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2. 밀림 속으로 [3] >
헬른포드 왕국의 국경지대.
감시탑 근무자의 교대 시간이었다.
“충! 근무 중 이상 없슴다.”
“그래. 수고했다. 어여 들어가 봐.”
“그런데 오늘 저녁은 뭐였습니까?”
“맨날 그렇듯 잡탕인데, 비린내가 심하더라. 너 잡어탕 먹냐?”
“윽, 딱 질색입니다. 오늘 저녁은 조졌습니다.”
“야, 그래도 군문에 있으니 세 끼 챙겨 먹지. 이게 배때기가 불러 가지고는.”
교대하러 온 선임이 후임의 머리를 툭 쳤다.
작년 가뭄에 흉작이 들고 난 봄이었으니 군대가 아니면 세 끼를 먹는 이는 높으신 분들뿐이었다.
“그나저나, 진짜 대주기가 오는 거 아닙니까?”
“대주기는 무슨, 우리 늙은이 때에 있던 대주기가 벌써 다시 오겠냐?”
“하지만.”
후임이 한편을 흘끗거렸다.
멀리에 방벽이 눈에 들어왔다.
이웃 왕국, 페벨룬의 국경이었다.
지지대를 박고 목재로 벽을 삼아 돌을 채워 올린 방벽이었다. 빠르게 축조되면서도 단단한 것이다.
물론 유지보수가 안 된다 할 정도로 수명이 짧은 것이 흠이다만, 단기간에 올리기엔 저만한 물건도 없는 편이었다.
“저쪽에서 워낙에 유난을 떨지 않습니까.”
“나릿님들도 다 생각이 있으시겠지.”
그렇게 말하는 고참 역시 불안하긴 마찬가지였다.
사실, 방벽이며 군대의 동원 따위야 다른 때 같았으면 저것들 할 일이 없어서 힘이나 뺀다며 비웃어주고 말았을 터다.
그러나 교단의 기가 서고 성기사가 직접 참가해 경계를 섰다. 거기에 방벽에는 은은하지만 신성한 기운까지 서렸다.
교단이 나선 바에야 헛심 쓴다며 무시할 수 있는 이가 얼마나 될까.
나날이 불안함만 커져 가는 상태였다.
분명 대주기가 일어나는 것이 아닐까, 하고.
“짜식. 불길한 소리 말고.”
“그렇습-”
땡땡땡땡!
돌연 요란한 종소리가 후임의 목소리를 틀어막았다.
종탑의 청아한 소리 따위가 아니다.
일부러 잡철을 섞고 얇은 판을 여럿 붙여 최대한 날카롭고 신경을 자르는 소리를 내도록 만들어진 감시탑의 위험종이었다.
부우우-! 그 사이로 깔린 낮은 음역의 나팔 소리.
감시병의 고개가 소리를 향했다.
페벨룬 왕국의 방벽, 너머에서 오르는 연기까지.
무언가 사단이 났음을 알리는 징조였다.
* * *
애초에 두 왕국의 군대의 시야 자체가 달랐다.
헬른포드의 국경은 지난 대주기에 쓴 것을 그저 군인이 땜질해 수선한 낡은 목책이었다.
그나마도 성인 키 높이와 정도라 목책보다 두꺼운 울타리에 가까웠다.
그 뒤에 받침대를 두고 너머를 보니 애초에 경계 시야의 높이도 그 정도에 그쳤다.
그에 반해 페벨룬의 국경에는 급조한 것이나 높은 방벽을 세우고, 그 위에 감시탑을 세워 멀리 내다보니 시계의 차이가 확연할 수밖에.
그러나, 어차피 누가 먼저 알아차리냐는 그다지 중요한 일은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적을 맞이할 준비가 되었는가.
헬른포드는 한창 전쟁을 준비 중이었다.
정예 병력은 이미 비밀리에 집결해 연일 훈련을 수행했다.
이러한 때에 적의 침투 우려가 없는 대수림 방면이니 그 병사의 질도 떨어지는 판이었다.
마침내 요란한 사위를 뚫고 적이 밀려들었다.
대수림의 키 큰 풀들로부터 뛰쳐나오는 적들.
수십의 늑대 대가리가 대지를 달렸다.
눈을 한 번 깜박이면 같은 숫자가 늘어 그 뒤를 따른다.
그 과정이 연신 계속되니 새까맣게 몰려드는 것이 전부 늑대인간들이었다.
헬른포드의 경계병들이 호각을 울렸다.
