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작가의 망령재림-167화 (164/268)

< 35. 서로 네 것이다 양보하니 [1] >

안통 백작가는 북서부 귀족 연합의 일원이었다. 살베지 백작가와 함께 북서부 귀족 연합의 두 축이었다.

내전에서 중립을 선언한 이후, 안통 백작가는 영지 경계를 단단히 걸어 잠갔다. 북서부 산악지대는 왕국의 광산이었고, 질 좋은 강철로 무장된 군대였다.

관문마다 군대가 주둔하고 있으나 훈련 등의 군사행동은 최대한 자제한 형태였다.

1왕자파건 왕당파건 영지 내로 들어올 수 없고, 대신 군대를 내보내지도 않겠다는 중립 표명이었다.

그렇기에 시엔 티란디스가 이끄는 1왕자파의 소수 부대가 관문에 도착했을 때에도, 안통 백작가의 군대는 길을 열어주지 않았다.

티란디스의 대공자가 앞으로 나섰다.

안통 백작님과 통행료를 교섭하려고 잠시 문을 열어달라. 교섭이 안 된다면 그대로 되돌아 나오겠다며.

관문수비대장은 잠시 고민했다.

그러나 괜한 판단으로 한 소리 듣는 것보다, 일이 조금 잘못되어도 명령을 들었다는 변명을 하는 것이 낫다 생각했다.

명령은 관문을 틀어막고 통과시키지 않는 것이니, 곧바로 파발을 보내 영주님께 알리겠다며.

시엔과 기사들이 관문 앞에 진영을 꾸렸다.

카레네가 걱정스레 물었다.

“그래서, 이대로 기다릴 셈이야?”

“어쩔 수 있겠어?”

“차라리 조금이라도 빠르게 철수 경로를 잡는 게 낫지 않아? 거추장스러운 군량은 태워 버리고 빠르게 달리면 사나흘이면 복귀할 수 있지 않아?”

“식량을 태우기는 너무 아까우니까.”

“백작이 언제 답할지 알고?”

“그렇게 오래 기다릴 필요는 없을걸. 내일 오전쯤? 늦어도 내일 오후면 백작이 직접 나타날 테니까.”

“왜지?”

“일단 기다려 보자. 이렇게 말했는데 백작이 늦장을 부리면 나만 민망해지잖아.”

“시엔. 조금만 진지하게.”

“아직 그렇게 조급해, 할 정도는 아냐.”

시엔이 그렇게 말하며 다른 곳을 보았다.

카레네가 그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시엔의 시녀가 옥수수를 대차게 뜯어먹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양손으로 옥수수의 끝단을 쥐고 입에 물어 빙글빙글 돌리는데, 물에 삶아 부드러운 것이라 해도 어쩜 저리 야무지게 뜯는지.

순식간에 희멀건 심이 그 영역을 넓혔다.

일주일은 굶은 사람 같았다.

상당한 실력을 갖춘 마법사라고 했던가.

마법사란 족속들은 괴팍하고 괴상하여 기사로서는 알 방도가 없다 해도, 그래도 이건 좀 아니었다.

양 볼따구에 미어터져라 옥수수 알갱이들을 머금은 채였다. 대귀족의 후계를 모시는 전속 시녀가 보일 모습이 아니지 않은가.

귀족의 미덕 중 하나가 절제이며, 기사의 미덕 중 하나가 또한 그러했다. 후작가의 장녀이자 차기 제일 기사단장인 카레네에 눈에 곱게 보일 리가 없었다.

세올이 옥수수에 팔려 한없이 알갱이들을 흡입하고 있으니, 트리예가 옆구리를 쿡 찔렀다. 그제야 카레네의 못마땅한 시선을 마주한 세올이 급히 변명을 붙였다.

붙이려고 했다.

“아이 이언 아 하엉이 이허허……”

“입에 든 것만이라도 삼키고 말해 주겠나?”

“압.”

