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작가의 망령재림-181화 (177/268)

< 37. 재해만발 풍운도시 [4] >

베스탄티의 생존자들, 유민들은 벼랑 끝에 섰다.

터전과 사랑하던 이를 모두 잃어버리고, 남은 것 없어 오로지 그저 몸뚱이 하나가 남았다.

사람은 본디 더는 잃을 것이 없을 때가 돼서야 온전하게 증오에 몸을 맡겼다.

원수는 명백했다. 티란디스의 깃발을 든 병사들. 평화로운 도시에 학살을 일으킨 주범들이었다.

그래서 유민들은 복수를 원했다.

그들의 주인이 허락하여 수단을 마련해 주었다. 마법사의 기이한, 주술과도 같은 어떤 행위를 받아들이라고.

이후 유민들에게 내려진 임무는 단순했다.

민가에 머무르다 원수의 군대가 지나가면 매달려 발을 묶으라고.

그러나 도시가 불타고 거처가 따라 화마에 휩싸였다.

도망쳐서 이탈한 유민들이 갈 데 없이 영주성에 모여들자, 흐레이그는 일단 신전에 찾아가 대기하라 명령을 내렸다.

그 와중에 몇몇은 흐레이그의 기사들에게 불려가 특별한 임무를 맡았다.

성녀를 찾아가 그들의 억울함을 호소하고 죄악을 단죄할 것을 청하라고.

* * *

진료가 끝나자마자 뷔아가 바로 쌍심지를 켰다.

“아니, 이단 심판관이세요? 눈만 봐서 죄를 알게?”

“오. 교단의 심판관들께서는 눈으로 죄를 아시는 겁니까? 그것참, 대단한 능력인데.”

“아, 씨. 말 돌리지 말고요. 내 말 알잖아요?”

“눈이 아니라 다른 것을 보아 알 일입니다만.”

“설명해 봐요.”

뷔아가 허리에 손을 척 올렸다. 그냥 넘어가지는 않겠다는 태도였다.

시엔이 말을 골랐다.

“일단 손을 보니 병사의 것이더군요. 분명 창을 능히 다루는 이의 손이었습니다.”

“그걸 보고 안다구요?”

“손에 굳은살이 배기는 것이 본디 오래 쓰는 도구에 따르지 않겠습니까. 뷔아야 모르겠지만은.”

“좋아요. 병사분이셨네요. 그리고?”

“병사가 성직자 앞에 고개를 떨구고 눈동자를 흔드니 떳떳하지 못한다는 뜻이고, 이러한 때에 치료를 받으러 왔으니 필시 불탄 가옥에 매복하고 있던 자가 아니겠습니까? 매복이 본디 정예에게 맡기는 일이고, 또한 충성심이 필요한 일입니다.”

“그래서 혹시 몰라 떠보셨다? 죽는다느니 얼마 못 버틴다느니 겁까지 주면서? 아니, 뭐 이딴.”

뷔아가 한숨을 푹 쉬었다.

“시엔이 돕겠다 했을 때 내가 허락한 건, 시엔이 항상 교단과 군대를 따로 보았기 때문이에요. 물론 군의 도움을 받아 이로운 일이기도 했지만, 돕겠다고 할 때는 티란디스의 대공자가 아니라 명예 성자로 움직이겠다고 한 줄 알아서.”

“그야 그렇습니다만.”

그렇다고 사실 제가 악령을 풀었는데, 그 악령이 원수를 찾아 달라붙어 있어서 알았습니다. 이렇게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아니지. 말 못 할 건 또 뭐야.

시엔이 생각을 바꿨다.

어차피 시엔이 마법사임을 왕국이 알고, 전쟁이 끝나고 나면 멀리 퍼지리라.

지금까지 없던 마법이 나타났으니 자연히 알고자 할 테고, 그때는 굳이 숨길 이유가 있나?

애초에 시엔이 흑마법사임을 굳이 말해 해명하지 않는 이유는 그저 내 수단을 적에게 알리고 싶지 않음이었다.

“뷔아. 제가 마법사인 것은 아실 테고, 마법사에 대해 얼마나 알고 계십니까?”