군대의 준비보다 늑대인간의 돌진이 더 빨랐다.
비정상적인 속도였다.
그뿐만이 아니다.
어른 키만 한 목책을 훌쩍 뛰어넘으니 아무리 날랜 늑대인간이라 해도 쉬이 해낼 일은 아니었다.
심지어 일부는 어깨로 들이받으니 우지끈 부러져 구멍이 뚫렸다.
그리고 일부는 발톱을 빼내 휘둘렀다.
발톱에 흰 것이 은은히 서려 빛이 일어나더니, 한 뼘이나 긴 광채를 내뿜었다. 그 앞에 목책이 동강이 나 맥없이 흩어지고 만다.
감시탑 위에 번을 서던 페벨룬의 기사가 곧장 그 이변을 눈치챘다.
오러를 다루는 이가 보아 어찌 모르겠는가.
저 사악한 괴물에 손에 서린 광채가 바로 그 오러가 내는 빛인데.
늑대인간이 목책을 간단히 뛰어넘어 감시병의 목을 벤다. 허물어지는 몸통을 괴물이 주둥이로 낚아챈다.
물고 흔드니 사방에 핏물이 튀었다.
마침내 주둥이에 큼지막하니 살점을 남겨두고 남은 몸통이 허공을 날았다.
돌진하던 무리 일부가 주춤하며 그 살코기를 물고 뜯어 맛보았다.
아우우, 아우우우, 피 맛을 보고 흥분한 늑대의 하울링이 동시에 터져 나왔다.
* * *
“대주기다! 괴물들이 몰려온다!”
“실제 상황이다! 모두 전투 태세, 당장!”
“무기 챙겨! 젠장, 황늑대 십번대! 십번대!”
경계에는 실패했으나 군대의 대응은 느리지 않았다.
후선 주둔지에서 빠르게 봉화가 피어오르고, 군대가 채비를 갖춰 열을 이뤄 방어선을 이뤘다.
아슬아슬한 타이밍이었다.
주둔지의 장애물을 앞세워 방패수가 서고 창수가 그 뒤에 궁사대가 가까스로 제 자리를 찾자마자 늑대인간의 노란 눈들이 인간과 마주했다.
“거창! 그래 봐야 괴물들이다! 훈련대로 해!”
“전우를 믿어라! 늑대인간은 인간과 그리 다르지 않다! 두려운 괴물이 아니다!”
지휘관들이 독려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군대는 집단에서 그 위력을 발휘했다.
두려움에 떨던 개인이 모였을 때에 비로소 군인이 되는 것과 같이.
“물러서지 마라! 우리 뒤에 누가 있는가!”
“우리 뒤에 가족이 있다!”
방패수가 악을 지르며 격려에 응했다.
그의 머리에 스쳐 지나가는 것이 끔찍한 상상이었기에.
늑대 머리를 한 괴물이 제 가족을 찢어 잡아먹는 그러한 상상.
아주 짧은 장면이었으나 끔찍해 뇌리에 박히니, 악을 질러 털어내기 위해서.
“궁사대! 쏴!”
수백의 현이 일시에 놓아지고 화살이 날았다.
늑대인간 일부가 허물어지나 그 수는 적었다.
인간과는 달리 화살 몇 대가 숨을 끊지 못하며, 또한 그 부상의 고통으로 분노하는 괴물이기에.
화살을 맞아 죽은 짐승을 밟고 또 다른 짐승이 자리를 채웠다.
죽지 않은 짐승은 더욱 흉포한 괴성으로 속력을 높였다.
마침내 괴물들이 지척에 도달하니 방패수가 다리에 힘을 주어 충돌에 대비했다.
그리고, 쾅!
온몸을 뒤흔드는 충격. 그러나 이겨냈다.
방패수가 이를 악물며 방패를 밀었다.
평소에 밉상이던 부사수가 창을 뻗으니, 깨개갱 하는 개 울음소리가 터졌다.
할 수 있다. 순간 방패수의 자신감이 치솟았다.
순간 힘이 치솟으니, 스스로도 놀랄 만큼의 용력으로 방패를 힘껏 떠밀었다.
일순 헐거워지는 압력.
“으아아! 죽어! 죽어! 으아아!”
부사수의 목소리.
양옆으로 창이 오가니 튀는 것이 핏물이다.
쿵! 재차 마물의 돌진이 방패를 후려쳤다.
두 번의 충돌로 벌써 허리가 뻑적지근하다.
