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0. 숲에 살면 자연인 [1] >
흐레이그 공작이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자결했다.
그러나 공작이 어디 보통 인물이랴.
자결할 인물은 아니거니와, 절대 제 죄를 고백할 인간도 아니다. 귀족들이 이미 아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발표를 듣고 이해하기를, 대충 뒤집어씌워 처형했구나. 그렇게 알아들었다.
속으로야 너무한 처사라 생각하는 귀족이 한둘이 아니었다.
한 나라의 공작을 그렇게 몰래 처형하는 법이 어디에 있다던가.
공작이 그럴진대 그 이하 작위라면 어떠하겠나 하는 위기감이었다.
게다가 파문이라니.
티란디스의 대공자가 명예 성자라고 하나, 교단이 내전에 끌어들인 것으로 보였다.
당연히 귀족들의 반감이 들 수밖에는.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죽지 않는 마물이 공개되었다.
몸통에 수십의 창날을 꿰어 고정시키고, 머리를 붙이니 곧 눈을 깜빡거리며 살아나는 인간 모양의 마물이었다.
창완 기사단.
흐레이그의 친위 기사단으로 얼굴을 알아보는 자가 적지 않았다.
이로써 진위가 명백히 밝혀진 셈이었다.
그러고 나니 귀족들의 생각도 바뀌었다.
침을 뱉으며 어차피 죽을 놈이 죽었다고.
제 가신을 습격해 참사를 일으킨 이다.
게다가 내전의 패배가 바로 공작이 제 죄를 감추기 위해 무리하게 군을 운용한 까닭이 아니던가.
그렇게 흐레이그 가문은 멸망했다.
그리고 가문의 생존자가 한 명.
“그래서, 새로운 성은 정했나?”
“설리번. 설리번으로 하기로 했다.”
“그거 설마…….”
시엔이 눈을 가늘게 떴다.
페시번이 시선을 피하며 딴청을 피웠다.
“여전히 뜨겁네. 힘든 시간을 함께했다. 뭐 그런 건가?”
“……마음대로 생각해라.”
“부정은 안 하겠다?”
세상에. 시엔이 휘파람을 불었다.
설리 유르반. 페시번의 부인이었다.
설리. 그리고 페시번. 둘이 합하면?
“좋아. 페시번 설리번. 뭐, 어감은 좋네.”
티란디스는 강스트프레와 베스탄티, 두 개 도시의 조세권을 확보했다.
말만 조세권이었다.
티란디스에서 총독을 파견해 통치하는 형태였으니 사실상 영지를 떼어준 셈이었다.
흐레이그의 가장 큰 도시 둘이다.
가장 비옥하고 넓은 땅이었으니 전쟁에서 가장 큰 공훈으로 따낸 성과였다.
“그럼, 무릎 꿇어.”
“……젠장.”
페시번이 중얼거리면서도 시엔의 말에 따랐다.
시엔이 검을 들어 짐짓 엄숙한 척을 했다.
“왕국의 대공이 왕실에서 하사한 권위로, 세상에 없던 귀한 피가 여기에 있음을 선언하노라. 그대를 백작 위에 봉한다.”
“칫. 백작이냐.”
“그나마 내가 대공이라 백작이지, 안 그랬으면 얄짤 없이 준남작이었어.”
대공은 준왕족에 속하는 작위고, 백작위까지의 임명권을 가진다.
그렇다곤 해도 함부로 남발할 수는 없는 권리라, 이미 알린 왕비와 상의를 마쳤다.
“대공이라. 이젠 저하라 불러드려야 하겠군.”
“아직은 아니지만. 뭐, 조만간.”
페시번이 쓰게 웃으며 말했다.
한때 왕국의 제일가는 귀족, 공작가의 후계자였던 이가 이제는 백작이다.
그리고 부인의 전 연인이었던, 후작가에서도 반쯤 버렸던 자식이 이제는 후계는 물론이거니와 본인이 대공이란다.
그러나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페시번 자신의 대에서는 아무리 발버둥을 치더라도 총독 신세에서 벗어나기는 힘들 터다.
시엔이 일단 그 자신보다 나이가 적었으니까.
그러나 결판은 자식 세대에서, 혹은 그 이후에.
도시를 완전히 지배 아래에 놓고, 기반을 탄탄히 다져 종속 관계를 끊고 독립된 가문으로 남는 것.
페시번에게 남은 과제였다. 이번엔 완패지만, 내 자식은 단단히 교육해 승리를 거둘 수 있도록.
설리번 백작가의 후계가 혹독한 가정 교육에 시달리는 운명이 결정되었다.