세올이 입에 든 것을 급히 삼켰다. 덜 씹은 옥수수가 재촉에 못 이겨 성마르게 목구멍을 통과했다. 개중 반항적인 낱알들이 빠져나와 기도를 푹 찔렀다.

컥. 푸악. 쿨럭쿨럭쿨럭.

샤레가 거하게 들린 세올이 씹다 만 옥수수를 사방으로 튕겼다.

“쯧.”

카레네가 고개를 젓곤 자리를 뜨고 말았다.

꽤 오랜 기침 후에 진정된 세올이 볼멘소리를 냈다.

“아니, 이 세올이 무슨 잘못을 했다고. 오히려 감사를 해도 모자랄 판에.”

세올은 억울했다.

요즘 계속해서 새의 몸을 타고 정찰을 다닌 탓에 후유증이 가시질 않았다. 뭔가 날짐승 입맛에 맞는 것이 계속 당기는데 그렇다고 생밀을 씹을 수도 없고, 벌레가 보일 때마다 인간의 존엄을 걸고 참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보다못한 시엔이 말린 옥수수를 몇 포대 구해 쌓아두고 삶아 입에 물려두었다.

“선배님, 안 그런가요?”

“맞아. 너무하지. 알았으니까 마저 먹고.”

시엔이 키득거리며 세올을 다독였다.

유피스 영지 공략에는 세올의 공로가 컸다.

유피스의 영주성을 함락시키고 유피스 백작부인과 둘째 공자를 포로로 잡았다. 이후 발발반덴에서처럼 무기는 불에 집어넣고 군량은 뿌릴 생각이었다.

그러나 세올이 날아 살펴보니 적의 움직임이 없었다. 얄렘방에서 저들끼리 의견이 갈렸기 때문이라 생각한 시엔이 조급함을 버렸다.

백작부인과 둘째 아들이 손아귀에 있으니 유피스의 도시 두 개가 알아서 성문을 열었다.

그렇게 털어온 군량으로 짐마차의 긴 행렬이 만들어졌다. 세 개 도시 분량이라 여간 많은 것이 아니었다.

대형 짐수레를 이리도 많이 몰고 다니니, 부대의 이동 속도는 딱 급하지 않게 걷는 수준이었다.

그래서 세올은 계속 날아 주변을 살펴야 했다. 지금 이 꼴이 바로 그 결과였다.

* * *

시엔의 예상대로, 이튿날 이른 점심쯤에 이르러 안통 백작이 직접 모습을 드러냈다.

파발이 가서 소식을 전하고, 그 후에 백작이 출발하여 도착한 시간이었다. 파발이 들자마자 바로 출발하고도 상당히 말을 재촉했다는 뜻이었다.

“어떻게 알았어?”

“응? 뭐가?”

“안통 백작 말야. 서두를 거라고.”

“그럼 카레네는? 카레네가 안통 백작님 입장이었다면 어떻게 했으려고?”

“내가 백작 입장이라고 치면, 솔직히 직접 올 필요가 없어. 중립을 선언한 상황이니까.”

“만약 직접 온다 치면?”

“급한 건 내가 아니고, 오히려 시간을 끌면 상대가 조급해할 테니 천천히 준비해야겠지. 통행료 협상에서 우위에 설 수도 있잖아. 혹시나 궁지에 몰린 상대가 어떤 수법을 쓸지 모르니 기사단도 소집하고.”

“흠. 카레네가 영지를 물려받아도 문제는 없었겠어.”

“그게 무슨 뜻이야? 백작은 직접 왔잖아? 그것도 이렇게 서둘러서.”

“백작님이시니까. 카레네가 영지를 물려받았으면 후작위를 받았을 테고.”

후작쯤 되는 대귀족이라면 굳이 상대에게 휘말릴 이유가 없었다. 중립을 선언했다면, 그저 우직하게 자리만 지키면 되는 일이었다. 말미에 상황을 보아 이득이 되는 쪽에 손을 뻗으면 될 테니까.

카레네의 사고방식은 강자의 것이었다.