“그냥 남들만큼만? 아케인 에너지를 다루고, 또 개중에 속성이 넷으로 나뉘고. 그러니까 화염, 물, 대기, 땅. 이렇게 말이에요.”

시엔이 고개를 저었다.

“사실 하나가 더 있습니다. 세상에 신성이 밝아 그림자가 지니 부정한 기운이 있는데, 이를 부르길 음차원 에너지라 하죠. 그걸 다뤄 흑마법사, 심연탑의 그림자들이라 칭합니다.”

“아니, 잠깐.”

뷔아가 손을 내저었다.

“그건 또 무슨 생뚱맞은 소리죠? 그러니까, 내가 지금 들은 사실이 맞다면, 사실 아무도 모르는 다른 마력이 있는데, 시엔이 그걸 다룬다구요?”

“훌륭합니다. 뷔아는 생각보다 머리가 좋군요.”

“하, 성녀는 아무나 하는, 잠깐. 생각보다?”

“마저 이야기하자면. 사람이 죽어 그 영혼이 천상에 닿는 것이 이치입니다만, 개중 죽음이 억울하여 도저히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남는 것들이 있습니다. 망령이라 부릅니다만.”

“그러니까, 귀신이 존재한다?”

뷔아가 삐딱하게 자세를 잡았다. 팔짱을 낀 표정이 불량하기 짝이 없었다.

“지금 나, 진지하게 놀리는 거죠?”

“이런. 들켰습니까?”

“시엔! 갑자기 농담이나 할 때예요?”

“사실 농담이 아니었습니다만.”

시엔이 사역하는 악령에게 마력을 불어넣었다.

그림자가 솟아올라 거뭇한 형체가 대충 사람의 모양을 했다.

쉐도우 스토커. 시엔의 그림자에 깃든 악령이 주인의 명을 받아 모습을 드러냈다.

버닝 신이 그 옆에 불탔다. 한없이 타오를 뿐인 가엾은 악령이 고통에 찬 귀곡성을 내질렀다.

“어머, X발. 세상에.”

시엔이 신성을 품어 그 기운이 가려졌었다.

이제 현상계에 형태를 갖추니, 부정한 기운이 휘몰아쳐 성녀가 보기에 한없이 끔찍한 것들이었다.

곧바로 성력을 일으키니 시엔이 급히 만류했다.

“뷔아, 일단 진정하시고.”

“진정? 지금 내가 진정하게 생겼어요? 세상에 어떻게 저렇게 끔찍한 것들이.”

“이거 안 보이십니까?”

시엔이 왼손을 들어 손등을 살랑살랑 흔들었다.

복잡하게 새겨진 상처가 바로 명예 성자의 증표, 성흔이었다.

교단의 인사에게는 가장 설득력 있는 수단이기도 했다.

약 올리듯 흔들리는 성흔에 뷔아가 인상을 구겼다.

“그래서, 저게 귀신들이고. 시엔이 다루는 거고.”

“맞습니다. 그리고 천신께서 허하신 일이니까요. 본디 사제가 신정으로 산 자를 구하고 흑마법사가 죽었으되 사라지지 못한 부정한 것들을 거두도록 하셨습니다.”

“……손은 좀 그만 흔들어요. 정신 사나우니까.”

뷔아가 머리를 쓸었다. 시엔이 이어 설명했다.

베스탄티, 그 도시에 참혹한 일로 수많은 망령이 있었다.

그 원한을 풀도록 돕기 위해 원수를 찾아가도록 했다.

그리고 이전 그 환자에게 망령 셋이 붙었으니 그 참상의 범인 중 하나라는 뜻이라고.

뷔아가 베스탄티의 끔찍한 광경을 떠올렸다.

광장 가득 고인 시체 더미 앞에 중얼거리던 시엔의 모습. 그저 슬픔과 연민으로 깜빡이던 눈동자, 그 위에 처연히 떨리던 섬세한 속눈썹……. 뭐? 아니.

“진짜 미쳤나 봐.”

뷔아가 급히 생각을 틀었다.

어쨌거나 이후 기이한 한기가 가시고 볕이 드는 기분이 들더니만. 아, 그럼 그거 진짜 위령이었네.

