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4. 알고 맞으나 모르고 맞으나 [3] >
밤새 공성 준비가 끝났다. 성벽 위로 끊는 기름 솥이 배치되고, 장창수와 궁병이 자리를 잡았다.
전선도 아닌 후방 도시에서 하룻밤 새에 준비한 것치고는 상당히 훌륭한 방어 태세였다.
마침내 어슴푸레 날이 밝아오기 시작했다. 어둠 속에 숨어 있던 반역도들의 진영이 흐릿하게 그 모습을 드러냈다.
멀지 않은 곳에 정연히 선 기병들이었다.
“적은 한 줌밖에 안 된다! 금방 혼쭐이 나 물러날 것이다!”
수비대장이 병사들을 독려했다.
사기가 나쁘지 않았다. 적의 숫자가 한눈에 보일 정도로 적었고, 따로 공성 장비가 보이지 않는 것이 그 이유였다.
한센트 갈푼 역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내 짐작이 맞았던 모양이네요. 소수 기병을 모아 몰래 영지에 침투했으니 정보가 닿지 않았을 뿐이군요. 심리전을 벌였을 거라 하지 않았습니까?”
“훌륭하십니다.”
“그러나 상당히 훌륭한 전략이 아닙니까? 저들이 성을 공격하겠다고 미리 알렸으니 방비할 수 있었지만, 혹여 그대로 도시 안으로 침투했다간 막을 수 없었을 겁니다.”
한센트가 감탄했다.
하지 않은 것과 못 하는 것의 차이는 컸다. 반역도의 소수 정예가 후방 영지에 침투해 영주성을 압박했다는 소식이 전해진다면?
귀족들에게는 내전도 좋지만 일단 내 영지가 우선이었다. 전선의 병력을 어느 정도 돌려보낼 수밖에는 없을 터였다.
“반역도에 상당히 전략에 능한 자가 있군요.”
“그렇다고 해서 바뀔 것은 없겠습니다만.”
비슷한 땅덩이라도 서부보다는 비옥한 평야인 북부의 영민이 배는 많았다. 군대의 숫자 역시 그러하니 내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반역도들에게 불리해졌다.
적들 역시 그걸 알기에 이런저런 수작을 부리는 것일 테고.
“적들이 공성을 준비하지 않았습니다. 이제 물러갈 터이니 이쯤 성으로 돌아가시는 편이 좋겠습니다.”
“음. 한데 내 기묘한 소문을 들었는데.”
“소문 말씀이십니까?”
“공성 파괴자 시엔 티란디스. 그자가 대단한 마법을 부려 단신으로 성문을 뚫는다고. 경은 못 들었어요?”
“전쟁 중에 그런 소문 역시 전략의 하나입니다. 제가 듣기로 이전에는 티란디스의 대공자가 검위공께 검술을 지도받아 경지에 이르렀다든가 했습니다만. 이전 소문과는 또 다른 이야기가 아닙니까?”
그때였다.
“어어어어!”
기이한 것을 본 마냥 여기저기서 고함이 터지는 바람에, 한센트의 고개가 휙 돌아갔다.
저 너머에서 검은 무언가가 날아들었다. 성문에 정확히 처박히는 것 같더니, 뒤이어 휘이이잉 드센 바람 소리만 요란했다.
“마법…….”
한센트가 인상을 찌푸렸다.
터지거나 폭발하지도 않고 굉음이 뒤따르지도 않았다. 마법에 대해 아는 것이 많지 않긴 해도, 전혀 들어본 적이 없는 형태였다.
그리고 한 발이 더 날아와 바람 소리가 높아지고 나니, ‘기이이이익!’ 거대한 무언가가 뒤틀리는 특유의…… ‘쿵’!
한센트가 성벽 밖으로 몸을 내밀었다.
땅에 쓰러진 거대한 것이 눈에 들어왔다. 거목을 엮은 형태의 무언가. 성문이 왜 바닥에 누워있지?
