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1. 망령 재림 [5] >
페이발란트는 초췌한 안색이었다.
제 장기를 눈으로 확인하고 난 이후였다.
상단주가 아니라 누구라도 지칠 수밖에는.
흑마법사가 기본적으로 인체에 빠삭한 외과의의 지식을 가졌고, 시엔도 상당한 수준이었다.
그리고 트리예는 그 이상이었다.
책과 시체로 배운 지식과 실제로 산 자를 실험해 아는 이의 실력은 차이가 있었으니까.
아무리 신성 치료가 동반되었다 해도, 속에 든 것을 자유자재로 꺼내고 다시 붙이는 솜씨에 시엔도 감탄을 아끼지 않을 정도였다.
사람의 내장이란 의외로 통증에 둔한 편이니, 그 과정이 그리 고통스럽지는 않았으리라.
실상, 고통보단 공포를 주는 방식이었다.
그렇게 긴 장기 자랑이 끝나고, 트리예가 재갈을 풀었다. 페이발란트가 힘빠진 웃음소리를 냈다.
“크흐흐……”
“흠. 웃어?”
“그럼 안 웃긴가? 이리도 사악한 놈이 명예 성자라니. 천벌이 두렵지도 않느냐?”
“천벌? 내가 천신를 뵙긴 했는데. 그분께선 여전하시지. 모든 인류를 사랑하시는 분이시라.”
시엔이 제 손등을 들어 톡톡 두드려 보였다.
“이거 보이나? 성흔이란 건데, 진짜거든.”
“웃기지 마라!”
“벌써 웃어 놓고는 뭘 웃기지 말래?”
“그런 말장난이나 하자고…….”
시엔이 페이발란트의 말을 끊었다.
“고문에 굴복하지 않는 이는 둘 중 하나지.”
소속의 의무가 무거움을 아는 자.
고문보다 더 무서운 것이 있는 자.
“전자로 보이는 인물은 아닌데. 어차피 상인 놈 양심이 금화보다 무겁지도 않을 테고.”
“크흐흐, 사람 잘못 건드렸다. 네 가문, 네 가족 친지, 네 모든 것이 파멸에 이를 것이다.”
“오오, 예언에도 정통하시다? 선지자셨군.”
시엔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나도 한 예언 하는데. 들어볼래?”
“무슨 소리를.”
“가까운 미래에 네가 죽게 돼. 죽고 나면, 시체가 남겠지? 그러면 한 흑마법사가 시체를 조종해 산 것처럼 꾸밀 테고. 상단으로 돌아가면 네 시체는 아무도 없는 방에서 조용히 목을 매달 거야.”
“말도 안 되는…….”
“말이 되지. 내가 되게 만들 테니까. 그리고 나면 뭐. 스스로 목숨을 끊은 상인 하나만 남는 거지.”
“잠깐, 날 죽일 생각인가? 날 죽이면…….”
“처음부터 말했잖아. 트리예 지금 시간이 어떻게 되지? 탑 재물 조사가 너무 오래 걸리는 것도 좀 수상하지 않을까?”
“점심 때쯤 된 것 같답니다. 아, 시엔 님. 시장하시진 않으신가요? 점심을 올려드릴까요?”
“그냥 지금 끝내고 같이 먹으러 가자. 질식으로 처리해. 외상이 남지 않도록 주의하고.”
“예, 시엔 님. 아. 그럼 이걸 쓰면 되겠네요.”
트리예가 도구 한 편에 있던 가죽을 집어 들었다.
“그걸로 어떻게?”
“간단하답니다. 바로 보여드릴까요? 이걸 이렇게 얼굴에 씌우고.”
가죽 조각 같은 것이 재봉되어 눈코입 없는 복면의 형상이었다. 특이하게도 귀 부분만 트여 밖으로 나오는 식이었다.
트리예가 가죽을 뒤집어씌우곤 물병을 찾았다.
“이제 이렇게 물을 뿌리고, 마르면서 조금씩 호흡이 어려워지는 구조로 되어 있답니다. 천천히 말려 죽이는 도구라 몹시 고통스럽기도 하지요.”
“그건 꽤 마음에 드네.”
“시간이 꽤 걸리니, 점심이라도 하셔요.”
“그러지. 뭐.”