“뷔아?”

“네, 아니요. 네. 아하하, 그러니까, 그래서요?”

“충격을 받으신 모양이네요. 이해합니다.”

죽어서 천상에 닿지 못하는 이가 있다고 들었으니 충격을 받을 만도 하지.

재림 이전에도 흑마법사와 사제의 사이가 좋지는 않았고, 개중에서도 교단의 원리주의자들은 심지어 이단 선포를 해야 한다며 꾸준히 날을 세우기도 했었다.

성흔이 있어 다행이었다. 우기면 그만이니까.

“그러니 아직은 뷔아만 알고 계십시오.”

“어. 저만요? 그럼 다른 분들은 아직 모른다는.”

“누군가에게 털어놓기는 뷔아가 처음입니다.”

“흐흐…….”

음산한 웃음이 새어 흘러나온 탓에, 시엔이 움찔했다.

혹시 사람 잘못 고른 건 아니겠지. 어째 약점이라도 잡았다는 태도인데.

뷔아가 어쩐지 의기양양해 제 가슴팍을 찹찹 두드렸다.

“걱정 말아요. 교단에서 내 입이 제일 무거운 거 알죠?”

“무거운 건 모르겠고 지저분한 건 압니다만.”

“아, 씨이. ……뭐, 이번엔 특별히 봐줄게요.”

“봐준다니. 사실을 말했기 때문에?”

“야!”

시엔이 또다시 키득거렸다. 반응이 이러니 계속 놀릴 수밖에는 없지.

생각해 보면 주변에 놀릴 만한 이가 달리 없기도 하고.

보면 세올이야 가만두고 지켜보기만 해도 웃기는 녀석이고, 트리예는 세올 옆에 붙으면 어째 지능이 떨어지는 것 같으니 굳이 약 올리지 않아도 재미를 보장해 주지 않던가.

정신 나간 노소는 농담을 구분하지 못하니 농을 붙이기가 무서울 정도고.

“어쩐지 기분이 좋아 보이시는군요.”

“아니요? 누가 기분이 좋아? 전혀. 전혀 아닌데.”

뷔아가 손부채질을 하니, 확실히 무언가 있기는 한 모양이었다. 시엔이 진지하게 물었다.

“뭔가 고민이라도 있으십니까? 요즈음 항상.”

“아아니요! 고민은 무슨. 그런 거 없는데? 맞다. 식사 준비나 좀 도와야겠어요.”

그리고는 냉큼 도망쳐 버리는 것이 아닌가.

뭐, 근래에 충격받을 일이 연달아 있지 않았던가. 저 성격에 혼자 끙끙 앓는 중일지도 모르고.

제 속이 어떻건 남들 앞에 굳건히 서서 신앙을 인도하는 것이 성녀의 숙명이기도 했으니 더욱 그러하리라.

그나저나 노리는 이가 있을 수 있으니 조심하라 경고할 요량이었는데, 말을 꺼내기도 전에 도망을 쳐 버리고 말았다.

이러면 하는 수 없이 곁에 붙어 있을 수밖에는.

* * *

만화원이 이전에 인간 폭탄으로 교단을 공격하려 했으나, 사전에 그 정체가 들킨 탓에 실패해 불발로 그치고 말았다.

원래는 방화광 토메쏘의 연구 분야였으나, 그녀는 이미 죽었다. 주인 잃은 연구가 얼마나 기꺼운 일인가.

마찬가지로 만화원 소속의 방화광인 뤼니에가 날름 삼켰다.

뤼니에는 제 나름대로 주문을 개량했는데, 저번 실패는 아케인 에너지의 누수로 적이 알아챘다고 여겨 그 은밀함에 중점을 두었다.

원래 제 전공이 주문을 뜯어고치기까지 했다.

아니나 다를까, 그 완성도는 숫제 처참한 수준이었다. 위력은 반의반에도 못 미치고, 그러면서 제조 난이도만 더럽게 높아 성유해의 힘을 빌리지 않고서는 아예 불가능할 정도였다.

