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작가의 망령재림-169화 (166/268)

< 35. 서로 네 것이다 양보하니 [3] >

뷔아가 시엔을 찾아 움직였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그 동선에 하부 전선이 겹쳤다. 그렇다 해서 위험할 것은 없었다.

교단의 기를 높이 들고 성기사가 호위하는 일행이었다. 전장을 지난다며 미리 통보하니 양군이 잠시 전투를 멈추고 물러났다.

본래는 빠르게 움직일 계획이었으나, 환자들이 그 발목을 잡았다.

하부 전선에서 있었던 거짓 항복 계책으로 서로가 원수가 되어 싸우니 전투가 매번 치열하기 그지없었다. 부상병이 땅 위에 누워 신음하니 신관들이 그냥 지나칠 수 없었던 까닭이었다.

야전 병상은 참혹하기 그지없었다.

강력한 신성을 가진 사제는 좀처럼 속세에 속하는 일이 드물었다. 그러니 종군 사제들의 성력은 고만고만했다. 그나마도 귀족과 기사들을 위해 아껴두라 대기시키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니 의사들만 죽어나갔다.

그런 의미에서 성녀 일행의 방문은 의사들에게 아주 기꺼운 일이었다. 때는 바로 이때다 싶어 위중한 환자들에게 안내했다.

뷔아가 무릎을 꿇고 천신께 기도를 올리니 사방으로 상서로운 빛이 차올랐다. 뒤이어 병상에 누운 환자들의 창백한 낯에 조금씩 핏기가 돌았다.

처치는 했으나 곪은 상처들에서 고름이 저절로 빠져나오고 새살이 돋아 아물었다. 부목으로 댄 뼈대가 다시 붙었다. 펄펄 끓어오르던 열기가 가시니 신음하던 이가 쌕쌕 평온하게 잠에 빠져들었다.

“세상에…….”

의사들이 입을 떡 벌렸다.

환자들이 호전되니 기쁘기도 하나, 동시에 의사질이 대체 의미가 있나 회의감이 드는 장면이기도 했다. 아니, 기도 한 번에 사람이 나으면, 대체 지금까지 배우고 익힌 의술은 대체 뭐가 되냐고.

물론 이만한 기적을 부르는 이는 역대 성녀 중에서도 몇 명 없었다. 뷔아가 교단 역사에서도 손에 꼽히는 강대한 신성을 가졌으므로.

그렇다고 그 사실이 의사들에게 별로 위안이 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신성 치료와 의술을 비교하는 것이 얼마나 부질없는 일이며, 둘이 반목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필요한 일임 또한 알았다.

의사가 미리 처치하여 부상자의 흰 것은 흰 것끼리, 붉은 것은 붉은 것끼리 이어놓았다. 그렇기에 신성이 파고들어 곧장 치유할 수 있었다.

뷔아의 기적을 본 의사들은 생각을 바꾸어, 야전 병동의 가장 후미진 곳으로 성녀 일행을 안내했다.

“여기는……”

뷔아가 인상을 찌푸렸다.

이전 병상에는 중환자들만 모아놓았다더니, 여기는 더욱 심한 환자들만 가득했다. 사람보다 시체에 더 가까운 이들이었다.

“이분들은 대체……”

“죽을 사람들입니다.”

“그게 무슨 뜻이죠?”

“환자는 많고, 의사는 적습니다. 사제분들은 더 적지요. 한 사람을 포기하면, 그 시간과 자원으로 열 사람을 살립니다.”

의사가 대답했다. 뷔아는 화를 내려다, 의사의 표정을 보고 그저 맥빠진 한숨만 내쉬었다.

의사가 진단하여 죽을 사람을 결정했다. 대체 어떤 기분이 들었을까.

뷔아는 그저 입술을 깨물며 치료에 전념했다. 그나마도 상세가 위중하여 그저 숨만 붙여놓고 다음 환자로 넘어가야 했다.

“저, 사제님…….”

돌보던 환자가 뷔아를 찾았다.

“예, 말씀하세요.”

“그, 제 다리는…….”

환자의 다리는 이미 썩기 시작했다. 본디는 다리를 통째로 잘라내야 할 상세였다. 그러나 성녀쯤 되면 회복시킬 수 있었다.

뷔아가 안심하란 듯이 웃어 보였다.

