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 세상천지 난리통 [6] >
시엔이 기사를 이끌고 들어와 베스탄티의 참상을 보았다. 시체로 메워진 광장. 차곡차곡 쌓은 시체가 이루는 깊은 호수였다. 그 위로 티란디스의 깃발이 펄럭거렸다.
그 앞에서 시엔조차 할 말을 잃었다.
흑마법사가 음차원 에너지를 다루며, 그 마력이 슬픔과 증오에서 나왔다. 그리고 슬픔과 증오는 대개 인간의 악의에서 비롯하는 법이었다.
그러니 시엔은 사람이 품은 악의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자부했다.
그러나 도대체.
차라리 이들이 살아서 항전했어야 했다.
도시의 문을 열고 머리를 땅에 붙여 항복의 뜻을 밝히면서도, 속에 칼을 품고 일시에 기습해 싸우고자 해야 했다.
군대를 상대로 평범한 영민이 분전한들 의미가 있겠냐마는, 적어도 그렇게 싸우는 와중에 죽어야 했다.
까득. 시엔이 이를 갈았다.
귀한 피가 세상에 따로 있으니, 위로 왕을 섬기고 아래로 백성을 살펴야 한다. 더 존귀한 신분으로 태어난 이가 가지는 의무였다.
적어도 시엔은 그렇게 믿어 그리 살았다.
제 일신의 평온을 추구했다면, 지워진 역사 속 왕자는 신비주의자 사원에 칩거하여 속을 다스렸을 터이니 흑마법사가 세상에 없었으리라.
시간이 지나 시엔의 삶도 그러했다. 귀족가의 일원으로 욕심 없이 행정이나 하나 맡아 못다 한 연구나 하며 지냈을 터였다.
그러나 결국 왕을 섬기고 대공자가 된 것이 결국 귀족의 삶이었기에.
시엔이 사는 방법을 이러한 길 이외에 알지 못했으니까.
시엔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흑마법사에 눈에 하늘을 가린 망령들이 보였다. 본디 평범한 죽음이 망령을 만드는 것이 아니다. 저 숫자만큼의 원통함이 있었다.
“가여운 것들. 가거라. 가서 너희의 원수를 찾아 복수를 속삭여라. 내 그 살점으로 주린 원한을 채우게 하리라.”
시엔이 중얼거렸다.
일찍이 말로 영혼을 묶어 재림한 흑마법사가 여기에 있었다. 그 말이 약속하는 복수였다.
망령들의 검은 영체 곳곳에 가로줄이 새겨졌다. 그 틈새가 벌어지니 붉은 눈동자가 무수히 떠올라 깔깔거렸다.
망령들이 한 떼로 몰려 흘러가기 시작했다. 그 숫자가 대단하니 하늘에 한줄기 급류가 일었다.
그 많던 망령 떼가 모두 사라졌다.
그제야 도시를 비추는 햇빛에 온기가 돌아왔다.
음차원 에너지가 본디 찬 성질이었으니, 사악한 마력이 자취를 감추자 본래의 더운 날씨가 되돌아왔다.
거기에 사람이 육감으로 아는 불길한 예감 역시 사라졌다.
시엔이 말머리를 돌렸다.
“돌아가죠. 여기에 우리가 할 일이 없네요.”
* * *
야전 병상? 그 참혹함은 나락이 아니었다. 시궁창에도 더한 바닥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러한 참상이었다.
시체가 썩어 흘러나오는 물을 추깃물이라 했다. 피가 아닌 체액들에 문드러진 살점이 녹아나 세상 지독하기 그지없는 구정물이었다.
뷔아는 넋이 나간 상태였다.
흥건한 추깃물 웅덩이 위에 털썩 주저앉아 그 지독한 냄새조차 눈치채지 못하고 그저 이 참혹함에 사고가 멈춘 상태로.
시엔이 도착했을 때, 뷔아는 조금 정신이 들었다.
티란디스의 깃발은 또 뭐고?
