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작가의 망령재림-173화 (169/268)

< 36. 세상천지 난리통 [2] >

심화의 구도자, 방화광의 심상은 아케인 에너지의 근원인 원초 세계와 이어진다. 네 가지 원소가 그저 존재하며 휘몰아치는 허수 차원이었다.

방화광이 심상 세계에서 정신을 뻗어 원초 세계의 화우를 향해 더듬는다. 뒤이어 심상계와 허수 차원을 잇는 문을 만드니, 마법사가 자신의 심상 세계에 절대적인 관념을 들이는 과정이었다.

뒤이어 방화광이 이름을 통해 주문을 외운다. 세계가 편애하는 언어. 본래 존재하지 않으나 영혼을 통해 발음하는 사악한 진언이었다.

사하 헤르 하르아 히 알렌. 알렌의 이름으로 세상에 선언하니, 하늘로부터 불이 있으라.

화염탑의 부탑주가 지팡이를 뻗었다.

뒤이어 하늘 위로 검은 구름이 소용돌이치며 흰 재가 눈처럼 한들거리며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주먹만 한 불씨들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불의 비. 원초 세계의 화우가 지상에 떨어지는 순간이었다.

본디 마법은 공격보다 방어가 쉽다. 화염으로부터 보호 주문을 외울 수 있다면, 어지간한 실력차도 극복 가능했다.

그러나 영지의 마법사가 한 명. 그 견습 제자까지 쳐 줘도 두 명이었다.

화염탑의 부탑주와 여섯의 고위 마법사가 부르는 불의 비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성벽 위로 불의 비가 떨어져내렸다. 단순한 불덩어리가 아니라, 반쯤 녹아 불이 붙은 암석 덩어리들이었다. 몸에 맞으면 불티가 튀며 진득한 쇳물이 한 줌씩 맞은 자리에 남았다.

갑옷을 차려입은 기사나 지휘관들이야 더운 기운에 눈살을 찌푸리고 말겠지만, 가죽이나 천 따위로 몸을 감은 병사들에겐 그야말로 인세에 강림한 재앙이나 다름없었다.

몸에 불이 붙어 그저 성벽 위의 돌바닥을 뒹군다.

불을 꺼줘야 할 전우는 이미 살점 어딘가가 익어 이성을 잃었다. 정신없이 사지를 휘두르니 창과 활이 눈 없이 춤을 추었다.

누군가는 얻어맞고, 비명을 지르고, 죽어가며, 타오르고. 또 하늘에는 불 비가 내렸다.

장엄한 지옥이었다.

데인 스나덴, 스나덴의 대공자가 망루 위에서 그 끔찍한 광경을 제 눈으로 지켜보았다.

화염탑의 방화광들이 오랜만에 제 실력을 온전히 뽐냈다. 알렌이 흰 이를 드러냈다. 후끈하게 밀려드는 열풍이 짜릿한 쾌감을 자아냈다.

일석 삼조. 화살 하나로 꿩을 셋이나 잡는 셈이었다.

오랜만에 마음껏 태울 수 있었고, 세올에게 멋진 모습을 보여줄 수도 있었으며, 그 티란디스의 대공자에게 용의 피를 한 병 받았다.

이제는 슬슬 한계였다.

마법을 거둔 방화광들이 비틀거리며 물러났다. 다들 신이 나 자신의 역량을 조금 넘기고 말았다. 정신 세계가 조금 과하게 불타버렸다. 이틀은 정양해야 할 판이었다.

십 분 동안 쏟아진 불의 비가 잦아들었다. 하늘에 소용돌이치던 구름이 제 모양을 잃어버리자, 지상 위에는 돌격 나팔이 울렸다.

1왕자파의 군대가 도시를 향해 진군했다.

방패병이 비스듬히 하늘을 막고, 그 사이사이로 사다리를 든 병사들이 시뻘건 얼굴로 다리를 재게 놀렸다.

스나덴의 지휘관들이 고함을 지르며 급히 방어에 나섰다. 예비병이 뛰어 올라와 성곽에 달라붙었다. 마법 범위 밖에 있던 좌우 먼 성벽의 병사들이 공백을 메우기 위해 필사적으로 달렸다.

