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 세상천지 난리통 [3] >
루우트다렌 요새는 독립 작전이 가능한 초대형 요새였다. 반면, 수도방어선은 최대 효율의 지연전을 전제로 설계되었다.
해자를 갖춘 소형 요새 여섯 채를 역삼각형으로 배치했다. 각 요새의 거리는 도보로 한 시간쯤 걸리며, 지하 통로로 서로 이어졌다.
왕실 마도병단의 땅지기가 관리하는 지하 통로는, 흐르는 땅 주문으로 쾌속 이동 및 보급을 할 수 있도록 했다.
요새 하나를 공격하면, 인접 요새에서 직접 병력이 튀어나와 옆구리를 쳤다. 요새가 함락될 것 같으면 비밀 통로를 통해 인접 요새로 후퇴했다. 그 후에는 통로의 지반을 무너뜨려 막았다.
그렇다고 요새를 우회할 수도 없다. 적을 뒤에 두고 진군하지 않는다.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대전략이었다.
이렇게 여섯 요새가 한 세트로 왕궁을 기준으로 팔방을 막았다. 동서남북의 외방어선과, 그 사이사이에 안쪽으로 자리를 잡은 내방어선으로.
소형 요새의 한계가 있다고 해도, 왕성으로 진군하려면 최소한 요새 두 세트를 함락시켜야 했다. 상호 보완 가능한 요새 여섯 채를 두 번 함락시켜야 하니, 공격하는 입장에서 고약하기 그지없었다.
그리고 1왕자파, 서부와 남부 귀족 연합군은 서쪽와 남쪽에서 양동을 펼치면서도, 수도 방어선의 위용을 절실히 실감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병력이 갈려 나갔다.
“4번 요새, 함락되었습니다!”
“피해는?”
“공성 간, 전투 지속 불능이 천 육백여 명입니다. 자세한 사항을 올려드립니까?”
“됐다. 빌어먹을. 나머지를 함락시키고 정리하도록 하지.”
서부 귀족 연합 하부 전선 주공 부대 총사령관 엘와즈 백작이 손을 내저었다. 이만 물러가라는 뜻이었다.
“생각보다 훨씬 피해가 큽니다.”
“왕실 마도병단이 문제입니다. 마법사의 숫자가 세 배 이상 차이가 나는 데에다, 불리하다 싶으면 바로 줄행랑을 쳐버리니.”
서부 귀족들이 말했다.
비난이 아니라, 위로에 가까운 말이었다. 생각보다 피해가 큰데 당신 잘못만은 아니라는.
왕국의 변경백이기도 한 여귀족은, 하부 전선에서 꾸준히 승기를 유지하며 그 진가를 인증했다.
시엔 티란디스의 화려한 전공에 가려지긴 했으나, 대등한 적군을 상대로, 피해를 최소화하며 조금씩 전선을 밀어붙인 전략가였다.
“빌어먹을. 왕국의 국경은 썩어 가는데, 왕성을 지키는 요새들은 계속 증축을 하다니.”
“그 말씀은?”
“어릴 적, 수도 방어선을 직접 견식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때보다 더 강성해졌군요.”
엘와즈 백작이 이를 갈았다.
방어 시설은 원래 계속해서 유지 보수가 필요했다. 황금을 바른다고 표현해도 될 정도로.
그리고 군대는 황금을 먹고 똥을 싸는 인종들이다. 돈을 들여 유지하나 생산력이 없다.
그래서 엘와즈 가문은 항상 가난했다.
왕국에 세금을 내지 않고, 오히려 국경 수호 명목으로 각종 지원을 받음에도 그랬다.
노후화한 성벽과 요새를 보강하려 해도 기술자를 부릴 황금이 없다. 그래서 군대에 맡겨 당장 급한 곳만 때웠다.
군대가 무슨 기술이 있겠는가. 그렇게 때워 놓은 것이 엉성해 매년 같은 문제가 생겼다.
그런 이유로 날이 좋고 농사일이 없는 봄이 되면, 당연하다는 듯이 대대적인 보수가 이루어졌다.
춘계 진지 공사였다.
물론, 대륙의 변경백들이 다 비슷한 신세였다. 대륙이 오랫동안 평화로웠다. 그러니 지배자로서는 병권을 쥔 변경백을 견제할 수밖에.
“전략 목표는 변하지 않습니다. 남은 요새 두 개는 동시에 정리합니다. 피해는 커지겠지만, 마도병단의 마법사들을 격멸해 두면 왕성 공략이 훨씬 수월해 질 겁니다. 동쪽으로 향할 겁니다. 왕성 서남 방위 요새는 남부 귀족들과 함께 공격하면 피해는 적을 겁니다.”