시엔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 속이야 대충 짐작이 가니까.
자식 대에서 승부를 보자 뭐 이런 생각이겠지.
시엔이 생각하기엔 대체 왜 그러는지 모르겠지만.
자식은 자식이고 나는 나지. 그걸 왜 걱정해?
내가 다스리긴 귀찮고, 페시번 녀석에게 맡겨놓고 이득은 다 챙길 수 있으니 참으로 일이 잘 풀리지 않았던가.
“그럼 이제 가 봐. 마마께서 기다리고 계시니까.”
두 개 도시라고 해도 어지간한 영지보다 잠재력이 큰 땅이다.
총독이자 신생 귀족으로 왕국의 주인과 면담의 시간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
페시번이 멈칫거렸다.
시엔이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고맙기는. 됐어.”
* * *
뷔아가 교단으로 복귀했을 때, 신전의 고위 사제들은 단단히 벼르고 있는 상태였다.
교단은 세속의 일에 개입하지 않는다.
비정하다 말할지는 몰라도, 지상의 일이 사람의 뜻으로 벌어지는 이상 어쩔 수 없었다.
대륙에 신앙이 널리 퍼져 교단의 힘이 강성하나, 그저 신관으로 남아 널리 이롭게 할 뿐이라 아무런 견제를 받지 않았다.
그러나 성녀가 그 불문율을 깨고 말았다.
귀족이 얼마나 재빠른 이들이던가.
벌써 다섯 개 왕국에서 신전에 세금을 물리고자 한다는 전언이 들어온 상황이었다.
명분이야 가뭄으로 힘든 상황에서 양해를 부탁한다지만, 명백히 교단에 대한 견제였다.
게다가 딱히 막을 방법도 없다.
사실 세금이야 좀 내도 어떻겠냐마는, 사실 본단이 각 신전에게 재화를 받는 것도 아니다.
신전의 수입이 온전히 해당 지부에서 집행하는 것이며, 그 황금으로 빈민 구제 등의 사업을 벌였다.
결국, 신전의 부가 해당 영지 바깥으로 나가는 것도 아니다.
귀족이 세금을 올리면 오히려 도와야 할 가여운 이가 더 굶주리게 되니.
물론 고위 사제들이 뷔아의 사람됨을 알았다.
어떤 정치적 목적이 있다기보단, 당장의 참혹한 전쟁을 끝내고자 함이었으리라고.
그러나 그 결과, 결국 대륙 전체에 교단의 힘이 줄어들고, 불쌍한 이들이 도움을 받지 못하게 되었으니.
그러니 불러 단단히 혼을 내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대외적으로 성녀의 징계를 발표해 교단이 정치에 뜻이 없음을 밝히자.
신전 수뇌부의 생각이었다.
적어도 돌아온 성녀의 상태를 두 눈으로 목격하기 전까지는 그렇게 생각했었다.
“세상에, 천신이시여.”
“그분의 은혜를 알고 뜻을 알겠습니다.”
벌해야 할 성녀의 머리에 후광이 비쳤다.
소문이야 진작에 들어 알고 있던 바였다.
그걸 곧이곧대로 믿지도 않았고.
그러한 풍문이 달에 수십 개씩 들어오는 곳이 바로 본단이었다.
성자 성녀가 험한 곳을 돌며 선행을 베푸니, 그에 구원받은 당사자들이 보기에 후광이 비쳐 고결한 모습이었다 과장을 섞어 떠들고 다녔다.
들어오는 소문대로라면, 성자, 성녀는 물론이거니와 지방의 크고 작은 신전에도 헤일로를 단 성인들이 득실거리는 셈이었으니까.
그런데?
“세상에, 당장 시성을 준비해야겠습니다.”
“시성식 절차가 어떻게 되지? 마지막 시성이 언제였답니까?”
“교단에 큰 홍복이 아닙니까?”
“성인과 같은 시대를 살다니, 천신이시여.”
징계고 뭐고 쏙 들어갔다.
오히려 정치적으로도 큰 성과라 여겼다.
교단이 세속에 개입하였으나, 그리 행한 주체가 성인이 아니던가.
시성식에 대륙 왕족을 모아 모두 천신의 뜻이었다 말하면 되겠구나 하고.
당연히 역효과가 날 일이었다.
천신의 뜻이 이러하니 교단이 앞으로도 개입할, 오히려 적극적으로 그리할 것이라 선전포고를 하는 꼴이나 다름없었으니.
그러나 정치와 뜻이 없는 신관들의 순진해 빠진 생각이었다.