한센트의 사고가 잠깐 정지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남은 한 짝의 성문이 지면에 누웠다.
그러자 다음부터는 성벽 위를 향해 검은 것이 쏘아져 날아왔다.
거대한 검은 창이 성벽 위 허공에 닿아 흔적 없이 녹아 사라졌다. 그리고 나니 거친 풍압이 한 점으로 일어나기 시작했다.
제아무리 거친 폭풍도 이렇게 거센 바람을 일으키지는 못하리라.
병사들이 버티지 못해 비틀거리다 쓰러져 중심을 잃어버리고 나면, 질질 끌려 들어가 한곳에 차곡차곡 쌓였다.
그리고 순간 바람이 사그라들었다. 그 중심에 쌓여있던 병력은 온데간데없고, 반구형으로 움푹 팬 성벽만이 남았을 뿐이었다.
다만, 어설프게 그 경계에 걸쳐있던 이들이 참혹한 꼴을 맞았다. 덩그러니 놓인 하반신 하나, 뒹구는 팔목이 몇 개……
기사가 더는 참을 수 없어 바락 외쳤다.
“도련님, 실례하겠습니다!”
기사가 한센트를 번쩍 들어 옆구리에 끼웠다. 저러한 마법은 들어본 적조차 없었다.
성문에 가까이 붙은 성벽 위에 일정 주기로 계속해서 영원한 밤의 창날이 연신 생명을 지웠다.
병사들이 적의 마법사가 성문에서 가까운 곳만 노림을 알아챘다. 저마다 쥔 것을 놓고 아우성치며 성문에서 먼 곳으로 도망치기 바빴다.
그리고 나서야 기사단이 돌진을 개시했다.
두꺼운 중갑도, 전마의 마갑도 없이 랜스도 아닌 장검을 앞세운 무모한 돌격이었다.
그러나 사기는 하늘을 찔렀다.
저마다 가문과 기사단의 이름을 목놓아 부르니 저 앞에 있는 것이 곳 영광이라.
성문 위의 적병들이 서로 밀치고 치이며 난리라 날아오는 화살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나마도 거리가 멀어 닿지 않고, 간혹 닿아도 기사들이 검을 휘둘러 쳐냈다.
성문 뒤로 방패로 벽을 친 적병이 보였다. 그들의 딱딱하게 굳은 얼굴, 크게 움직이는 목울대, 떨리는 눈동자가 보였다.
마침내 말이 가슴으로 적의 방패를 들이받았다. 와르르 밀려나가는 적병들. 그 사이로 흥분한 군마가 날뛰고, 그 위에선 기사들이 칼을 휘둘렀다.
적군이 순식간에 와해 되었다. 겁먹은 이가 뒷걸음질 치고 등을 돌리면 누군가와 부딪치고 엉켰다. 대로에 밀집한 군대가 엉키기 시작하니 개중 용맹한 자도 무기를 휘두를 공간이 없었다. 그저 사방이 고함뿐이었다.
뜨거운 것이 끼쳐 얼굴을 훔치면 시뻘건 선혈이 끈적하게 묻어나오고, 간혹 툭툭 떨어지는 것이 머리며 손 따위가 나머지를 잃은 것들이었다.
“창을 들어! 이 머저리들! 맞서 싸우억……!”
병사들 사이 말을 탄 장교가 말을 끝맺지 못했다. 덜덜 떨며 제 가슴께를 내려다보니, 땅에서부터 솟은 검은 가시가 제 몸뚱이로 이어진 것을 보았다.
“으…… 어…….”
폐가 꿰여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문득 검은 가시가 스르륵 녹아 사라지니 장교가 말에서 떨어져 군홧발에 밟히며 숨을 거뒀다.
쉐도우 스토커.
시엔이 가진 악령으로 그림자에 숨어 산 자의 생명을 노리는 녀석이었다. 적의 지휘자들을 은밀히 노려 멱을 따니 이 난리통에 눈치채는 이가 누가 있을까.
“빨리 닫아! 닫으라고!”