따질 생각으로 자리에서 일어나려다 힘이 빠진 몸이 허우적거리니 라이뱅이 급히 다가와 부축했다.
그리고 다시 시엔을 보았다.
낯선 모습이었다.
뷔아를 보며 언제나 온화한, 더불어 장난기가 넘쳐 기꺼운 눈을 한 시엔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광택 없이 차가운 눈빛에 그 분노가 고스란히 비쳤다.
그 시선이 저를 향하는 것임이 아님에도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뒤이어 시엔이 무어라 중얼거리는 것을 보았다. 입술만 달싹거리니 남이 들도록 하는 말은 아닐 터였다.
그러자 한기가 가셨다.
뜨거운 날씨 속에서도 기묘하게 달라붙던 차가움이 사라졌다. 가슴 속을 찌르던 일말의 불안감 역시 자취를 감추었다.
뷔아는 그제야 온전히 정신을 차렸다.
그러자 부끄러움이 찾아왔다.
시엔이 중얼거린 내용은 모르겠으나, 어떤 종류의 위령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심지어 그게 효과가 있었다.
그게 정말로 망자를 위로했는지, 아니면 그 모습에 자신이 위로를 받은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시엔이 명예 성자로 교단에 반쯤 적을 올렸다고 해도, 결국 세속에 속한 이가 먼저 나서서 행하도록 방치한 꼴이었다.
이런 년도 성녀랍시고 그 난리를 떨었다고? 뷔아가 아득 이를 갈았다.
그녀는 부끄러움 앞에 그저 황망해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유형이 아니었다. 오히려 반대였다.
* * *
“이봐요, 시엔.”
시엔이 복귀하는 길에, 뷔아가 말을 재우쳐 따라잡았다.
시엔이 아차 싶었다. 먼저 가라고 해놓고는 참상에 정신을 놓고 까맣게 잊고 있던 참이었다.
“아, 뷔아. 죄송합니다. 그러고 보니 미처 신경을 못 써 드렸군요. 괜찮습니까?”
“아니, 씨. 지금 내 걱정해요? 사람이 이러니까. 읏, 신경 쓰지 말아요. 미쳤나 봐.”
“갑자기 시비 걸기 있습니까?”
“됐고.”
시엔의 표정이 떫었다.
안 그래도 기분이 좋은 때가 아니다.
그래도 일단 참았다. 여인이 유난히 날카로워지는 때가 있기 마련이랬던가. 요즘 상태가 영 이상한 것이 아마 그런 연유일지도 몰랐다.
“시신의 수습은 어떻게 할 생각이죠?”
“그건 제가 할 일이 아닙니다. 장례을 치르려거든 그 가족과 아는 이, 주인이 된 이, 그도 아니면 용서받고자 하는 죄인이 청해야 할 일입니다. 저는 그중 어디에도 속하지 않으니 그러할 권리가 없습니다.”
“티란디스의 깃발을 봤어요.”
“저 참상이 티란디스가 한 일이라 생각하십니까?”
시엔이 뷔아를 멀거니 바라보았다.
“아니, 성녀님께서는 그렇게 생각하실 수 있겠군요.”
호칭은 존중을 담은 것이지만, 또한 사람 사이의 거리를 나타내기도 했다. 이런 때에 속을 긁으니 말이 곱게 나올 리가 없었다.
정작 성녀님이라 불러드리고 나니, 뷔아가 움찔 놀라는 것이 보였다.
어쩐지 불안한 태도로 급히 변명 비슷한 것이 되돌아왔다.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시엔이 그럴 사람이 아니라는 건 내가 아니까.”
“그렇지는 않습니다. 적성 도시의 시민을 모조리 참하여 전시하는 일이 아닙니까. 필요하다면 할 수 있습니다. 전쟁이 비단 군인만의 일이 아니고, 연약한 피로 내 영민의 목숨을 살 수 있다면 마땅히 그러할 일입니다.”
“아, 씨이. 그렇게 나오시겠다?”
뷔아의 얼굴이 금세 새빨갛게 물들었다.