시엔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애초에 고문의 목적이 굳이 정보를 캐기 위한 것은 아니었으니까. 겸사겸사 정보를 얻으면 좋고, 아니면 뭐, 말고.
어차피 무언가 꾸미는 일이 있는 모양이었다.
눈에 보이는 것을 하나 치우고 기다리면 조만간 또 다른 녀석이 나타나리라.
그러니 굳이 아쉽게 캐묻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시엔이 등을 돌려 나가려는 참이었다.
“아웁! 아으엣읍아!”
가죽 너머의 둔탁한 외침이 시엔을 붙들었다.
“저거 뭐라고 하는 것 같아?”
“말하겠습니다! 하는 게 아닐까요?”
“흠. 일단 풀어 줘 봐.”
트리예가 가죽을 풀자, 페이발란트가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시엔이 그 앞에 다시 앉아 마주 보았다.
“생각이 바뀌었나 봐?”
“다 말하겠다, 다 말할 테니, 목숨만은…….”
“아. 설마.”
시엔이 놀란 척을 했다.
“설마 죽이겠어? 내가 입을 안 열면 살려두겠지? 그렇게 시간이 지나면 누군가 이상을 알아차릴 테고, 그러면 구하러 올 거다. 뭐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건 아니지?”
“…….”
페이발란트가 고개를 떨궜다.
긍정의 침묵이었다.
“순진하긴. 제 목숨이 얼마 남지 않은 것도 몰라? 애초에 반지를 그리 자랑스럽게 끼고 다니는 집단인데, 너 아니라도 어디서 또 찾기가 힘들려고.”
애초에 인장 반지를 대놓고 끼고 있지 않았던가.
이미 세상에 저들 말고는 알아볼 자가 없다 생각하고 있다는 뜻이다. 다른 잔당이 남아 있다면, 그 역시 자랑스레 반지를 차고 다닐 터.
그러니 그냥 눈에 띈 녀석 하나 그냥 치워버려도 아쉬울 일도 아니다.
“전부 말하겠다, 살려다오.”
“겨우 말로만?”
“내 재산, 재산도 전부 줄 터이니…….”
“쯧. 처음부터 이해를 못 했네.”
시엔이 혀를 찼다.
“지금 네가 할 일은 거래나 협상이 아냐. 애초에 내가 원하는 것이 네 고통이거든. 세상에 그 인장을 품은 이에게 절망을 안기게 하는 것이 내 사명이라서.”
“그, 그런…….”
“그러니 네가 할 일은 설득이야. 거래가 아니라. 내가 널 죽이지 말아야 할 이유를 내게 설득하고, 그게 마음을 움직인다면 받아들일 수도 있지.”
페이발란트의 안색이 한층 나빠졌다.
그제야 깨달은 것이다.
애초에 살려둘 생각이 없다.
아니, 그것보단 그저 살해 자체가 목적이었음을.
장기를 꺼내 보여준 일련의 행위가 그저 남은 시간을 때우기 위한 과정이었을 터다.
“날, 날 죽이면 안 된다. 왜냐하면…….”
“땡. 트리예. 그거 씌워. 밥이나 먹으러 가자.”
시엔이 자리에서 일어나고, 트리예가 다가왔다.
페이발란트가 기겁하며 외쳤다.
“자, 잠깐! 아직 말도 안 꺼냈는데!”
“태도가 글렀잖아. 내 마음을 움직여야 한다니깐? 벌써 말투에서부터 간절함이 모자라는데.”
“아닙니다! 간절합니다!”
“흐음. 선심 썼다. 계속해 봐.”
시엔이 다시 자리에 앉았다.
“의회는, 의회는 아주 큰 조직입니다. 제가 죽으면 철저한 조사에 들어갈 테고, 사제님께서 아무리 감추려 하신들, 언젠간 드러나고 말 겁니다.”
“의회? 네 조직을 의회라 부르나 봐?”
“예. 그렇습니다.”
“이름치곤 불분명하지 않나? 보통 무슨 무슨 의회 하고.”
“제국, 제국 의회입니다.”
“제국. 그렇단 말이지.”
시엔이 미소지었다.
늦게 돌아왔다고 여겼건만, 아직은 아니었다.
그래, 애초에 언령으로 묶인 재림이었으니.
내 돌아와 제국의 모든 것을 태우겠다 선언했으니 태울 것이 남은 때에 돌아왔으리라.