그러나 방화광의 사고방식으로는 이 정도면 충분했다. 위력이 약하면? 여러 개를 터뜨리면 되니까.

뤼니에가 로브를 뒤집어쓴 채 신전 앞 광장으로 접어들었다.

이미 어수선하기 짝이 없었다.

한쪽에선 커다란 솥에 흰 연기가 피어오르고, 그로부터 줄지어 선 이들이 바깥쪽으로 길게 늘어졌다.

그 안쪽으로 광장 가득 엉덩이를 붙이고 표정 없이 죽을 퍼먹는 사람들이 있었다.

검댕으로 지저분한 꼴을 하고, 머리 위엔 하얀 재를 드문드문 뒤집어쓴 채로.

여전히 불타는 도시에 하늘은 온통 검었다. 흰 재가 눈발처럼 한들한들 연신 떨어져 내렸다.

그리고 한편에 자리를 잡은 성녀를 보았다.

신전을 등지고 계단 앞에 무릎을 꿇어, 제 앞에 나서는 이들과 함께 기도를 올렸다. 더러는 신성을 일으켜 치유를 행하기도 하고.

뤼니에의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성녀의 경건한 태도도, 그 사람들 가운데서 빛을 발하는 미모도 아니었다.

머리 뒤로 희미하게 비치는 빛무리였다.

“헤일로…….”

뤼니에가 입술을 깨물었다.

그이는 항상 교단이 위선자라 욕하지만, 이러한 광경을 보면 어쩔 수 없이 교단과 사제들의 선량함을 다시금 깨닫고 만다.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인걸.

측은함은 측은함이고, 그보다 더 무서운 것이 그의 사랑을 잃는 것이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니까.

뤼니에가 마음을 다잡았다.

만화원의 다른 년들은 하나같이 인성이 저세상이다.

마법사란 인종이 원래 제 연구 아니면 관심이 없다지만, 개중에서도 유난히 개년들만 그이 곁에 꼬인다니까.

나라도 옆에 붙어서 바로잡아주지 않으면 안 되니까.

실상 다른 여인들이 들으면 코웃음을 칠 생각이었지만. 적어도 사람을 폭탄으로 쓰자는 데에 신이 나 앞장서는 년이 할 소리는 아니라면서.

그때 광장에 한 떼의 이재민이 새로 흘러들었다. 일부는 흠칫 놀라 몸을 떨기도 하고, 누구는 성급한 발걸음으로 성녀를 향해 움직였다.

뤼니에가 입술을 핥았다. 그녀의 작품들이었다. 안 그래도 우울하니, 폭발이라도 보고 기분을 풀 생각에 벌써 슬그머니 기대감이 치솟았다.

“성녀님, 제발 저희의 억울함을 들어주십시오!”

“추악한 티란디스놈들의 죄를 고발하겠습니다!”

인간 폭탄들이 성녀의 주변을 가득 메웠다. 바닥에 엎드려 발치로 늘어진 성복 자락을 붙잡고 울분을 토했다.

성녀의 당혹스러운 표정. 머리 뒤의 후광이 깜박거리며 점멸했다.

적어도 고통스럽지 않게 한 방에 보내 줘야겠지.

뤼니에의 입이 벌어졌다. 화염이 날름거리는 듯한 주문이 나지막하게 흘러나왔다.

“어어……!”

뒤이어 광장 곳곳에 불안한 탄성이 이어졌다.

이미 대공자의 명령으로 신전에 대기했고, 또한 성녀 주변을 메운 유민들.

눈코입과 귓구멍 인체에 뚫린 곳에서 강령한 빛이 뿜어졌다.

심장 깊은 곳에서 불길이 일어나니 단숨에 부글부글 끓어오른 피가 전신을 내달렸다.

끔찍한 고통에 빛과 비명이 한데 뭉쳐 벌어진 입으로 쏘아졌다.

뤼니에가 흥분으로 벌건 얼굴을 하고, 기대에 찬 눈을 부릅떴다.

이어질 광경을 절대로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그렇게 신이 나 속으로 숫자를 셌다.

하나. 둘. 그리고…… 셋!

< 37. 재해만발 풍운도시 [4]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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