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1. 망령 재림 [2] >
시엔의 속이 복잡해졌다.
제국의 인장 반지가 세상에 한두 개쯤 남아 있을 수도 있겠지. 그렇다면 엄청난 골동품일 테고.
시엔이 보기에 상인의 반지가 그리 낡은 물건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기나긴 시간 동안 얼마나 관리를 잘해야 천 년 묵은 반지가 멀쩡하게 보일까.
그러니 과거로부터 남은 유물은 아닐 테고.
새로 제작되었다고 치면, 누가? 어째서?
게다가 인장 반지는 그저 문양이 박힌 쇳덩이다.
그 문양이 상징하는 배경이 귀한 것이지, 자체로 귀금속으로 빛나는 액세서리가 아니었으니까.
그런 인장 반지를 찬 상인이었다.
더군다나 심연탑을 집어삼키려 하고 있다면, 이게 우연인가?
어쩌면 우연일 수도 있다.
시간이 그리 지났음에도 사람의 취향은 결국 거기서 거기가 아니던가.
원과 번개, 매 셋이 모두 멋진 것이니 모두 모아 인장을 만들었다 하면.
상인이 제 상단의 인장으로 만든 문양이 우연의 일치로 같은 모양이 될 수도 있을 터다.
시엔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럴 리가 있나.
뭐. 어쨌든 고마운 일이었다.
아직 세상에 지워야 할 놈이 남아 있는 것 같으니.
“저, 선배님……?”
“짐이나 싸. 이사 가야지.”
“이사라 하시면.”
“내 영지에 새로 지어줄 테니 이사해. 어차피 별거 아닌 재산이야 그냥 줘 버리고. 금화 오십만 개 대신 낡아빠진 수도회 건물 하나 받겠다는데야.”
“하지만 선배님. 선배님들께서 쌓아 올린 역사가 바로 여기에 있는데, 저희가 어찌 버리고 갈 수 있단 말입니까.”
시엔이 말을 잘랐다.
“됐고. 몇 푼 안 되니 줘 버려. 어차피 중요한 건 심연탑 그 자체지 오래된 마탑 따위가 아니니까.”
재스타가 눈을 끔벅거렸다.
중요한 것은 심연탑 그 자체다.
아직 젊은 마탑주의 가슴 속에 닿는 한 마디였다.
가난하고 궁상맞은 마탑. 제자라고 받는 것들 셋 중 둘은 결국 심연탑이 무언지도 모르고 퇴마사로 살았다.
연구는커녕 먹고 살기 바빠 허덕이는 생활이다.
이런 때에 매양 원망하던, 그러나 위대한 선배가 하는 말이니 어떤 위로처럼 닿았던 탓이었다.
겨우 제 색을 되찾았던 얼굴이 다시 붉게 달아올랐다. 감격해 울먹거리는 낯이었다.
“맞습, 맞습니다. 중요한 건 심연탑 그 자체지요. 대륙 어디에 있더라도 저희가 있는 곳이 심연탑일 테니. 흑마법사가 모인 곳이 바로 심연탑…….”
시엔이 인상을 찌푸렸다.
“무슨 개소리야?”
“예?”
“부탑주 지팡이 있지? 흑단목에 흑요석 박힌 거. 그거나 가져와. 그림자 탑만 가져가면 그만이지.”
감동이 와장창 깨져나갔다.
재스타가 다시 물었다.
“저, 선배님? 그림자 탑이라니요?”
“역시 모르지? 그럴 것 같더라. 이전에 세올한테 서고가 실전되었느니 할 때부터 이상하다 생각을 했어야 하는데. 그 날려 먹기도 힘든 걸 용케 날려 먹었다 했더니.”
“그, 고견을 청합니다.”
“심연탑이 겨우 구덩이에 건물 하나 띄워놓고는 흑마법사의 자부심이니 했겠나. 기둥 위에 평평한 건물은 축대야. 그림자 속 심연으로 뻗어 나간 탑. 그래서 심연탑이지.”
“저는 처음 듣는 말입니다.”
“원래 진서고에 책장 한 칸이라도 마련한 고위급 흑마법사들에게만 내려져 왔으니까.”