시엔이 움찔했다. 또 울려는 건 아니겠지.
시엔이 바로 태도를 바꿨다.
“제가 안 했습니다. 세상 어떤 이를 걸고 맹세하래도 할 수 있습니다만.”
“그럼 그렇게 말하면 되지, 왜 주둥이가 그렇게 길어요? 사람 서운하게, 진짜.”
“뷔아는 지금 교단의 대리 자격을 가지고 계시지 않습니까? 친구와의 우정이 교단의 판단이 되어서는 안 될 일이잖습니까. 저는 일단 결백을 주장하겠습니다만.”
“좋아요. 그럼 죄인은 누굴까요?”
“심문입니까? 저로서는 흐레이그의 군대 이외에는 생각할 수 없겠군요. 북부의 영지를 지나쳐 왔으니 다른 귀족군은 접근할 수 없었고, 가장 이득을 보는 이가 공작일 테니.”
흐레이그가 얻는 것이 많았다.
군대의 결속은 더욱 단단해지고, 항복이 없다고 우길 터이니 죽음보다 더한 두려움으로 방어에 나설 텐데.
시민이 항복하지 않고 죽음으로 항전한 역사가 사서에 여럿 있기는 했더라도, 도시 하나를 몰살시켰다 하면 분명 비난을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거기에 이런 수작을 부렸으니, 분명 목격자를 따로 만들어두었을 터. 분명 항복에도 학살을 자행했다 억지를 부리겠지.
왕성이 함락되더라도, 북부 귀족 연합군이 복수를 천명하며 달려들 명분으로는 충분했다.
북상하는 북부 귀족군의 숫자가 만오천쯤 되던가. 시엔의 사천 군대로 대적할 수 없는 숫자였다. 심지어 이 병력으로 강스트프레를 함락시켜야 하는 때에.
기필코 죽여버리고 말겠다는 공작의 분노가 고스란히 담긴 함정이었다.
다만, 한 가지 맹점만 빼면.
흑마법사가 어떠한 존재인지 몰랐다. 시엔이 귀족으로 군대를 쓰는 것이 인간의 전쟁이기 때문이 아니던가.
흑마법사 개인의 일이 아니었기에.
그리고 흐레이그는 선을 넘었다.
어쩌면 공작에게는 저 심연 아래에 갇힌 대적을 맞이할 자격이 있을지도 모르고.
뷔아의 목소리가 시엔의 생각을 끊었다.
“시엔.”
“말씀하십시오.”
“이전에 말했죠? 전쟁은 선과 악의 싸움이 아니라 교단이 끼어들 일이 아니라고. 아직도 같은 생각인가요?”
시엔은 대답이 궁했다.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까지 할 것이라 예상했겠는가.
귀족이 제 의무를 저버리고 보살펴야 할 이들을 학살했다.
천신께서 내린 의무에 반하였으니 이는 분명한 죄악이었다.
“……어쩌실 생각이십니까?”
“신성 재판을 소집하겠어요.”
“보통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만. 정확히는?”
뷔아가 설명했다.
교단이 주체로 여는 재판이며, 모든 성민은 이에 임해야 할 의무가 있다.
성자와 성녀 대주교를 포함해 교단의 고위 사제가 심판관 열셋을 맡으며, 그동안 피고인은 모든 분쟁을 중지하고 조사에 임하여야 한다.
재판의 선언 이후 이루어지는 적대 행위가 최고형인 파문으로 곧장 이어지는, 사실상 교단의 영향력을 총동원한 실력 행사인 모양이었다.
“……실제로 역사에 몇 번이나 있습니까?”
“제가 알기로는 단 두 번이네요.”
“결과적으로 전 대륙에서 교단을 견제하고자 할 터입니다만.”
“결과가 옳게 되면 문제가 없지 않겠어요? 피고 티란디스 및 흐레이그. 도시의 학살을 자행하다. 어때요? 문제가 있나요?”
“저야 문제가 없습니다만.”
