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5. 서로 네 것이다 양보하니 [2] >
“그래서, 뭘 하고 지내셨답니까?”
“국경에서 무어 할일이 있겠나. 그저 덜 익은 것들 사람 좀 만들다가. 에잉.”
검위공이 인상을 찌푸렸다.
“이전에는 국경 수비군이라 하면 잘 벼려진 정병들이었네. 한 놈 한 놈 훈련이 잘되어 군기 바짝 들어간 정예들 말일세. 그런데 이 늙은이가 가 보니 어떻겠나. 온통 어린 녀석들, 아니면 창 하나 들고서도 헉헉거리는 나이 먹은 녀석들이 골골거리는데.”
“신병들이었군요.”
“이 늙은이에게 병력을 맡기기가 부담스러우셨던 게지. 폐하께서는.”
검위공은 모든 왕국 기사들의 정신적 스승과 같았다. 존경하여 칭송하기를 버릇처럼 하니, 일면식 없는 기사라도 그 칭호 세 글자에 가진 경이가 보통 것이 아니었다.
국왕이 검위공을 동부 국경 수비대장으로 임명하였으나 사실은 좌천이었다.
동부의 변경백들이 그 사실을 알았다. 또한 수비대장으로 온 이가 제 군대를 휘어쥘까 무서웠다. 국왕의 비위를 맞추는 동시에 제 두려움을 피하려 수작을 부렸다.
정병을 빼버리고 신병을 올려보낸 것이었다.
“그래도 군이 원래 담금질하여 강해지는 것이니, 훈련시켜 몰아쳐 국경을 지키도록 해야 했으나. 내 여기에 있군. 내 여기에 있어.”
검위공의 표정이 흐렸다. 어떤 회한 같은 것이 밖으로 비쳐 나왔다. 그 표정은, 주름도 별로 없어 정정한 얼굴임에도 그 나이대의 노인처럼 보일 정도였다.
“검위공?”
“이제 나도 나이가 드는 모양이네. 늙은이가 주책맞게. 계속 국경을 지킬 생각이었네만, 동부 변경백들이 설익은 신병마저도 급한 모양인지 그걸 또 떼어 가지 않겠나. 그나마 있던 병사들이 열 중 둘만 남았어. 열 중 둘만……”
국경을 지키는 병사들이 어설픈 신병들이 된 뿐만 아니라, 팔할이 도로 되돌아갔다.
원래 군대식 농담으로, 다섯 중 하나는 하자가 있다고 했던가. 본래는 좀 더 거칠게 표현하기는 하지만.
멀쩡한 놈들 다 빼가니 남은 것들이 전부 그랬다.
어떻게든 제 몸 편하게 쉴 자리만 찾는 놈.
제가 전우보다 삽질 한 번만 더 해도, 삶의 거대한 손해이자 남은 인생 최대의 후회 거리가 되는 마냥 여기는 이기적인 놈.
아니면 멍청하기 짝이 없어 말귀를 전혀 알아듣지 못하거나, 겁이 많아 산새의 날갯짓 소리에도 자지러지며 오줌을 지릴 정도거나……
“심한 소리라 할지 모르겠으나, 사람 천성이 본래 바뀌는 것이 아니라 생각한다네. 국경에 모인 것들이 군대가 될 수 없는 놈들 뿐이야. 그러니 대장이라 해봐야 거기서 무얼 하겠나? 군대 이미 없는데. 심심하니 소일거리라도 있나 싶어 와 봤다네.”
검위공이 말이야 그렇게 해도 그 속을 대충이나마 알 것 같았다.
평생을 충신으로 살았으나 그 꼴이 이러하고, 그렇다곤 하나 모신 주군에게 국경을 지키라 명령받아 그걸 어기고 왔다.
시엔이 부러 웃으며 손을 잡았다.
“잘 오셨어요. 있어 봐야 뭐해요?”
“그렇지. 듣자 하니 자네 꽤 재미있는 일을 벌이고 다닌 모양이야? 늙은이 하나 끼워줄 자리가 있나?”
“아쉽게도 조금 늦으셨네요. 벌써 한탕하고 왔지요. 조금 흔들다 진격에 나설 텐데, 그때 앞장서시면 되겠네요.”
“한탕이라. 무용담을 들어봐도 되겠구먼.”