한편, 후퇴한 병사들이 영주성 안에서 방어를 준비했다.
도시의 성벽만큼 견고하지는 않으나, 하나의 구조물로 만들어진 성채였다. 외벽과 두 개의 내벽, 본채까지 이어지는 미로 같은 내부 통로, 그리고 아군이 그 위에서 공격을 가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영주성이라면 성문이 날아가더라도, 적이 함부로 진입할 수 없으리라.
그러나 한센트가 이미 성문이 무너지는 것을 보았다.
성문은 단순히 적을 막아선 벽이 전부가 아니었다. 단단히 서서 자신을 지켜줄 것이라는 믿음이자, 방어에 나선 이들의 정신이었다.
어떤 열세에 있더라도 성문을 사수하는 데에 있어 병력이 필사적인 이유가 무엇이던가. 성문이 뚫리고 나면 병사가 무너져 등을 돌리니 얼마 지나지 않아 함락되고 마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팔퓌유 자작이 성문을 잃자 순순히 항복했다. 얄렘방의 왕당파 군대도 시엔의 무력시위에 급히 성문부터 보수하지 않았던가.
한센트가 망루 위에서 영주성 앞에 진을 친 적들을 내려다보았다.
저마다 피칠갑을 한 기사들. 저 피가 바로 내 군대의, 내 영민의 것들이구나……
개중 한 명이 앞으로 나와 목소리를 높였다.
마법으로 증폭한 여인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려퍼졌다.
“반역도들은 즉시 무기를 버리고 항복하라! 아니면 성을 통째로 무너뜨려 버리겠다!”
성을 무너뜨리겠다니. 무시무시한 협박이었다. 다른 때에 들었으면 그래 해보아라, 하고 비웃었겠지만, 이미 성문이 그렇게 나가는 것을 본 이후였다.
여인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이미 루우트다렌이 그렇게 무너졌다. 그 불침의 요새조차 무너뜨리는 마법 앞에서 작은 영주성이 얼마 버티지 못할 것이다!”
루우트다렌 요새. 그 강력한 군사 요새를 떠올린 한센트가 눈을 질끈 감았다.
“……백기를 걸어야겠습니다.”
“도련님!”
“내가 틀렸어요. 심리전 따위가 아니라, 정말로 공격해 이길 것으로 생각하고 보낸 겁니다. 막을 수 있다면 막아보라 선언한 것이었군요.”
“아직 장병들이 건재합니다. 부디 마음을 강하게 먹으셔야 합니다.”
“경, 그게 아닙니다. 항복하여 피해를 줄이는 것이 낫다고 판단했을 뿐이니.”
“영주님께서 진노하실 겁니다!”
“아버지 귀에 들어가기가 장렬히 싸우다 전사했다는 소식이 낫겠습니까, 아니면 항복하여 살아있다는 소식이 낫겠습니까?”
한센트가 말을 이었다.
“어차피 항복하여 잃을 것이 별로 없습니다. 적의 숫자를 보세요. 기마로 편성하여 급히 달려왔으니, 많은 수의 군대가 들이닥치면 저들 역시 곤란할 테지요. 우리가 내어준들 어떻게 가져가겠습니까?”
“영주성에서 며칠만 버티면 영주님께서 군대를 이끌고 돌아오실 겁니다.”
“그 며칠조차 버티지 못할 겁니다.”
“하지만 구원 요청을 보냈으니……
“저들도 당연히 그리했으리라 알고 있을 겁니다. 그러니 저들에게도 시간이 별로 없어 금방 떠나야 할 텐데. 기껏해야 제가 볼모로 잡히는 선에서 무얼 더 할 수 있겠습니까.”
기사가 입을 다물었다.
저 자신을 볼모로 내어주고 영민의 안전을 보장받겠다는 소리였다.
그 앞에서 더는 할 말이 있을 리가 있을까. 기사가 고개를 떨궜다.
그렇게 영주성 성문 위로 흰 깃발이 올랐다.