하지만 안통 백작에게는 아니었다.

말이 중립이다 뿐이지, 좋게 말해서 그랬다. 나쁘게 말하자면 양쪽에 끼인 판이었다.

실제로 안통 백작에게 있어선 마른하늘에 날벼락 같은 소식이었다.

티란디스의 대공자가 통행료 교섭을 요청했다. 1왕자파의 영웅이었다. 그것도 남쪽이 아닌 북쪽에서. 왕당파인 유피스 백작령 방면에서 통행을 요청했다.

1왕자파가 뒤에 추격대를 달고 있을 확률을 무시할 수 없다. 그게 아니더라도 왕당파의 추격이 편성될 것이 분명한데, 그렇다면 내전중인 양측 모두 시간 싸움이었다.

자신이 늦장을 부리고 나면, 어떤 결과가 나오든 그 책임은 어디로 향할 것인가.

직접 가서 정중하게 거절하는 수밖에.

백작 본인이 직접 나서서 중립을 핑계로 거절하면 티란디스의 대공자라도 명분이 없다.

거절 후에도 강짜를 놓으며 억지를 부리면 대공자 한 사람만 통과시키는 것으로 내전 중인 양측 모두에게 괜찮은 중립의 선을 지켰다고 말할 수 있었다.

안통 백작이 생각하기에 방법은 그뿐이었다.

티란디스의 대공자가 내건 통행료를 듣기 전까지는 그랬다.

“곡식을 전부 양도하겠단 말이오?”

“예. 백작님. 안 그래도 곳간 사정이 좋지 않으실 텐데, 이 정도면 충분히 통행료로 충분하지 않을까요?”

“흠.”

북서부 산악 지대는 왕국의 광산으로 영지의 규모에 비해 상당히 부유했다. 대신 험악한 지형 특성상 식량 자급이 불가능했다.

평시야 부유한 재산으로 식량을 들여오나, 요즘 곡물값이 천정부지로 치솟고 심지어 그렇게 오른 가격으로도 들여오기가 쉽지 않았다.

이 상황에서 대형 수레 수십대 분량의 곡식을 그저 통행료로 넘기겠다니 고민이 될 수밖에.

그렇다고 홀랑 받아 챙기자니 왕당파에서 가할 비난을 감수하기도 쉽지 않다.

왕당파 뿐이랴.

북서부 귀족 연합이 함께 중립을 지키기로 했는데 저 혼자 곡식을 먹겠다며 엇나가는 셈이었다.

좀처럼 대답을 하지 못하는 안통 백작을 보며, 시엔이 쇄기를 박았다.

“아. 이 말씀 안 드렸구나. 저 곡식들이 라남, 델아스, 텔바베트의 모든 군량이에요.”

각각 유피스의 가장 큰 세 도시의 이름이었다.

“대공자의 말대로라면 세 도시 모두 함락시켰단 말이오?”

“유피스 백작부인과 둘째 공자도 모셔왔구요.”

“호오.”

유피스 백작령의 군량을 전부 쓸어온 데에다, 1왕자파에 볼모까지 잡혔다는 뜻이었다. 이러면 이야기가 달랐다.

유피스가 더는 걱정할 만한 적이 아니었다. 안통 백작의 힘이 더 강했다. 강자의 사고와 약자의 사고는 완전히 달랐다.

“전리품은 승리자의 정당한 권리이니, 저 군량은 대공자의 소유로군? 나아가 델피르 전하의 군량이기도 하고.”

“당연한 말씀을요.”

“병력 사백을 통과시키는 대가로 저만한 군량을 받아낸다면, 중립을 지키는 데에 있어서 문제가 될 것도 없겠군. 아니, 오히려 델피르 전하께서 노하실지도 모르겠네만.”

“그 부분은 제가 잘 말씀드리지요.”

“훌륭하군.”

안통 백작이 만족스럽게 웃었다.

겨우 병력 사백의 통행료로 막대한 군량을 거둬들였으니 오히려 왕당파에게 이득을 가져다주었다 할 거래였다.