방패수가 재차 밀어내기 위해 허벅지를 부풀리는 순간이었다.
쩌적. 기괴한 소리.
대방패 안쪽으로 네 줄기 흰빛이 파고들었다.
상단에서부터 중단까지. 철제 방패를 찢어 내려간 흰빛이 방패 안쪽, 방패와 고정된 방패병의 팔뚝을 통과했다.
어? 이게 무슨. 의문과 동시에 고통이 터졌다.
“내 팔! 내 팔이!”
팔꿈치 아래가 방패와 함께 허물어진다. 그러자 남은 것은 제 팔을 붙들고 악을 쓰는 개인이었다.
그리고 그 위로, 괴물의 팔이 떨어져 내렸다.
* * *
“폐하! 폐하! 급보입니다! 대주기, 대주기입니다!”
헬른포드 국왕대리, 앙흠 왕태자가 되물었다.
“뭐라고?”
“대주기입니다! 이미 국경이 뚫렸습니다!”
“젠장, 진정 좀 하게! 그따위로 보고할 텐가?”
앙흠의 일갈에, 방위대신이 급히 고개를 숙였다.
“좋아. 이제 정신이 좀 드오? 이제 차근차근 말해 보시게나. 대주기가 일어났다고? 기어코?”
“예, 전하. 이미 방위선이 뚫려 괴물들이 영토 내에 진격 중입니다.”
“지금 놈들의 위치는? 대응은 어쩌고 있지?”
“그것이.”
방위대신의 말문이 막혔다.
앙흠의 표정이 썩어들어갔다.
“왜 말문이, 아니지, 일단 거기 너, 좌대신을 모셔오도록 해. 빨리. 대주기가 일어났다 하면 빠르게 채비해 오실 것이다.”
앙흠이 일단 좌대신을 호출했다.
급작한 상황을 앞두고 일단 왕국의 최고 귀족을 곁에 두는 것이 우선이리라.
“방위대신, 당신을 탓하지는 않겠소이다. 대주기에 대한 위험을 미리 받았으니 무시한 것이 바로 내 부덕이 아니던가. 그러니 사실대로 말해주시겠소? 현재 상황이 어떠하오.”
“송구하옵나이다, 폐하. 곧장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한층 침착해진 방위대신이 상황을 설명했다.
사실 설명이랄 것도 없었다.
대주기가 일어났고, 국경이 뚫렸다.
“현재 위치는 어떠하오?”
“현재 괴물 떼의 위치는 불명입니다.”
대수림을 따라 뻗은 숲이 울창하여 육안으로 관찰이 불가하고, 괴물이 야영이나 주둔을 하지 않으니 다른 흔적도 밖으로 보아 찾을 방도가 없다.
방위대신의 설명이 이어졌다.
“그럼, 숫자는?”
“대략 수천 이상일 것입니다.”
“수천 이상? 알 수 없지만 많기는 하다는 소리가 아니오? 괴물의 숫자도 파악할 수 없는 상황이오?”
앙흠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니지. 급보라, 상황이 언제 상황이오?”
“대략 네 시간 전입니다.”
“아직 소식이 들기엔 이른 때가 아니겠소. 그보다 먼저 각지로 보낼 대처부터 고심합시다.”
앙흠은 아직 왕세자의 직책에 있었다.
선왕이 병상에 누워 통치 중이긴 하나, 그간 절대적인 왕권을 만들어낸 수완이 어디에 가겠는가.
한 자리 공석이라 하나가 빈 다섯 대신 역시 앙흠의 지지자로 능력 있는 인물들이기도 했고.
“일단 각지에 파발을 보내 방어 태세에 들어가라 알렸습니다.”
“잘해주시었소. 페벨룬 침공은 일단 없던 일로 돌립시다. 원정사령관을 호출하시오. 일단 짜여진 군대가 있으니 막아낼 수는…… 있겠지.”
앙흠이 이를 갈았다.
막아낼 수는 있다. 다만 얼마나 피해를 입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전쟁을 준비 중이었기에 다행이라 할까.
이미 군대를 소집해 훈련 중이었으니 곧장 투입해 토벌을 치를 수 있을 터였다.
그러니 이제 남은 것은 기다림이었다.
괴물이 어디에 있는지, 숫자는 어떻게 되는지, 그 구성은 어떠한지 알아야 할 테니까.
“빌어먹을.”
새삼 이제야 속이 들끓었다.
진짜 대주기가 일어났다고?
