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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작가의 망령재림-211화 (207/268)

< 42. 망령 재림 [1] >

재스타는 아직 젊었다.

흑마법사의 경지도 결국 그 정도였다.

물론, 탑주가 가장 강대한 마법사일 필요는 없다.

강력한 마력이 곧 권력이 된다면 화염탑의 방화광 녀석들과 다를 바가 무엇이겠는가.

마탑주에게 필요한 능력은 책임감과 애정이다.

그 외에 갖춰야 할 지혜와 지식은 다른 이에게 빌려도 되는 일이었다.

그러나 책임감과 애정이야, 이제 얼굴을 안 시엔이 어찌 알겠는가.

그러니까, 이 까마득한 아래의 탑주 녀석은 능력은 별로 없으면서도 젊어서 튼튼하다는 뜻이었다.

대가리 박는 정도야 능숙하게 해낼 정도로.

“꽤 편해 보이네?”

수정구를 가져와야 하나?

시엔이 잠시 고민했다.

그러나 수정구는 너무 심한 처사가 아닌가. 일단 위험하기도 하고.

중심을 못 잡으면 넘어질 수밖에 없고, 팔을 뒤로 두르고 있으니 곧장 머리를 땅에 받는 일이 허다했다.

시엔이 너무 이를 갈았지 않던가.

수정구까지는 좀 그렇고.

시엔이 대신 신성을 쫙쫙 뿜었다.

“어억, 서, 선배님 신, 신성을…….”

“왜. 신성 뿜는 흑마법사 처음 보나?”

시엔이 여상히 말했으나 보통 일이 아니었다.

누구에게나 머리털 나고 처음 보는 기사이리라.

서로 간섭하여 불안정한 에너지들이었다. 그게 한 몸에 담기다니.

“어떻게 그게, 가능한, 일이신지…….”

재스타가 머리를 땅에 박은 채로 물었다.

참으로 마법사다운 태도였다.

암. 마법사라면 어떤 상황 속에서도 지식을 추구해야 하는 법이지.

“웁. 저, 선배니임…….”

그러나 그도 잠시였다.

신성이 일어 흑마법사가 속에서부터 불안정하게 흔들리는 마력을 주체하지 못했다.

속이 쓰리고 메스꺼우며 체한 마냥 답답하겠지. 더불어 그게 조금 더 계속되면 찌를 듯한 두통마저 함께 찾아온다.

그래도 건강에 이상이 있을 것은 아니다.

수정구보다야 낫지.

당하는 재스타에겐 죽을 맛이었다.

애초에 수정구와 신성 샤워 중 택하라면 기꺼이 전자를 택했으리라.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집무실 안이 쿰쿰한 땀내로 차올랐다.

생각해 보니 집무실은 항상 이러했는데.

창이 한 면이라 환기는 잘 안 되고, 그러면서도 탑 내에서 벽이 두꺼워 방음이 잘 되는 방이었다.

땀내가 배어 사시사철 날 정도였으니, 집무실에서 대가리를 박은 고위 흑마법사가 한둘이 아니리라.

그러나 방음이 탄탄한 곳에서 탑주와 둘이 그러고 있으면 누가 알겠는가.

인제 보니, 후배들 몰래 대가리를 박은 선배들의 자존심을 지켜주기 위한 설계였다.

그때, 누군가 문을 쾅쾅 다급히 두드렸다.

일어나. 시엔이 빠르게 명령했다.

아무리 괘씸한 놈이라도 탑주는 탑주였다.

머리 박고 있는 꼴을 그 아랫것에게 보여줄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탑주가 벌떡 일어나고, 시엔이 일단 땀부터 훔치라고 다시 말하려던 때였다.

갑자기 집무실 문이 벌컥 열려버리고 말았다.

“이보시오, 탑주! 사람이, 음, 크흠.”

“이러시면 안 됩니, 읏.”

장소에 어울리지 않는 중년인이었다. 그러니까 옷차림이. 기워입는 흑마법사들과 달리 차림새부터가 상당히 부유한 이로 보였다.

그리고 그 소매를 붙잡고 말리려는 꼬맹이 하나.