뭐든 천신께서 뜻하셨다 하면 오오, 기적이다 하고 넘어가는 선량한 이들이나 할 법한.
물론, 전부 그러하진 않아 일부 신관들이 우려하기는 했다. 그러나 도저히 발언할 수가 없었다.
뭐라 할 것인가. 성인을 징계하자고?
결국, 이 또한 천신께서 뜻을 둔 일이리니.
결국, 성대한 시성식의 준비가 시작되었다.
비탈길에서 말 잃은 마차가 굴러가는 꼴이었다.
* * *
그리고 본의 않게 말을 풀어버린 장본인, 뷔아는 큰 결심으로 라이뱅 경의 댁에 방문했다.
사실, 주변에 마땅히 상담할 상대가 없다.
수히는 남녀의 문제라면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지만, 실상 저 역시 늘상 독신이 아니던가.
뷔아가 생각하기에 주변에서 가장 성공적인 결혼 생활, 금슬이 터진다고 표현할 만한 부부는 한 쌍뿐이었기에.
라이뱅 경의 그 유명한 아내, 메이가 말했다.
“그거 헤일로니? 천신이시여. 만져봐도 돼?”
그렇게 묻고는 대답도 전에 손을 뻗는다.
“오. 신기하네. 막 통과하는데. 유우야, 헤일로야. 헤일로. 자아.”
“꺄하!”
손으로도 모자라 젖먹던 아이를 들어 내밀었다.
아이가 꺄륵 웃음을 터뜨리며 손을 내저었다.
“잠깐 이러고 있어도 될까? 어쩐지 축복을 받는 것 같은 기분인데. 유우한테도 좋은 것 같은. 아! 아예 뷔아가 안고 있을래?”
말은 묻는 것이나 대뜸 아이를 내민다.
뷔아가 엉겁결에 아이를 안아 들었다.
방긋방긋 웃으며 꼬물거리니 참 귀엽기도 하지.
“애가 참 예뻐요. 언니.”
“예쁘긴. 아주 마귀가 따로 없어.”
“마귀라니.”
“너도 애 낳으면 알걸. 이거 보이니?”
메이가 제 눈가를 가리켰다. 눈 아래 짙게 기미가 끼어 그 피곤함이 역력히 묻어나왔다.
“얼마나 까탈스러운지 밤에 잠도 못 자. 그이는 집 떠나서 돕지도 않고. 길게 잠을 잔 게 언젠지.”
“어……. 그, 죄송해요, 언니.”
뷔아가 사과했다.
라이뱅 경이 성녀의 호위를 맡아 나돌았으니 어쩐지 저를 성토하는 것 같아서.
“우리 뷔가 죄송할 건 없지. 그이와 함께하겠다고 마음먹었을 때부터 각오한 거니까. 그나저나 신기하네. 어미 손 떼면 울고불고 난리를 치는 앤데.”
“얘가요?”
“애기도 성인 좋은 줄은 아나 보다. 그치?”
“어, 저는 잘 모르겠어요. 헤일로라고 하던데.”
뷔아가 위를 바라보았다.
보이는 것은 천장뿐이었다.
“그래서, 우리 뷔는 무슨 일로 찾아왔니?”
“어. 그냥 언니 보러.”
“그냥은 무슨. 밥 좀 먹으러 오라고 해도 그렇게 바쁘다고 난리고, 성도에 있을 때라도 예쁜 얼굴 좀 보여달라 해도 안 보여주더니.”
“그냥.”
뷔아가 딴청을 피우며 아이를 흔들었다.
꺄륵, 꺄르륵.
맑은 웃음소리가 터졌다.
얘가 뭔가 어려운 고민이 있구나.
그렇게 생각한 메이가 가만히 기다려 주었다.
그리고 한참 있다가 뷔아의 입이 열렸다.
“……언니는 처음에 라이뱅 경께서 고백하셨을 때, 기분이 어땠어요?”
“끝내줬지. 신전만 아니었으면 그 자리에서 바로 비명을 지르면서 입이라도 맞췄을 텐데.”
“예?”
라이뱅 경의 이야기와는 좀 달랐다.
신분의 차이로 겁을 먹고 피하던 여인이라더니.
“우리 뷔라서 해주는 이야기지. 그이는 천신상을 닦는 내 경건한 모습이 너무 아름답다고 했는데.”
“저두 그렇게 들었는데요.”
