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 세상천지 난리통 [5] >
“도시의 상태가 정상이 아니니, 아무래도 정찰을 해 봐야겠습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자신을 지킬 만한 실력자분이 필요해요. 각 기사단의 대장급 인사 한 분씩을 뽑아 주세요.”
“정찰이라면, 그냥 정찰병을 보내면 되지 않겠소? 저게 적들의 함정이라면…….”
귀족들은 내키지 않는 눈치였다.
정찰병의 본디 임무가 그러했다. 안전하다면 돌아올 것이오, 함정이라면 그렇지 못했다.
누가 봐도 수상한 도시에 기사단장급 정찰대를 꾸리자니.
시엔이 아니라면 미친 소리라 비웃었겠지만, 그러기에는 쌓아놓은 신뢰가 보통이 아니었다.
그저 곤란하다는 듯, 혹은 저의가 무엇이냐는 듯 바라볼 뿐.
“제가 직접 갈 테고, 검위공께서 함께 나서실 겁니다. 거기에 기사단장급 실력자분들께서 함께한다면, 상황이 틀어져도 충분히 돌아올 수 있을 테니까요.”
“아무리 그래도 대공자가 직접 나설 필요까지야 있겠소?”
“그러다 잘못되기라도 하면 어쩌시려고.”
이어서 한 소리는 더 정신이 나갔다. 일군의 사령관이 직접 정찰에 나서겠다니.
“죄송하지만, 이번에는 제 뜻에 따라주세요. 혹여 어떤 일이 있을까 몰라 그러하니.”
시엔 치곤 드물게 강행하겠다는 의지를 밝히니 결국 귀족들이 어영부영 물러나고 말았다.
사실 왕국 최고의 검, 검위공이 호위한다니 최악의 경우는 없으리라 싶기도 하고.
시엔 입장에서야 가지 않을 이유가 없다.
저 수많은 망령이 날뛰는 도시.
과거 같았으면 먼저 도착하는 흑마법사가 임자라며 전력으로 내달릴 만한 장소였다.
저만한 망령이면 이계화를 걱정해야 할 정도로 음차원 에너지가 가득 찬 상태리라.
신출내기 어설픈 흑마법사라도 저 안에서는 능히 위엄을 보일 수 있었다.
그러니 시엔 정도 되는 경지에선 어떠하랴.
바다 위의 물길잡이, 토사 위에 선 땅지기, 산불 속의 불길잡이, 회오리바람을 등진 천문관.
마법사가 제 땅에 서면 과장 조금 섞어서 그 정신세계와 현상계가 구분되지 않았다.
뒤이어 각 기사단에 소식이 전해지자, 단장들이 기꺼이 나서 모였다. 이미 승리의 단맛을 본 기사들에게 티란디스의 대공자는 영광과 비슷한 뜻으로 쓰였다.
그러고 나니 뷔아가 찾아왔다.
어쩐지 시선을 피하는 모양새가 수상하기 짝이 없지만, 그래도 분명하게 할 말은 했다.
“나도 갈 거예요.”
“어딜 가십니까? 마실을 나가기엔 때가 영 좋지 않은데.”
시엔이 늘 그렇듯 능글맞게 뷔아를 놀렸다.
기대하던 반응은 돌아오지 않았다. 뷔아가 시선을 피하며 중얼거렸다.
“누가 마실을 나간다고…….”
확실히, 요 며칠 상태가 영 이상했다.
시엔이 진지한 태도를 취했다. 농담이 안 통하니 어쩔 수 있나.
“뷔아. 누차 말했지만, 교단이 세속에 관여하는 일은…….”
“아니, 씨. 대체 왜 그래요? 내가 가면 당신도 어차피 좋은 일 아니에요? 왜 그렇게 이 악물고 반대만 하죠?”
성녀가 일행에 있으면, 흐레이그가 어떤 함정을 파 놓았더라도 일단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적을 공격하는 일과 성녀를 습격하는 것이 구분되지 않으면, 이후에 오히려 큰 문제가 생긴다.
