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작가의 망령재림-220화 (216/268)

< 42. 밀림 속으로 [4] >

대수림을 맞댄 이웃들이 곤란을 겪는 모양이다.

시엔이 신경을 쓸 바는 아니었다.

미리 알려 경고했다.

이웃으로 할 일은 충분히 해내지 않았던가.

너희네 도둑이 들 것이라 경고를 듣고도 문을 열어놓았다면 그건 저네들 잘못이기에.

그보다는 대주기의 주체, 늑대인간이 신경 쓰였다.

오러를 쓰는 괴물이라니.

시엔이 생각하기로 말도 안 된다.

그러나 말도 안 되는 일이 이미 벌어졌다.

모든 일에는 이유가 있기 마련이니, 이번 대주기에도 원인이 있으리라.

한별의 요청이 있기도 했다.

그러나 대수림은 왕국과 인접하니, 요청이 아니더라도 그럴 수도 있지 하며 넘길 일은 못 된다.

“……이런 이유로, 대수림에 들어가려 합니다만.”

“위험하지 않을까?”

“괜찮습니다, 전하. 이미 괴물들이 빠진 이후가 아니겠습니까. 밀림은 원체 익숙하기도 하도, 또 대수림의 주민을 안내로 앞세울 테니까요.”

델피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왕자가 무엇을 알겠는가.

시엔이 그렇다 하면 그렇다고 철썩같이 믿을 뿐.

다른 이 아닌 시엔이 거짓말을 할 이유도 없고.

다만, 소년의 호기심이 불타올랐다.

“위험하지 않다고 하면, 짐도 대수림에 한 번은 가 보고 싶은 바인데.”

“전하께서 뜻이 그리 하시겠다면야 기꺼이 모시겠습니다.”

“정말?”

순순히 그러자 대답할 줄은 몰랐다.

말이야 해 보았지만, 안 될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사실, 가능할 리가 없다.

한 나라의 왕위 계승자가 위험하게 어딜 기어들어간단 말인가.

예상치 못한 허락에 델피르의 표정이 확 밝았다.

뒤편에 있던 검위공이 고개를 저었다. 그 옆에 예법 선생도 마찬가지였다.

시엔이 못 본 척 말을 이었다.

“일 주야에서 이 주야 정도 걸리겠습니다만, 전하께서 학업이 있으시니, 그 분량은 돌아와 벌충하셔야 합니다.”

“흠흠, 조심히 다녀오게나.”

델피르가 곧장 말을 바꿨다.

지금의 공부 시간이 반으로 줄었다.

그걸 다시 도로 늘리라고 하면, 세상 끔찍한 일이 또 없었다.

뒤편에서 예법 선생이 소리 없이 웃었다.

안 된다 하면 서운할까 봐서 일단 그러자며 받고 다음에 스스로 마다하게 만든다라.

상대를 잘 알아 다루는 방식이 아니던가.

그게 재미있기도 하고, 말썽꾸러기 왕자를 다루는 데에 도움이 될 것 같으니 마음에 새겨 두겠다며.

“좋아. 흠, 흠. 그대의 몸이 그대의 것만이 아니니 혹여 상하는 것이 불충임을 명심하게나.”

“예, 전하.”

델피르 왕자의 허락도 받았으니 대수림 조사에는 막을 자가 없다.

지휘 천막을 나온 시엔이 곧장 옆으로 향했다.

급조된 신당, 성녀에게도 알리기 위해서.

뷔아가 성전군의 총사령이나 하나 어차피 왕국 지휘권과는 별개다. 굳이 허락을 받을 이유는 없다.

그럼에도 굳이 찾는 이유야 간단했다.

그냥 얼굴 아는 사이에 나중에 찾아 자리를 비웠다 들으면 서운할 테니까.

신당 앞에서 라이뱅이 언제나처럼 살갑게 반겼다.

“시엔 형제님이 오셨군요.”

“성녀께선 안에 계시구요?”

“예. 오늘은 비번이라 깨어 계실 겁니다. 이보게, 형제, 성녀님께 명예 성자께서 오셨다 알려드리게.”

