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0. 숲에 살면 자연인 [5] >
한별은 원망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시엔은 태연했다.
어차피 한별에게도 타 종족의 일이었다.
시엔이 엘프를 적대하거나 해하지 않는 한에야, 당장 원망 좀 사고 다음에 만나면 또 친구일 테니.
엘프란 종족을 이제 제대로 알고 말았으니까.
“제가 반대로 말씀드렸던가요?”
“아냐. 그냥, 내 생각은 달랐거든.”
“들어볼 수 있을까요?”
“그냥 개와 늑대의 차이지, 뭐.”
시엔이 므잉과의 대화 중 깨달은 바였다.
엘프가 개와 늑대의 이름을 따로 생각하며, 펠리를 보며 개로 분류했다.
정작 늑대 수인은 펠리를 늑대라 말했고.
결국은 선택의 문제였다.
늑대로 태어난 펠리가 그 영리함으로 개 흉내를 내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게 더 편하고 안락하니. 더 행복할 테니까.
늑대가 개로 변한 것이 제 생존을 위해 선택한 일에 불과하니, 애초에 둘이 같은 종이 아닌가.
이종족이라고 무어 다를 것이 있을까.
저들이 살기에 더 좋은 방향으로 선택했을 뿐.
그런데도 오로지 엘프가 엘프로 남은 이유야, 뭐.
세계수를 가진 이들만이 할 수 있는 배부른 소리이자 또한 오지랖이었다.
나무 한 그루가 땅을 지배해 의식주를 전부 제공하니, 엘프가 굳이 다른 삶을 선택할 필요가 없다.
매양 놀고 노래하며 삶을 즐기기만 하면 되는데.
그래서 엘프는 태평하고 유쾌할 수 있을 터다.
당연히 눈치도 있을 수가 없지.
자신의 기분을 숨길 이유가 없으니 항상 솔직하고 직설적이며, 또한 모두가 속을 숨기지 않고 말하니 눈치를 살필 이유가 없다.
거기에 욕심이 없으니 적을 만들지 않는다.
혹여 적이 있더라도, 강력한 수호자는 세계수가 펼친 숲속에서 거의 반신에 가깝지 않던가.
뭐 이런 축복받은 종족이 다 있어?
물론, 친구로도 이만한 종족이 또 있겠냐마는.
“그건, 음. 부정은 못 하겠어요.”
“까놓고 말해서, 흑랑족의 대수림 생활이 만족스럽냐 하면 그게 아니니까. 종의 멸종이니 그러한 말이 일리가 없지는 않지만, 그보다 본인의 의지가 더 중요한 게 아니겠어?”
“그게 종족을 파멸로 이끈다 해도 말인가요?”
“어차피 내가 나서지 않았더라도 흑랑족이 대수림에 돌아가지는 않았을 것 같아. 숲을 망가뜨리며 유랑하다 끝내 한 지점에서 토벌당하겠지.”
“시엔은 되돌아가라 설득할 수도 있었어요.”
“그렇게 대수림에서의 생존이 언제까지 이어질 수 있겠어? 한 종의 멸종과 탄생이 순식간에 이뤄지는 끔찍한 곳인데. 한별은 거기 가 본 적 있어?”
“몇 번 정도요. 세계수 자리를 봐야 했답니다.”
“세계수 없이 거기 살라면 살겠어?”
한별이 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순순히 또 고개를 저었다.
“거봐. 나 싫은 건 남도 싫은 거지.”
“하지만. 누군가 제게 아무리 좋은 조건을 제시하더라도, 결코 엘프가 숲을 떠나는 일은 없어요.”
“에이, 엘프의 숲보다 엘프에게 좋은 조건이?”
시엔이 키득거렸다.
“엘프는 아마 엘프로 계속 남겠지. 그리고 다른 종족은 인간이 될 테고. 아마 세상엔 인간과 엘프 단둘이 남게 될 거야.”
“그게 과연 옳은 일일까요?”
“몰라. 거기에 생각해서 뭐에 쓰겠어?”
한별이 입술을 삐쭉거렸다.
“그럼 대수림에 이상 조사도 안 하시겠네요.”
“대주기가 끝나고 나면 내부도 정리될 테고. 그때 한 번 시간을 내 보지. 뭐.”
흑랑족이 대수림에 돌아갈 이유가 없으니, 시엔이 나서 정리할 이유도 없었다.
물론 왕국에 피해가 가지 않도록 방비를 해 두긴 하겠지만.
“내일 돌아갈 때 수호자주나 가져가세요. 전부 다 내어드릴 터이니.”
“오. 정말?”
“그게 제 손발톱으로 빚은 술이나 마찬가지라는 거. 코딱지나 눈곱으로 빚었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랍니다. 그것만 확실히 기억하세요.”
