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작가의 망령재림-172화 (263/268)

< 36. 세상천지 난리통 [1] >

국왕이 뱅가 공작을 바라보았다. 하얗게 세어버린 그 머리카락을 보았다. 그간의 마음고생이 훤히 보였다.

국왕의 마음이 편치 못했다.

그러나 그 감정도 곧 사라졌다.

‘난들 흐레이그가 그렇게 나올 줄 알았겠나.’

신부행 습격은 국왕이 의도한 바가 아니었다. 그 발칙한 흐레이그에게 속았다. 거기에 드는 생각이 하나 더.

사람이 이렇게 나약해서는. 공작이란 자가. 겨우 자식 하나 화를 입었다고 이 꼴이라니 결국 그릇이 이것밖에는 안 되는 작자다.

국왕의 불편한 마음이 살그머니 자취를 감췄다.

국왕이 태연하게 뱅가 공작을 위로했다.

“불미한 일에 고생이 많으셨구려.”

“예. 폐하. 그렇습니다.”

“허어.”

국왕이 한숨을 내뱉었다.

그래도 국왕이 안부를 물었다. 괜찮다, 걱정끼쳐 죄송하다, 말뿐이라도 이리 말하는 것이 예의였다. 대놓고 그렇다고 하면, 확실히 꼬인 속으로 이 앞에 섰다는 표현이었다.

“내 심심한 위로의 뜻을 전하오.”

“위로가 아니라 진실을 원합니다, 폐하.”

“진실, 진실이라.”

국왕이 고민하는 척을 했다.

“자네의 마음속이 어지러우니 내가 보증한들 믿음이 설까.”

“그래도 보증하여 주십시오.”

“자네의 마음이 여간 상한 것이 아니구만. 좋네. 나 레이알드 셉텐 페벨룬은 천신께서 살펴보시는 천 개의 눈 아래 거짓 없이 말할 것을 맹세하노라. 왕실 위로 모든 계보와 이어질 아래의 모든 계보의 명예를 걸고, 신부행 습격은 나의 뜻과 의지가 조금조차 담겨있지 않았노라.”

국왕은 떳떳했다.

사실은 사실이었다. 사실과 진실은 달랐다. 뱅가 공작이 절하며 이마를 바닥에 붙였다.

“이 불민한 신하를 용서하여 주십시오. 또한 간청하건데, 흐레이그 공작을 호출하여 주실 수 있겠습니까?”

“허어. 이 사람아. 속이 얼마나 상했을꼬.”

“말씀하십시오, 폐하.”

“흐레이그 공작을 불러 줄 수는 있네. 그러나 그러한들 무엇을 얻을 수 있겠나?”

“제 눈으로 판단하겠다.”

“두 공작이 대면한다고 치세. 흐레이그 공작이 진실로 명예롭고 무고하다면, 신부행 습격과 관련이 없으며 또한 그러하다 말하겠지.”

국왕이 말을 이었다.

“흐레이그 공작이 사악한 일을 벌였다고 가정해 보세. 그렇다면 자네가 얼굴을 맞대 묻는다고 해서 순순히 실토하겠는가? 왕실을 습격할 정도라면 충정은 가식이오, 명예는 알지 못하는 자일 텐데.”

둘이 대면해 진실을 따진다고 한들, 돌아올 대답은 하나였다. 흐레이그가 의혹을 부인하면, 뱅가 공작이 아 그랬군요 하고 이해할 수 있을까.

뱅가 공작의 생각도 그랬다. 그래서 다른 요청을 준비했다.

“뱅가의 조사관들이 흐레이그 영지를 수색하겠습니다. 마물의 제조를 직접 알아볼 수 있게 해주시옵소서.”

“자네가 그리 생각한다면야 내 어쩔 수 없지. 왕명으로 자네의 조사대를 보증해 주겠네. 흐레이그라도 감히 왕실의 보증 앞에 조사를 막을 수는 없을 걸세.”

