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8. 대단원 [5] >
중립을 지키고 물러나라 했지만, 결국 유리한 편은 시엔 자신이었다.
많이도 기대하지 않았다. 귀족 두셋만 물러나도 부담은 훨씬 덜해지는 판이었으니까.
시엔의 군대가 성채를 끼고 수성을 준비 중이었다.
“대공자. 내 하나만 묻겠소. 아니, 대공자가 아닌 명예 성자님께 묻겠습니다. 그 말이 사실이라 천신께 맹세할 수 있으십니까?”
“사발디! 어찌 자네가! 대의를 생각하게. 반역도를 토벌하고 난 후에도 그리 말하겠는가?”
공작이 으르렁거렸다.
내전에서 승리하고 난 후의 논공행상에서 제외하겠다는 노골적인 협박이었다. 참으로 공작다운 말이기도 했다.
사람이 누구나 소중히 여겨 따르는 가치가 있다. 개인이 세상을 보는 눈이 거기에서 나오는 것이라, 제게 소중한 가치가 남에게도 그리할 것이라 여기지 않는가.
가문을 위해 혈육을 내쫓고 죽이며 영민을 살해한 이다.
공작이 사는 이유가 오로지 가문의 영화뿐이니 다른 이들 또한 그러하리라 여기니.
사발디 백작뿐만 아니라 다른 귀족들에게도 하는 경고이기도 했다.
여기서 중립을 지켜서 한발 물러난다 한들, 너희가 재미 볼 것이 없지 않겠느냐고.
1왕자파가 승리하면 뒤늦게 중립을 지킨다 한들 부부의 몰락은 예정된 것이며, 왕당파가 승리해도 자신이 좌시하지 않겠다고.
시엔이 속으로 비웃음을 삼켰다.
저게 이 상황에 할 소리던가.
어르고 달래도 모자랄 판에, 내전이 끝나고 감당할 수 있겠냐 으름장을 놓다니.
사발디 백작은 조용히 인상을 찌푸릴 뿐이었다.
“각하. 사발디가 흐레이그를 모셔 그 역사가 가문이 존재한 시간과 같습니다. 저희가 항상 충심으로 따랐으나, 돌아오는 것이 이러한 의혹이로군요.”
“이간계다. 저 어린놈이 노리는 바가 그것이야.”
“그렇다면, 각하께서 맹세하여 주시겠습니까?”
“그깟 맹세 따위! 오냐, 천신께 맹세코, 나는 결백하다. 모든 것이 저 반역자의 해괴한 헛소리일 뿐이야.”
그러자 백작이 시엔을 바라보았다.
“명예 성자께서는?”
“파문당한 이의 맹세라. 웃기지 않나요? 각하께서 저러시는데 말로 떠드는 결백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도 모르겠고. 증거와 증인이 있으니 제가 굳이 더해 믿으라 말씀드리진 않을게요.”
“제가 말장난을 하려는 것으로 보입니까?”
백작의 눈에 노기가 서렸다.
시엔이 고개를 저었다.
“명예 성자라고 해도 결국 명예일 뿐이고, 교단을 기꺼이 여기나 적을 두진 않았습니다. 말씀 낮추세요. 이 자리에 신관으로 찾지 않았어요.”
“맹세를 할 수 없다?”
“아니요. 이걸 보시겠어요?”
시엔이 손을 들어 신성을 발했다. 그저 빛을 비추기야 마법사도 흔히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밝음이 눈부시지 않고 또한 성스러워 누구나 한눈에 알 수 있는 것은 신성뿐이었다.
“제가 신성을 피웠으니 여기에 걸고 맹세해 백작님께 믿음을 심어드릴 수 있겠지만, 천신께 기댄 권위에 판단을 내리시려거든 그러지 마세요. 백작께서 스스로 생각해 결론을 내셔야지요.”
“네노옴!”
공작이 고함을 질렀다.
맹세는 안 한다고 말하면서 굳이 신성을 보여주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말은 번지르르하니 상대를 위하는 척하나 그뿐이었다.