“예, 단장님.”

라이뱅이 부하를 시켜 연통을 넣었다.

“불편한 점은 없으시고요?”

“페벨룬의 성도분들께서 생각보다 더욱 독실한 분들이라, 모두 세상의 복이다 싶지 않겠습니까.”

“그래도 불편한 점이라던가, 나중에라도 생각이 나면 꼭 말해주세요. 도와주러 이 오지까지 오셨는데, 번까지 직접 서 주시는 데에 대접이 불민하다면 얼마나 실례겠어요?”

“대접받고자 오지 않았으니 조금의 불편함이야 서로 맞춰나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물론 지금도 분에 넘치니 문제가 없지요.”

사실 대주기가 일어났다 소식이 돌고 나선 성전군의 위상이 두 단계는 더 올라갔다.

애초에 들이닥칠 괴물을 창칼 한번 안 휘두르고 막았으니 신앙이 빈약한 이도 괜스레 사제의 눈치를 보며 식전에 기도 한 번을 올리는 판이었다.

라이뱅이 보기에는 참으로 옳게 된 상황이었다.

시엔이 잠시 떠들다 안으로 들었다.

연통이 손이 왔으니 잠시 준비하라 알리는 일이라 밖에 오래 서 있는 것도 외려 실례가 되리라.

이제보니 급조된 신당이나 정성이 들었다.

색유리에 태양이 비치니 곧게 뻗어 그 고운 색채를 성단 위로 드리웠다.

부옇게 번진 성화 위로 뷔아가 그림처럼 곱게 손을 모아 무릎을 꿇었다.

그 경건한 태와 머리 위의 후광까지 하니 그야말로 그림과 같은 모습이었다.

시엔이 천신의 존재를 긍정하나 굳이 신앙해 믿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절로 경건하다 생각이 드는 장면이 아닌가.

시엔이 기도를 마치길 기다리다 문득 생각나기를,

보통 이리 애매한 시간에 기도를 올리던가?

분명 찾아왔다고 연통이 들어갔는데, 기도가 대회마냥 결승이 있어 끝까지 마칠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니고.

물론 빡빡하게 예의를 지킬 사이가 아니니, 하던 일 마저 하겠다는 정도야 뭐 그러려니 하겠지만.

잠시 후, 뷔아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뒤이어 뒤를 돌아보니 우아한 미소를 띄웠다.

못 보던 표정인데, 어째 어색한 우아함이었다.

안 하는 시간에 하는 절실한 기도.

어딘가 딱딱한 표정.

시엔이 조심스레 결론을 내렸다.

“뭔가 근심이라도 있으십니까?”

“예? 아닌데. 왜요, 그래 보여요?”

“그리 간절히 기도를 하시기에. 보통은 오후 사역에 나서는 시간이잖습니까. 애매한 시간이니. 물론 천신께 예를 올리는 데에 정해진 시간이 없다고는 하나.”

“앗. 어. 앗.”

뷔아의 후광이 맹렬히 반짝거렸다.

은은한 광채이나 빠르게 점멸하면 어쩔 수 없이 눈이 부실 수밖에.

시엔이 그 눈부심에 잠깐 눈을 찌푸리자, 뷔아가 명백히 당황한 태도로 버벅거렸다.

“아니, 기도야 뭐, 아무 때나 하잖. 왜, 그 기도하는 모습이 제일 아름답다는 말도 있고, 아니, 아니. 그러니까.”

“괜찮으십니까? 확실히, 마음에 두신 일이 있으신 게 아닌지.”

“어, 그러니까, 어. 음. 그게.”

“굳이 그리 감추지 않으셔도, 뭐. 친구가 좋다는 말이 무엇이겠습니까?”

“친구.”

뷔아의 어깨가 축 처졌다.

잠시 후, 처진 어깨만큼 눈꼬리가 위로 치솟았다.

“아, 씨이. 열받네.”

“무슨 일이 있으셨군요.”

“일 없거든요?”

뷔아의 태도가 뾰족하다.

시엔이 떫은 표정으로 말했다.