교단의 전력은 둘째 치고, 파문 혹은 주적 선포라도 당했다간 전 대륙에게 명분을 주는 셈이었으니.
“그게 제게 도움이 되니 그렇습니다.”
“그래서? 더 말해 봐요.”
“뷔아. 천신께서 세상을 그냥 지켜보심이 결국 교단의 뜻입니다. 병으로 아이가 죽는 일이 부당합니까? 때로는 부모가 사고로 죽고 남은 아이가 참혹하게 아사하는 일이 사악한 일입니까? 그러하니 천신께서 지상에 신분을 두어 왕이 귀족을 살피고, 귀족이 또한 영민을 살펴 보전토록 하셨습니다.”
“지금 나하고 신학으로 싸워보자는 거죠?”
“뭐, 못할 건 또 뭐가 있나.”
“방금은 혼잣말이다? 좋아요. 나도 혼잣말할 줄 아는데. 뭐 이런 놈이 다 있어.”
뷔아가 쌍심지를 켰다.
“좋아요. 그래서, 이 참혹한 전쟁이 결국 사람의 운명이다?”
그거 참 참신한 개소리네. 뷔아가 덧붙였다.
“방금 말씀드렸다시피, 크지 못하고 죽는 아이가 세상에 한둘이 아닙니다만, 천신께서 은혜를 내려 그 가여운 것들을 살리신다면 결국 어찌 되겠습니까. 누구는 구하고 누구는 죽게 내버려 두시겠습니까? 산 이는 칭송할 것이나 죽은 이는 원망하여 저주를 품겠지요. 교단이 그러한 이치로 중립을 지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까.”
“교단은 대륙의 가여운 이를 찾아 돌보죠. 구제는 시엔 같은 귀족들만의 의무가 아니잖아요? 천신께서 신성을 내려 그 종으로 하여금 행동하라. 평화와 사랑을 온 성도가 노래하게 하라 하셨으니.”
“그래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교단의 선의가 누군가의 이익으로 이루어져서는 안 되는 일이니.”
“교단의 선의는 한 번도 누군가의 이익이 되지 않았던 적이 없거든요?”
“바꿔 말하지요. 교단의 선의가 누군가의 불이익으로 이어져서는 안 됩니다.”
뷔아가 입을 다물었다. 교단의 선의가 누군가의 불행이어서는 안 된다.
교단이 눈치채지 못해, 혹은 능력이 되지 못해 손을 뻗지 못해 불행한 이가 있다 해도, 그건 그 주인 되는 귀족의 잘못이지 교단의 책임이 아니다.
교단은 그저 도울 뿐이므로.
이제야 납득한 모양. 시엔이 한숨 돌렸다.
그러나 뷔아가 미묘한 웃음을 띄웠다.
“그럼 됐어요. 나는 교단의 성녀로서, 곤궁한 도시를 위안하기 위해 방문해야겠으니까.”
“뷔아.”
“그러니 대공자의 호위는 거절하겠어요. 이제는 교단의 기를 들어 성녀행을 떠나려 하니, 대공자께 천신의 뜻이 함께하기를 빌어드리지요.”
함께 가는 것이 아니라 따로 용무를 보러 가겠다고. 시엔은 대답이 곤궁해졌다. 이러면 막을 방도가 없었으니.
시엔은 설득을 포기했다. 대신 물었다.
“왜 그렇게까지 하는 겁니까?”
“난 전쟁이란 게 뭔지 몰랐어요. 직접 겪어보기까지는. 시엔은 야전 병상에 있어 보았나요? 해 뜬 내내 피 흘리며 고통받는 이들이 끊임없이 모여들고, 밤이 되면 신음하며 살려달라 애원하며 잠을 이루지 못하는.”
“그들을 가여히 여기십니까?”
“네. 그래요. 그래서 내가 결코 외면해서는 안 되는 일이기도 해요. 그게 교단의 뜻이 아니더라도, 대륙에 교단을 미워하는 자가 나오더라도 마찬가지예요.”