신성을 쓰는 신실한 이와 파문당한 자의 비교를 두기 위한 것이 아니던가.
실제로 시엔이 노린 바가 그랬다.
공작이 망설임 없이 천신을 입에 담았으니, 시엔 역시 더는 굳이 언급을 피할 이유가 없었다.
그저 뻔뻔하기로는 창세 아래 가장 대단한 작자다 생각하면서.
시엔이 지휘 막사의 뒤바뀐 분위기를 읽었다.
“그럼,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본래는 공작의 말실수를 끌어내 궁지에 몰 계획이었다. 생각보다 영리한 작자라 걸려들지 않았지만.
이 상황에서 어설프게 더 입을 놀려봐야 주둥이가 길다는 소리나 듣지. 시엔이 물러날 때를 알았다.
시엔이 팔을 접고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고개를 숙인 채로 검위공의 팔뚝을 툭 치고는, 이내 곧장 몸을 돌려 훌쩍 뛰어올랐다.
입구를 막던 기사가 놀라 검을 쥐었다.
그러나 시엔이 순수한 육체 능력으로 오러를 쓰는 이와 같은 수준이었다.
한 발짝에 성큼 내디딘다. 두 발에 이미 기사 앞이었다. 시엔의 어깨가 기사를 들이받았다.
기사가 중심을 잃었다.
쓰러지는 기사의 시선에, 공중에서 몸을 한 바퀴 돌려 머리 위로 사라지는 습격자의 잔상만 남았다.
“젠장! 놈이 도망친다! 저 반역자의 목을 쳐라!”
등 뒤로 들려오는 노성.
검위공이 어둠칼을 휘둘러 말을 맨 줄을 끊었다.
시엔이 천막 앞 깃대를 뽑으며 소리쳤다.
“검위공, 밧줄이요! 천막!”
“오냐!”
검위공이 검은 칼날을 휘두른다.
오러 섞인 검풍이 막사 주변으로 쏘아졌다.
말뚝에 매인 밧줄이 싹둑 잘려나갔다.
지휘 막사의 입구 지지대가 쓰러진다. 곧장 입구가 맥없이 내려앉았다.
쫓아 나오려던 기사들이 천막을 뒤집어썼다.
방수포로 만들어진 천막 천은 제법 무거운 물건이다. 사람 모양으로 솟은 여럿이 허우적거렸다.
시엔과 검위공이 키득거리며 말에 올랐다.
딱히 앞을 가로막는 이가 없었다.
명령을 내려야 할 지휘 막사를 고립시키고 말을 타고 먼저 달렸다.
아주 잠깐의 차단이었지만, 덕분에 추격 명령이 시엔보다 빨리 닿지 못했다.
게다가 시엔이 깃대 하나를 챙기지 않았던가.
지휘 막사 앞에 곧장 손에 잡히는 것을 뽑았다.
시엔이 깃발을 번쩍 들어 소리쳤다.
“비켜! 급한 일이다!”
그러니 군대가 날뛰는 두 기마를 막아내긴커녕, 급히 길을 터주기 바빴다.
심지어 진영의 끝, 경계를 선 병사들이 급히 목책을 끌어 친절하게 길을 열어주기까지 했으니.
그렇게 한참을 말을 달리니 도시의 성문이 코앞이었다.
시엔이야 눈이 밝아 대낮이나 다름없으니 달 아래 훤한 벌판을 달려나갔다.
검위공은 소드 마스터의 체면이 있지, 낙마라도 하면 평생의 치욕이다 위기감에 그냥 이를 악물고 말을 몰았다.
야간에 도망치는 적을 추격하기란 본래 보통 준비가 필요한 일이 아니라, 따라붙은 적이 보이지도 않았다.
“흘흘, 자네랑 있으면 심심할 일은 없다니깐.”
“그런 것 치곤 지치신 것 같습니다만.”
“자네야말로 남의 깃발을 언제까지 들 셈인가?”
시엔이 위를 살피니 하필 흐레이그의 깃발이었다. 총사령의 깃발이 입구에 가장 가까이 있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겠지만.