“아니, 광장에서 뺨 맞고 거실에서 화풀이합니까? 왜 꼴이 났는지는 모르겠는데, 애먼 이 붙잡고는. 기껏 얼굴이나 보자 했더니만.”

“뭐에욧?”

“뭐 틀린 말이라도 했나.”

“아니, 씨이. 애먼 이는 무슨. 내가 누구 때문에.”

“그러니까 누구 때문인지부터 말을 해야지.”

“그야. 당신…… 때문은 아니지만…….”

“당신은 너무 가신다니까.”

“아악! 진짜! 안 해! 에이, 씨이.”

“음? 어디 가십니까? 손님 앞에 두고.”

“옷 불편해서 갈아입으러 간다! 여기저기 끼어서!왜요!”

시엔이 뷔아의 성복을 떠올렸다.

확실히 품이 넉넉하니 편하기는 할 터였다.

성복보단 로브나 망토에 가까운 꼴이라도.

아무리그래도 교단을 대표하는 이가 하고 다닐 꼴은 아니었다.

물론, 전장이나 역병이 든 도시라면 차려입은 복장이 꼴불견이겠지만, 그렇지 않은 때야 복장이 주는 위엄도 무시해서는 안 되는 법이니.

시엔이 일단 만류했다.

“굳이 그래야겠습니까? 모처럼 예쁘게 잘 차려입고 다니더니만. 교단의 대표이시니……”

제 방으로 향하던 뷔아가 우뚝 자리에 섰다.

“그래요? 이 옷, 예쁘다 이거죠? 잘 어울려요?”

“왜 진작 안 그러고 다녔나 싶을 정도인데.”

“그럼 어쩔 수 없지. 좀 불편하긴 한데.”

어째 얼굴이 금세 싱글벙글이다.

어쨌거나 기분이 좋아 보이니 그만이었다.

교단의 성녀라도 뭐 나름 고충이 있겠지, 하고.

“그래서, 무슨 일이에요? 식사 시간은 아직이고.”

“자리를 비우기 전에 인사라도 할까 하고 들렀습니다.”

“자리를 비워요? 왜요? 벌써 돌아가려고요?”

“대수림에 조사를 위해 들어가려 합니다. 일 주야 혹은 이 주야 정도.”

“조사요?”

“오러를 쓰는 괴물. 전에 없던 것이고, 대주기가 이리 빠르게 돌아온 일 역시 전에 없으니, 대수림 안에 무언가 이상이 생겼다 여겨야 할 테지요.”

뷔아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이상이라 하면요?”

“그걸 모르니 조사하러 가지 않겠습니까. 한별, 그러니까 엘프 수호자의 말로 대수림 방면에 이변이 있는 중이라 하기도 했고.”

“하지만, 위험하지 않겠어요?”

“대수림에서 빠진 괴물이 대략 오천 전후라 하면, 내부에 더 남아 있을 확률은 낮을 겁니다.”

“대형종이나 초대형종이 발견되지 않았잖아요. 대수림 내부에 존재할 가능성도 있지 않아요?”

“그도 그렇습니다만. 별문제는 없을 겁니다.”

밀림 속의 흑마법사는 불 안의 방화광, 바다 위의 물길잡이나 마찬가지였다.

사시사철 습하고 어두운 장소. 독물이 우글거리는 땅. 흑마법사에게 오히려 힘이 되는 것들이었으니.

“아이, 참. 그렇게 낙관만 하지 말구요.”

“낙관이 아니라……. 뭐. 늑대 수인들도 있으니, 안쪽 지리도 훤히 꿰고 있는 이들이라 괜찮습니다. 정 위험하다 싶으면 돌아 나오면 그만이니.”

“흠, 좋아요. 그럼, 뭘 준비하면 되죠?”

“함께 가시려고요?”

“시엔 말대로면 크게 위험한 것도 아니고.”

시엔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고생길이 훤합니다만. 밀림 경험은 있으십니까?”

“아. 밀림.”

뷔아의 표정이 딱딱해졌다.

보아하니 경험이 없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한편으로는 성녀행에 밀림까지 쏘다니나 싶기도 하고.