“걱정하지 마세요. 멀끔하게 붙여드릴 테니까요. 나중에는 다시 뛰어다니실 수 있으실 거예요.”

“그게 아니라……”

환자가 머뭇거리다, 겨우 모기만 한 소리를 냈다.

“차라리 잘라주십시오…….”

“그게 무슨 말이세요?”

“다리가 낫고 나면, 그. 다시 전장에 나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너무 무섭습니다.”

그 순간 뷔아가 느낀 감정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그저 끔찍하고 또 끔찍했다.

대체 전쟁이란 왜, 어째서. 뷔아가 고개를 떨궜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여전히 환자는 많았으니까.

그렇게 하루를 보내고, 늦은 밤이나 되어서야 뷔아가 침소로 마련된 천막에 몸을 눕힐 수 있었다.

그리고 그제야 왕실의 발표를 전해 들었다.

「미상의 무리가 왕실의 신부행을 습격하여 무고한 이를 해쳤다. 장차 왕국의 어머니가 될 왕세자비께서 이 참극을 피하지 못하였다.

왕실의 조사대가 이 사건을 조사하여 결국 이 참화의 흉수를 추적하여 범인을 붙잡았다. 이는 이 세상에 결국 숨길 수 없는 죄가 없음을 증명하는 바이니, 천신께서 정의의 집행을 원하시는 바이니라.

심문 끝에 흉수가 신원과 죄를 실토하니, 곧 반역도의 사주를 받아 한 일이라 하였다.

벨멘 카르트만은 티란디스의 영민으로 평시엔 상단으로 활동하였으나 본디 하는 일은 타인의 영지를 염탐하는 비열한 첩자였다.

그리고 왕실의 가족을 살해한 이 용서받지 못할 범죄의 뒤편에 티란디스가 숨어 있음을 고백하였다.

이에 이 일을 꾀하여 지시한 시엔 티란디스와 티란디스의 일가는 왕성으로 출두하여 법정에 설 것을 국왕의 이름으로 명령한다.」

* * *

왕실의 발표가 전해지자, 시엔이 후방 영지로 향했다. 향후의 대응을 의논하기 위해서였다.

케이슬 자작의 영주성에 도착하여 짐을 풀고 있으니, 똑똑 하고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들어오라 하니, 기가 센 여인이 대뜸 인사도 없이 다가와 물었다.

“정녕 시엔이 벌인 일인가요?”

“저도 잘 지냈습니다. 공주님.”

“공주님? 우리 계약이 그렇게 되었던가요?”

세필리아가 쏘아붙였다. 시엔이 웃으며 대답했다.

“계약이라 할 것까지는 아니었던 걸로 압니다만. 세피. 사람을 봤으면 인사부터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잘 지내셨습니까?”

“나 잘 지냈는지 굳이 물어볼 필요가 있나요? 내가 누군지 몰라요? 공주가 후방에 있으면 잘 지낼 수밖에 없죠.”

“잘 지내셨다니 다행입니다.”

“누가 위험하게 계속 나다닌다 소식만 못 들었으면 더 잘 지냈을 텐데요.”

“걱정을 끼쳐 드렸군요.”

“웃겨. 누가 걱정을 했대요. 어쨌거나 대외적으로는 연인인데, 걱정하는 척을 해야 하니까 내가 잘 지내질 못한 것뿐이지.”

“제가 전쟁에 나선 것이 세피의 지분도 있으니 그 정도는 감수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 여전하네요. 사람이 좀 쩔쩔매고 그러면 안 되나 몰라. 매력이 없어, 매력이.”

“세피의 성벽에 맞춰드리지 못해 죄송하게 되었습니다만.”

쥐고 흔들 멍청한 남자를 찾는다는 맹랑한 공주는 여전했다. 세필리아가 진지한 표정을 했다.

“그래서, 시엔이 했나요, 안 했나요?”

“글쎄요. 세피가 보기에는 어떻습니까?”

“흠. 구 대 일. 안 했다는 데에 구예요. 들키지만 않았다면 꽤 적절한 방법이긴 하니까. 왕자비가 실종되면 가장 먼저 북부 귀족들이 의심받을 테죠. 안 그래요?”

“그래도 안 했다는 데에 거시는군요.”