현재 서부 귀족군이 외방어선 서방 요새들을, 남부 귀족군이 외방어선 남방 요새들을 공략 중이었다.
이후 왕성 남서 방면으로 진격해 내방어선 남서방 요새를 함께 공략하고 왕성으로 진격한다.
1왕자파의 승부수였다.
* * *
흐레이그 영지의 관문은 텅 비어 있었다.
관문에 주둔하는 군막은 그야말로 터만 남았다. 목책까지 태워 없애, 재만 가득이었다.
영지 내의 모든 병력을 도시에 모아 방어하겠다는 뜻이리라.
빈터만 남은 군영을 보고, 부대가 정지해 취사 준비에 들어갔다.
어차피 북부 영지라 사방이 트여 적이 보이지 않았다. 흐레이그의 군대가 철수해 결전을 준비 중이라면, 이쪽 역시 든든히 준비해 두는 것이 좋으리라.
그리고 무엇보다, 아침부터 어렴풋이 느껴지는 존재감이 있었다. 멀리로부터 조금씩 가까워지는 신성이었다.
뚜렷하게 느껴지는 존재감.
시엔이 아는 이 중, 이만한 신성을 품은 이가 없다. 그러나 누구인지는 알 것 같았다.
아마 그사이에 신성이 더 늘어난 모양이지.
시엔이 쓴웃음을 지었다.
교단과 엮이지 않으려고 했는데, 이래서야 빼도 박도 못 하게 생기지 않았나. 그 성격에 돌아가라고 한들 순순히 돌아갈 것 같진 않은데.
“선배님. 저희는 좀. 그. 그렇죠?”
“욱. 속이 좀. 시엔 님. 잠시 자리를 좀 비워도 괜찮으신지요?”
세올과 트리예가 뒤늦게 신성을 감지하고 눈치를 보았다. 아직 도착하려면 시간이 좀 남았건만, 두 흑마법사는 벌써 창백하니 송장 같은 꼴이었다.
시엔이 고개를 끄덕이자 두 시녀가 급히 물러났다. 연신 가슴을 두드리는 것이 안쓰럽기도 하고.
그에 비하면 시엔은 태연했다.
아마 이럴 것이라 예상하긴 했다. 누렁이와 나비 이 정신 나간 것들 덕분에 시엔에게 신성이 싹텄다. 속에 품어 문제가 없었으니 더는 신성에 해를 입지 않으리라 짐작했다.
상반된 두 에너지가 반발하지 않고 어울린다라. 용의 신체 때문인가?
시엔이 무릎 위에 앉은 파린의 정수리를 내려다보았다.
어린 용은 두툼하게 구워낸 말고기를 양손에 쥐고 뜯어먹는 데에 여념이 없었다. 실상 스테이크라기보단 그을린 고깃덩어리에 가까웠다.
뭘 먹어도 맛있다고 하니 용의 식성이야말로 세상 제일 관대한 것일지도 모르지. 시엔이 작성 중인 ‘용의 식사에 대한 관찰’ 편을 머릿속으로 잘 갈무리했다.
아래에 받쳐준 냅킨이 이미 뚝뚝 흘러내린 핏물로 흥건했다. 시엔이 혀를 차며 다른 냅킨을 들어 파린의 입가를 훔쳤다.
“좀 얌전히 먹지.”
“흥. 고기는 입 안 가득 채워 넣고 씹어야 제맛이야. 인간처럼 깨작깨작 썰어 먹는 건 용에게 어울리지 않아.”
“그게 네 취향? 아니면 용의 대담함이야?”
“몰라. 다른 용을 본 적이 없으니까. 하지만 나는 용이고, 현재 유일한 객체로 지상 가장 위대한 종을 대표할 자격이 있어.”
제법 논리적인 말이었기에 시엔이 수긍했다.
파린에게 딱히 무언갈 교육한 기억은 없었다. 게다가 사방이 인간뿐인 틈바구니에서 용으로서 정체성이 흐려지지도 않았다.
용의 성장이란 그저 시간에 따라 자연스레 이루어지는 것일지도 몰랐다. 배우지 않은 것은 알 수 있다라. 도대체 이 무슨 완벽한, 그리고 불가사의한 생물이란 말인가.
시엔이 생각에 잠긴 사이, 천막 밖에서 누렁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도련님, 식사하시는 데에 송구하기 그지없습니다만…….”
시엔이 들라 하니 늙은 하인이 안으로 들어왔다.
언제나 그렇듯, 정중하기 짝이 없는 태도였다.
“도련님. 교단의 성녀님께서 뵙자고 하십니다. 뷔아 샤인 세러헤드 님이십니다.”
“오시라 해.”
