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5. 서로 네 것이다 양보하니 [4] >
“공작님? 괜찮으신지요.”
“나는.”
시종이 걱정스레 물었다.
뱅가 공작이 돌연 입을 다물었다.
제 피붙이를 대하는 귀족의 태도는 그야말로 천태만상이었다.
어떤 이는 그저 도구로 여기고 어떤 이는 가족으로 보듬어 귀히 여기기도 했다. 물론 그 중간 어딘가에 걸친 이가 있고, 자식마다 차별을 두는 귀족도 있었다.
뱅가 공작은 자신이 전자라고 생각했다. 왕국의 공작 가문으로서, 가문을 위해 모든 구성원이 희생해야 한다고.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했다.
그리고 지금은 자신이 후자에 속했음을 깨달았다.
가문을 위한다고 자식들에게 여기저기 혼약을 억지로 맺도록 한 모든 행위가, 사실 공작가와 맺어질 자격이라면 충분히 잘살게 되리라는 그런 생각에서부터 비롯한 것임을.
열세 살 어린 딸. 아직 피워보지도 못한 어린 딸을 먼저 보내고 나니 알았다. 왕세자비, 나아가 왕국의 어머니가 되어 행복했어야 할 그 아이가.
그러자 증오가 솟았다. 누구든 이 일에 관련된 이를 절대 가만두지 않으리라.
그렇다고 왕실의 발표를 곧이 믿은 것은 아니었다. 티란디스의 애송이가 신부행을 습격했다고? 대체 그게 무슨 이득이 있어서.
사실 케이트 뱅가의 신부행 습격으로 가장 이득을 보는 이는 흐레이그 공작이었다.
드리엔 왕세자는 2왕비, 아타냐 위피 페벨룬 흐레이그의 소생이었다. 그러니 뱅가 공작 영애를 신부로 들여 북부 귀족을 견제하려는 것이 국왕의 노림수였다.
물론 이득만 놓고 따지자면 흐레이그의 소행이라 의심할 법했다.
그러나 이게 티란디스의 노림수라면? 신부행을 습격해 왕당파의 두 세력이 반목하길 원하는 것이라면.
뱅가 공작이 이를 갈았다.
섣불리 움직였다가 원수를 잘못짚었다면? 복수는커녕 원수를 돕는 꼴이었다. 그러니 더욱 신중하게.
어린 딸을 떠나보내고, 속에 천불이 솟는데 당장 사태를 지켜봐야 하는 그 마음이 어떻겠는가. 뱅가 공작은 요 며칠 새 머리가 하얗게 샜다. 주름이 깊게 패니 짧은 시간 만에 폭삭 늙어버린 꼴이었다.
그때였다. 둘째 아들이 집무실로 뛰어 들어왔다. 아끼던 막내를 잃고 침울하던 녀석이, 웬일로 흥분한 기색이었다.
그러나 이어진 말에, 뱅가 공작 역시 화색을 띌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 케이트가 살아 있답니다!”
“케이트가?”
“방금 델피르 왕자의 발표가 도착했습니다. 검위공께서 습격을 막고 케이트를 구출해 그쪽으로 합류하셨다는군요.”
“허……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야.”
뱅가 공작이 앉은 자리에서 축 늘어졌다.
잃은 줄 알았던 딸이 살았다니 일단은 안도감에 긴장이 풀린 탓이었다.
그러고 나니 다른 생각이 들었다.
이러면 티란디스가 범인일 확률이 높았다.
솔직히, 습격을 우연히 구출하는 일이 쉬울까, 아니면 습격을 빙자하여 납치한 후에 입을 맞추는 편이 쉬울까. 일이 이렇게 돌아가니 인질로 삼으려 발표했겠지.
“발표문은?”
“여기 있습니다.”
뱅가 공작이 두루마리를 받아 펼쳤다.
[왕실의 신부행을 두고 벌어진 참사에 본 왕세자 역시 참담함을 금할 수가 없다. 이는 왕실의 존경이 땅에 떨어짐을 뜻하는바, 왕국에 역적이 있어 날뛰는 까닭이다.