“그야 역공 맞기 워낙에 쉬운 방법이어야지. 습격해서 북부 귀족의 문장 하나만 떨궈놔도 그만이지만, 저쪽도 마찬가지지. 목격자가 없으면 만들면 되고, 증거도 마찬가지니 결국 누가 했다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기는 싸움이잖아요. 나 같으면 안 할 방법인데, 시엔이 그렇게 할 것 같진 않네요?”

“사실, 뱅가 영애를 보호 중이긴 합니다.”

“시엔이 했다구요?”

세필리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내전이 한참인 와중에 그리 현명한 수는 아니었다. 물론, 제대로 먹힌다면 서부 귀족이 북부와 반목할 가능성이 있었으니 내전을 단숨에 끝낼만한 한 수가 되었으리라. 하지만.

시엔이 고개를 저었다.

“제가 한 일은 아닙니다. 검위공께서 국경을 이탈하여 오시는 길에 구출하셨습니다.”

“난 또 뭐라고. 그 말부터 하지 왜.”

“한번 놀라보시라고 그랬습니다만.”

“웃겨. 정말.”

세필리아가 콧방귀를 뀌었다.

그렇게 간단히 차림을 정돈한 시엔이 방을 나섰다. 세필리아와는 일단 비공식적 연인이라는 설정이라, 함께 마련된 대회의장을 찾았다.

시종이 이름을 외치고, 뒤이어 문이 열리자마자 델피르 왕자가 시엔을 반겼다.

“시엔!”

델피르가 격의 없이 이름을 부르며 달려들었다. 왕이 신하를 보고 신이 나 뛰어오니 사실은 법도에 맞지 않았다. 원래라면 찾아가 인사를 드려야 하겠지만, 왕자가 제 발로 뛰어왔으니 시엔이라고 무슨 수가 있을까.

그래서 이 소년이 시엔의 왕이었다. 그저 왔다 하니 기꺼워 반기는 나의 왕이여. 부디 앞으로도 그렇게 남아주시기를.

시엔이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왕자님, 안녕하셨습니까?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그새 키가 자라셨습니다.”

“응. 조금만 지나면.”

델피르가 문득 움찔하며 시선을 돌렸다. 그 끝에 위치한 이가 왕자의 예법 선생이었다. 여전히 우아한 태도로 선 예법 선생의 눈매가 사뭇 날카로워 위협적이었다.

“흠흠. 시엔. 잘 와주었네.”

“예. 전하. 반겨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내 경의 활약을 귀담아들었다네.”

뒤이어 1왕자파의 가장 큰 전력, 물론 티란디스를 제외한 후의 이야기였지만, 엘와즈 백작과 랭무튼 백작에게 인사를 전하고, 잠시 간단히 안부를 물었다.

그러고 나서야 본 회의의 시작이었다.

“그래서, 대공자. 왕실의 발표가 사실입니까?”

“아닙니다. 사실 그럴 여력도 없었구요. 그건 아시겠지요?”

“역시.”

“대공자가 그런 식으로 일을 벌일 인물은 아니었으니 말이오.”

귀족들은 그럴 줄 알았다는 반응이었다.

그러나 사실, 시엔이 일을 벌였는지는 이 회의와 상관없는 일이었다. 귀족들도 그저 사실이 궁금하여 확인해 보았을 뿐이었다.

이미 일은 벌어졌다.

어떻게 수습할 것이냐가 중요하지, 누가 했느냐는 중요하지 않았다.

“말도 안 되는 모함입니다. 어찌 이런.”

“왕실에서 비열한 수작을 벌이는군요.”

“이미 온 왕국에 선포된 소식이니, 법정에 나서지 않으면 사실이 되어버릴 것입니다만.”

“법정에 나서면 이때다 하고 적들의 총공격이 시작될 테지요.”

이래저래 난처한 상황이었다.

왕실에서는 1왕자파를 반역도라 부르지만, 1왕자파의 명분이 반역이 아니었다.

현왕을 폐하자는 것이 아니라, 델피르 왕자의 왕세자 직위를 복권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국왕을 조종하여 국정을 휘두르는 왕당파 귀족들이 제멋대로 벌인 일이니 그들을 몰아내겠다면서.

그러나 시엔이 드리엔 왕자비의 신부행을 습격했다 하면 이야기가 달랐다. 왕실을 습격한 것이나 마찬가지이니, 지금까지의 명분이 무실해졌다.

