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5. 서로 네 것이다 양보하니 [5] >
얄렘방 대회의실의 분위기는 무기력했다. 그저 다들 자리만 지키고 있었다.
뭘 하자 해도 반대 의견이 앞섰다. 총공격? 미쳤소이까? 후방 영지로 후퇴해 재정비? 어디까지 후퇴하실 생각이오?
이렇다 보니 이제는 누구 하나 뭘 하자 주장조차 하지 않았다. 사실, 이렇다 보니 다들 드는 생각은 하나였다.
굳이 여기서 자리를 지킬 필요가 있나. 누구 하나가 눈 딱 감고 해산하자 주장하면,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찬성표를 던져야겠다고.
그렇다고 먼저 말할 수는 없었다. 그랬다간 그 결과를 온전히 혼자 뒤집어쓰게 될 테니까.
그러니 대책 없는 회의에 모두 참석해서 자리를 지켰다.
결과적으로는, 차라리 누군가 불이익을 감수하는 편이 모두에게 좋은 일이었으리라.
“왠지 바깥이 소란스럽지 않소이까?”
“음?”
과연 문 너머로 들리는 소리들이 있었다. 철컥철컥 창창 금속 부대끼는 소리며 무언가 소리치는 듯 둔탁한 소음들이었다.
그리고 그 소리들이 빠르게 가까워졌다.
뭔가 사달이 벌어진 것이 틀림없었다.
“젠장, 다들 피합시다!”
귀족들이 급히 대회의실을 빠져나왔다. 한데 뭉쳐 계단으로 향하는데, 모퉁이 너머에서 온통 검은 갑옷을 찬 기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귀족 하나가 반색하며 기사들을 반겼다.
“경들은 어디 소속인가? 그리고 지금 무슨 상황인지 아는가? 무언가 난리가……”
귀족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새까만 검날이 그 심장을 꿰뚫었다.
등 뒤로 삐져나온 칼날을 보고, 귀족들이 바로 상황을 깨달았다.
습격이었다.
불사의 검은 기사들. 이미 왕과 델피르 왕자의 발표로 들어 아는 마물들이었다.
“감히! 뭐 하는 녀석들이냐!”
“저들을 막아라!”
귀족의 호위병들이 기사들에게 달려들었다. 귀족의 호위라면 정예들이었다. 내지르는 창이 정확히 갑옷의 관절부를 향했다.
푹. 창날이 기사의 목울대를 꿰뚫었다. 뒤이어 호위병들의 창이 기사들을 찔렀다. 애초에 적이 피하지 않아 거진 전부 쑤셔 박혔다.
그렇게 관절마다 창에 꿰인 채로, 기사가 손발을 움직여 적을 꿰었다.
“어어!”
말이 되지 못한 말들이 터졌다. 당황과 공포, 불신을 잘 버무린 소리였다.
호위병들이 복도 위에 눕기까지는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일부 귀족이 검을 들고 달려들어 용맹히 전사했다.
등을 돌려 달아난 귀족들은 조금 더 오래 살았다. 킬지언 역시 거기에 속했다. 승산이 없다 계산이 서자마자 앞장서서 적에게 거리를 벌렸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복도 반대편에서도 검은 기사들이 공간을 막고 다가오고 있었다. 그들이 귀족들을 발견하자 즉시 검을 뽑아 달려들었다.
킬지언이 검을 뽑아들며 호통 쳤다.
“무엄한 것들! 당장 멈추지 못할까!”
그러자 기사들이 곧장 움직임을 멈췄다. 달려들던 모습 그대로. 흡사 시간이 멈춘 것 같은 풍경이었다.
킬지언 역시 흐레이그의 핏줄이며, 흐레이그 나이트의 명령권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그러자 킬지언이 당황했다.
멈추라는 말이 정말로 그러한 뜻이 아니었다. 그만두라는 뜻이 맞기는 하지만, 이렇게 충격적인 모습으로 명령에 따르라는 말은 또 아닌데.
다른 귀족들이 킬지언을 바라보았다. 황당한 표정이었다. 킬지언의 표정이 귀족들과 같았다.
“대체 어떻게……?”
“저도 모르겠습니다. 그것보단 자리를 피하는 것이 우선이 아니겠습니까?”
귀족들이 돌격 자세 그대로 굳어버린 기사들 사이로 살금살금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킬지언 역시 혹여 기사들이 움직일세라 숨을 멈추고 조심조심 몸을 놀렸다. 개중 온전한 자세로 멈춰있던 기사를 지나는 순간, 푹 하고 강렬한 통증이 밀려들었다.
킬지언이 칼날을 붙잡았다. 잘 갈린 칼날에 손바닥이 갈라지며 피가 주르륵 흘렀다. 기사가 킬지언의 품으로 바짝 파고들며 속삭였다.
“죄송합니다. 킬지언님. 모두 흐레이그를 위한 일이니, 양해하여 주십시오.”