“별 거 있나요?”
시엔이 대충 요약해 들려주었다.
귀족 둘의 가족을 포로로 잡았다.
갈푼 가문은 후계자를 빼앗겼으니 곧 빠져나갈 테고, 유피스 가문은 조금 애매했다. 부인과 둘째 아들이면 인질로 가치는 조금 떨어지는 편이었으니.
“과연. 허나, 자네. 너무 개인의 기량에 의존한 전략 아닌가? 적들이 적극적으로 나왔다면 상당히 위험한 상황이 나왔겠구먼.”
“뭐. 결과적으로는 잘 되었으니까요.”
“자네답지 않은걸. 자네가 그런 식으로 움직이는 위인이 아니었는데.”
시엔이 그저 웃어넘길 뿐이었다.
검위공의 말이 맞았다.
세올이 정찰을 맡아 멀리까지 보고 빨리 알렸다. 송수신기가 있으니 지휘가 세세하고 또 하나둘씩 적소에 심어두고 공간을 파악할 수 있지 않았던가.
“그건 그렇고, 영주성에 쳐들어가 인질을 확보했다고 했나. 내 이리 오다 예기치 못한 손을 맞이했네만.”
“예기치 못한 손님이라구요?”
“케이트 뱅가 영애. 아는가?”
시엔이 잠시 그러한 이름을 떠올려 보았다.
딱히 기억에 남지 않으니 모르는 사람이었다. 다만, 그 성은 대충 알았다.
뱅가 공작이라면 동부 귀족의 거두가 아닌가. 최근 들은 소식이라면 뱅가 영애와 2왕자, 드리엔 프린 페벨룬과의 약혼 소식이었다.
시엔의 표정이 굳었다.
이런 상황에 굳이 꺼낼 이야기라면, 누구를 말하는 것인지 대충 가닥이 잡혔다.
“잠깐. 그럼 설마.”
“드리엔 왕자비로 낙점된 분이시지. 내 제자들을 이끌고 달려오다 습격받아 위태로운 영애를 구출했다네.”
“같이 오셨어요? 아니, 아는 이가 또 달리 있나요?”
“자네만 알고 있게. 지금은 제자들과 함께 계시지. 지금은 대충 제자 놈 하나 시켜 먼 사촌이라 둘러댔다만은. 일단 자네는 알고 있어야 할 판이라.”
“습격이라. 좀 더 자세히 알려주실 수 있겠어요?”
“자세히라 할 것도 없네. 시커먼 갑옷을 입은 사람 꼴을 한 마물들이었어. 사지를 베어도 멀쩡하게 움직이는 놈들이었는데, 머리를 베니 그래도 쓰러지긴 하더군.”
흐레이그 나이트. 뻔한 수작질이었다.
시엔이 들어 바로 알아챘다. 애초에 그걸 만든 장본인이 바로 옆에서 수발을 들고 있는 상황이었으니 어찌 모를까.
어떤 상황인지는 명확했다. 그러나 원래 진실은 그리 귀한 것이 아니었다.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네요. 뱅가 영애의 신부행을 습격당했다는 거고. 음. 그게 언제쯤 일이죠?”
“이제 스무 날쯤 지났을 걸세.”
“그 정도면, 신부행에 이변이 일어났다는 걸 알아채고도 조사대가 파견되기엔 충분하겠네요. 증거야 하나 만들어두면 그뿐일 테니까……”
“뒤집어씌우겠다, 이 말이로군.”
검위공이 표정을 굳혔다.
“동부 귀족들이 분노해 크게 일어나겠지. 이제까지야 슬그머니 간을 보는 정도였다만은. 일이 이리되면. 이거 내전이 점점 큰일이 되어가는군.”
“아니면, 오히려 기회가 될 수도 있구요.”
시엔이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마물이 연관된 일이니, 결국 뒤가 밝혀지면 오히려 역풍을 맞을 테니까요.”
“허나, 어찌 밝힐 수 있겠나. 뱅가 영애를 내 보호 중이긴 하나, 사실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은 것이 오히려 문제가 될 수 있기 때문이 아닌가. 오히려 뱅가 영애를 데리고 있으니 이야말로 습격한 증거다 하여 떠든다면 어쩔 텐가.”
“음. 그러니까 잘 해봐야지요.”