시엔이 악령을 불러 불을 일으켰다. 흐레이그의 깃발이 금세 불길에 휩싸이고, 뒤이어 시엔이 홀로 남은 깃대를 휙 내던졌다.
* * *
영주성은 새벽부터 분주했다.
해가 뜨기 전부터 밥 짓는 연기가 피어오르더니, 기어코 지평선에 걸릴 때쯤 군대가 식사를 시작할 수 있었다.
본디 전투 전에는 건량 따위로 때우는 편이었으나, 성채를 끼고 적을 관측하며 살피는 것이 가능할 때는 또 이야기가 달랐다.
뜨거운 수프를 곁들인 푸짐한 식사는 사기에 큰 도움이 되니까.
시엔이 보루에 올랐다.
어느새 도시의 가까운 곳까지 다가온 적의 군대가 보였다.
그리고 그 뒤편, 본래 진영을 꾸렸던 곳에 적지 않은 숫자가 주둔 중이었다. 시엔이 눈을 가늘게 떴다.
용과 섞여 뛰어난 시야가 더욱 먼 곳을 살펴 깃발 여섯 개를 살폈다.
사발디를 포함한 네 개 가문의 깃발이었다.
본대가 이동했음에도 자리를 지키고 있으니 중립을 선언해 지켜보겠다는 뜻이리라.
네 개 가문이면 오천에서 팔천쯤 되는 적이 줄어들었다는 뜻이기도 했다.
“간밤에 돌아다닌 수고가 있었구먼.”
“수고에 비해 큰 성과는 아니지만요.”
애초에 적 절반인 만오천 정도는 묶어둘 수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흐레이그 공작이 가진 영향력을 얕잡아 본 모양이었다.
“자네는 참 욕심도 많아. 입으로 조금 떠들고선 적을 저만큼이나 줄이지 않았나. 사서에 나올 업적이네만은.”
“업적이 무슨 상관이랍니까.”
시엔이 피식 웃으며 손에 든 것을 만지작거렸다.
새카만 해골.
만화원의 마법사가 쓴 세 개의 성물 중 가장 강력한 것이었다.
나머지 둘은 이미 흡수해 녹여냈으나 아직 두개골만은 놔둔 상태였다.
이 안에 선뜩한 증오가 담겨 있음을 알겠다.
흑마법사가 마지막까지 산 부위가 바로 머리였다.
목이 잘려 땅을 뒹굴면서도, 성대에 숨을 불어넣을 허파도 없으면서, 쩌렁쩌렁 온 사방에 우렁찬 언령을 토해냈던 바로 그 머리.
본래 내 것이라 하나 굳이 이러한 분노를 되찾을 이유가 있을까.
시엔이 두개골을 만지작거렸다.
흑마법사는 죽었으며, 제국은 멸망했다. 여기에 선 이가 과거의 흑마법사가 아니다.
그러니 대상 없는 증오가 필요한 일은 없으리라.
시엔이 눈을 감았다.
보이는 끝까지 불탄 폐허가 펼쳐졌다. 마법사의 심상 세계였다. 그 가운데에 시엔이 손을 펼쳤다.
손끝으로부터 균열이 번졌다. 쩌적쩌적 번져나간 금이 마침내 산산이 깨져나갔다.
자리에 남은 것은 통로였다. 그 너머로 헤아릴 수 없이 넓은 공간과 그 속을 채운 어둠이 넘실거렸다.
부정 세계로 통하는 포탈.
마법사가 심상에 문을 열어 마법을 받아들이고, 뒤이어 주문을 외워 현실에 불러들인다.
포탈 너머 저 아주 먼 곳에 얼핏 불빛이 비쳤다.
뒤이어 포탈 너머의 불빛이 가까워졌다. 사람이 감히 인지할 수 없는 속도였다.
포탈이 실은 부정 세계 아래로 추락하고 있는 과정이었다.
부정 세계 깊은 곳. 가장 깊은 곳의 감옥을 향해.
문득 포탈 위에서 불쑥 아래로 솟아 나오는 머리통이 있었다. 아직 젖살이 빠지지 않은 여린 여아의 얼굴이었다.