“그때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아니? 신전 뒤 텃밭에 상추가 잘 컸던데, 몰래 뜯어가도 큰 죄는 아니지 않을까? 보름이면 다시 자라잖아. 샐러드 만들어 먹으면 맛있는데. 그러는 있는 사이에 갑자기 잘생긴 청년이 무릎을 꿇는 거야.”
“아.”
“드디어 내 팔자 제대로 펴는구나. 그런 생각도 들고. 한편으로는 겁도 덜컥 나지. 딱 봐도 귀족가 도련님이신데, 나 같은 게.”
메이가 개구진 표정으로 킬킬거렸다.
“그래서 점잖은 척, 표정 딱 깔고, 도련님, 말씀 거두어 주셔요. 천한 것 앞에 무릎을 꿇으셔서는 아니 되십니다.”
그 순간부터 메이는 독실한 신자가 되기로 했다.
“그럼 계속 거절하셨다는 이야기는…….”
“거절은 아니었고, 여지만 둔 거야. 나는 좋은데 세상은 그렇지 않다. 나는 좋은데 당신의 마음이 변할까 두렵다. 나는 좋으니까 좀 어떻게 상황 좀 해결하고 오라고.”
“하지만, 그건.”
“속이는 거 아니냐고?”
뷔아가 입술을 삐죽거렸다.
듣던 중 가장 극적인 사랑 이야기가 와장창 깨져나가는 순간이었다.
“뷔. 누군가에게 사랑받는다는 건, 나 역시 그에 보답해야 한다는 뜻이란다. 그이가 내게서 경건한 신도를 보았으니, 나는 그렇게 해야 했어. 시간이 필요한 일이었지.”
꼬셔서 내 팔자 고치겠다는 뜻이 아니라, 상대의 마음에 보답하기 위해서.
진솔하게 속을 내보이는 것이 아니라, 그가 원하는 모습으로 언제까지나 보여주길 원해서.
자신을 그에게 맞춰주고 싶어서.
“그래서, 어떤 놈이 우리 뷔 마음을 흔들어 놓았을까? 너 좋다고 하니? 뷔도 마음이 없지 않으니 언니를 찾아 물어보려는 모양인데, 그거 곧장 받아 주면 안 된다? 쉽게 얻은 건 쉬이 다루는 게 사람 마음이라.”
일해서 번 돈은 귀히 알아 소중히 써도, 길다가 주운 동전은 아무렇기도 않게 쓰는 법이라면서.
“어, 그게 아니라. 그게.”
뷔아가 어물거리며 속을 털어놓았다.
메이의 입가에 수상한 미소가 어렸다.
“과연, 그렇단 말이지. 그러면 말야……”
메이가 나름대로 조언을 털어놓았다.
* * *
세계수의 수호자, 한별은 참으로 오래 살았다.
본래 수호자는 반쯤 불멸에 속했다.
전임자에게 사명을 물려받는 순간부터 수호자의 삶은 세계수와 그 운명을 함께할 수 있었으니까.
그러나 엘프가 으레 그러하듯, 인생 즐겁게 살다 때가 되면 묻혀 세계수로 되돌아가면 그만이었다.
수호자들도 적당히 살다가, 아 대충 즐길 만큼 다 즐겼다 싶으면 후임에게 떠넘기고 생을 마감했다.
원래 그렇게 생겨먹은 종족이기에.
그런 의미에서 한별은 별종이었다.
하루하루 엘프 최장수 기록을 갈아치우는 중이었으니까.
특이한 일은 아니었다.
지성체가 대개 그 집단의 가치관을 따른다고 하나, 개개인의 특질은 다르다.
엘프 사회가 죽음을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지만, 모든 엘프가 그러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한별은 오래 살았다.
그리고 그 기나긴 삶 속에서, 온전히 제 실력을 드러낸 적이 몇 번이나 있었던가.
한별이 손을 뻗자, 엘프의 비검이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엘프의 비검술.
몸이 가벼운 만큼 근력이 모자란 엘프는 직접 검을 휘두르지 않았다.
수십 자루의 비검이 한별의 곁으로 모여들었다.
그도 모자라, 세계수의 줄기로부터 날카로운 목검들이 자라나 분리되어 나오니 계속해서 그 숫자가 늘었다.
허공에 떠오른 백여 자루의 비검들.
단 한 명의 엘프의 지휘 아래 정연히 늘어져 적들을 겨눴다.
“유백.”
“네, 수호자님.”
“인간의 내전이 끝났다고 하니, 우리의 친구 역시 자리로 돌아왔을 거예요. 서둘러 도움을 요청하세요. 시엔에게, 최대한 빨리 와 달라고.”
< 40. 숲에 살면 자연인 [1]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