의외로 국왕이 순순히 허락했다.

뱅가 공작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정말이십니까?”

“물론이지 당장이라도 보증을 내려 주지.”

“감사합니다, 폐하. 소신, 뜻을 전부 이루었으니 이 모든 것이 폐하의 은덕입니다. 소신 뱅가, 이만 물러가도 되겠습니까? 조사대를 짜 이 일의 진상을 밝히는 것이 황급하나이다.”

그러자 왕이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때가 워낙에 좋지 않군. 반역도의 군대가 흐레이그 영지로 향한다는 소식이 있네. 만약 그들이 흐레이그를 침범하여 도시를 차지하면, 증거를 만들어 진실을 가리려 들지 않겠나?”

“하시면.”

“뱅가 공작 자네가 동부 귀족의 군대를 연합해 왕성 수비에 전념하도록 하게. 북부 귀족의 군대가 북부로 향해 반역도들부터 제압한 후에. 그래. 이 난리부터 끝내고 자네가 주도하여 조사를 행하도록 하게나.”

현재 하부 전선의 북부 귀족 군대가 후퇴해 북으로 향한다. 필연적으로 무너진 전선을 방어가 탄탄한 수도 방위선까지 끌어내리고, 그 방어를 동부 귀족군이 맡아달라고.

“하시면…….”

단순한 전략적 부대 전환 개념이 아니었다.

왕성 방어는 내전의 가장 중요한 지점이었다. 동부 귀족이 내전 후에 가장 큰 공로를 주장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리고 나면 진실은?

흐레이그의 땅에서 전쟁을 벌이면, 남는 것은 잿더미였다. 조사대가 아무리 유능해도 진실을 찾진 못할 것이다.

‘결국, 흐레이그의 소행이구나.’

뱅가 공작이 이를 악물었다.

이제는 분명해졌다. 흐레이그가 떳떳하다면 합동 조사를 통해 밝히면 될 일이었다. 그러지 않고 승부수를 던졌다.

문제가 있다는 뜻이었다.

국왕의 뜻은 단순했다.

1왕자파에 합류해 적으로 돌아서지 말고, 최대한 편의를 봐줄 터이니 이쪽에 남아달라고.

“소신 뱅가, 폐하의 뜻을 따르겠습니다.”

고민은 길지 않았다.

뱅가 공작의 딸은 살아있었다. 습격은 괘씸하나 결국 실패하였으니, 더 큰 이득 앞에 참아줄 수 있는 일이었으므로.

* * *

뱅가 공작이 물러가자, 알현실의 시종실에서 흐레이그 공작이 나타났다. 공작의 눈빛이 사나웠다.

“폐하께서 이렇게 나오셨습니까?”

“일을 망친 건 자네지. 왕실을 능멸하려거든 들키지나 말 것을. 아직도 권력이 아쉽나?”

“폐하께서 그리 말씀하시는군요.”

“글쎄. 나야 일이 잘못되더라도 뒷방 늙은이 신세겠지. 하나 자네는?”

내전에서 패배하더라도 국왕은 권력만을 잃을 뿐이었다. 델피르에게 계승권을 돌려주고, 왕비가 나라를 대신 통치하리라.

“소신,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한동안 뵙지 못할 터이니, 전운을 빌어 주십시오.”

“이기게. 그게 자네가 사는 법이야.”

흐레이그 공작은 달랐다. 내전에 패배하면 목이 같이 날아간다. 반역도들의 주장으로는, 흐레이그가 국왕을 조종해 왕권을 손상시켰다 했다.

대전을 나서며, 흐레이그 공작이 이를 갈았다. 빌어먹을 티란디스. 왕국의 역사만큼이나 오랜 앙숙이 여기서 또 발목을 잡았다.

“알리아.”

“네, 각하.”