더욱 참담한 사실은, 이 역적의 무리들이 감히 왕국 제일의 충신을 모함코자 함이다. 티란디스는 오랜 왕국의 충신이자, 일부 사특한 역적들의 전횡을 참지 못해 들고 일어나 행동하여 그 의기를 증명하였다.
하나. 드리엔 왕자비 케이트 뱅가 영애는 현재 왕세자의 이름으로 보호하고 있다. 이는 천신께서 왕실을 보우하시매 천운이 닿아 가능한 일이었다.
왕가수호대 대장인 검위공이 서쪽으로 그 참된 주군을 찾아 이동하니 마침 사악한 무리가 신부행을 습격하는 것을 목도하여 막아낼 수 있었다.
습격자들은 검은 갑옷을 입었으며, 인간과 같은 모양이나 칼로 베어도 쓰러지지 않는 마물이었다.
이는 바로 사특한 자들이 마물을 부려 왕실의 식구를 해하고자 함이다.
둘. 흐레이그의 전 대공자 페시번 흐레이그 역시 본 왕세자의 보호 아래에 있다.
페시번 흐레이그가 이 무도한 사태를 맞이하여 양심과 용기를 발휘해 진실을 고발하였다. 그 마물이 바로 흐레이그 가문이 제조한 것이며, 이에 거짓이 없음을 천신께 맹세하였다.
또한, 이 마물의 제조가 진실로 추악하고 비인간적임을 증언하였다. 수천의 사람을 모아 죽이고, 그 살과 피를 사람에게 취하게 하여 완성한, 인세에 다시없이 끔찍한 행위였으니.
셋. 이를 통해 왕실의 신부행 습격이 모두 흐레이그 가문의 추악한 술수임이 밝혀졌다. 수천의 영민을 마물에게 먹였으니 아무리 감추려 해도 그 증거가 사라지지 않았으리라.
그리하여 나 델피르 프린 페벨룬 왕세자의 이름으로 이 악행의 조사를 요구한다. 왕국의 충신 티란디스의 법정 출석은 이 조사가 이루어진 후에야 논의되어야 할 것이다.]
발표문을 다 읽은 뱅가 공작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버지?”
“준비해라. 함께 왕성으로 가자꾸나. 흐레이그 공작을 보고 내 이 일에 대해 직접 추궁해야겠다.”
* * *
“……이게 진실인가?”
국왕의 목소리가 떨렸다. 흐레이그 공작이 잠시 갈등했다. 그러나 오래 생각할 거리는 아니었다. 거짓으로 모면해 봐야 그뿐이었다.
흐레이그 공작이 대답 대신 고개를 숙였다.
“자네가 그랬군. 이런 빌어먹을.”
국왕이 왕당파의 발표문을 집어던졌다. 두루마리가 정확히 흐레이그 공작의 얼굴에 맞고 대전 위에 떨어졌다.
“드리엔 그 아이로 만족하지 못했나? 장차 왕이 될 그 아이가, 그때 흐레이그가 왕실의 외척으로 누리는 권력이 모자랐냔 말이다. 어떻게 감히 이런 짓을 벌였느냐.”
“폐하, 송구하기 그지없습니다. 하나 권력을 어찌 나눈단 말씀이십니까. 세상 모든 것을 나눌 수 있더라도 오로지 권력만은 나눌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들키지 말았어야지. 일을 대체 얼마나 허술하게 진행했으면 이리 들키느냔 말이야.”
흐레이그 공작이 이를 악물었다.
빌어먹을 티란디스. 설마 페시번 그 못난 놈을 빼돌려 보호하고 있을 줄이야.
그러나 어차피 시체가 발견되지 않았으니 어디 숨어 살고있으리라 생각은 했다. 그렇게 도망쳤으니 죽은 사람처럼 살겠지. 그러니 관심을 끊었다. 아비의 마지막 자비심이었다.
애초에 무해하기도 했고.