“중립 의무를 저버리시겠단 말씀이십니까.”
“교단이 미움받아 세상이 좀 더 나아질 수 있다면, 나는 분명 그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렇게 말하는 뷔아의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 확신에 차 있었다. 그리고 빛이 있었다.
시엔이 뷔아를 바라보았다.
그윽하게 피어오르는 성스러운 불.
뷔아의 머리 뒤로 둥글게 떠올라 그저 맑게 온화하게 후광을 뿌리는 빛의 고리가.
헤일로.
시엔이 떫은 표정으로 성인의 징표를 바라보았다. 뭐야. 저게 진짜로 되는 거라고? 교단에서 떠는 허풍이 아니라?
경전에 기록으로 존재하나 그저 누가 말하여 기록했다는 것뿐, 직접 봤다는 사람은 적었다.
“천신이시여! 이것이 당신의 뜻입니다…….”
뷔아를 호위하던 라이뱅이 무릎을 꿇고 기도를 올렸다.
기도뿐이랴. 어느새 눈물을 줄줄 흘리고, 두 손은 곱게 모을 뿐이니 땅 위로 물방울이 뚝뚝뚝뚝 떨어져 내렸다.
그 앞에서 뷔아가 세상 자애로운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렇게 해서 나는 세상이 이롭기를 바래요. 어차피 세상 모두에게 사랑받는 사람은 없, 음? 사랑?”
뷔아의 말이 부자연스럽게 멈췄다.
이태까지 위엄이 따르던 성녀의 모습이 깨어지고, 부릅뜬 눈과 찡그리며 휘어진 눈썹을 하고 당황스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뷔아의 후광이 불안하게 흔들리며 깜박거리더니, 스르륵 자취를 감추었다.
“뷔아?”
“잠깐, 잠깐만요. 아. 씨. 이건 아니지.”
“뭔가 잘못되었습니까?”
시엔이 한 발짝 내밀었다.
“그만! 멈춰요! 그대로 딱 있어 봐요. 움직이지 말고. 당신, 차렷. 아니, 열중쉬어. 알죠?”
“왜 그러는지 전혀 모르겠습니다만.”
“아, 쫌. 그냥 시키는 대로 해요.”
시엔이 일단 그렇게 했다. 뷔아의 가늘게 뜬 눈이 위아래로 시엔을 살폈다.
으, 하는 영문 모를 소리를 내더니만, 다시 이상한 주문을 했다.
“이리 와 봐요. 두 발짝만. 어, 한 발짝만 더. 손 좀 앞으로 내밀고.”
시엔이 순순히 손을 내밀었다. 뷔아가 마주 뻗어 맞잡을 듯하더니만, 결국 닿기 전 파들파들 떨며 이내 손을 거두고 말았다.
“아. 씨. 진짜. 미쳤나 봐.”
“뷔아?”
“됐어요. 라이뱅 경. 바로 채비해 주세요. 지금 당장 떠나야겠으니까.”
그리고선 대답도 안 듣고 몸을 돌려 성큼성큼 떠나버리고 말았다. 어쩐지 도망치는 듯한 인상이었는데.
뷔아의 태도야 요 며칠 이상하기도 했고, 지금에 와서는 그것보다 더 흥미로운 주제가 생겼다.
헤일로라니. 마법사의 습성으로 몇 가지 가설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신성이 인간 신체가 담을 수 있는 한계를 넘었을 때 몸 밖에 저장하여 나타나는 것이 아닐까?
시엔은 사제가 아니라 학자였다. 신의 존재가 명확함은 두 인종이 모두 인정하는 바이나, 신성에 대해선 견해가 또 달랐으니까.
천신께서 내린다고 주장하는 교단과 달리, 마법사들에게 신성이란 스스로의 신앙이 만들어내는 에너지 발현 현상이라 추정했다.