앞부분하고 뒷부분은 또 뉘앙스가 달랐다.
그렇게 말하니 또 어쩐지 꺼려지기도 하고.
시엔이 혀를 찼다.
“쯧. 이왕 줄 거면 곱게 주지 않고.”
“자리만 차지하는 술 떠넘기는 거랍니다. 선물로 드리는 게 아니거든요?”
* * *
저녁에는 엘프식 연회가 열렸다.
엘프식 연회라고 딱히 거창한 것은 아니다.
그저 부어라 마셔라, 술이 술을 먹듯이 퍼먹다가, 그 자리에 기절하듯 잠이 들면 그걸로 끝이다.
세계수가 푹신한 땅을 따스하게 데워준다.
그야말로 포근한 노숙을 보장해 주는 공간이었다.
시엔은 궁금했던 고기주를 맛볼 수 있었다.
입에 들어가는 순간부터 진한 육향이 퍼진다.
술이 아니라 무슨 육즙을 들이마시는 듯한 기분.
게다가 눅진하니 혀에 감기고 넘기면 목에 걸리는 기이한 식감이라니.
좋게 말하면 육향이오, 나쁘게 말하면 비린내다.
마시자마자 저절로 오만상을 찌푸리게 된다.
그렇게 한껏 느끼한 첫인상이 지나고 나면, 독한 술기운이 갑자기 치솟아 내장을 후끈하게 데웠다.
그 과정이 지나고 나면 머릿속에 그저 물음표들이 바글바글 끓어올랐다.
대체 무얼 마셨는지 인지의 부조화가 따른다.
대체 뭐야? 뭔데? 모르겠으니까 한 모금 더, 또 한 모금 더. 같은 과정으로 무한 반복이었다.
과연 한별이 감춰두고 금지한 이유를 알겠다.
맛으로 먹는 술이 아니라, 도저히 믿기지가 않아 손에서 떨어지지 않는 술이었으니까.
대체, 뭐야?
알고 보니 흐트브레카라타, 시엔이 이전에 엘프의 숲에 방목한 부정 세계 괴목의 알뿌리로 술을 담근 것이라고.
엘프들의 사랑을 듬뿍 받아 애칭은 히티, 별명은 고기 나무가 되었다고.
뿌리가 지상 위로 자라고 거기에 나는 열매였으니 알뿌리인데, 그것이 피가 뚝뚝 떨어지는 생고기의 모습이라나.
본래 부정 세계의 마수는 실재하지 않는 것이라, 그 고기나 과육에 아무런 영양가가 없었다.
심지어 아무런 맛도 없고 배도 부르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세계수의 통제 아래 영력을 받았는지 어쨌는지, 이런 괴상한 술의 재료가 되고 말았다.
“다 내꺼거든? 크흑……. 내꺼야아…….”
한편에서 세올이 견과류 바가지를 끌어안고 꺼이꺼이 울음을 터뜨렸다.
술이 들어가면 눈물로 도로 나오는 주사가 어김없이 나타나는 순간이었다.
그렇게 통곡을 하면서도 구운 콩을 볼따구 가득히 밀어넣는다.
이제 새로 변신시키는 건 자제시켜야 할까 싶기도 하고.
트리예가 그런 세올의 허리를 끌어안고 머리를 부볐다.
저건 취하면 안기는 주사가 틀림없다.
견과류 부스러기가 제 머리 위로 떨어지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저 하염없이 그렇게.
가까운 자리에 가부좌를 틀고 앉은 누렁이가 허허로이 술잔을 움직이고, 그 옆에 다소곳이 무릎을 꿇은 나비가 제 스승을 챙겼다.
다소곳한 나비라니. 취해서 잘 못 본 모양이었다.
파린은 달콤한 과실주를 홀짝이나 싶더니 어느새 잠들어 시엔의 품 안에 쌕쌕 숨소리를 냈다.
그리고 그 위로 연신 주인 다른 술잔이 다가왔다.
“어머니, 한 잔 올리겠습니다.”
“어머니,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일족의 영광을 위해, 새로운 어머니를 위해!”
“어, 그. 어머니? 안녕하세요오.”
심지어 엘프에게 희롱당하던 그 꼬맹이마저 쭈뼛쭈뼛 인사를 올리며 술을 따르니 배가 불러 도저히 이게 술을 먹는지 먹여지는지 분간이 안 된다.
완전히 취한 한별이 백 세 자루 비검을 날려 온갖 묘기를 부리고, 박수를 치며 구경을 하다가…….
정신을 차리고 나니 벌써 아침이었다.
이상하게 발이 시려 내려다보니 신고 있던 부츠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어차피 범인이야 뻔했다.