“널 죽이면 내게도 손해가 될 거다. 뭐, 의도는 좋았는데, 역시 별로 마음이 가지는 않네.”
“하, 하지만 사제님.”
“왜냐하면, 네가 무지해서 그래. 몰라서.”
“제가 무얼 모르신다는 말씀이신지…….”
“내가 굳이 네 말을 들어주는 이유는, 그래, 해충. 딱 해충이네.”
해충을 보면 누구나 곧장 때려잡았다.
불쾌하고 해가 되는 것이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해충을 아예 박멸코자 하면, 조금 더 인내심을 가질 필요가 있었다.
조용히 두고 보며 쫓아 그 소굴을 찾아 일시에 제거해야 할 테니까.
“작정하고 달려든들 내가 두려울 것 같으냐?”
“하나, 제 죽음을 자살로 꾸미신다고 하심이…….”
“내가 누구인지 알게 되면, 몸을 숨기고 수작을 부릴 게 뻔하잖아. 반지를 빼고 정체를 감추겠지. 내가 마음을 읽는 것도 아닌데.”
“누구라 하시면.”
“너, 정말로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페이발란트는 필사적인 표정이었다.
시엔이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잔챙이네. 에잉. 시간만 버렸어. 더 들어볼 것도 없겠다. 그냥 치우자.”
“예, 시엔 님.”
“잠깐, 잠깐만 제 말을 들어주십시오! 아는 것을 전부 말하겠습니다, 그러니 제발……!”
“좋아. 뭐. 마지막 기회라고 치고.”
페이발란트가 두서없이 정보를 마구 쏟아냈다.
제국 의회.
보통은 의회라 부르며 제국 의회라고 부르는 일은 거의 없다.
의회의 구성원 외의 인물에게 그 이름을 꺼내서도 안 된다.
의회는 점조직이라 서로를 모르나, 인장 반지를 통해 알아볼 수는 있다.
이는 각계각층에 흩어진 의회 구성원이 충돌하는 일을 막기 위함이다.
그러나 반지를 통해 알아본다 한들 사적인 만남을 가져서는 안 된다.
의회는 막대한 재화, 그리고 강력한 암살자들을 보유하고 있다.
금과 칼.
사람을 휘두르는 가장 강력한 무기를 동시에 갖췄다.
의회는 핏줄로 유지된다. 페이발란트도 아버지께 물려받은 자격이다.
다만, 대의원이라 불리는 수장급 인사의 추천으로 들어오는 이도 있다 들었다.
심연탑을 노린 것은 의회의 지령이었다.
정확히는 심연탑과 그 신물이며, 그 외의 재물은 페이발란트 개인의 전리품이다.
특히나 심연탑의 서책은 의회에서 전량 비싸게 구매하기로 했다.
그래서 전대 탑주에게 오랫동안 공을 들였다.
여자를 붙이고 도박에 재미를 들리게 했으며, 그 결과 막대한 빚을 지우고 협박과 회유를 통해…….
“잠깐. 전대 탑주란 녀석이 널 도왔다고?”
“예, 일이 잘되면 빚의 탕감은 물론이거니와 금화 오만 개를 주겠다 했습니다만.”
“그놈. 지금 어디에 있어?”
“탑의 신물과 대출 계약서를 받고 나선…….”
페이발란트가 눈치를 보며 말끝을 흐렸다.
볼일 다 보고 처리했다는 뜻이었다.
“곱게 죽었나?”
“제가 한 일이 아닙니다! 의회의 전달자, 그놈이 취미가 고약해 산 사람의 회를 뜨는 것을 취미로 하는 바람에…….”
“곱게 안 죽었다고?”
시엔이 고개를 끄덕였다. 잘 죽었네, 그 자식.
“네가 한 일 중 유일하게 마음에 드는 일이네.”
“그렇습니까? 참으로 죽일 놈이었지요.”
페이발란트가 반색하여 아부를 붙였다.
시엔이 웃으며 아부를 받았다.
“너도 마찬가지니까 헛소리는 말고.”
“예. 헛소리 않겠습니다. 계속 말씀드리자면…….”
그 외엔 자질구레한 정보들뿐이었다.
페이발란트 상회의 근황과 부정들. 경쟁 상회의 약점. 친한 인사와 영향력.
그로 인해 시엔이 얻을 수 있는 것들…….
저를 이용해 달라는 애원이나 매한가지였다.