“진서고라 하시면 그건 또 어떤…….”
시엔이 그것도 모르냐는 양, 톡 쏘았다.
“됐고. 지금 가볼 테니 따라와 보던가.”
* * *
마탑은 오랜 시간 마법사가 개축을 계속한 당대 마법 시설의 정수였다.
다른 마탑이 역사와 같은 상징을 가진 것에 비해 심연탑이 심심하다고 하는 말이야 으레 듣는 소리기도 했다.
젊은 흑마법사는 그 말에 분개했다.
그리고 노련한 흑마법사는 그저 비웃을 뿐이었다.
심연탑의 정수는 그딴 잡기와는 비교가 안 되는 고등한 시설이었기에.
겨우 인공섬이나 큰 봉화대나 거탑, 땅굴?
마법사가 아니라 기술자들을 데려다 놓아도 만들 수 있으리라.
그러나 심연탑은 다르다.
심연탑의 그림자 탑이 바로 그 마법의 극의였다.
기술이 아니라 위대한 마법적 성취. 결국 말장난에 불과한 심연탑이 흑마법사의 자존심으로 남았던 이유.
그림자 탑은 개인 심상 세계의 조각을 모아 만든 허수 차원에 존재했으며, 이는 아예 새로운 세상을 창조했다 해도 과언이 아닌 업적이었다.
그림자 탑의 출입 자격은 간단했다.
고위 마법사의 능력을 갖춰, 진서고를 확장시킬 수 있어야 할 것.
제정신을 분할해 허수 차원의 공간을 넓히는 일로, 책장을 마련한다고 표현하곤 했다.
어둠 호수.
역대 탑주들이 철저히 지켜왔던 수칙 하나가 바로 지금 깨졌다.
마탑 출입구에 불을 피워 절대 꺼지게 하지 마라.
시엔이 당장 그 흉물스러운 횃불을 치우라 하니 재스타가 마지못해 그 명에 따랐다.
시엔이 보기엔 어둠 호수가 비로소 제 모습을 찾았다. 낮에도 불구하고 칠흑같이 어두운 호수.
과거엔 반딧불 병으로 요요한 한 줄기 길을 만들어 놓았지만, 지금은 그조차 없어 캄캄했다.
“넘어지지 말고. 조심조심 내려와.”
시엔의 목소리를 따라, 재스타가 그 뒤를 따랐다.
본탑에서 어둠 호수로 통하는 유일한 탑 출입구. 횃불을 끄고 나니 온통 어두워 눈에 보이는 것이 없었다.
그저 발로 조심조심 아래를 더듬어 한 칸 한 칸 계단을 내려갈 뿐.
그렇게 한 칸. 또 한 칸. 그리고 또 한 칸…….
그러다 문득 재스타가 위화감을 느꼈다.
내려가는 계단이 이리도 많았던가?
기둥이 높은 편이기는 해도 결국 한 층이다. 이리 줄창 아래로 또 아래로 내려갈 정도는 아니었는데.
그리고 어느 순간, 빛이 밝으며 거대한 서고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사방으로 펼쳐진 책장과 빽빽하게 꽂힌 책들. 책이 내는 특유의 종이 향이 기분 좋게 코를 간질였다.
“선배님, 여기는……!”
“그림자 탑. 진서고야. 본래 좋은 저서가 나오면 베껴다 필사본은 본탑 서고에, 원본은 여기에 보관하게 되어있으니까.”
시엔이 중앙에 놓인 큰 원탁으로 다가갔다.
한 때는 심연탑 중진들의 회의가 이루어지던 그 원탁이었다. 허수 차원으로 고정한 것이라, 아직도 반짝반짝 잘 닦여 광을 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위에 편지가 한 장.
시엔이 편지를 집어 들었다.
[못난 제자에게, 위대한 스승이.]
익숙한 필체. 체감으로야 그리 먼 과거도 아니다. 못된 스승의 글씨를 잊기에는 턱없이 모자란 시간이기도 했고.
[이 편지를 읽을 때면, 네 녀석이 다시 심연탑을 찾은 이후이리라. 너무 늦지 않았으면 좋겠다만.