시엔이 머리를 굴렸다.
놀고먹던 페시번이 밥값을 할 때가 된 모양이었다.
흐레이그 나이트. 그 저주받을 것들이 워낙에 흉악한 물건이어야지. 페시번이 흐레이그가 만든 것이라 증언할 수 있을 테고.
어쩌면 교단 쪽에서도. 아니. 그건 말고.
시엔이 생각을 바꿨다.
교단을 끌어들이는 건 아무래도 내키지 않았다.
시엔이 저를 아끼는 왕을 모시며 전쟁에 나섰지만, 결국 이는 사람의 권력을 위한 것이지 선과 악의 문제는 아니었으니까.
교단은 교단으로. 여신을 섬기는 선량한 이들은 그저 그렇게 남아야 할 터였다.
그래도 뭐.
일부러 끌어들이는 일은 없겠지만, 혹시나 저네가 죄악의 냄새를 맡고 달려들면 막을 필요까지는 없지 않을까.
조금 비겁한 생각이긴 해도.
* * *
왕실에 간만에 손님이 들었다.
좋지 않은 때에, 별로 반갑지 않은 손님이었다. 내전이 한참일 때에 교단의 방문을 맞이하는 것은 누구라도 저어할 일이었다.
국왕은 그러한 심기를 숨기지 않았다.
성녀가 알현을 청한다고 하여 기다리고 있으나, 한참이나 늦게 나타난 것이 바로 그러한 뜻이었다.
“왕국의 지배자이자 세 공작의 후원자, 페라인드 평야의 주인이자 매송곳 산맥의 주인이며…….”
또한 어쩌구 하는 시종의 말이 길게 이어졌다.
“……레이알드 셉텐 페벨룬 폐하께서 드십니다.”
대전의 귀족이 전부 허리를 있는 대로 접는 와중에, 뷔아가 빳빳이 서서 고개를 들었다.
뷔아의 신분이 교단의 제일가는 성녀이며, 또한 성황의 대리자였다.
성황청이 독립된 세력으로 굳건하고 또한 여신 이외의 권세를 섬기지 않았다. 그러니 성녀가 국왕 앞에 예를 표할 필요는 없었다.
물론, 실제로 그러하는 경우는 좀체 없었다.
허리 좀 숙인다고 닳는 것도 아니다.
교단은 원래 허리 숙이기 하나는 전문가들이었다. 대개 교단이 귀족 앞에 서면 아쉬운 소리를 하기 마련이었고, 가여운 이를 위해 예의 정도야 깍듯이 차려주는 정도야 신관의 소양이 아니던가.
물론 신전에서의 신관은 또 달랐지만. 귀족이 신전을 찾으면 저가 아쉬운 상황이고, 원래 아쉬운 쪽이 허리를 굽혀야 하니까.
결국, 뷔아가 그저 멀뚱히 서서 올려다보고 있는 지금 상황은 국왕에게 있어선 심기깨나 상할 무례한 행동이었다.
그러나 뷔아도 마음이 굉장히 상했다.
왕국에 들며 본 것들이 신음하는 백성들이었다. 마을이며 도시마다 사내를 찾기 힘들고, 근심어린 여인의 얼굴, 굶주린 아이와 노인들이 새삼 전쟁의 참혹함을 일깨워준 탓이었다.
그 와중에 왕성의 대접은 또 훌륭하고.
기껏 알현을 청했더니 사람을 한 시간이나 서 있게 만드는 처사는 대체 무엇이람.
원래 제 거친 속을 감추는 것에 능한 뷔아였지만, 이번에는 굳이 그러지 않았다.
“크흠. 먼 길 오셨소이다. 요즈음 때가 이러하여 격무에 시달리는 중이오. 늦어지게 되어 미안하외다.”
“괜찮습니다.”
“그래서, 교단의 손님께서 어찌 방문하시었소?”
“이번 여름이 유달리 가물어 대륙의 내일이 온통 근심입니다. 이러한 때에 왕국에는 더욱이 슬픈 소식이 이어지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소. 개탄스럽기 그지없는 상황이지.”
“하여, 교단을 대표하여 청하겠습니다. 이 전쟁을 평화로 해결하여 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허허. 평화라……”
돌연 국왕이 팔걸이를 쾅 내려쳤다.