“너어…… 하……”
킬지언이 맥없이 웃었다.
근래에 있던 발표들이 한 번에 이해가 되는 순간이었다. 그러니까 흐레이그가 습격을 한 게 맞고, 자신과 다른 귀족들을 바쳐서 이쪽의 결백을 주장하겠다고.
“개…… 같은…… 개새끼……”
킬지언이 눈을 부릅뜬 채로 죽었다. 죽기 전에 기어코 욕을 완성했다는 사실이 그에게 위안이 되었을지는 누구도 알 수 없었다. 억울한 죽음이었다는 사실은 명백할지라도.
“다시 임무를 수행하라!”
킬지언을 제거하기로 마음먹었으니 흐레이그 나이트로만 보낼 리가 없었다. 명령권을 가진 기사의 외침에, 흐레이그 나이트가 일제히 행동을 개시했다. 마침 귀족들이 바로 곁에 있었다. 복도 벽면에 무수한 피가 튀었다.
잠시 후, 얄렘방의 영주성이 불타기 시작했다. 병사들이 급히 달려들어 불을 끄려 했으나, 동시에 쏟아져 나온 검은 기사들이 사방으로 칼을 휘두르며 난동을 부리기 시작했다.
영주성의 참화는 그저 시작일 뿐이었다.
* * *
얄렘방 방면에서 피어오르는 연기가 상부 전선 사령부에서도 관측되었다. 애초에 봉화가 이러한 원리니 보지 못하는 것이 더 이상했다.
처음에는 무슨 일이 있어 봉화를 올렸겠거니 했더니, 점차 그 연기가 세를 불리며 자욱하게 하늘 한편을 좀먹었다. 그리고 나서야 제대로 사달이 났음을 깨달았다.
척후가 말을 보채며 평원을 가로질렀다.
그리고 돌아왔을 때는 군식구를 단 채였다. 얄렘방의 주인, 팔퓌유 자작이었다.
“검은 기사들이 나타나 연합의 귀족들을 전부 죽이고, 영주성에 불을 질렀소. 성을 뛰쳐나와 병사들을 학살하더니 말을 훔쳐 서쪽으로 달아났소이다.”
팔퓌유 자작이 전략 회의에 소외된 것이 하루 이틀이 아니었다. 아예 그 꼴을 참다못해 아예 영주성을 나와 도시 외곽의 저택에서 지냈다. 덕분에 화를 피할 수 있었다.
“서쪽으로 달아났단 말씀이세요?”
“그렇소. 그런데. 음. 내 이미 들은 소식이 있다만은. 물론 대공자의 결백을 의심하려는 건 아니지만은……”
팔퓌유 자작이 어물어물 말끝을 흐렸다.
검은 기사가 습격하여 귀족을 전부 죽이고 서쪽으로 달아났다. 검은 기사의 배후가 너무 뻔히 드러나는 정황이었다.
시엔이 인상을 찌푸렸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흐레이그 공작이라. 선을 넘어도 한참 넘었다.
저를 따르는 귀족들이 아니던가. 대영주가 봉신을 혈육과 같이 대하며 고난을 나누는 것이 귀족의 의무일진대.
의무 없이는 권리도 없다. 의무와 권리가 귀족을 세웠고, 또한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기도 했다.
시엔이 사는 방식이었다.
또한, 천신께서 세상을 관리하라 귀한 피를 따로 분류하셨으니 그에 따르는 은혜이기도 했다.
“아니, 그게 아니라. 대공자의 결백을 내 믿는다지 않소. 하하……”
시엔의 찡그린 표정을 본 팔퓌유 자작이 중언부언 덧붙였다. 아쉬운 쪽이 자신이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귀족들이 전부 당해 버리고 나니, 군의 지휘가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다오. 그 망할 것들이 도시에 온갖 패악을 부리고 있으나, 내 도움을 청할 이가 대공자밖에 없지 않겠소.”
명령권자가 없고 검은 기사가 학살해 군기가 사라진 군대는 더 이상 군대가 아니었다. 아예 폭력배, 약탈자, 노상강도, 방화범 등으로 부르는 편이 정확했다.
이들을 제압하려면 군대가 필요했다. 그리고 가장 가까운 곳에 큰 규모의 무리가 있었다.
시엔이 고개를 저었다.
“군대가 제 것이 아닌데 개인적인 사정으로 자작님을 도와드릴 수는 없죠. 이 모든 것이 델피르 전하의 군세이니 신하가 사사로이 다룰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어요?”
“내 왕세자 전하의 뜻에 따르리다. 일이 이리 된 것을 보면 삿된 무리에 잘못 끼어 천신께서 천벌을 내리신 것이 분명하네.”