시엔이 시체처럼 쓰러진 이들 사이에서 베른닐을 찾아 어슬렁거렸다.
“아니, 왜 술만 들어가면 남의 부츠를 챙겨?”
미적지근한 부츠를 품에서 빼내 발을 끼워 넣고, 시엔이 주변을 크게 한 바퀴 둘러보았다.
코 고는 소리, 일부는 이 가는 소리가 합창처럼 울려 퍼지는 가운데, 대지에 무수히 깔린 술꾼들.
그사이에 홀로 선 기분이란.
용과 섞인 신체를 얻고 가장 이득을 본 것이 바로 숙취가 전부 사라졌다는 사실이다.
어느 때보다도 맑고 깨끗한 정신이었다.
시엔이 이미 밝은 태양을 올려다보았다.
왜 순진무구의 머쓱한 표정이 비쳐 보이는지.
아무래도 술이 덜 깬 모양이다.
* * *
갈 때는 조촐한 인원이었는데, 돌아올 때는 백이 넘는 가까운 대인원이었다.
길들인 늑대 무리는 또 따로였다.
한별이 가져가라 넘겨준 술병이 쉰 개가 넘었다.
수호자주가 세상에 없던 명주임은 둘째치고, 세계수로 만들어진 술병 자체가 이미 보물이었다.
공짜로 얻은 것이라기보단, 나중에 대주기가 넘어 대수림 이상 조사의 비용을 미리 지불받은 셈이다.
시엔이 일단 차근차근 일을 처리했다.
므잉의 뜻으로, 흑랑족은 군인을 희망했다.
본래 태어난 것이 전사들이니 다른 일을 배우기보단 제 특기를 살리겠다는 것이다.
기사 몇을 붙여 훈련을 개시하고, 차후 독립 부대의 깃발을 내릴 생각이었다.
특히 숲에서의 기동 및 추적, 생존에 능숙한 인원들이 아니던가.
거기에 늑대까지 갖춰질 예정이었으니.
수호자주는 일단 와인고에 보관하도록 하고, 개중 두 병을 빼서 왕실에 보내기로 했다.
전할 소식과 함께였다.
[엘프들이 제공한 정보이며, 또한 대수림의 주민이 보증했습니다. 제 판단으로도 타당하여 분명히 그러할 것입니다.
올봄 전후로 대수림의 대주기가 찾아올 것이며, 숫자는 미정이나 특출이 강력한 늑대인간이 주를 이룰 것입니다.
어수선한 때이나, 단단히 대비하여야 합니다.]
편지를 받은 왕비가 이마를 주물거렸다.
하필이면 이런 때에 대주기라니.
왕실의 자문관들, 마도병단은 말도 안 되는 소리라 의견을 모았다.
저번 대주기가 겨우 삼십 사 년 전이다. 역사에 이리 짧은 대주기가 온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면서.
그러나 애초에 현명한 이는 일이 터진다는 작은 의혹에도 미리 준비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아니리라 생각하더라도 일단 조치를 해 둬야겠지.
일단 왕령으로 군대를 소집해 국경을 강화하고, 방어선을 단단히 축성하도록 공병단 역시 파견해야 했다.
거기에 은화를 녹여 은제 무기를 준비해야겠고.
그리고 대주기가 어디 왕국 하나의 일이던가.
대수림을 둘러싼 네 왕국에도 사신을 보냈다.
대주기가 일어난다면, 이는 외교상으로 큰 쾌거가 될 것이다. 그러나 그 반대라면 개망신을 당하고 말 테고.
그러나 왕비가 시엔을 믿었다.
아니면?
그걸로 책잡아 억지로 혼인이라도 시켜야지.
어느 쪽이건 손해를 보지는 않을 터다.
그럼 이참에 일을 더 크게 벌여도 될 테고.
왕비가 이어 교단으로의 서신을 작성했다.
대주기가 의심되는 와중, 왕국이 내전으로 상황이 좋지 않으니 부디 원군을 청한다고.
어차피 이미 내전에 교단이 끼어들었다.
빚을 애매하게 남겨두느니, 차라리 왕가가 교단에 우호적임을 명백히 밝혀두는 것이 나았다.
그 대가로 대신전이라도 하나 지어야 하겠지만.
왕국가 안정되고 나면 대신전 하나 정도야 부담이 되지 않으리라는 판단도 함께였다.
* * *
헬른포드는 페벨룬의 서쪽으로 국경을 맞댔다.
대수림을 둘러싼 다섯 왕국 중 하나이기도 했다.
페벨룬의 사신이 대수림의 대주기를 경고하는 친서를 전달받아 읽고 나서는, 왕태자 앙흠 헬른포드 2세가 웃음을 터뜨렸다.