“성녀께서 무언가 잘못 알고 계시는군. 이는 전쟁이 아니오. 성녀께선 도적을 토벌하는 것도 전쟁이라 부르시오? 아니. 그런 건 전쟁이 아니지. 무도한 반역자들이 왕좌를 노려 강탈하려 하니, 그저 충신들이 일어나 도적을 토벌하는 것에 불과하지.”
국왕의 속이 점점 끓어오르는 모양이었다.
“왕명조차 무시하는 무도한 것들. 제 주인을 해하고자 칼을 든 배은망덕한 것들. 오히려 내가 교단에 항의해야 할 것이 아니오? 성직자라는 이들이 도적을 도와 치료하고 돌보고 있으니. 도적이 그렇게 몸이 나아 다시 칼을 들어 덤비니 무고한 피가 계속해서 흐르지.”
뷔아가 속으로 생각했다.
혓바닥 더럽게 기네. 시발 놈.
그렇다고 그렇게 욕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뷔아가 대신 달리 말했다.
“하오나 폐하. 증오는 오직 증오를 불러올 뿐입니다. 여신께서 말씀하시기를 세상에 어떤 괴물보다 무서운 것이 증오이니, 이는 사람의 마음을 먹고 커져 세상을 집어삼킨다 하셨습니다. 부디 용서의 마음으로 포용하여 주실 수 없으시겠습니까?”
국왕이 픽 웃음을 터뜨렸다.
“용서, 용서라. 그래. 내 못할 것도 아니지.”
“정말이십니까?”
“허나, 용서에도 순서가 있는 법이 아니오? 그 전에 죄인이 무릎 꿇고 용서를 청해야지.”
“그렇다면, 그렇게 하면 용서하시겠습니까?”
국왕이 이를 내보였다. 사나운 미소였다.
“그래. 내 그러하리다. 그러니 성녀께서 저 반역도에게 사람의 마음을 좀 설파하여 주시겠습니까? 저들이 죄를 뉘우치며 잘못을 고한다면 내 기꺼이 용서하리다.”
국왕의 말은 긍정보다는 비꼼에 가까웠다. 할 수 있으면 해보라는 바로 그러한.
그러나 뷔아가 원하던 말이 이것이었다.
“그리 약조하여 주시니 감사합니다. 예하께서도 분명 기뻐하여 폐하의 너그러움을 칭송하실 테지요.”
국왕의 속이 덜컥 내려앉았다. 실언이었다.
조금 기다리게 했거니 그 분함을 참지도 않고 고스란히 내보이는 것이 고약하고 괘씸했다. 성녀라곤 하나 새파랗게 어린 것이 고개를 치들고 화난 눈빛을 하니 당연히 그럴 수밖에. 그만큼 철없고 순진한 애송이라 해서 얕보기도 했다.
그런데 성녀가 덜컥 약조했다 대답을 붙이고 성황을 들먹인다. 이러면 정말로 약속을 한 상황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그것도 성황의 이름을 걸고.
그럴 일은 없겠지만, 혹시라도 반역도들이 용서를 청하면 정말로 용서를 해줘야 할 상황이었다.
국왕이 잠시 갈등했다.
지금이라도 발언을 철회할 것인가.
자존심은 조금 상하는 노릇이나, 방금은 실언이었다며 넘기는 편이 좋으리라. 국왕이 그렇게 판단했다.
그러나 국왕의 아래 선 성녀의 표정이 그 판단을 막았다.
한 방 먹였다고 뽐내는 듯한, 의기양양 맹랑한 얼굴. 삐뚜름히 올라간 입꼬리는 누가 봐도 비웃음이 아닌가.
국왕은 요즘 자존심이 많이 상했다. 화가 속에 많이 쌓여 평소의 냉정함이 많이 깨져 버린 와중이 아니던가.
어차피 저 반역도들이 항복하고 굽힐 확률은 그야말로 만에 하나. 기적이 아니고서야 일어나지 않을 일이었다.
이미 왕실에 반기를 들었으니, 용서를 받아 당장 머리를 보전한다 해도 두고두고 불이익을 받을 것이 뻔한데 그러하겠는가.
결국, 국왕이 이렇게 말하고 말았다.
“그래. 내 성녀의 활약을 기대하겠소.”
< 35. 서로 네 것이다 양보하니 [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