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작가의 망령재림-166화 (163/268)

< 34. 알고 맞으나 모르고 맞으나 [4] >

교단의 제일가는 성녀이자, 가난한 화가들의 구원자. 뷔아 샤인 세러하드.

전자는 명백한 사실이었다. 가장 더럽고 위험한 곳에 스스럼없이 찾아가 위로하니 그 인기가 성녀 중 제일이었다.

후자는 조금 짓궂은 농담이었다. 가난한 화가들이 성녀의 그림을 팔아 먹고사는 경우가 워낙에 흔해야지.

그 성녀는 네무 지방에 역병이 들었다 하여 찾아온 참이었다.

그토록 찾아 헤매던 역병의 둥지가 다름 아닌 도축장에 있었더란다. 알고 보니 오랜 풍습이다 하여 아무 짐승이나 잡아 고기를 내던 곳이었다.

그렇게 못 사는 마을도 아닌데, 대체 박쥐는 왜 처먹고들 지랄이야? 먹으려면 푹 고아 먹던가 왜 반만 삶아 홀라당 처먹냐구.

마음같아서는 욕을 한 다발 쏟아주고 싶었으나, 교단의 얼굴이 그리할 수도 없는 노릇.

싱글벙글 웃으며 여신께서 직접 내리신 가축이 괜히 있느냐, 여신께서 허하신 고기만이 피와 살이 되고 나머지는 그렇지 아니하였다.

특별 설교 코스를 아침부터 점심 전까지 내내 쏟아부었다. 그러니까 아무거나 주워 먹지 좀 마세요. 알겠죠?

토씨 하나 안 틀리고 똑같은 설교를 나흘 동안 퍼부은 참이었다. 교단의 성녀가 특별히 여는 설법에 빠질 수도, 감히 꾸벅 졸 수도 없던 성민들이 필사적으로 듣는 척을 하던 모습이 눈에 선했다.

물론 뷔아에게도 정신적으로 힘든 시간이었다. 설교는 능동적 행위라도 고역이었다.

나는 혼자 힘들고 상대방은 여럿이 힘들면 어쨌거나 이긴 거라는 논리로 승리를 쟁취하긴 하였으나, 상처뿐인 승리라 하겠다.

지친 뷔아가 침소에 들어오자마자 침대에 몸을 던졌다. 힘을 주어 몸을 쭉 펴니 간질이라도 걸린 마냥 팔과 다리를 달달 떨었다.

“으아. 되다 되. 으아아아아아아.”

“아니, 무슨 노인네같은 말씀이세요?”

“머가아아아아아.”

“되다라는 말 되게 오랜만에 들어보네.”

수히 알렌티. 바늘에 실이 따르듯 성녀 뒤에 덤으로 붙은 사제였다. 시녀와 업무가 그리 다르지 않지만, 직급상으로는 주교급이었다.

남들이 볼 때는 꿀보직이다 할지 몰라도, 험한 성녀행 뒤에 따르는 것 자체가 어지간한 주교급 둘의 업무 이상이라 억울한 그녀였다.

“발론소 주교님이 맨날 그러시자나. 하이고 되다, 하이고 되. 왜 그러시나 했더니 힘드니까 자동으로 나오네. 결국, 노인네 같은 소리는 맞는 거네.”

“그 말, 발론소 주교님께 곧장 전해드리면 될까?”

“그래라, 그래. 발론소 주교님이 그럼 노인네지 어린애야? 흐아아아아. 힘들다. 음. 그런데.”

뷔아가 수히의 눈치를 보았다.

수히가 키득키득 웃음을 터뜨렸다.

“왜. 뭐가 궁금한데?”

“……안 궁금해.”

“궁금한 눈친데?”

“아니거든? 궁금하긴 뭐가 궁금하다고.”

“흐음. 어디 보자. 페벨룬 왕국 근황이.”

“아. 씨. 됐거든?”

어쩌다 들은 이야기가 화근이었다.

공성 파괴자? 거 진짜 거창한 별명이네.

그런데 그다음에 명예 성자가 튀어나오면 이야기가 좀 괴상해진다. 교단에 몸담은 입장에서 파괴자와 성자가 한 문장에 있으면 신경을 안 쓸래도 안 쓸 수가 없다.