그러나 상인 하나 거둬 봐야 이득을 볼 것이 금화 말고 또 있으랴.
금화야 많을수록 좋다고 해도, 이미 가진 재화가 충분한 상황에서. 굳이?
“됐고. 인장은 가진 놈이 또 있던가?”
“제 상단이 큰 편이 아니라서인지, 아직까진…….”
“그래? 결국, 뭐. 트리예, 슬슬 배고프네.”
“예, 시엔 님. 식사하러 가시지요.”
트리예가 가죽을 들어 올렸다.
“잠깐, 잠깐만! 잠깐만요! 제 말을…….”
“아깝네. 핏줄로 이어진다는 소리만 안 했어도. 입이 방정이라더니. 제국의 피를 이었다고? 그러면 어쩔 수 없는 거라.”
“잠깐, 다 말했습니다, 다 말했다고요!”
“그나마 내가 베풀 것은, 네 자식의 처우를 보류하겠다는 약속뿐이로구나. 두고 보아 너의 자식이 반지를 끼지 않는다면 계속 살 것이다.”
“제발, 게다가 저는 아직 자식이 없습니다!”
“아. 그러냐? 그럼, 뭐.”
시엔이 뺨을 긁적거렸다.
네 자식이 제국의 피를 모르고 산다면 내 기꺼이 용서하겠노라.
그것이 시엔에게 얼마나 큰 결심이었는지 페이발란트는 결코 이해할 수 없으리라.
자식이 없다고. 그러면 어쩔 수 없지.
* * *
페이발란트가 어기적어기적 걸음을 옮겼다.
한 걸음 한 걸음 뗄 때마다 중심이 흔들려 기우뚱거리는 것이, 기괴하기 짝이 없는 모습이었다.
시엔이 인상을 구겼다.
시체 조종은 흑마법의 대표적인 주문이다.
그저 시체를 일으켜 옮기는 정도야 누구나 할 수 있겠지만, 산 사람처럼 보이게 만들기는 매우 어려웠다.
“이거 생각보다 잘 안 되네.”
“이전에 안 쓰시던 주문이세요?”
“즐겨 쓰기는 했는데, 굳이 자연스럽게 보일 필요는 없었으니까. 보통은 이렇게.”
시엔이 손을 흔들자, 페이발란트가 네 발로 바닥을 박차며 뛰쳐나갔다.
사람이 하는 모습으로는 기예에 가까운 꼴이다.
어느 순간 펄쩍 뛰어오르며 팔을 휘두르고 다시 바닥에 떨어지며 한 바퀴 굴러 자세를 잡았다.
“전쟁에 쓸 때는 이런 게 효과적이니까.”
시엔이 덧붙였다.
사람의 병기술이란 사람을 상대하도록 만든 것.
그러니 시엔이 시체를 짐승처럼 부렸다.
실제로도 대단히 효과를 보았더란다.
평범한 인간의 사체라도, 시엔이 붙어 움직이면 어지간한 기사 하나 정도는 기습해도 승산을 볼 정도였으니.
다만, 문제는 거기에 너무 익숙해진 탓이었다.
“제가 나서도 되지 않겠어요, 시엔 님?”
“곧 흑마법사라 알려질 텐데, 만에 하나 가능성이라도 주고 싶진 않아서.”
시체 조종은 흑마법사를 아는 이라면 곧장 떠올릴 수 있을 테니, 상단주가 미리 죽고 나서 목을 매었다 이야기가 나오면 곤란하다.
그러니 신성을 피워 모른 척할 수 있는 시엔이 직접 나서는 수밖에는.
시엔이 툴툴거렸다.
“애초에 세올 녀석이 할 수 있으면 되는데.”
세올이 딴청을 피웠다.
웬일인지 트리예가 세올의 편을 들어주었다.
“인간과 같은 고위 정신체에겐 빙의할 수 없으니까요, 세올 선배는.”
“용에도 들어갔던 녀석이 사람에 못 들어가고.”
“그야 산 용이 아니라 죽은 용이라 가능했, 음?”
“오?”
“아…….”
세올이 울상을 지으며 변명을 붙였다.
“저, 선배님. 아무리 리치라곤 하나 그래도 이 세올은 여인이라구요? 사내의 몸에 깃들라 하시는 건 조금…….”
< 41. 망령 재림 [5]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