“바로 바깥에 계십니다. 기다리라 말씀드려도 듣지 않으시는 통에 늙은이가 미처 막을 수가 없었습니다.”
뭐, 이미 알고 있었다. 천막 밖에서 느껴지는 강대한 기운을 어떻게 모를 수가 있을까.
심호흡을 하는 듯, 후 하 후 하 하는 숨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천막의 문을 들추고 낯익은 여인이 안으로 들어섰다.
시엔이 씩 웃으며 손을 들어올렸다. 쥐고 있던 냅킨이 흔들리는 통에 멋쩍게 다시 내려놓아야 했지만.
“오랜만입니다. 뷔아.”
못 본 사이 신성이 부쩍 성장했다.
용의 신체가 아니었더라면, 그리고 속에 피어난 신성이 아니었다면 시엔이라도 속이 성치 못했으리라.
인사는 했는데,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다.
시엔이 왜 저러나 하고 바라보고 있으니, 이내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질문이 돌아왔다.
용의 아이는 보호자를 닮았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머리카락을 가진 소년은, 놀라울 만치 시엔을 빼다 박았다. 특히나 그 얄밉도록 시큰둥한 미소가 그랬다.
“당, 당신! 그 아이는…….”
“거 참 오랜만에 듣는군요. 당신은 너무 가셨다 또다시 말씀드려야 합니까?”
뷔아가 기가 막혀 벙긋벙긋 입술만 씰룩거리는 사이, 파린이 냉큼 대답했다.
“나. 나는 파린. 위대한 용이야. 그런데, 신기한 인간이네? 용케 인간 주제에 저만큼의 신성을 담다니.”
“이런. 미안합니다. 아이가 좀 정신이 온전치 못해서.”
“너, 또 그런 식으로 감히 용을 모욕하다니. 그러고서도 네가 내 보호자야? 하여간 자격이 없어. 자격이.”
“보시다시피 이런 아이라.”
시엔이 어쩔 수 없다는 듯 양손을 펼쳤다.
태연하기 짝이 없는 태도. 뷔아는 무언가 울컥 치미는 것을 느꼈다. 사실, 언제나 그래왔으니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었지만.
“누렁이. 잠시 파린을 좀 맡아 줘. 성녀님과 할 말이 있으니까.”
“예. 도련님.”
“뭐야. 나 아직 덜 먹었는데?”
“작은 도련님, 그냥 들고 가시지요.”
“아. 그러면 되겠네. 들어. 정신 나간 것아.”
파린이 당당하게 양팔을 펼쳤다. 파린의 표현으로 정신 나간 것, 누렁이가 파린의 겨드랑이 사이에 손을 넣고 조심스레 품에 안았다.
누렁이가 막사 밖으로 나가자, 뷔아가 급히 캐물었다.
“그 아이, 엄마는? 엄마는 누구죠?”
“글쎄요. 분명치 않습니다만.”
시엔이 아이를 떠맡긴 푸른 용을 떠올렸다. 푸른 용의 성별을 알 수 없었다. 그러니 어미인지 아비인지 또한 모를 일이었다.
“분명치 않다니……”
뷔아가 경악했다. 물론 명예 성자가 하인으로 여인을 셋이나 두고 부린다고 했던가. 물론 정작 한 번도 눈으로 본 적은 없어 헛소문이라 믿었다.
시녀 중 둘은 성녀가 가까워지면 슬그머니 내빼느라 바쁘고, 하나는 음지에 숨어 혹여 모를 위협을 막는 중이니 당연한 일이었지만.
뷔아의 표정을 보며, 시엔이 속을 알아챘다.
충분히 오해할 만한 상황이 아닌가.
“아. 제 아이는 아닙니다. 사정이 있어 부모에게 부탁받아 보호 중인 아이이니.”
“그럼 처음부터 그렇게 말을 했어야지!”
뷔아가 소리를 바락 질렀다.
시엔이 인상을 찌푸렸다. 왜 이래?
뷔아도 아차 싶었다. 내가 왜 이래? 민망함이 밀려오는 통에 급히 말을 돌렸다.
“무슨 전쟁터에 애를 데리고 다녀요?”
“사정상 그렇게 되었습니다.”
“무슨 사정이길래 애를 전장에……”
“복잡한 이야기가 되겠습니다만, 지금 그게 중요한 사항은 아니지 않습니까?”
시엔이 말을 이었다.
“뷔아가 찾아온 이유가 사실 짐작이 가는군요. 미리 대답을 드리자면, 그럴 수 없습니다.”
뷔아의 가슴이 선뜩하게 내려앉았다.
이미 예상했던 바였지만, 어쩐지 얼굴이 뜨끈하게 달아올랐다. 뷔아가 억지로 인상을 찌푸렸다.