“시엔 공자님께서 마법사라고 하시네요. 단신으로 성문 파괴에 능하니 별명이 공성 파괴자라고.”

“아, 씨. 그 인간은 자기가 성자라는 걸 생각은 하고 있대?”

“용을 부린다고도 하고요.”

“용? 그 용? 이야기에 나오는?”

“목격자가 한둘이 아니래요. 애초에 용을 인질로 마탑을 손가락으로 부리는 중이시라네요.”

“아니, 대체 뭘 하고 다니는데?”

뷔아가 발칵 성을 냈다.

수히가 씁쓸히 웃었다. 더 들은 바가 있으나 성녀의 앞에서 담을 이야기는 아니었다.

결국, 전쟁이 아니던가.

“공자님은 결국 세속에 계신 분이니까.”

“상황이 심각해?”

“내전이 한참 격화되고 있는 와중이라고. 이미 죽은 자가 일만에 가깝다 하니.”

대륙 어디에나 사제는 있고, 전장에도 마찬가지였다.

종군 사제들. 세속과 교단에 반쯤 걸친 이들은, 제 고향 제 왕국이 위기에 닥치면 분연히 떨치고 일어섰다. 제 지켜야 할 것을 지키겠다는데 교단이 거기까지 막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그들이 완전히 세속에 기운 것은 아니었다. 발끝이나마 교단의 선을 밟고 아슬아슬하게 선 이들. 상대를 해하지 않으며 신성으로 사람을 낫게 하는 본연에 충실하기로.

그리하여 교단의 눈은 대륙에서 가장 멀리 보고, 또 가까이 지켜보았다.

뷔아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사람을 살린다 제아무리 뛰어다녀도, 결국 몇 달 남짓한 전쟁에 죽은 이가 일만이란다.

“전쟁을 멈출 수는 없어?”

“내정 간섭이야. 뷔아도 알잖아?”

“아니, 내가 왜 이렇게 고생을 자처하는데. 사제단은? 성기사단의 형제들은? 전쟁 한 번에 일만이면, 이런 오지까지 와서 하는 고생이 대체 다 뭐야?”

“전쟁하고는 다를 거야. 적어도 병마에 휩쓸려 원치 않게 죽어가는 이들을 구하는 거니까.”

“전쟁은 누구나 원해서 하고?”

수히가 입을 다물었다.

모든 이가 죽음을 각오하고 전장에 서지는 않으리라. 모든 이가 무어야. 개중 제 죽음마저 바치겠다 할 이가 과연 얼마나 있을까.

“……가자.”

성녀가 돌연 말했다.

“뷔아.”

“가자고. 가서 다리몽댕이를 부러뜨리든 어쩌든 전쟁을 멈추자고 해봐야 할 것 아냐.”

“성황께서.”

“할 수 있는 만큼은 해 봐야지. 내정 간섭이니 뭐지 나는 신경 안 쓸래. 그런 거 몰라.”

“하아.”

수히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가면 무얼 할 것인가. 교단이 한쪽의 편을 들 수는 없다. 교단이 대륙 전체에 사람을 파견해 모두가 기꺼이 반기는 이유가 무엇이던가.

그래도 마음 한구석에서 성녀가 움직여주길 바란 것도 있었다.

내정 간섭이니 놔두어야 한다고 정해지긴 했어도, 사람이 그렇게 죽어 나가는 참극에 눈을 돌리고 못 본 척할 수는 없지 않은가.

결과가 나오지 않더라도 무어라도 해 볼 수 있다면, 혹시나 어쩌면 하는 작은 가능성이라도 걸어볼 수 있다면.

* * *

시엔이 전령을 미리 제거했으므로, 발발반덴이 함락되고서야 그 소식이 얄렘방에 전해졌다.

“급보입니다! 발발발덴이 함락되었습니다!”

“뭐, 뭣이라!”

갈푼 백작이 화들짝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시엔의 특공대를 놓친 게 겨우 나흘 전이었다. 전령이 오는 시간을 제하면 겨우 이틀, 아니면 사흘만에 도시를 함락시켰다는 뜻이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나? 발발반덴은, 아니, 내 아들, 한센트는 어떻게 되었지?”

“한센트 공자께서 자진하여 포로로 나서 영민의 피해를 줄이셨다 합니다.”

“허. 다행이야. 다행이다.”