돌아가는 꼬라지를 보아하니 몇백 년 안 가서 아예 망해버리고 말겠다 싶은데. 그래서, 망했더냐?
망했으면 다시 세워야지. 고생 좀 해라.]
시엔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아니, 꼬라지가 뭡니까. 꼬라지가.
어쨌거나 실력 없는 스승은 미래를 내다보는 눈도 없었던 모양이었다. 몇백 년은 무슨. 아직 그래도 반만 망했구만.
[심연탑에서, 아니, 우리 말고도 각 마탑에서 금지된 연구로 쫓아낸 것들, 그리고 썩은 인성으로 이 새끼는 안 되겠다 싶어 내보낸 놈들이 전부 어디로 가 있는 줄 아느냐?
그 쓰레기들이 한데 모였던 곳이 제국이었다.
그리고 그놈들이 거기서 뭘 했겠느냐.
하지 말라던 짓은 전부 하고 있었느니라.
그 연구 중에 매우 위험한 것들이 있었다.
어느 정도냐면, 다섯 마탑의 수장들, 그리고 대륙의 위명을 떨친 마도사들이 전부 모일 정도로.
그게 뭐냐고? 나도 모른다.
회의가 십 년만 늦게 열렸어도 이 위대한 스승이 그 의석에 자리를 배정받았을 텐데.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니냐?]
시엔이 생각하기에 십 년이 아니라 백 년이라도 스승 수준엔 힘들지 않았을까 싶었다.
백 년 지나 스승이 성취를 이룰 때쯤에는, 새로 입문한 천재들이 다시 저 위를 차지하고 있을 터.
[회의의 결과, 흑마법을 역사에서 지우기로 했다.
가장 위대한 학문이 가장 위험한 무기가 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제국의 연구가 심연탑의 연구와 합쳐졌을 때, 그야말로 세상에 재앙을 푸는 일과 마찬가지라는 결론이 나왔다더라.
납득이 안 되고, 해서도 안 되는 일이다.
그러나 하늘 같은 선배님들께서 까라고 하시는데 뭐, 까야겠지.
언제까지?
네가 돌아올 때까지.
그래서 진서고를 남겨두되, 아예 아는 이가 없게 만들기로 했다. 나중에 되돌아온 너 혼자만 알 수 있도록.
그러니 후배놈들이 멍청하고 아둔하다 너무 핍박하기는 말 거라. 남겨준 것이 없는데 저들끼리 잘 산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 아니냐.
오히려 이 선배들의 결정으로 괴로울 터이니 잘 보듬어 다독여 줬으면 한다.
이미 각 마탑과 이야기가 된 사항이다.
탑주가 탑주에게 전해, 언젠가 다섯 번째 마탑이 되돌아올 것이라고.
좀 음침하고 부정하기까지 한 녀석들이나 나쁜 놈들 아니니 환영하고 받아들이라 대대손손 전해주기로 했다던데.
그간 우리는 제국의 잔당과 유산을 태울 것이고.
네가 돌아올 때쯤이면 심연탑이 부활해도 그놈의 위험한 연구인지 뭔지도 걱정할 필요가 없을 테니.
아, 어차피 제국은 망했다. 워낙에 패악질이 심했어야지.
네가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고 나니, 대륙의 모든 왕국이 일시에 전쟁을 선포해 짓밟아 부숴버렸다.
왜, 약오르냐?
꼴 좋다. 이미 망했는데 네가 어쩔 거야?
이 독하고 미련해 빠진 얼간이 같으니. 어차피 할 일도 없고 심심할 터.
망한 마탑이나 다시 일으켜 세우면 될 것이야.]
그리고 여백뿐이었다. 이게 끝인가?
아직 편지가 한 장 남았기에, 마저 펼쳐보았다.
[아. 네가 언제 돌아오나 내기도 했다.
가흐안 선배 80년에 금화 311,250개
마인스 선배 100년에 금화 222,300개
추아이 지 선배 120년에 금화 115,500개
………
………
가으람 선배 470년에 금화 314,706개
하나 선배 500년에 금화 500,000개
다들 자기 죽고 나서 일이라고 아주 수십만 닢씩 걸어대는데, 어차피 그때 누가 이겼다 알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굳이 이걸 적어두라 하시는 이유를 모르겠다.