안 그래도 하루에 몇 번씩 전향할까 진지하게 고민했던 팔퓌유 자작이었다. 일이 이렇게 되고 나니, 검은 기사들의 진위가 어떻건 간에 일단 영지를 보전해야 했다. 그게 적의 간계에 넘어가는 꼴이라도.
“델피르 전하께서 그분의 신하를 돕는 데에 기꺼이 군대를 내어주실 터이니, 자작님의 뜻이 그러하다면 돕는 것이 순리겠죠.”
팔퓌유 자작이 1왕자파 합류의 뜻을 밝혔다.
그제야 시엔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상부 전선의 군대가 얄렘방 방면으로 진군을 개시했다. 적의 군대가 이미 무너져 범죄자가 되었으니 전투까지 갈 필요도 없었다.
그저 성문 앞에 군대가 당도하니 주인 잃은 개인들이 얌전히 무릎을 꿇을 뿐이었다. 집단으로 뭉칠 때야 대항이라도 해보겠지만, 와해된 하나들이 군대 앞에서 저항할 수는 없었으니까.
얄렘방 재점령이었다.
피해 없이 진입했던 만큼, 이후의 처리가 큰일이었다. 1왕자파의 군대가 도시의 소란을 진압하고 약탈자들의 죄상을 밝혀 대대적인 집행을 시작했다. 동시에 병사들을 풀어 무너진 도시를 재건하고 영민들을 위로할 필요가 있었다.
그렇게 바삐 움직이는 사이, 왕실의 발표가 새로 도착했다. 새 발표문을 받아 든 시엔이 혀를 쯧쯧 찼다.
“아무리 짜고 치는 판이라도, 이렇게 빨리 발표가 해 버리면 쓰나.”
참화가 이루어진 것이 겨우 두 주 전이었다, 이렇게 빨리 발표문이 도착했으니 숫제 미리 알고 준비한 수준이었다. 물론, 실제로도 그랬을 테지만.
「레이알드 셉텐 페벨룬의 이름으로, 근래에 벌어진 참사에 깊은 애도의 뜻을 전한다. 왕국의 슬픔이 가득하니 이는 국왕의 부덕이라. 왕국의 충신들에게 참으로 면목이 없어 그저 안타까울 따름이다.
왕실의 신부행을 습격한 마물이 금번에는 북서부의 진주 얄렘방을 공격하였다. 그 결과, 반역도과 내통한 변절자 팔퓌유를 제외한 도시의 모든 귀족이 목숨을 잃었다. 군대의 총사령관이던 킬지언 흐레이그 역시 그와 운명을 함께하였다.
마물이 군대를 학살하여 도시의 혼란을 일으키고 서쪽으로 도주하여……(중략)…….
……일찍이 시엔 티란디스가 마물의 제조법을 밝히며 흐레이그를 고발하였으나, 이상의 행태로 보아 흐레이그가 그 용의선상에 있지 아니한 것은 명백한 일이다.
또한 마물이 서쪽으로 도주하여 자취를 감추었으니 이는 필시 저 반역도들이 감춰두고 있는 것이니 마물을 부리는 증거가 아니겠는가.
시엔 티란디스가 고발하길 마물의 제조법을 알았고 또한 그 상세를 알고 있으니 이는 오히려 합리적인 이성으로 의심이 가는 일이다.
이에 티란디스 일가와 주요 혐의자 시엔 티란디스는 왕실 법정에 출두하여 엄중한 국법에 따라 재판을 받아야 할 것이다.
유죄와 결백이 재판에서 밝혀질 것이니 더는 왕명을 어기는 중죄를 범하지 말고 즉시 출석할 것을 명령한다.」
아무리 봐도 네놈이 한 일이 맞으니 일단 달려와서 재판을 받으라는 발표였다.
합동 조사로 흐레이그의 만행이 드러날 것이 뻔하니 이걸로 입을 틀어막겠다는 수작이었다.
1왕자파의 귀족들이 걱정스러운 낯으로 시엔을 바라보았다. 말이 발표문이지 시엔을 콕 찍어 내지르는 비난이었다.
“대공자, 이제 어쩌시겠소?”
“뭐 어쩌겠어요. 폐하께서 대화로 하기 싫다고 하시는데요. 언제는 전쟁이 입으로 하는 싸움이었나요?”
대놓고 무시하겠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문제의 소지가 될 수 있지 않은가?”
“그러니 전쟁을 끝내야지요.”
시엔이 지도를 가리켰다.
“북부 영지 대부분이 주인을 잃었어요. 막대한 군대와 함께 말이에요. 물론 원한이야 가득할 테지만, 원망하는 마음만으로 군대와 대적할 수는 없을 거예요. 우리는 진군해 강스트프레를 직접 공격할 겁니다.”
시엔이 지도 위에 한 점을 지휘봉으로 콕 찍었다.
강스트프레. 흐레이그의 영주성이 자리잡은 직할도시였다.
< 35. 서로 네 것이다 양보하니 [5]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