갈푼 백작이 힘이 풀려 자리에 주저앉았다.

아들이라곤 하나뿐이었으나, 어려서부터 영특하여 자질이 뛰어났다. 다른 귀족들이 후계 문제로 속을 썩일 때, 자신은 자식이 하나뿐이라도 뛰어난 아이가 있으니 더 잘되었다 여겼다.

그만큼 중한 아들이었다.

포로로 잡혔다곤 하나 무사하다 하니 일단 가장 큰 걱정은 덜은 셈이었다.

“다행이라니, 그게 할 말입니까?”

“겨우 사백 되는 군대에 제일 도시가 함락되었다는 소리건만. 쯧쯧.”

“갈푼 령이 뚫렸으면 우리도. 젠장, 그걸 막지 못해 내주었단 말이오!”

곱지 않은 말들이 나왔다. 유피스, 그만드, 제우사이란, 스나덴. 갈푼 영지에 맞닿은 귀족들이었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가질 불만이었다. 특공대를 잡지 못했으면, 당장 제 영지에 전화가 미칠 수 있다는 뜻이 아니던가.

그러나 갈푼 백작의 처지에서는 불난 집에 입김을 후후 부는 꼴이요, 거기에 고구마까지 던져 넣는 일이었다. 영주성이 털리고 아들이 볼모로 잡혔는데 여기서 가장 속이 터지는 것이 누구랴.

갈푼 백작의 훤한 이마에 핏줄이 돋았다.

“지금 뭐라고 하셨소들?”

“흠흠.”

귀족들이 시선을 피했다.

말하고 나서도 아차 싶었다. 그래도 같은 왕당파 귀족들끼리 할 말은 아니었다.

그러자 킬지언이 앞으로 나섰다.

“빌어먹을 티란디스의 애송이가 진영을 떠났다는 뜻이오. 그가 없는 적진은 취약할 것, 총공격을 해야 할 때입니다. 한 번에 몰아붙여 결판을 내야 합니다!”

왕당파가 가진 것이 압도적 수적 우위였다. 애초에 비슷한 크기의 땅덩어리라도, 평야 지대에 자리를 잡은 북부 귀족의 영민이 훨씬 많아 군대 자체의 숫자가 달랐다.

“지금 그게 문제입니까? 발발반덴이 넘어갔다지 않습니까? 다음은 어디입니까? 제우사이란? 스나덴? 그 위로 불례그와 암물안구느 영지에 이르면 다음이 바로 흐레이그 아닙니까? 적이 영지를 휘젓는데 놔두고 진격하잔 소리 아닙니까!”

“적은 고작 몇백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 몇백이 도시를 함락시켰잖소! 거기 전령, 발발반덴의, 그래, 발발반덴에서 적의 손실을 얼마나 입혔다고 하던가?”

“제가 듣기로는 적 기사 둘에 종자 다섯이……”

“거 보시오! 이래도 고작 몇 백이라 할 셈입니까?”

그러자 귀족들이 저마다 소리를 높였다. 영지가 가까운 귀족들은 군을 돌려 특공대를 잡아내자 하고, 먼 귀족들은 당장 총공격에 나서자 대립각을 세웠다.

사령부라기보단 버글버글 난리통인 시장바닥에 가까운 모양새였다.

“젠장……”

킬지언이 머리를 쥐어뜯었다.

그간의 실책으로 장악력이 떨어졌다. 귀족들이 저마다 목소리를 높이면, 연합군은 움직일 수 없다.

이제는 오도 가도 못하게 얄렘방에 갇힌 꼴이었으니까.

* * *

시엔이 기사들을 이끌고 갈푼 백작령 제일 도시 발발반덴을 함락해 무력화시켰다. 몇 가지 조치가 끝나자마자, 바로 북서로 달려 나갔다.

이미 적의 도시를 함락했으니 어떻게든 소식이 갈 터였다. 그래서 눈치 볼 필요 없이 내달리니 갈푼-유피스 백작령 경계를 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유피스 백작령은 서남쪽으로 왕국 북서부 산악지대를 마주하고, 동남쪽으로 유피스 백작령과 맞닿았다.

북서부 산악 지대는 광업을 중심으로 연합한 네 귀족이 통치했다. 이전에 시엔과도 엮인 적이 있었다.