물론 이 이론은 항상 성자 성녀의 존재 앞에 반론이 존재하기는 했다. 그렇다면 대체 날 때부터 신성을 품은 저들은 무엇이냐고.
물론, 대륙이 함께 천신을 믿고, 성자 성녀의 존재를 의심치 않으니 모두의 정신이 현상이 되어 나타나는 의견도 있기는 했다. 시엔이 믿는 바였다.
그렇게 나오면 최초의 성자는 누구냐 하는 추정뿐인 모순이 발생하니 보통 그 전에 토론을 접는 편이었다.
만약 뷔아가 성녀의 자격으로 교단의 태도를 정했고, 그로 인해 신앙이 더욱 확고해졌다면?
본디 성녀라 어마어마한 신성을 품었는데, 또 한 번 큰 신성을 거두어 신체의 한계를 넘었을 수도 있지.
일시적인 현상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현재로선 가설뿐이었다.
존재의 확인으로도 충분한 쾌거였다.
기록에 존재하니 본 사람이 없다 한들 그 기록이 헛되이 나오지는 않았으리라.
누군가 보았고, 그걸 구전으로 전했으니 또 그걸 듣고 누군가 기록했겠지.
“아. 논문 쓰고 싶다.”
그러나 시간이 없다. 성녀가 먼저 출발했으니 최대한 빨리 베스탄티로 출발해야 했다.
시엔이 대충 아쉬움을 달랬다.
* * *
교단의 깃발을 든 말이 도시에 접어들었다.
인기척이 하나도 없어 수상하기 짝이 없으니, 성녀와 성기사가 말을 묶어두고 경계하며 두 발로 걸었다.
성녀가 한참 복잡한 표정을 한 가운데, 성기사가 입을 열었다.
“성녀님, 실은 저 역시 명예 성자님과 같은 생각이었습니다.”
“라이뱅 경도 교단이 끼어드는 것은 옳지 못하다 생각하셨다구요?”
“생각이었습니다. 지금은 그렇지 않다는 뜻이지요.”
“생각이 바뀌셨다구요? 어째서요?”
“그야.”
라이뱅이 뷔아의 헤일로를 바라보았다.
이러한 때에 빛나고 있으니 그야말로 천신의 뜻이 임하심이라.
인간의 뜻으로 감히 선행의 한계를 정하지 말라 내리시는 말씀이 분명하다. 라이뱅은 그렇게 믿었다.
성황청에 복귀하고 나면 아마 교단이 발칵 뒤집히리라. 나쁜 쪽이 아니라 좋은 방향으로.
뷔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제 머리에 뭐가 묻었나요?”
“……아무렇지도 않으십니까?”
“뭐가요? 뭐가 있나요?”
“그, 머리 뒤쪽에 말입니다.”
뷔아가 고개를 돌렸다. 후광이 머리 뒤에 있으니 함께 돌아갔다.
당연히 뷔아가 보지 못하고 머리 위쪽을 빙 둘러 살폈다. 후광이 땅을 한 번 훑고는 제자리로 돌아갔다.
아무것도 보지 못한 뷔아가 이번엔 손을 들어 머리 위의 허공을 휘저었다. 당연히 손에 잡히는 것이 없었다.
“아무것도 없는데…….”
“그, 잠시.”
라이뱅이 검을 뽑아 살폈다. 잘 닦인 검날에 얼굴 반쪽이 비쳤다.
한 번 비춰 보시라 건넬 요량이었는데, 그러고 나니 어느새 후광이 꺼져 자취를 감췄다.
마치 뷔아가 알기를 꺼리는 것 같은 모양새라, 라이뱅은 순순히 포기하기로 했다. 거기에 사실 참으로 재미있는 모습이기도 하고.
“아무것도 아닙니다.”
“피. 뭐예요.”
뷔아가 킥킥 웃음을 터뜨렸다.
그 소리에 맞춰 헤일로가 점멸하며 빛났다.
그리고 잠시 후, 뷔아가 도로 심각한 얼굴이 되었다.
“라이뱅 경.”
“말씀하시지요.”