시엔이 한숨을 내쉬었다.
뷔아의 말대로라면, 내전의 끝이었다. 어쩐지 맥이 빠지는 결론이지만, 어찌 보면 이야말로 최선이기도 했다.
결국, 내 영민이 흘릴 피를 줄이는 일이니.
물론 왕국에서 그만큼의 대가를 치러야 하리라. 왕이신 델피르 전하께서 내실 값이었다.
그러나 백성을 돌보기 위함이고 또한 왕의 일이니 시엔이 이만큼 애썼다면야 할 의무는 다했다 하리라.
* * *
“뤼니에, 폭탄들은?”
“대충 끝났어. 뭐, 급하게 준비하느라 위력은 한참 떨어지는데, 원래 토메쏘 언니 전문이기도 해서 완성도도 떨어지고. 그래도 질보다는 양이잖아?”
“화염은 끝이고, 알리아?”
“네네. 저도 준비 끝이에요, 언니.”
“라이네스?”
“흐흐.”
라이네스라 불린 여인이 대답 대신 음침한 웃음소리를 냈다. 만화원의 마법사를 이끌고 온 팔란이 인상을 쓰며 뒤를 돌아보았다.
사람의 두개골을 사랑스럽다는 듯 쓰다듬는 퀭한 눈의 여인이 눈에 들어왔다. 새까맣게 변색이 된 머리뼈였다. 얼마나 매만졌는지 번들거리며 빛이 날 지경이었다.
“야! 이 음침한 년! 내 말이 말 같지 않아?”
라이네스가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왜, 왜, 왜…….”
“준비 끝났냐구!”
“으, 응. 끝났어…….”
“하여간 그이는 저딴 년을 어떻게…….”
“못된 늙은 년. 확 죽었으면.”
“뭐?”
팔란이 도끼눈을 뜨고 부라렸다. 라이네스가 어깨를 움츠렸다.
“아, 아무 말도 안 했어.”
“후우. 내가 참아야지. 메이화, 너는?”
“그것보단, 이상해.”
“또 뭐가?”
“악령이 상당수 흘러들어왔는데.”
“또 귀신 이야기야?”
메이화가 고개를 저었다.
“그게 아니라. 아무래도 흑마법사가 개입한 것 같아. 제물이 있던 도시에 세워둔 망령들이 힘을 얻어 여기까지 왔는데.”
“심연탑이?”
“심연탑은 아닌 것 같은데. 애초에 심연탑이 발견했으면 신나서 사역했을 텐데. 그보다 이 정도 수준으로 망령을 부릴 사람도 없어. 적어도 그 리치 정도는 되어야.”
“하. 그 해골바가지. 그러니까, 배신자가 납신다?”
“아마.”
팔란이 씩 웃었다.
“배신자 년이 제 발로 찾아온다면 뭐 잘된 일이지. 안 그래도 마음에 안 들었어. 맨날, 이 세오르그 오스텐이, 감히! 감히는 무슨, 죽다 만 해골바가지가.”
팔란이 옛 동료의 목소리를 흉내 냈다. 제법 그 특징을 잘 잡은 흉내라, 여기저기 여인의 웃음소리가 터졌다.
팔란이 짝짝 박수를 쳤다.
“어차피 우리 사이가 좋은 것도 아니고, 그이 옆에 너네가 있는 것만 해도 기분이 나빠. 하지만 이번 일이면 그래도 도시가 하나 굴러 들어와. 알겠지? 그이가 시장이라고. 작위도 하나 딸려오겠지. 그러면 우리도 귀부인이 되는 거고.”
정확히는 내가. 너희는 첩이지.
팔란이 속마음을 숨기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이번 일은 기필코 성공해야 해. 사적인 감정은 잠시 접어두고. 다들 알겠지?”
여인들이 나란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속마음도 같았다.
짬 좀 먹었다고 지가 정실이라도 되는 것처럼 굴기는.
확 죽어버려라. 하고.
< 36. 세상천지 난리통 [6]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