딱 보니 기세 좋게 들이닥친 이와 그걸 말리려던 아이다.

그렇게 들어오긴 했는데, 집무실이 습하고 퀴퀴하니 둘 모두 하려던 말을 잊고 잠시 눈살을 찌푸렸다.

“거, 운동하려면 밖에서 하는 게…….”

“여기까지 무슨 일이십니까, 상단주님.”

재스타가 애써 근엄한 표정으로, 짐짓 분노한 목소리로 물었다.

미역처럼 젖어 달라붙은 머리칼에 일그러진 표정이 사뭇 위협적이었다.

“외인은 수도회에 들 수 없다 말씀드렸습니다만. 여기에 와 계시는군요. 이번에는 넘어가 드리겠습니다. 돌아가시지요.”

호오. 제법인데. 제법 위엄이 있다.

시엔이 재스타를 다시 봤다.

그나저나 상단주라.

상단주라면 어차피 다른 이가 아니리라.

페이발란트 상단이라 했던가. 금화 오십만 개의 독촉을 위해 직접 찾아온 모양이었다.

외인을 탑에 들일 수 없다며 지금까지 막아왔다는 사실도 알 수 있었고.

상단주가 움찔했다.

그러나 그도 잠시, 붉어진 얼굴로 언성을 높였다.

“언제까지 그런 내규 같은 핑계로 넘어갈 셈이오? 당신들 채무자야, 그것도 악성 채무자! 왕국법에 이미 집행이 들어가고도 남았어! 오히려 지금까지 참아준 것을 감사해야 하는 게 아니오?”

“그, 그건.”

악성 채무자. 왕국법. 집행.

곧장 듣기에도 무시무시한 단어들에 탑주가 찌그러지고 말았다. 기세가 오른 상인이 말을 이었다.

“게다가 외인을 들일 수 없다고 하셨소? 내 손님이 찾아와 탑에 들었다고 전해 듣기로 어이가 없어 이렇게 달려온 것이 아니오!”

“그, 저분께선 외인이 아니신데…….”

왜 날 물고 늘어져? 시엔이 눈썹을 까닥거렸다.

본래는 탑에 외부인을 들일 수 없다고 막아왔으나, 시엔이 곧장 들어오는 것을 보고 그저 변명이라 판단했다는 것이다.

그 판단에 한몫했으니 지켜보기만 할 수도 없다.

본인을 곁에 두고 지칭해 말하는 일부터가 예의에 어긋나기도 했고.

“사람을 두고 그리 말하시니 민망하게 되었군요.”

시엔이 핀잔을 주자, 상인이 급히 허리를 꺾었다.

상인 다운 빠른 태세 전황이었다.

“아, 이런. 무례를 끼쳤습니다. 머리에 열이 올라서 그만. 죄송합니다. 그 성함이…….”

“시엔 티란디스입니다.”

“오오! 티란디스 가문이라면 페벨룬 왕국의 명문이 아닙니까?”

“알고 계시는군요?”

“솔직히 가문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일이나, 대륙의 상단을 이끄는 이가 티란디스의 이름을 모르겠습니까?”

티란디스 상단이 대륙에서 손에 꼽히는 목재상이었다. 규모로는 더 큰 상단이 얼마든지 있었지만, 가장 좋은 목재를 취급하는 상단은 하나뿐이었다.

세계수의 영험함이 깃든 목재를 인간이 구할 방도가 티란디스 외에 달리 있겠는가.

“수도회장이 외인이 아니라 한 말이 거짓이 아니네요. 여기는 귀신 쫓기가 용하다 소문이 난 수도원이고. 제가 명예라 하나 교단의 성자로 이름을 올렸으니.”

시엔이 손끝에 신성한 광휘를 피워 보였다.

신성의 따사로운 광채는 다른 빛과는 달라 흉내를 낼 수 없다. 사람이 보면 저 밝음이 이로운 것이다 곧장 아는 것이니 누가 보아도 신성하다 했다.

상단주가 어색하게 웃었다.

이리되면 제가 강짜를 놓은 셈이 되어버리니까.