아. 이런, 젠장. 시엔의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오. 시란이다. 시란시란시란! 놀러 왔구나!”
“순진께서 왕림하셨군요.”
“그러엄! 누가 온 것 같아서 곧장 왓지롱! 나랑 놀러 온 거지? 놀러 왔구나! 좋아, 놀자!”
“어. 금일은 순진을 뵙자 한 것이 아닙니다만.”
“몰라! 난 놀 거야! 놀자! 놀자! 놀자! 놀자!”
시엔은 어지간하면 말로 해결을 보는 것을 선호했다. 그리고 그게 안 되고 나서야 힘을 쓰곤 했다.
그런데 말로는 절대 해결이 안 되는데, 힘으로도 어림이 없는 상대가 있었다.
대죄인 순진무구.
“아. 싫어! 싫다구! 또야! 이거 놔! 놓으란 말야!”
-참아라.
“너 자꾸 나만 방해하지! 나 울 거야. 운다? 울 거야? 운다? 나 울면 너 큰일 난다?”
-참아라.
“나쁜 놈! 거지발싸개 같은 놈! 미워! 밉다고!”
-참아라.
“아, 잡아당기지 마! 하지 말란 말야! 끄으…….”
기어코 순진무구의 눈에서 방울방울 눈물이 쏟아졌다. 거꾸로 매달린 통에 눈물이 눈썹에 맺혀 세를 불리다 이마로 흘러내렸다.
그러나 그뿐. 순진무구의 머리통이 포탈 위쪽으로 사라져가고, 앙증맞은 손가락이 테두리를 잡고 버티나 얼마 지나지 않아 놓쳐버리고 말았다.
포탈 너머로 아이가 떼를 쓰며 억지로 우는 소리가 급격히 멀어져갔다.
뒤이어 포탈 너머 무저갱, 바닥없이 깊은 감옥에 수수하나 아름다운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인내하는 슬픔.
모든 욕망을 인내하고 끊어 미련을 떨치고 정신적 독립을 이루는 것이 미덕이다 주장한 덕 높은 사제가 있었다.
그녀가 말하기로 세상의 슬픔이 모두 욕망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그러니 욕망에서 해방되어 진정 기쁨만이 존재하는 경지을 원했다.
그러나 사람이 사는 목적이 기쁨을 추구함이다.
인내는 그저 계속 참아 시간을 낭비하고 또 삶의 목적을 포기하는 것에 불과했다.
거기에 세상에 인내를 풀어 탐욕을 부정한 것으로 취급했다.
그리하여 사람이 탐욕을 숨기며 삶이 기쁨을 부끄러워하며 숨기고자 하니, 그녀가 세상에 가장 큰 죄악을 풀었다.
그리하여 깊은 곳에 고통받으리라.
-오랜만이구나, 흑마법사.
“인내하는 슬픔께 또 신세를 지고 말았습니다.”
-괜찮다. 순진무구의 방종을 내 사과하지. 보아하니 본 인내를 찾는 것이 아니로구나. 누구를 보러 왔는가? 이번에도 부패인가?
“아닙니다. 부패한 환희께선 잘 계십니까?”
-언제나처럼 고통을 인내하고 있지.
“안부 전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혹여 파랑새께서는 안에 계시는지요.”
-그렇다면 물러나야겠구나. 또 다음에.
시엔이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뒤이어 포탈을 닫고 심상에서 벗어나 눈을 떴다.
그러자 검위공의 물음이 날아들었다.
“자네, 어깨에 그건 또 뭔가?”
어느새 시엔의 어깨 위, 당연하다는 듯이 다리를 놓고 서 있는 생물이 있었다.
아름다운 자태의 새가 한 마리.
깃털이 푸른 빛으로 일렁이며 신비스러운 녀석이었다.
긴 꼬리깃이 머리카락처럼 휘날리며 시엔의 발치까지 닿았다.
부드럽게 호선을 그리는 볏 아래 새까만 두 눈이 참으로 앙증맞았다.
“파랑새입니다.”
시엔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행운의 상징, 아시죠?”
< 38. 대단원 [5]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