“아니, 사람 말은 듣지도 않고.”
“전쟁을 멈출 수 없겠냐는 말씀이시겠지요. 틀립니까?”
“……맞아요.”
시엔이 한숨을 쉬었다. 당연히 납득하지 못한 눈치였으니까.
하기야. 상대는 교단의 성녀였다. 그 지독한 역병 속에서도 사람을 구하겠다 뛰어들었던 그런 여인이었으니.
“뷔아. 말하자면, 전쟁은 선과 악의 대결이 아닙니다. 선량한 이와 사악한 적의 싸움이 아닌, 그저 사람이 각기 제 의무를 다하기 위한 그러한 충돌에 불과한 일입니다.”
“……그게 무슨 뜻이죠?”
“정의가, 선이 관여할 일이 아니라는 뜻이죠. 그저 인간의 욕망이 충돌하여 벌이는 다툼이니 말입니다.”
시엔이 쓰게 웃었다.
뱉고 나니 과연 그러하다 생각이 들었다.
결국, 사람의 욕심이었다.
델피르 전하, 어린 왕세자께서 그대로 왕위에 올랐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전쟁이었을까.
그렇다고 그것이 왕의 부덕인가? 그렇지 않았다.
국왕은 국왕의 권리를 행사했으며, 북부와 동부 귀족은 제가 모시는 왕을 위해 기꺼이 전쟁을 받아들였다.
무엇보다, 개전을 시작한 이가 시엔 본인이 아니던가. 왕자를 지키기 위해 전쟁을 벌였다.
결국, 사람은 이렇게 살았다.
먼 과거의, 역사에서 지워진 흑마법사가 그리했듯이.
제국이 사악했던가.
항복을 무시하고 왕국을 지워 본보기를 보였다.
침략자의 미덕을 어겼을지언정, 그를 통해 제 백성이 흘릴 피를 줄였다. 결국 제국의 황제가 제 의무를 다한 것이었다.
그리고 지켜야 할 의무를 다하지 못한 왕자가, 강대한 흑마법사가 되어 제 사명을 다했을 뿐.
“그게 뭐예요. 사람이 이렇게나, 많은 사람이 죽어 나가는데. 그게 고작 욕심 때문이라고.”
“비난해도 좋습니다. 뷔아는 자격이 있으니까요. 세속의 추악한 욕망을 비난하셔도 달게 받겠습니다.”
교단에게는 자격이 있었다. 선을 행하며 그저 선량할 뿐인 이들이니. 삿된 욕심을 버리고 함께 행복하자 말하는 것이 그네들의 역할이 아니던가.
“아니, 진짜, 씨발……”
생각해보니 성녀가 입이 제법 걸었다. 오랜만에 보아 잊고 있었는데, 혹시나 잊을까 봐 이러는 모양인지.
“진짜, 개 같네……”
뷔아가 말문이 막혀 못된 소리만 쏘았다.
물론 예상했던 바이지만, 그래도 막상 철벽을 치고 안 된다, 욕하려면 욕을 해라, 내가 나쁜 놈이고 그쪽이 옳기는 하다며 인정하고 나오니 어쩔 줄을 몰랐다.
그러자 밀려드는 것이 서운함이었다.
나쁜 짓인 줄 알면 하질 말아야지. 사람이 대체 왜 그러는지. 교단의 명예 성자라는 이가 입에 담을 말인지.
쏘아주고 싶은 말이 한가득인데, 목울대가 시큰하게 달아올라 제멋대로 꽉 닫아 말을 듣지 않았다.
이상하게 치미는 열기가 얼굴에 모이고, 걷잡을 수 없이 눈가로 모여들었다. 연약한 눈이 불타는 것처럼 뜨거우니 눈물샘이 화들짝 놀라 대처에 나섰다.
무언가 뺨을 타고 흐르는 것 같아 손으로 훔치니 물기가 묻어나왔다. 모르고 나온 눈물이나, 뒤늦게 알고 나니 둑이 넘치고 제방이 무너졌다.
뷔아가 서럽게 울음을 터뜨렸다.
“뷔아? 진정을 좀 하시는 편이.”
“진즈엉? 이이 나쁘은 새끼야아……!”
아니, 울긴 왜 울고 그래.
이전 삶과 이번 삶을 통틀어, 시엔에게 여인의 눈물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이전에는 그저 싸우느라 바빴고, 이번에는 딱히 관심이 없어 마음을 두지 않았으니.
인생 처음 맞이하는 당혹스러운 사태였다.
당연한 결과로, 시엔이 당황해 허둥거렸다.
< 36. 세상천지 난리통 [3]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