“대주기라고? 크큭, 크크크크……!”
“전하, 제발 그러한 간하산 웃음을 거두어 주십사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위엄이 다 상하옵니다.”
“젠장. 입에 붙어서 그래. 어쩌다 이게 붙었지.”
좌대신이 절래절래 고개를 저었다.
이젠 틀렸다는 투다. 앙흠이 울컥했다.
“아니, 어전에서 그게 무슨 태도요?”
“아무리 말씀드려도 듣지 않으시니, 저도 모르게 그리하고 말았습니다. 전하.”
“젠장. 좌대신이 좌대신만 아니었으면, 내 그냥.”
앙흠의 스승이자 장인, 왕국 제일의 귀족, 그리고 그 전에 대부로 아비보다 더 따르고 의지한 이다.
아들이 없는 좌대신에게도 친아들처럼 기른 대자였다. 사실상 사이좋은 부자이자 왕국의 실세였다.
“그래서, 좌대신은 어떻게 생각하시오?”
“저번 대주기에 치른 고생이 아직도 어제 일처럼 생생한데, 벌써 다시 오겠습니까.”
“그렇지. 개도 안 믿을 헛소리니까. 다만, 문제는 이걸 왜 보냈냐는 건데.”
“알린 왕비는 결코 녹록한 인물이 아닙니다.”
“그렇지. 그래서 더 문제인 건데.”
왕태자가 손가락으로 왕좌를 톡톡 두드렸다.
“아무래도 우리 계획이 새어나간 것 같아.”
“내전을 치른 왕국이 대체 어떤 첩보력을 가지고 있겠습니까? 비선이 전부 박살이 나 장님이나 마찬가지일 겁니다만.”
“왕비의 친정이 타스테스테잖아. 그쪽에서 제공한 정보일 수도 있지. 주변국이 은밀히 군대를 모으고 훈련을 개시하는데, 침략의 징조일지 모른다고.”
“왕비가 친정을 증오하는 건 유명하지 않습니까? 계승에 밀려 팔려 왔다고 이야기할 정도로.”
“이제 왕국의 지배자가 되었으니까. 타스테스테에서 먼저 손을 내밀었을 수도 있지. 사적인 원한은 접어두고 일국의 관계에 집중하자고.”
좌대신이 흐뭇한 미소를 숨기지 않았다.
이리 총명하니 왕국의 미래가 밝을 것이라고.
“그렇지 않고서는 설명이 안 돼. 대주기를 핑계로 다시 군대를 모았고, 그로 모자랄 것 같으니 교단을 끌어들였어.”
“최소한 교단의 원군이 주둔하는 상황에서는 전쟁을 선포할 수 없는 노릇이니 말입니다.”
“올봄 전후라고 했지. 그러니 여차하면 늦은 여름까지 잡아두겠다는 심산일 테고. 그러면 가을이라 추수를 해야 하고, 그게 지나면 겨울이란 말야?”
“무서운 귀계입니다. 교단에 숙여주는 대신 일 년을 거저 벌다니.”
“그러면 우리는 둘 중 하나. 교단이 원군을 파견하기 전, 그러니까 지금 당장 공격하거나. 아니면 추수철에 기습적으로 진격해야 해.”
“가뭄으로 왕국이 아우성인 상황이 아닙니까.”
“저쪽은 완전히 박살이 났으니까. 징집을 절반만 해도 충분해. 그러면 우리는 추수를 하고, 페벨룬은 못 하게 될 테니 군대뿐만 아니라 군량 보급도 막힐 테고.”
좌대신의 마음 같아서는, 전쟁은 내후년이나 그 이후라도 충분했다.
당장 왕국이 가물어 봄을 나기가 곤궁한 때에, 전쟁을 논의하자니.
사람이 겨우 한두 해로 자라는 것이 아니다.
내전으로 수많은 사상자를 낸 페벨룬이 갑자기 군대를 보충할 수도 없는 노릇임에도.
그런데도 대놓고 반대하지 않는 것이, 좌대신도 결국 전쟁을 벌이는 데에는 찬성하기 때문이었다.
가장 쉽게 페벨룬을 손에 가질 시기가 바로 지금, 아니면 내년 가을이 맞기는 했다.
“좋아. 내년 가을에 왕국에 지평선을 가져온다. 좌대신은 군대의 훈련에 박차를 가해 주시오.”
“그러면, 전하, 대주기에 대한 대비는…….”
“창공탑에 대지급으로 의뢰를 넣어보도록 하지요. 저네들 입으로는 천기를 읽는다든가 하던데. 그럼 대주기가 진짜인지 아닌지 알겠지.”
< 40. 숲에 살면 자연인 [5]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