나는 크게 천 년에 걸었는데, 된통 혼났다.
천 년 지나서 돌아오면 심연탑이고 뭐고 가루가 되어있는 거 아니냐면서. 부정 타는 소리 한다나.
아니, 어차피 모를 내기에 한마디 더 하면 어때.
그리고 오백 년이나 천 년이나.
그쯤 되면 그게 그거지. 그걸 가지고 아주……. 후배는 서러워서 못 살겠더라. 내가 이 짬 먹고도 참나.
추신.
미래는 즐거우냐? 그럼 좀 웃고 살아라.]
시엔이 키득키득 웃음을 터뜨렸다.
고약한 늙은이. 천 년이 뭐야? 천 년이.
그래도 막판에 선배님들 한 번 이겨 먹기는 했네.
“선배님?”
“여기 있네. 심연탑이 지워진 이유.”
시엔이 선뜻 편지를 건넸다.
어차피 보여주지 못할 것도 아니다.
편지를 건넨 시엔이 원탁의 상석으로 향했다.
매번 볼 때마다 어색한 자리이기도 했다.
원탁의 상석이라니. 모두 평등한 입장에서 회의를 하자 만들어진 것이 원탁이 아니었던가?
그러나 굳이 한 자리만 금박으로 칠해 화려하게 장식해 놓았으니 곧 마탑주가 앉는 자리였다.
탑주의 자리 앞에는 움푹 팬 공간이 있었다.
바로 탑의 신물, 밤빛 천체를 올려놓는 자리였다.
그저 권위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
개인적으로야 겸사겸사 권위를 위해서이기도 하리라 짐작은 가도.
밤빛 천체는 그림자 탑의 열쇠 비슷한 물건이다.
허수 차원의 좌표를 고정하고 현상 세계와 잇는 제어 도구였으니까.
굳이 비싸지도 않은 보석을 탑주의 신물이라 귀히 여긴 것이 아니었으니까.
그 신물은 지금 수상한 상인의 손에 있었다.
그러나 현명한 자는 항상 예비를 준비하는 법.
시엔이 부탑주의 지팡이를 원탁 위에 올려놓았다.
지팡이에 달린 커다란 흑요석이 움푹 파인 공간에 놓아두고, 심장으로부터 어둠을 풀어 밀어 넣었다.
시엔의 심상 세계에 새로운 통로가 열렸다.
개인의 정신을 모아 한 차원을 이루고, 한 사람이 그와 통하는 통로를 열어 좌표를 고정하니 곧 열고 닫는 것이 그 주인의 마음대로였다.
“일단 그림자 탑은 챙겼고.”
재스타의 표정이 복잡했다. 시엔이 그 얼굴을 보니 대충 그 속이야 알 법도 했다.
그 고생을 한 것이 결국 누구의 잘못이라 할 것도 없으니, 갈 길 없는 원망이 어떤 기분이랴.
굳이 잘못한 이를 꼽으라면 제국이겠지만.
“선배님, 그러면 저희는 이제 다시 세상에 나서게 되는 겁니까?”
“글쎄. 아직은 이르고. 조만간.”
제국의 인장을 보지 못했더라면 굳이 시간 끌 것 없이 곧장 심연탑을 세상에 내놓았을 터다.
그러나 이미 보았고, 또 심연탑을 노렸다.
편지의 내용과 더하면, 아직은 이른 판단이리라.
“일단, 탑의 재산부터 여기로 옮겨야지. 그림자 탑의 연결을 끊고 새 마탑과 이으면 그만이니.”
“아! 그런 방법이 있으셨군요!”
재스타가 손뼉을 쳤다.
페이발란트 상단이 용병으로 탑을 둘러싸 재물이 밖으로 나가지 못하도록 막는 상황이었다.
숨겨진 공간에 재산을 감출 수 있다면야, 그저 땅과 빈 건물만 넘겨주고 마는 일일 테니까.
< 41. 망령 재림 [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