공작을 따르던 시녀가 생글생글 웃으며 대답했다. 파도등대의 탈주자이자 만화원의 마법사인 알리아였다.

“히야. 정말로 숨이 막히네요. 일국의 왕이나 공작쯤 되면 사람이 이렇게 철저한가요? 진짜진짜 대단하네. 그에 비하면 우리 주인님은 영 허당인데. 뭐. 그게 좋은 거지만요.”

“만화원의 마법사를 더 빌리지.”

“공작님, 요즘 저희가 쫄딱 망하는 바람에 할증이 붙거든요? 다들 파견나가 바쁘다구요. 더 부르려면 그 위약금까지 내 주셔야 해요.”

“일이 왜 이 꼴이 되었는지 이해하나? 너희가 이전에 파견한 그 음침한 마법사가 배신한 탓에.”

“어머. 그게 왜 저희 잘못이에요? 트리예 그년이 배신한 걸 우리보고 뭐라 하면. 뭐. 경쟁자 하나가 제발로 나갔으니 다들 좋아했긴 했지만, 그게 만화원의 뜻은 아니었잖아요?”

“네년이…….”

“예이예이. 이년이랍니다아.”

공작이 입을 다물었다. 만화원의 마법사를 여럿 빌렸다. 그리고 모두 다른 형태로 사람의 속을 긁었다.

그러나 그 개개인이 마탑의 수준과는 다른 실력자들인 것 역시 사실이었다.

“……비용은 얼마든지 더 내겠다. 아예 도시의 조세권을 하나 내어주지.”

“오. 정말이세요? 그러면 또 이야기가 다른데. 아. 그래도 위약금은 선불로 주셔야 해요. 지금 우리가 그거 낼 황금이 없거든요. 헤헤. 그래서, 얼마나 필요하실까?”

공작이 일고의 여지도 없이 대답했다.

“일주일 안에 강스트프레에 도착할 수 있는 인원이라면, 전부.”

* * *

뷔아가 교단의 이름으로 마련한 야전 병동은 양쪽으로부터 지원 물자를 받았다. 그리고 오늘 아침부터 밤까지, 왕당파에서 물자를 보내오지 않았다.

성기사가 상황을 알아보러 떠났으나, 돌아오는 말은 이미 군이 철수해 보이지 않는다는 보고뿐이었다.

뷔아가 분통을 터뜨렸다.

“아니, 환자를 맡기고 떠나는 법이 어디 있어? 어차피 교단이 환자를 버리진 않는다는 거 아냐! 이 나쁜 새끼들.”

“나중에 교단에서 정식으로 항의하면 되니까. 어쨌거나 전투가 그쳤으니 다행이잖아?”

“그건 그렇지만.”

“그러니까 여긴 내가 맡고 있을게. 사제분들도 있고 성기사분들도 있으니까, 일주일이면 정리할 수 있을거야.”

“그럼 나는?”

“우리 뷔는 공자님 찾으러 가야지. 오매불망 기다리던 우리 님 찾아서.”

수히가 샐쭉하니 웃는 모습이 수상하기 그지없었다. 뷔아의 표정이 떫었다.

“개소리 말고.”

“와. 이제 나한테도 막말을 하는구나? 우리 뷔가 입에 점점 걸레를 물어서 어째?”

“윽. 나도 모르게. 이게 다 주교님 때문에.”

“됐으니까, 가. 마물과 관련된 끔찍한 소문도 있고. 공자님께 할 말도 많잖아.”

“할 말? 딱히 그런 거 없는데?”

“응? 전쟁을 멈춰달라 하려는 게 아니었어? 우리 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뭐야. 그런 거 아니거든?”

뷔아가 질색했다. 수히가 흥흥 웃다가 이내 표정을 바꿔 말했다.

“라이뱅 경께 부탁드려서 말을 타고 가면 금방 도착할 수 있을 거야. 교단 깃발을 세우면 위험할 일도 없을 거고. 어차피 여기서 환자분들이 추가되지도 않을 테니, 굳이 뷔아가 붙어서 돌보지 않아도 충분한걸.”