그사이, 성벽 여기저기에 사다리가 기댔다. 제대로 교대가 이루어지지 못한 수비군이 급히 장대를 들어 사다리를 밀고 손에 잡히는 것들 성벽 아래로 떨구기 시작했다.

준비했던 기름솥의 내용물은 이미 바닥에 퍼졌다. 빈 무쇠솥을 떨구고, 심지어는 사망자의 몸뚱이를 끌어 성문 밖으로 투하했다.

개중엔 아직 덜 죽은 이도 있었으나, 떨어지고 난 이후엔 대부분 확실히 죽었다. 운 좋은 이는 조금 더 오래 살았을 것이다.

사다리를 오르던 병사가 시체와 부대끼며 중심을 잃고, 뒤따르던 전우와 함께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사다리 하나가 성벽에 몸을 기댔다.

갑옷을 입은 기사 하나가 곡예를 선보였다.

직각에 가까운 사다리를 계단 오르듯 순식간에 뛰어, 성벽 위에 가볍게 착지했다. 전신에 쇳덩어리를 두르고서 그러하니 이미 인간의 수준을 한참 넘은 기예였다.

기사가 검을 뽑아들었다. 눈이 부실 정도로 찬란한 오러가 칼날을 휘감았다. 기사가 그대로 성벽을 내달리며 팔을 휘둘렀다.

허공에 은빛의 부채꼴이 연신 그 모습을 드러냈다. 그 궤적에 걸린 모든 것이 깔끔하게 잘려나갔다.

창날과 창대, 검날과 같은 모든 금속들. 그걸 쥔 인간의 몸이 쇠붙이모다 훨씬 물렀다. 심지어 성곽의 바위 벽돌까지 슥슥 잘려나가는 통에 인간의 피륙쯤이야.

대륙이 평화로운지 워낙에 오래. 그 오랜 시간을 넘어, 드디어 전장에 소드 마스터가 달렸다.

소드 마스터는 전쟁의 주인이란 칭호가 바로 이러한 연유임을 증명했다.

달리는 그대로 모든 적의 신체를 분리되며 쓰러졌다. 사방을 수놓는 은빛 궤적 속에 기적처럼 1왕자파의 병사만이 온전히 제 몸을 지키니 신앙과도 같은 사기가 솟아올랐다.

검위공이 성벽 안쪽으로 뛰어내렸다.

이미 무력화된 오른쪽 성벽에 사다리를 대고, 전직 왕가수호대 기사들이 급히 올라와 스승의 뒤를 따랐다.

검위공이 앞장을 서니, 성문을 지키는 병사들이 죽음으로 임무에서 해방되었다. 성문을 고정하는 두터운 쇠사슬이 오러 앞에 썩은 실처럼 끊어졌다. 굉음을 내며 성문이 쓰러졌다.

도시 안으로 군대가 밀려들었고, 미처 자리를 피하지 못한 스나덴의 대공자가 망루에서 잡혔다.

반나절도 안 되어 도시가 함락되었다.

* * *

시엔이 데인 스나덴, 스나덴의 대공자를 바라보았다. 시엔이 무식하게 힘으로 도시를 함락시키는 바람에 영주성에서 전투마저 시도해 보지 못했다.

“비겁한 놈. 상중에 공격하다니. 사람의 기본적인 도리조차 모르겠나?”

스나덴 남작은 팔퓌유 참사로 목숨을 잃었다. 데인은 이제 막 장례를 치른 참이었다. 왕실에 연락하여 작위를 승계하는 의식조차 끝나지 않았다. 그래서 아직 스나덴의 대공자였다.

시엔이 피식 웃었다.

“전쟁통에 적의 장례까지 신경 써줘야 하는지는 몰랐네. 거기에 기본적인 도리라.”

흠. 시엔이 흥미롭다는 듯 말을 이었다.

“그럼 비겁하지 않은 전쟁은 또 뭐야? 서로 한 명씩 내보내서 싸운 다음에, 패자의 죽음을 애도하며 일주일 쉬고 또다시 싸우나?”

“그건…….”