1왕자파의 기사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 * *
“한센트 갈푼입니다. 소문으로 듣던 공성 파괴자를 직접 겪어보니 상상 이상이군요.”
“현명한 판단에 감사드리죠.”
“바로 본론만 말씀드리자면, 무엇을 원하십니까? 어차피 시간이 그리 많지는 않으실 터이니, 원하시는 대로 내어드리지요.”
한센트 나름의 회심의 한 방이었다.
그러나 시엔은 방긋 웃어 보였다.
“간밤에 전령 넷을 잡았는데, 이 정도면 시간도 꽤 벌지 않았을까요?”
“그럼 하나는 놓치신 겁니다. 아버지께서 군대를 이끌고 조만간 도착하실 테니……”
“아. 전령이 하나 더 있었나요?”
“워낙에 위중한 일이라서. 신중을 기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흐음. 그거 큰일인데.”
시엔이 고민하는 척을 했다.
간밤에 가로챈 편지가 다섯이었다. 문제는 그게 전부인지 아닌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밤이 어두우니 하나쯤 놓쳐도 알 도리가 없었다.
그러니 상대가 속이고자 하면 그게 정말인지 알 수가 없어서 한번 떠봤다.
전투 없이 항복하여 꽤 분할 테니, 아직 어린 녀석 앞에서 실실 웃어주면 걸려들지 않을까 하고.
시엔이 제 호위 기사에게 눈치를 주었다. 이틀 동안 잠을 제대로 못 자 눈 밑이 시커멓게 변한 베른닐이었다.
“도련님. 간밤에 잡은 전령이 넷이 아니라 다섯입니다.”
“아. 다섯이야? 괜히 걱정했네. 시간이 그리 급하지는 않게 되었네요. 뭐. 그렇다고 해도 말씀하신 대로 오래 있지는 않겠지만,”
역시 보통 인물은 아니구나. 한센트가 씁쓸히 웃었다. 그 역시 어릴 적부터 영특하다 소리를 들었지만, 보아하니 상대가 한 수 위인 모양이었다.
패배를 받아들인 한센트가 순순히 시엔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정오가 되자, 도시의 군량 창고가 활짝 열렸다. 도시의 영민들이 그 앞에 줄을 섰다.
1왕자파의 기사 몇이 지켜보는 가운데, 그 종자들이 곡물을 퍼담아 영민들에게 나누어주었다.
“델피르 전하께서 베푸는 은혜시다. 감사히 여기도록.”
“오오……!”
올해가 워낙에 가물어 내년에 대기근이 올 판에 곡식을 나눠주니 영민들이 신이 나 델피르 전하 만세를 외쳤다.
남의 군량으로 생색까지 냈다.
본래라면 군량을 불태우는 것이 편할 터이나, 이들 또한 결국 델피르 왕자가 다스릴 백성이라 생각해 자비를 베풀기로 했다.
나중에 백작이 돌아와 회수하려 해도, 왕당파가 그 민심을 감당하지 못하리라 계산이 서기도 했고.
도시 광장에는 큰 불을 피웠다.
성문을 쪼개니 무수한 장작이 생겼다. 이를 한데 모아 크게 불을 피우고는 그 안에 창과 갑옷 따위를 계속 던져넣었다.
발발반덴의 군대가 사용하던 물자들이었다.
탈것은 불타 사라지고, 쇠붙이들은 물러져 못 쓰는 물건이 되고 만다. 노획하여 가져가는 것이 최선이나, 여력이 없으니 아예 못 쓰게 만들 작정이었다.
적 기사단의 무구 역시 같은 꼴을 당했다.
태워버리기엔 아까운 것이나 적이 쓰는 것보다는 나았다.
일부 적 기사들이 반발했으나, 한센트가 시엔의 수중에 있었다. 결국, 칼과 갑옷을 잃고 어깨를 축 늘어뜨린 신세가 되고 말았다.
“참으로…… 철저하시군요.”
한센트가 한탄했다.
< 34. 알고 맞으나 모르고 맞으나 [3]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