“그건 그렇지만…….”

뷔아가 말끝을 흐렸다.

“왜? 공자님께 말씀드려서 전쟁을 끝내겠다면서?”

“그게, 모르겠어. 내가 말한다고 한들, 그러죠 하고 대답할 수 있는 게 아닌데. 혹시 그 사람이 냉정하게 안 된다고 하기라도 하면 어떻게 해? 막 우길 수도 없는데.”

수히가 생각했다.

그간 기세 좋게 만나서 담판을 짓겠다더니, 막상 만나러 가려니 겁을 먹은 모양이었다.

겁을 먹을 이유가 대체 무엇이던가. 설득이 되면 좋고 안되면 어쩔 수 없는 일인데.

기대해서 그렇지. 공자님이라면 어떻게 이해해줄 것이라 기대를 하니까. 거절을 받아 실망할까 그게 두려운 거고.

그걸 뷔아 본인이 생각해 알지는 못한 모양이었다. 사람의 마음이 머리보다 앞서기 때문이기도 하고.

그러니 더군다나 가야 했다. 모호한 채로 두는 것보다는 어떻게든 결론이 나는 것이 뷔아에게도 좋은 일일 테니까.

수히가 부러 얄밉게 웃었다.

“안 되면 머리끄댕이라도 잡아야지. 천하의 뷔가 뭐가 무서워서. 안 그래?”

* * *

위험한 작전이었다.

흐레이그 영지를 점령하는 순간 모든 북부 귀족군 전체가 달려들 것이 뻔했다. 그렇지 않으면 북부 영지 전체가 쑥대밭이 되고 말 테니까.

적의 주력과 부딪치기 전에, 1왕자파의 주공인 하부 전선의 군대가 왕성을 점령해야 했다.

결국, 시간 싸움이었다.

왕성 수비는 동부 귀족이 도맡을 테고, 수도 방어선이 아무리 잘 갖춰졌다 하더라도 남부 귀족군과 함께 두 방향에서 방어를 펼치는 데에는 한계가 있으리라.

그러나 그 전에 시엔의 군대가 당하고 나면, 북부군이 할 수 있는 선택 모두가 치명적이었다. 서부로 진격하거나, 혹은 왕성 방면으로 우회해 공격하거나.

흐레이그의 직할도시 강스트프레 점령까지야 사천의 군대라면 능히 가능하리라. 거기까지는 문제가 없으나 이후 보급은 불안하고 지원도 힘들다.

그럼에도 1왕자파의 귀족들은 시엔을 믿었다. 특히, 상부 전선에 참여한 이들의 믿음은 기이한 수준이었다. 시엔이 강스트프레로 진군하자 했을 때 보여준 열렬한 호응만 봐도 그랬다.

영지 방어를 위해 남겨둔 병사들까지 전부 끌어모았다. 용병단 몇 개가 합류하니 일주일 새에 군대가 천이 늘었다.

시엔이 생각하기로, 좋은 흐름만은 아니었다. 총사령관을 맡아 소속이 다른 지휘관들이 명령에 따르는 것은 좋지만, 적어도 누군가 하나는 문제를 제기해야 하지 않았을까.

그러기엔 시엔이 보여준 용병술이 있었고, 무엇보다 내전이 끝났을 때 예정된 권세가 있었다.

델피르 왕세자가 시엔을 친형처럼 따른다 소문이 자자하니, 어쩌면 왕국 역사에 오랜만에 대공이 들어설지도 모른다는 말이 공공연히 나도는 판이었다.

이미 무장 해제가 된 갈푼 백작이 얌전히 길을 비켜 주었다. 남은 것은 스나덴과 제우사이란. 두 영지를 지나면 흐레이그의 땅이었다.

< 36. 세상천지 난리통 [1] > 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