흐레이그 나이트 제조는 가문 내에서도 자신과 대공자 베사렌만이 아는 사실이었다. 허수아비로 세워놓은 폐급 자식인 페시번은 알지 못했다. 그러니 페시번은 아니다.
누군가 달리 비밀을 알린 이가 있을 터인데.
단 한 명. 짚이는 이가 있었다.
수상하기 짝이 없는 여성 마법사들의 집단, 만화원에서 빌려온 그 재수 없는 마법사. 흐레이그 나이트의 제조를 맡았던 여인.
트리예 아르트레스. 그년이 틀림없었다.
어느 순간 사라져 만화원에 따졌더니 저네들도 모르는 일이라더니.
국왕이 혀를 찼다.
“그래서, 그래서 마물을 제조하고 왕실의 신부행을 습격했다고? 믿을 수가 없군. 믿을 수가 없어. 이 나까지 깜짝 속아 넘어갈 뻔했단 말이야.”
“송구합니다. 폐하.”
“내 믿을만한 충신이 한 명도 없군. 참으로 슬픈 일이야. 더 슬픈 일이 무언 줄 아나? 이리 배신을 당하고서도 내 뜻을 함께할 이가 자네뿐이라는 걸세.”
이미 국왕과 공작이 한 몸이나 마찬가지였다. 이것이 진실이다 밝혀지면 북부 귀족들은 단숨에 와해될 것이고, 그러면 서부와 남부의 연합을 동부 귀족들 만으로 막을 수가 없다.
동부 귀족들이 막아주기라도 하면 다행이었다.
뱅가 공작은 항상 애매한 태도로 자식들을 대했는데, 본인은 냉정하다 믿었으나 다른 이들은 이미 저 치가 팔불출이다 하여 익히 알고 있는 사항이었다.
이 와중에 제 딸을 습격한 것이 흐레이그의 소행이다 알면 어찌 나올지 몰랐다.
“이제 어쩔 텐가?”
“이미 증거로 남을 물건은 남지 않았습니다. 폐하.”
“수천 명을 갈았다며? 태가 나지 않을 도리가 없을 텐데.”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습니다. 폐하. 하나, 조사가 진행되는 것은 막는 편이.”
“그렇겠지.”
국왕이 경멸을 담아 공작을 노려보았다.
“듣자하니 얄렘방 방면에 무능한 것들이 이도저도 못하고 뭉쳐 있다 들었는데.”
“송구합니다, 폐하.”
“그놈의 말만. 자네가 가진 마물을 그리로 보내게. 북부 귀족이 그 마물에게 습격을 받아 피해가 크다면, 아무리 저들이라도 자네가 범인이라 일방적으로 우길 수는 없겠지. 북부 영지들을 상당 부분 저 반란군들에게 넘겨줘야겠지만, 조사만은 막아야 할 테니까.”
징글징글한 늙은이. 흐레이그 공작이 속으로 생각했다. 결국, 그리되면 북부 귀족의 세력이 줄어드는 셈이었다. 간을 보다 북부의 피해가 더 커서 동부 귀족이 우세하다 싶으면, 또 왕세자를 갈아버릴 생각이겠지.
그와는 별개로, 다른 방법이 없었다.
억지를 부려 시간을 벌자 해도, 동부 귀족을 이끄는 뱅가 공작이 어찌 나올지 알 수 없었으니까.
그것만 빼면 참으로 절묘한 묘책이었다.
북부 귀족들이 이만큼이나 피해를 입었는데 어찌 흐레이그의 소행일 수 있겠느냐 말한다면, 반역도들이 사실을 안다고 해서 함부로 조사가 필요하다 입을 놀릴 수는 없을 테니까.
그 누가 가장 큰 피해자에게 의혹의 화살을 계속 겨눌 수가 있겠는가.
* * *
“엣취. 크킁…… 앗.”
뷔아가 재채기를 했다.
그리고 나니 콧물이 반쯤 인중에 걸쳤다. 평소 하던 대로 아무 생각 없이 킁 들이마시고 나니, 여기가 진중 병상의 한가운데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수히가 기겁했다.