“그 메이 언니와 사이가 정말 좋으시다고.”
“제가 세상에 살며 천신께 두 번째로 감사드리는 일입니다.”
“두 번째요?”
“첫 번째는, 아시다시피 이제 저도 한 아이의 아버지가 되지 않았습니까.”
“아.”
뷔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두 분은 어떻게 만나게 되셨나요?”
“음. 꽤나 유명한 일화라 자부했습니다만.”
“그래도 본인에게 듣는 건 또 다르잖아요.”
라이뱅 경이 쑥스러운 듯 입을 열었다.
“때는 19년 전, 세속의 귀족이던 한 소년이 있었습니다. 꽤 높은 집안의 도련님이었지요. 열다섯 살이 되던 해에 신전에서, 메이를 처음 보았습니다. 그리고 곧바로 사랑에 빠졌지요.”
“그걸, 어떻게 알았어요? 그냥 보자마자?”
“예. 때가 낀 누더기를 입고서는, 제 키보다 큰 천신상을 닦고 있었죠. 상상할 수 있으시겠습니까? 천한 여인이 지저분한 꼴로, 다만 누구보다 숭고한 태도로 천신상을 닦고 있었단 말입니다.”
유명한 일화였다.
라이뱅 경이 그 자리에서 사랑에 빠졌고, 그 만남에 대해 천신께 깊은 감사를 드렸다. 그러자 기적처럼 오러가 흩어지고 대신 신성이 차올랐다.
그렇게 지금의 성기사장이 존재했다.
“어떻게 그렇게 확신할 수가 있었어요?”
“물론 천신께서 신성을 내리셨으니 의심할 바가 아니었습니다만은, 제 가슴이 그러하라 한 일을 외면할 수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모르는 거잖아요. 물론 메이 언니가 정말로 좋은 사람이긴 하지만, 혹시나 그렇지 않았다면요?”
“그러면 실망했겠지요. 하지만 그게 뭐 어떻습니까?”
“예?”
라이뱅 경이 씩 웃었다.
“그때야 사람 잘못 봤구나 하고 말 일이지요, 진실로 두려운 것은, 시도조차 하지 않고 포기하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라이뱅이 여인과 맺어지는 데에는 3년의 세월이 걸렸다. 라이뱅은 차기 소드 마스터가 되리라 유력하던 검의 천재이자 동시에 고위 귀족이었다.
그야말로 모든 이가 반대하던 인연이었다.
“좋게 생각하시지요. 반려를 찾는 일이란 시도하여 손해를 볼 것이 없습니다. 두고 보아 진실로 사랑이라면 남은 삶이 행복이지요. 아니었다면 뭐, 언제라고 또한 늦은 일이겠습니까. 혼약이 영원한 일이 아니니 갈라서는 것 또한 여상한 일입니다.”
“그런가요.”
망설이는 이의 등을 밀어주는 정도는 괜찮으리라. 헤매더라도 가야 할 길이라면. 아예 단정지어 가지 않는 것보다는 나을 테니.
라이뱅이 자상한 미소를 지었다.
괜히 부끄러워진 뷔아가 입을 다물었다.
그래도 묻고 싶은 것이 있는데 공연히 또 부끄러워 입술만 달싹거리기를 한참이었다. 결국, 말 꺼낼 기회를 영영 놓치고 말았다.
“천신이시여…….”
“세상에.”
라이뱅 경이 비통한 기도를 올렸다.
뷔아가 경악해 그 자리 그대로 굳었다.
도시의 광장, 급조한 장애물로 가려진 그 너머, 수백의 시체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시간이 지나 썩은 내가 천지에 진동하고, 온갖 벌레들이 날며 뜯으며 부산스럽게 연회를 즐겼다.
참혹하다는 말로도 모자란 참극. 시체들이 호수처럼 깊은 웅덩이를 이뤘다.
그 위에 꽂힌 깃발들이 보였다.
티란디스의 문장이었다.
< 36. 세상천지 난리통 [5]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