그러니 중립 위반이라 항의를 해도 1왕자파에서 할 일이지, 왕당파에서 시비를 걸 일은 아니다.

안통 백작이 하는 말이었다.

그러나 실상 그 군량이 전부 유피스에게서 빼앗은 것들이었다. 그러니 안통 백작이 주장하는 것은 순 억지 말장난이었다.

그런데 사람이 말장난으로 싸우면, 결국 힘 쎈 놈이 이기는 법이었다.

유피스 백작이 안통 백작을 견제할 수 없게 된 지금은, 결국 왕당파에서도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중립을 지켰다고 하니까.

그렇다고 군대를 파견하여 압박하기엔 상대는 중립이었다. 언제든지 편을 바꿀 수 있다는 뜻이었다. 괜히 수작을 부리다 1왕자파에 붙어버리면 저네만 더욱 손해를 본다.

“아. 그러고 보니 살베지 백작님께도 안부 전해주세요. 지금 북서부 귀족 연합의 맹주님이시던가요?”

“크흠. 그런 건 아니고. 언제까지나 동등한 입장에서 뭉친 것이니.”

시엔이 씩 웃었다.

동등한 입장에서 뭉쳤다라. 사실, 안통 백작의 결정은 북서부 귀족 연합의 타 귀족들에게 있어선 배신이나 마찬가지였다.

다 같이 중립을 지키자 해놓고는, 저 혼자 막대한 군량을 먹겠다고 어긴 셈이었으니까. 명분이 있으니 대놓고 뭐라고 하긴 힘들어 더 짜증이 날 테고.

그리고 그 결과로는, 북서부 귀족 연합 전체가 싸잡아서 중립 의무를 방기하였으니 소리가 나올 것이 뻔했다.

이득은 혼자 챙기고, 위험은 다 같이 나눠 가지는 상황에서 동등하니 어쩌니 해 봐야.

“뭐. 지금 연합의 대표이신 건 맞잖아요? 물론, 동등한 입장이시라면 다음 대표는 다른 분이 맡으시겠네요?”

“대공자와는 참으로 말이 잘 통하는군.”

이참에 1왕자파로 돌아서는 것이 어떠냐. 북서부 귀족 연합을 설득해 전향시킬 수 있다면, 내전이 끝나고 나서도 목에 힘 좀 주고 한몫 챙길 수 있으리라. 그럼 그때 연합의 맹주가 누가 되겠느냐고.

안통 백작이 긍정적인 답변을 내밀었다.

시엔이 한 발 더 나갔다.

“좋은 결과를 기다리지요. 이번에 복귀하면 얄렘방 다시 탈환할 계획이니, 그 이후로는 꽤 바빠지겠네요.”

얄렘방이 함락되고 나면 상부 전선의 세가 확 기울어졌다. 중립을 포기하고 이쪽에 붙으려면 가장 좋은 기회가 바로 지금이라면서.

* * *

군량을 넘기고 나니 다시 몸이 가벼워졌다. 시엔과 기사들이 안통 영지를 통해 산을 가로질러 상부 전선의 진지로 복귀했다.

진지를 떠난 지 스물 하고 닷새째 되는 날이었다.

시엔이 사령부 막사로 들어서자, 익숙한 얼굴이 반겨주었다.

“동부 국경에 계시는 거 아니었습니까?”

“말뿐이지 사실 유배가 아니었겠나. 왕국 꼴이 이러하니 더 손을 놓고 있기도 그렇더만. 내 듣기로 자네 활약이 어마어마하담서?”

“검위공께서 오셨으니 그 활약도 끝날 때가 되었네요. 이름 좀 날려볼까 했더니, 기어코 방해를 하러 오셔가지고는.”

“허허. 그래 나도 반갑다네.”

“잘 오셨어요. 검위공.”

그제야 노인과 청년이 서로를 끌어안았다.

< 35. 서로 네 것이다 양보하니 [1]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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