시엔이 외인이 아니라 직접 밝히지 않았는가.

시엔 입장에서 어차피 거짓말도 아니다.

시엔은 외인이 아니고. 광명 수도회가 귀신 쫒기로 유명한 것도 사실이고, 명예 성자로 인정받은 것도 맞는 말이니까.

시엔의 지원에 힘을 얻은 재스타가 따졌다.

“그러게 제가 외인이 아니시라 하지 않았습니까.”

“큼, 흠. 이거 참. 실례했소이다. 하지만 말이오, 회장도 너무한 것이 맞지 않소? 내 언제고 이렇게 담판을 지으리라 했으니 이제라도 할 말은 해야겠소이다.”

“지금은 먼저 찾아오신 분이 계시니…….”

재스타가 시엔을 바라보았다.

지금을 넘기고 보자는 호소가 담긴 눈빛이었다.

그러나 시엔이 의뭉스럽게 말을 돌렸다.

“저도 이 정체 모를 수도회에 무슨 일이 있는지 알고 싶기도 한 참이라서.”

“아. 그런 이유로 오셨군요! 잘 되었습니다. 사제님도 한번 들어보십시오. 아주 고약한 일입니다!”

상단주가 알았다는 손뼉을 쳤다.

수도회라 이름 붙은 곳에 사제가 한 번씩 들르는 이유가 여럿 있겠지만, 마냥 좋은 뜻만은 아니다.

혹여 이단이 아닌가 해로운 일을 벌이지 않는가 감시를 겸해 기습하듯 찾아가는 때가 많았으니.

“십 년 전, 이전 수도회장이 광명 수도회의 토지와 건물을 담보로 잡아 금화 오십만 개를 대출했습니다.”

“오십만 개요? 제가 세속에 걸쳐 있으니 아는 바인데, 겨우 이런 시설과 토지를 담보로 잡는다고 해도 어림없는 금액일 텐데요?”

“그것이, 이전 수도회장에게 크게 도움을 받았던 적이 있었던지라. 그 이후로 절친한 지기로 지내온 세월이 이십 년에 이릅니다.”

상단주가 보기에 이전 수도회장이 사기를 칠 인물은 아니었다고. 인품이 훌륭하고 책임감이 대단한 사람으로 알았다나.

그러니까, 이전 수도회장과 큰 친분이 있었다는 소리였다.

친구의 간곡한 부탁에 못 이겨 턱도 없는 담보를 형식적으로 잡고 큰돈을 빌려주었다고.

“그, 사제님께서도 알고 계시겠지요? 오십만 닢이 얼마나 큰 금액인지. 심지어 저는 이자를 받고자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잠적했다는 거네요.”

“예. 뼈아픈 불찰이기도 합지요. 제가 사람을 잘못 봐도 단단히 잘 못 본 모양입니다.

이미 손실은 어쩔 수 없는 노릇이고, 그러하니 담보라도 거둬들이려고 합니다만, 지금 회장께서 너무 협조를 해주지 않으시니.”

“협조라 하면요?”

“건물의 재물을 파악하고 압류하는 일인데, 회장이 외인을 안에 들일 수 없다 강짜를 부리며 계속해서 시일만 미루고 있지 않습니까!”

“아아. 그래서 밖에 용병들이 지키고 있었네요.”

“미루는 이유가 무엇이 있겠습니까? 물론 그 심정이야 이해는 됩니다만. 수도회 분들도 피해자들이겠습니다만, 제가 입은 피해가 너무나 막중하니.”

상인은 숫제 애원하는 태도였다.

그러니까, 고자질이었다.

시엔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알았으니 오늘은 일단 물러나 주세요. 제가 수도회장과 할 말이 많을 것 같네요.”

“아유. 잘 좀 부탁드립니다.”

상단주가 굽실거리며 자리를 떴다.

달칵. 집무실의 문이 닫히자, 재스타가 후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나선 더운 듯 제 섶을 펄럭거리려다, 땀에 푹 젖어 달라붙은 천조각에 눈살을 찌푸렸다.

“선배님, 죄송하지만 좀 씻고 와도…….”