빌어먹을, 전쟁 준비를 하더라도 대주기 방비 정도는 할 수 있었는데.
왜 그랬지? 이 내가 한심하게.
최악을 대비하는 것이 대전략의 기본인데.
내가 뭘 놓치고 대주기가 안 일어난다 확신을 했지?
젠장, 맞아. 점괘.
점괘만 아니었더라면.
빌어먹을 천문관 놈들.
앙흠이 이를 부득 갈았다.
* * *
알린 왕비가 시엔의 편지를 받았을 때, 사실 내심 그러하리라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뜬금없이 대주기라니.
그러나 왕비 자신의 납득과는 별개로, 시엔에겐 무조건적인 신뢰를 가장할 필요가 있었다.
가장 총애하여 다른 귀족들에게 본보기를 보여야 할 제일의 충신이 아니던가.
그래서 이왕 벌이는 김에 판을 키웠다.
교단을 끌어들이고, 타국에도 알려 동네방네 소식을 알린 것이 바로 그런 의도였다.
대주기가 일어나지 않으면 망신 중의 망신이 되겠지만, 그렇더라도 왕비에겐 충분한 이득이었다.
망신을 감수할 정도로 제 사람을 철저히 신뢰하겠다는 메시지를 왕국 귀족 모두에게 심어줄 테니까.
실제로 왕비가 노리는 바이기도 했다.
그런데 진짜 대주기가 일어났다.
알린 왕비가 미소를 지었다.
“한 번쯤 실망시켜도 좋았을 것을.”
“너무 유능하니 매력이 떨어지는 이라니까요.”
세필리아 공주가 말을 받았다.
알린 왕비가 혀를 찼다.
“매력이 떨어지긴. 대주기를 확신하여 알았다면 스스로 그리 주장해 여론을 만들면 될 것을. 굳이 내게 편지를 보낸 이유가 무엇이겠니?”
“어머니께서 공을 챙기시라 진상 드린 거죠. 뭐.”
“그러니 내가 어찌 안 아끼겠니. 그래도 한 번쯤 틀려 줘야, 공주 하나 안겨주기가 그림이 서는데. 세피야.”
“제 취향 아니라니까요, 어머니.”
“하여간 이상한 점만 빼닮아서는.”
왕비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누굴 닮아서 이러겠나. 전부 저를 닮아 이러지.
“그래서, 네 혼사가 말이다. 권력은 있으나 적당히 무능해서 손에 쥐고 흔들 수 있는 사내가. 흠. 레손의 꼬맹이, 차기 공왕이 유약하다던데……”
“꼬맹이요? 올해로 나이가?”
“일곱 살.”
“어린애랑 뭘 하겠어요? 게다가 사탕만 줘도 쥐고 흔들겠네. 재미도 없겠어요.”
“레스북의 새 공작도 사람이 꽤 우유부단하다지?”
“그분, 뚱뚱하다고 소문이 자자하던데요. 아무리 그래도 대륙적인 뚱땡이와는 좀 그래요.”
“물빛 제도의 선단왕이 세비를 구한다던데.”
“저 멀미 심해서 배는 못 타잖아요.”
“상단은 어떻니? 델러스타 상단이라면 키워 대륙 제일을 노려볼 수도 있겠지. 젊은 상단주가 상처한 지 삼 년이니, 슬슬 재가를 갈 때도 되었을 텐데.”
“둘째 아내면 모를까, 재가는 싫어요. 죽은 사람하곤 못 싸우니…….”
“핀랜드의.”
“핀랜드는 너무 추워요.”
알린 왕비가 눈을 가늘게 떴다.
이래도 싫다, 저래도 싫다. 기실 그 이유도 하나같이 말이 안 되는 것들이 아니던가.
“세피, 너. 하아……”
“그냥 적당히 권력 있고 적당히 허술한 사람이면 되는데요, 무어.”
“그래. 내가 잘못 생각했구나. 그냥 닥치고 내가 가라는 데로 시집이나 가련. 왕국 최초의 대공비를 왕가 말고 타인에게 넘겨줄 수도 없는 노릇인데.”
“어마마마께서 명령하신다면야 어쩔 수 없네요.”
결국 이러할 거면서 애먼 핑계는.
알린 왕비의 고심이 깊어졌다.
억지로 넘겨도 결국엔 받기는 할 것이다.
그러한 인물이니까.
그래도 영 모양새가 살지 않으니.
뭘로 책을 잡아야 딸을 떠넘길 수 있을까.
< 42. 밀림 속으로 [3]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