광산 분쟁에서 시작해 무력시위로 이어진 충돌이었다. 흐레이그가 바람을 넣고 마법사를 보내 지원했다.

하필이면 과거 흑마법사의 유체를 들고 분수에 맞지 않는 대마법을 부리려고 했던 통에 오히려 역공을 맞았다. 그때 백파이어로 백치가 된 마법사의 신체를 세올이 홀라당 삼켜 지금도 유용하게 썼다.

북서부 귀족들이 느끼기에는 흐레이그 공작이 충돌을 부추기곤 실력이 형편없는 마법사를 보내 기만했다고 여겼다.

그리고 티란디스와는 직접 충돌이 있었던 셈이라, 어느 편을 들기에도 마뜩찮은 꼴이었다.

그래서 간단히 그냥 중립을 지켰다. 내전에서 어느 쪽이 이기건 상관없는 일이라고.

덕분에 유피스 백작령은 중립과 아군으로 둘러싸인 영지였다. 그래서 더욱이 방비가 전혀 되지 않았다.

시엔이 기사들을 끌고 들이닥치자 허둥지둥 방어에 나섰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차라리 갈푼 백작령의 신세가 나았다.

갈푼 자제가 영특하여 빠르게 항복하니 큰 피해가 없었으나, 유피스의 둘째 공자는 항전하다 영주성의 절반이 내려앉았다.

“어떻게 할까? 발발반덴처럼 군량은 베풀고 무기는 태우면 되겠지?”

“아니, 잠깐만.”

세올이 멀리까지 정찰을 마친 마 왕당파의 군대는 움직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대충 어떤 상황인지 눈에 훤히 보였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귀족들끼리 서로 얽혀 멈춰있을 뿐이겠지.

그러니 이번에는 군량을 좀 챙겨도 될 것 같은데. 시엔이 생각했다.

다만 군량을 챙기면 수레를 끌어야 하니, 군이 움직이는 속도는 반의반도 안 나온다. 게다가 지키며 싸우는 전투라 더욱 취약해지니 안전도 생각해야겠고.

시엔의 궁리가 깊어졌다.

사실 발발반덴에서 군량을 남의 영민에게 거저 뿌린 것이 시간이 없어 한 일이었다.

왕당파가 군을 몽땅 이끌고 추격하면 시엔이라도 당해낼 수 없으니까. 정확히 말하자면, 시엔이 아니라 따르는 기사들의 문제로.

그렇다고 시엔이 나서서 적을 주살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시엔이라고 모르겠는가.

영웅과 괴물은 한 끗 차이였다.

과거, 잃을 것이 남지 않은 흑마법사는 기꺼이 괴물이 되었다. 괴물의 그림자가 대륙을 뒤덮어 세상 모든 이가 두려워했다. 그렇기에 역사에서 통째로 도려내진 그런 괴물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섬겨야 할 나의 왕이, 그리고 보살펴야 할 내 영민이 있었다.

게다가 사람의 전쟁은 사람의 전쟁으로.

창칼을 손에 쥐고 직접 적의 피를 취하며, 또한 제 피를 흘리고 나서야 비로소 전쟁이 제 것이 되곤 했다.

그 후의 승리야말로 바로 온전한 자신의 것이니 긍지를 얻고 상실을 이겨낼 것이다.

그러니 흑마법사가 다시 등장하지는 않으리라. 시엔이 다시금 다짐했다.

그러나 시엔도 모르고 있었다.

갈수록 제가 부리는 것들이 조금씩 상식을 벗어나고 있음을. 손발처럼 자유롭고 편하여 쓰는 것들이 점점 강력한 수단으로 변모하고 있었다.

리치와 악령을 자유로이 써먹고 용의 시체를 움직이며 단신으로 성문을 깼다. 사실 이것이 군대의 승리인지 시엔 개인의 승리인지 모호한 경계에 서 있었다.

그러니 언제고 괴물이 나올 준비가 되었다.

내전에서 패배한다면. 혹은 다른 개입이 있어 큰 참상이 일어난다면 그 때는 어찌하나.

시엔이 제 승리를 의심치 아니하니 그저 생각만으로 사람으로 남을 것이라 믿을 뿐이지만.

< 34. 알고 맞으나 모르고 맞으나 [4]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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