“뭐. 나도 어차피 진지하게 하는 소리라곤 생각 안 하니까. 너도 그냥 홧김에 한 소리잖아? 그렇게 해서 네 마음이 좀 풀린다면야.”

“젠장.”

데인이 이를 갈았다. 시엔이 히죽 웃었다.

“델피르 전하께선 야량이 넓으시지. 지금이라도 투항하는 건 어때?”

“웃기는 소리 하지 마라. 아버지의 원수와 손을 잡을 수 있겠냐! 날 모욕할 셈인가? 비록 내가 패배했다곤 하나, 정당한 포로로 대우할 것을 요구하겠다.”

“아버지의 원수? 스나덴 남작님 말야?”

“그렇다. 네놈이 비열하기 짝이 없는 술수로 마물을 부여 살해한 바로 그분이시다. 악인과 타협하지 말라. 스나덴의 가훈에 걸고, 내 너를 절대 용서하지 않을 테니까.”

“용서하지 않으면? 어쩔 건데?”

“…….”

기세는 좋았으나 그뿐이었다.

포로로 잡힌 주제에 용서하지 않으면 제깟게 무얼 할 수 있다고.

데인이 그저 이만 벅벅 갈았다.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니잖은가. 그저 강력한 거부의 의사를 밝혔을 뿐이었다.

“그런데 억울한 건 좀 짚고 넘어가야겠다. 스나덴 남작님의 원수는 흐레이그지 내가 아냐.”

“결백을 주장하겠다는 거냐?”

“생각을 해봐. 내가 굳이 왜 그런 일을 벌이겠어? 나는 애초에 합동 조사를 요구했다구. 흐레이그가 마물을 제조했다는 합동 조사. 그래놓고는 굳이 마물을 부려 내가 범인이라고 밝히겠어?”

“그게 네놈이 노린 수작이겠지. 범인을 찾으려면 가장 이득을 본 자를 찾으라 했다. 누가 가장 이득을 보았지?”

“그건 내가 맞긴 한데.”

시엔이 순순히 인정했다.

“거 봐라, 역시……!”

“그러니까 아니래두.”

“하. 네가 정녕 떳떳하다면, 네 모든 명예를 걸고 맹세라도 해 보시지.”

“나 시엔 티란디스는 나 자신과 그리고 티란디스의 모든 선조, 앞으로의 후손을 두고 천신 앞에 맹세하건대, 사악한 마물의 제조가 흐레이그 가문의 소행이며 또한 그 조종 역시 그러하다 말하겠다.”

시엔이 순순히 맹세했다.

데인이 눈을 꿈벅거리다, 다시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큭, 그런 말뿐인 맹세 따위.”

“내가 이 말까진 진짜로 안 하려고 했는데.”

“무슨 말을 말이냐?”

“이거 보여?”

시엔이 손등을 내밀었다.

흉터가 기이한 도형을 그리니 한데 모여 신비한 모양을 이루었다.

“네놈! 그게 바로 마물을 조종하는 사악한 문장이 틀림없겠구나! 역시 네가 범인이었어!”

“이거 성흔이야.”

“그래, 마물을 조종하는 성흔…….”

일단 되는대로 말을 내뱉고 나니, 어감이 영 이상했다. 데인이 멍청한 표정으로 성흔, 성흔, 하고 반복하다, 이내 화들짝 놀라 고개를 푹 숙이고 중얼거렸다. 들어보니 대충 회개의 기도인 모양.

“그래도 내가 일단은 명예 성자인데. 교단에서 아무런 확인도 없이 그런 전무후무한 칭호를 내려줬겠어? 다 증거가 있으니까.”

“아니, 그러면. 그, 그러면. 물론 네가 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러나 꼭 흐레이그의 소행이라고 할 수는 없지 않나? 명백히 반역도에게 유리한 일이었으니 개중 누군가의 소행일 수도 있지 않냐!”

“흐레이그가 했다니까. 페시번 흐레이그가 증언했잖아. 지네가 제조했다고.”

“하지만, 흐레이그가 어째서……! 스나덴은 오랜 봉신이었다, 역사만큼이나 계속된 인연을 가졌는데.”

