이었으니까.

소화에 쓰는 체력이 먹어 얻는 체력보다 크면 먹을수록 배만 고플 뿐이지.

“그나저나, 어머니, 그건 토끼인가요?”

“이거? 라프라크라고 하는데.”

“저, 안아 봐도 될까요?”

삐익.

검은 것이 앙증맞은 소리를 냈다.

겉으로야 토끼를 닮았지만, 사실 털가죽 안에 든 것은 흉악한 입과 소화기관이 전부다.

라프라크.

북실한 털가죽 아래 몸통의 절반이 이빨 달린 주둥이로 이루어져 있는 부정 세계의 마수였다.

“헤에, 귀엽다. 너, 이거 먹니?”

삐익.

라프라크가 기분 좋은 듯 누에를 집어삼켰다.

마수 중에는 가장 흔한 종류였다.

마수는 기본적으로 작은 녀석을 부르기가 쉽고, 개중에서도 또 한 개체가 약한 녀석이 더 쉽다.

방심하지만 않으면 아이라도 쇠지레 하나로 잡을 수 있는 마수이니 마수학 기초로 소환하는 녀석.

다만 제대로 써먹기는 어려운데, 라프라크를 부려 위력이 나오려면 수백 이상의 군집을 통째로 소환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밀림이 흑마법사에게 유리한 이유가 바로 이러한 마수들 때문이었다.

시야가 막히고 위아래로 좌표가 깔린 밀림에 마수 떼를 깔아놓으면, 그야말로 적들에게 있어 사지와 마찬가지였으니까.

* * *

히드라. 대수림 서부 늪지대의 주인이었다.

아홉 개의 목을 가진 초대형 용종.

맹독성 혈액과 불사에 가까운 생명력으로 수백 년간 늪지의 왕좌를 지켜온 괴물이기도 했다.

다만, 요즘 들어서는 퍽 소심해진 상태였다.

대수림의 늑대인간.

평상시엔 간식처럼 잡아먹을 연약한 것들이 기이한 힘으로 날뛴 까닭이었다.

오래 산 괴물답게 현명한 히드라는, 이때 잘못 건들면 자신이라 해도 무사하지 못함을 알았다.

덕분에 바닥없는 늪에 가라앉아 아홉 대가리의 숨구멍만 빼꼼 내밀어 그저 숨만 쉬는 상태였다.

늪지의 악어나 하마 따위나 잡아먹으며 그렇게.

지금의 이상한 구도 역시 세월에 지나가 사라지리라 믿으면서.

삐익. 삐익!

히드라의 열여덟 귀를 두드리는 기이한 울음소리.

질척한 늪지 위로 머리 하나가 빼꼼히 솟았다.

못 보던 짐승이 잔뜩 물가에 모인 상태였다.

통통 튀고 저들끼리 엉켜 문대는 기이한 짐승.

평시의 히드라였다면, 감히 제 영역을 침범한 겁 없는 짐승을 가만두지는 않았으리라.

그러나 잔뜩 소심해진 히드라는 성질을 내는 대신 그저 머리를 하나 올려 관찰하기로 했다.

긴 귀 비슷한 것으로 수면을 툭툭 두드리나 싶더니, 이내 개중 하나가 눈을 질끈 감으며 뛰었다.

첨벙. 작게 물보라가 일고, 라프라크가 허우적거렸다. 히드라의 못은 일반적인 호수가 아닌, 질척거리는 늪이었으니까.

남은 라프라크들이 어쩔 줄 몰라 깡충깡충 뛴다.

제법 다급해 보이는 움직임들이었다.

허우적거리던 라프라크의 움직임이 서서히 둔해지며 마수의 생명력이 다하려던 때였다.

“이건 또 뭐야?”

큼직한 손 하나가 늪에 빠진 마수를 건졌다.

갈기 같은 수염을 기른 사자 수인, 히예브였다.

“흑토끼? 못 보던 건데. 맛있게 생겼군.”

히예브가 잠시 수염을 쓰다듬었다.

보통 여인들이 이리 생긴 생물을 좋아하지 않나?

마침 공을 들이는 여인이 한 명 있는 참이었다.

“좋아. 너, 내가 살렸으니 이젠 내 거다.”

빼액! 라프라크가 으르렁거리다, 사자 수인의 흉악한 송곳니를 보고 이내 잠잠해졌다.

히예브가 라프라크를 대충 가방에 쑤셔 넣었다.

그륵. 그르륵.

히드라가 사자 수인을 보고 반가운 척을 했다.

늪지 밖으로 안 나가는 소심한 히드라에게 요즘 먹이를 주는 녀석이었으니까.

“옜다. 먹어라.”

히예브가 질질 끌고 왔던 물소의 시체를 집어던졌다.

첨벙.

왕관 모양의 커다란 물보라가 인다.

히드라의 머리 하나가 솟아 물소의 시체를 물고 다시 수면 아래로 자취를 감췄다.

뒤이어, 다른 머리가 솟아 투투투 하며 무언가를 뱉어 냈다.

팔뚝만 한 물고기 세 마리가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 히예브의 발치에 정확히 안착했다.

“겨우 세 마리냐. 누구 코에 붙이라고…….”

히예브가 덥수룩한 머리를 긁적이며 줄로 고기를 꿰어 목에 걸었다.

그래도 늪에 사는 산선어는 맛이 좋다. 그 입이 짧은 나림마저도 맛있다며 매번 찾을 정도였으니.

“여인 하나에 이리 공을 들여야 하다니. 동족들이 보면 비웃겠구만. 거 참.”

히예브가 툴툴거리며 자리를 떴다.

그리고 잠시 후.

늪의 사방으로부터 라프라크가 새어 나왔다.

늪가를 완전히 메우고도 모자라, 저들 위로 저들이 올라타 쌓이니 바글바글거리며 막대한 숫자로 불었다.

뒤이어 마수의 무리가 한 방향을 향해 일제히 이동을 시작했다.

그 모습을, 히드라의 열여덟 눈깔이 조용히 바라볼 뿐이었다.

< 42. 밀림 속으로 [5]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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