“경험이 있으시다면 준비는 알아서 잘하실 테고. 밀림 중에서도 퍽 지독한 곳일 터입니다만.”

“그래도, 시엔의 말대로라면 조사해 보는 게 맞을 테니까……. 이번 일의 원인을 알면, 다른 비경들에서의 위험도 미리 막을 수 있을 테니까요. 그런데 윽. 밀림. 아, 싫다.”

“그리 꺼리시면야, 굳이 따라오지 않으셔도 서운해하진 않겠습니다만.”

“됐어요. 제가 안 가면 누가 가겠어요.”

뷔아가 체념하듯 말했다.

시엔이 픽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도 뷔아다운 결정이었다. 가장 힘들고 어려운 곳에 제가 가야 한다는 말이 아니던가.

“인원은 최소화할 계획이니, 성기사 분들을 동원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혹여 모를 일에 대비하기도 해야 하니. 동행으로 한 분쯤?”

* * *

본래 시엔이 계획한 인원은 자신과 세 시녀, 그리고 누렁이. 그리고 므잉과 쫄따구 몇 정도였다.

세올과 트리예야 흑마법사라 밀림에서 잘 적응할 수 있을 테고, 누렁이와 나비는 신성을 깨운 녀석들이라 그래도 밀림에 들 만한 자격은 있었다.

밀림에서 가장 무서운 것이 바로 병마였으니까.

물, 공기, 땅과 풀, 그리고 벌레들.

밀림의 모든 것이 바깥 사람에게 줄 병마를 품었다.

그러나 흑마법사에게는 본래 면역에 가까웠다.

늑대 수인이야, 원래 대수림에 살던 이들이고.

신성을 가진 이 역시 병마에 강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뷔아쯤 되는 수준이면 독물을 들이키는 정도가 아니라면 외부 요인으로 위험할 일이 없으니 함께 따라오겠다는 데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거기에 파린이 끼어들었다.

“썩 유쾌한 곳은 아닐 텐데.”

“내 보호자도 가고, 미친 것도 따라가잖아? 그럼 내가 남는 편이 더 위험하지. 아니, 애초에, 네가 내 보호자잖아. 날 두고 어딜 가?”

“용도 벌레에 물리나?”

“벌레 따위가 용을 어찌 물어?”

“그럼 뭐. 문제는 없겠네.”

어린 용이란 신비한 생물이었다.

아무거나 잘 주워 먹고, 추위도 더위도 안 탔다.

이렇게 정리하니 신비라고 칭하기엔 조금 싸구려 같은 느낌이었지만.

애초에 생긴 것부터 영락없는 인간 꼬맹이니까, 뭐.

“저도 가겠습니다.”

“아서. 사흘도 못 가서 쓰러질걸?”

“하지만, 도련님. 제가 호위 기사이지 말입니다.”

“내가 호위해야 할 판이니 그렇지. 그냥 이참에 검위공께 단단히 배워두도록 해.”

검위공과 그 패거리. 사실 제자들보단 패거리라는 말이 딱 어울리는 집단이었다.

카레네야 신이 나서 그 사이에 자발적으로 끼어든 상태고, 베른닐은 억지로 끌려다니는 꼴이었다.

검위공의 수련이 시엔이 겪기로도 꽤 지독했다.

그러니 아무래도 호위보단 거기서 빠져나오고 싶은 눈치였다. 그러나 어림도 없지.

“검위공께서도 도련님 가는 데에 제가 남았다고 하면 크게 혼쭐을 내실 겁니다.”

“아. 걱정 마. 호위가 좀 많이 모자라서 맡겨놓고 갈 테니 갈 가르쳐 달라고. 검위공께 내가…….”

“아니 아니, 안 그러셔도 되는데 말입니다…….”

“아니, 이미 말씀드렸는데?”

“혹시 절 암살하시려고.”

“몰래 해야 암살이고, 처형에 가깝지 않나?”

“본색을 드러내십니까.”

베른닐의 안색이 검게 죽었다.

실제로도 아마 반쯤 죽지 않을까.

남들은 못 받아서 안달인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 42. 밀림 속으로 [4]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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