“성녀님?”
“저도 안답니다, 자매님. 하나, 제 코로 나온 것을 환우분들께 떨굴 수도 없는 노릇이라…….”
뷔아가 어색하게 변명을 붙였다.
사실 수히에게 하는 말이 아니라, 혹여나 작금의 사태를 보고 충격을 받았을 환자가 있다면 들으라 하는 소리였다.
수히는 어이가 없었다.
그럼 재채기하느라 입에서 나온 건 환자들에게 뿌려도 된단 말이고?
어째 그 원숙한 내숭도 점점 흐려지고, 그 털털한 속내를 숨기는 게 점차 미숙해지고 있었다. 아니면 이제 교단에서도 짬 좀 먹었다고 막 나갈 준비를 하는 것일지도 모르고.
수히의 근심이 새로 추가된 가운데, 어찌어찌 오늘도 환자들의 치료를 마쳤다.
특별 야전 병상이 전장 외진 곳에 설치되었다. 어느 한 진영의 환자만 치료하는 것이 편드는 셈이나 마찬가지니, 뷔아가 아예 장소를 따로 마련해 양쪽의 부상자를 모으도록 했다.
그리고 나면 벌떡 일어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조절하여 목숨만 붙여놓고 덧남만을 막으며 병상을 차지하도록 만들었다.
어차피 다 나아봐야 다시 전장에 나설 것이고, 번거롭고 일이 많아지더라도 이리 하는 것이 사람을 구하는 일이었다.
게다가 병상이 계속 늘어나며 소모하는 물자 역시 늘어나니, 양쪽 모두에게 부담을 주어 전쟁을 재고하도록 만들려는 속셈이었다.
마침내 성녀의 처소로 마련된 야전 천막에 몸을 던지니, 수히가 근심스레 물었다.
“뷔아. 시엔 공자님을 만나러 가지 않아도 괜찮겠어? 전쟁을 끝내자고 설득할 생각이었잖아.”
“북쪽으로 다시 올라가 버렸다는데 그럼 어째. 그렇다고 여길 비울 수도 없는데. 나쁜 놈. 가까이 왔으면 얼굴이라도 좀 비추던가.”
사실, 시엔은 뷔아가 왔다는 사실 자체를 몰랐다. 상부 전선에 있다가 후방 영지에서 회의를 마치고 되돌아갔으니까.
애초에 1왕자파에서 성녀가 도착했다는 소식 자체를 너무 늦게 알았다. 왕당파 쪽에서 치료에 전념하다 아차 싶어 특별 병동을 마련했고, 그제야 성녀의 존재를 알게 되었으니까.
“여기서 이러는 것보다 공자님을 만나보는 게 낫지 않겠어? 그걸로 전쟁을 끝낼 수 있다면 말야.”
“하지만.”
뷔아가 망설였다.
여기를 떠나면 당장 다시 사람들이 죽어 나갈 것이 뻔했다. 시엔을 만나 설득이 되면 전쟁 자체를 멈출 수는 있겠지만.
결국, 이 문제였다. 더 큰 평화를 위해 당장 아프고 다친 이들을 외면할 수 있겠느냐.
물론 큰 목표 역시 중요하겠지만.
대의란 언제나 강자의 변명이었다.
더 큰 피해을 줄이기 위해 소수를 희생시키며 하는 변명. 그게 어쩔 수 없었노라 말하는 합리화였다. 그게 실제로도 그렇다 하더라도.
“아직은 아냐.”
뷔아가 결정을 내렸다.
듣자하니 북쪽에서는 전투가 거의 벌어지지 않는다고 했다. 시엔과 관련된 끔찍한 전공이 거슬리지 않는 것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이렇게 참혹한 전장만은 피하려 했다는 사실이 그나마 위안이 되는 일이었다.
그러니 아직은 좀 더. 눈앞에 고통받는 이들을 위해 움직여도 되지 않을까 하고.
< 35. 서로 네 것이다 양보하니 [4]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