“켕기는 게 있으니까 승부수를 던졌겠지. 내 주장대로 합동 조사가 이루어지는 것만은 막기 위해서. 실제로 마물을 제조한 증거가 나오면, 그때는 이미 왕국의 문제만이 아냐. 교단이 나서 징벌하겠지.”

데인의 눈이 떨렸다. 혼란한 표정이, 이내 억울함으로 바뀌었다.

“그, 그랬으면 전령을 보내 설득하면 될 일이 아니었나? 어째서 이런 참혹한 공성전을 벌였단 말이냐!”

“이제는 그렇게 나오시겠다?”

시엔이 코웃음을 쳤다.

“하나. 이렇게 사로잡힌 처지가 아니었으면 내 말에 귀를 기울이지도 않았을 테고. 둘. 방금 말했잖아. 교단이 나선다고.”

속세의 일은 속세에서. 교단은 그저 교단으로. 그 선량한 이들은 그저 선량하게 남아있어야 했다.

귀족의 의무는 왕을 섬기고 영민을 다스리는 것뿐이었다.

오직 위로 신을 섬기며, 모든 이를 이롭게 하라는 사제들과는 상관이 없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상관이 없어야 했다. 그게 천신께서 정하신 법도이기 때문에.

시엔은 한 명의 마법사로서 천신을 신앙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모든 마법사가 그러하듯, 그 피조물로서 실존하는 절대자를 존중해야 한다는 태도 역시 확실했다.

“젠장…….”

“원망하려거든 흐레이그를 원망해야지. 결국, 그 수작에 놀아난 꼴이잖아?”

“젠장! 젠장!”

데인이 연거푸 분통을 터뜨렸다.

시엔은 일단 시간을 좀 주기로 했다.

투항해 합류한다면 병력이 늘어날 테고, 그게 아니라도 포로로 끌고 다니면 스나덴 영지를 확보하는 셈이었다.

그리고 굳이 성대한 공성전을 벌인 이유. 데인에게는 말하지 않은 세 번째 이유도 있었다.

“훌륭한 공성 잘 보았습니다. 대공자님.”

“같은 준귀족들끼리 어색하게 님은 무슨.”

“지금이야 그렇습니다만은, 곧 그렇지 않게 되겠지요. 대공 작위를 약속받으셨다는 소문도 있었습니다만.”

시엔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대공은 무슨. 영지 하나 건사하기도 이렇게 힘든 판인데. 쓸데없이 신분만 늘면 귀찮아져. 명예 성자도 거절을 할 걸 그랬지 뭐야.”

차라리 명예 성자 신분을 받지 않았더라면 교단을 끌어들이는데 거부감이 없었으리라. 그러나 천신께 신세를 지기도 했고, 교단에서 식구라며 살갑게 나왔으니 오히려 그 중립을 감히 해칠 수가 없었다.

은혜에는 은혜, 호의에는 호의.

“그래서, 결정은?”

아후르 제우사이란. 제우사이란 백작의 서자였다.

제우사이란 영지 또한 얄렘방 참사로 주인을 잃었다. 거기에 작위를 계승해야 할 대공자는 하부 전선에 군대를 이끌고 가 있는 상태였다.

그렇게 텅 빈 집에 서자가 남았으니, 이때다 하고 삼키지 않는다면 오히려 얼간이 소리를 들어야 마땅했다.

물론 왕실에서 계승 허가를 내려 주지 않으면 말짱 헛짓거리로 남았다. 그러나 델피르 왕자를 왕세자로 모시면 해결되는 일이었다.

다후르 제우사이란이 사병을 일으켜 영지의 전권을 틀어쥐었다. 그러나 가신들을 완전히 휘어잡지는 못해, 시엔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가신들의 눈앞에서 1왕자파 군대의 막강함을 보여주면, 그들 역시 어쩔 수 없이 소속을 갈아탈 수밖에 없다 느낄 수 있도록.

아후르가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애초에 정해져 있는 바였습니다. 제우사이란의 정병들이 반역자 토벌에 선두에 설 것입니다.”

스나덴 함락, 제우사이란 합류.

흐레이그에의 진군로가 활짝 열렸다.

< 36. 세상천지 난리통 [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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