“탑에 돈 될 만한 게 뭐가 많나? 압류를 막게?”

“그런 게 있겠습니까. 그게 아니라 서고의 서적들 때문에 그렇습니다. 세상에 없던 것인데, 바깥으로 나가서는 안 되는 지식이 아닙니까.”

“아, 서고가 있었지. 거기에 얼마나 있는데?”

“현재 장서가 사천 권 정도 됩니다.”

“사천 권? 꽤 많네? 세올이나 트리예가 말하기로 기존 저서가 거의 다 소실되었다고 들었는데.”

심연탑의 장서가 시엔 때에만 오천 권 정도였다.

개중 천 권 정도의 손실이라면, 물론 그도 뼈아픈 손실이기는 했다.

그래도 그 정도라면, 거의라고 강조할 정도는 아닌 것 같은데.

“그, 기존 저서는 거의 소실된 것이 맞습니다.”

“사천 권이라며? 나 때가 오천 권이었는데.”

“선배님, 그 이후로 시간이 많이 흘렀습니다.”

“아. 맞네.”

마탑의 책이 계속 늘어나니, 그 길고 긴 시간을 다시 채워 지금에야 사천권이었다.

그야말로 기존 장서는 홀라당 날려먹었다는 뜻이 아닌가.

시엔이 인상을 찌푸렸다.

“장서가 사천 권이라면 셈이 맞지.”

“예?”

“금화 오십만 닢. 대충 토지와 건물, 밤빛 천체를 해서 오만 개쯤. 그럼 남는 건 사십오만인데.”

본래 서적은 값이 나가는 법이었다.

“사천 권. 마법서에다가, 세상에 없던 지식일 테니 그걸 고려하면 꽤 가치가 크겠지. 사천 권을 처분하면 대충 이십만 정도는 되지 않을까.”

재스타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선배님, 그 말씀은…….”

“상인이 친분이 있어서 부실한 담보로 돈을 빌려줘? 개도 안 믿을 소리지.”

금화 일만 닢을 빌려줄 수 있는 상인이라면, 그럴 수도 있었다.

그러나 금화 오십만 닢을 빌려줄 수 있는 상인은 절대 그러지 않는다.

그런 허술한 놈은 절대 그런 금액을 마련할 수 없는 세상이니까.

거상은 절대 친분 따위로 거래를 하지 않았다.

금화 오십만을 대출할 능력이 있다면, 거상이라 부르기에 부족함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하지만, 오만에 이십만 닢. 합쳐도 이십오만이 아닙니까? 반절뿐입니다만, 셈이 맞다고 하시면.”

“그러니까 셈이 맞다는 거지. 이해가 안 되지?”

“……예. 사실 그렇습니다.”

“뭐. 됐고.”

시엔이 상단주를 떠올렸다.

시엔도 사실 그리 떳떳하지는 않은 입장이었다.

따지자면 빚진 마탑을 빼돌리려 하는 참이었다.

상인 입장에서는 상대의 야반도주나 다름이 없지 않겠는가. 물론, 땅과 건물을 가져가겠지마는.

그러나 부실한 담보로 돈을 빌려준 놈이 잘못이 아닌가. 그래도 미안하기는 마찬가지.

그래서 로우드에게 일러 거래선이라도 터 줄까.

요정목은 부르는 게 값이라 조금 이득을 봐 주는 선에서 조금이나마 힘을 보태 줄 요량이었다.

그런데 그 반지.

상인의 검지에 끼워진 인장 반지가 눈에 들어오기 전까지는 그렇게 생각했다.

커다란 원과 그걸 가로지르는 번개. 그리고 그 안에 파인 정교한 매의 형상.

커다란 원은 하나를 뜻하고, 번개는 뇌제라 불리던 과거의 누군가를 기리는 것이었다.

그리고 매는 대륙 전체를 아울러 보는 신조가 아니던가.

그리고 그 셋을 합쳐놓으면, 과거 사라진 거대한 국가의 상징이 되었다.

제국.

제국의 인장 반지였다.

< 42. 망령 재림 [1]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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