“여러분. 잠시만,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시엔이 귀족들의 이목을 모았다.

“검위공께서 국경을 이탈하여 합류하셨고, 그 도중 케이트 뱅가 영애를 습격에서 구출해 합류하셨습니다.”

“오오. 검위공께서.”

“큰 결단을 내려주셨군.”

귀족들의 표정이 밝아졌다.

검위공은 일신의 무력도 무력이거니와, 왕실의 수호자라는 상징성을 가진 기사였다. 물론 그 직위가 해제되었다 해도, 왕국 최고의 기사가 델피르 왕자를 모신다는 것은 1왕자파의 명분에도 딱 알맞은 좋은 그림이었다.

“그럼 뱅가 영애가 증언을 할 수도 있겠군요. 검위공께 구출받았다 하면.”

“그래도 변하는 것이 있겠습니까? 오히려 범행의 증거라며 날뛸 수도 있습니다.”

“어쨌거나 법정에 참석하라 우긴다면야.”

귀족들의 흥분이 다시 식었다.

그래도 이전보단 조금 나았다. 어차피 같은 상황이라도 검위공의 합류 소식을 들었으니까.

“계속 들어보세요. 검위공께서 말씀하시기를 검은 갑옷을 입고, 베어도 쓰러지지 않는 인간 형태의 마물이 영애를 습격하였다 하셨습니다. 뱅가 영애 역시 같은 진술을 하셨구요.”

“그럼, 마물의 소행이란 말이오?”

“그런 마물은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만.”

귀족들이 웅성거렸다. 개중 변경백, 엘와즈 백작이 시엔을 보며 물었다.

“대공자가 거짓을 논할 이유가 없으니 필시 사실이겠지. 그렇다면 그저 재수가 없었다는 말인가? 습격은 마물이 한 일이고, 왕실에서 끼워 맞춰 계책을 부렸다고? 그리 말할 생각은 아닐 테지.”

“맞습니다. 그 마물은 사람이 만든 것이고, 그러니 습격 역시 사람이 의도한 것이겠죠.”

“사람이 만들었다? 그럼…….”

“흐레이그 공작가. 흐레이그에서 마물을 제조했습니다. 사람의 피와 살을 먹고 불사를 얻은 마물이죠. 수천의 사람을 마물에게 먹였을 겁니다.”

귀족들이 입을 다물었다.

충격적이기도 하거니와, 수천의 사람을 먹이다니. 그 끔찍한 사실을 듣고 잠시 넋이 나간 탓이었다.

잠시 후, 충격에서 벗어난 엘와즈 백작이 급히 물었다.

“그, 그걸 어찌 대공자가 알지? 증거가 있나? 증거만 있다면……”

“흐레이그의 전 대공자, 페시번 흐레이그를 보호 중입니다. 그리고 흐레이그에서 제조한 끔찍한 마물에 대해 기꺼이 증언할 준비가 되었구요.”

“오오……!”

귀족들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 말대로라면, 오히려 흐레이그를 범인으로 지목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이를 발표하며, 흐레이그의 마물 제조에 대한 합동 조사를 요청해야 합니다. 거기에 응한다면 조사하여 반드시 사실을 밝힐 수 있을 테니까요. 영민이 한둘이 아니라 천 명이 넘게 실종되었다면 조사해 나오지 않을 수가 없겠죠.”

“조사를 거절한다면?”

“그러면 왕실의 법정 소환 역시 거절할 수 있잖아요? 물론 합동 조사가 이루어지는 편이 좋겠지만요.”

물론 흐레이그가 순순히 인정하려 들지는 않을 테고, 왕실에서 거짓이라 우기면 그뿐이었다. 그러나 그때는 법정 소환을 거부할 명분이 섰다.

이미 내전은 1왕자파가 조금씩 승기를 굳히는 와중이었다. 시엔이 왕당파의 병력을 상부 전선으로 유인하고서 그 자리에 묶어두었다. 그뿐이랴, 그 와중에도 계속 일방적인 전과를 올렸다.

덕분에 하부 전선의 주공이 조금씩 왕성을 향해 전진하고 있었고, 검위공의 합류는 그 속도를 더 빠르게 만들어줄 것이다.

< 35. 서로 네 것이다 양보하니 [3]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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