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4. 알고 맞으나 모르고 맞으나 [2] >
산과 숲으로 이루어진 서부 귀족들의 영지 간 경계는 사람 살기 힘든 험지였다.
깊은 숲이나 늪지, 고개 따위의 영양가 없는 땅들. 그러니 서부 귀족령 간 관문은 자연 그 자체가 방어적으로 대단히 유리한 자리였다.
그러나 북부 귀족령은 온통 평야뿐이고, 영기 간 관문 역시 사방이 트인 장소였다. 그러니 관문이라고 해 봐야 그저 관문소 정도가 고작이었다.
물론, 고작이라고 폄하하기에는 어폐가 있었다. 근처에 아예 군대의 주둔지를 차려놓았으니 관문에 문제가 생기면 곧장 뛰쳐나왔다.
그러나 이는 평시의 사정이었다.
팔퓌유-갈푼 경계만 해도 어떠한가. 팔퓌유 영지의 군대는 무장해제되어 강제 해산되었다. 갈푼 백작령의 경우 백작이 직접 영민을 징집까지 해 이끌고 나갔다.
그러니 관문을 지키는 병사가 별로 없었다.
그 얼마 없는 병사마저 말썽이었다.
저 멀리 기마가 만드는 먼지구름이 피자, 병사들이 난리가 나 급히 움직였다. 그러고는 대로변에 일렬로 정렬했다. 신병이 어설프게 깃발을 들어 올리니 그래도 어찌어찌 기마가 도착하기 전에 사열 준비를 끝냈다.
남은 이 중 고참이 없었다. 그렇다고 적이 온다는 소식을 미리 들은 것도 아니었다.
그러니 당연히 아군이 돌아온다 여겼다.
관문을 강행 돌파하려던 왕당파 기사들의 맥이 빠지는 순간이었다.
-어떻게 해?
선봉에 선 카레네가 송수신기를 조작해 시엔에게 물었다. 시엔이 잠시 고민하다 대답했다.
“천천히. 대열을 맞춰 평보로 가자. 아무 말도 하지 말고.”
-일단은 그냥 통과해 보자 이거구나? 알아들었어. 불필요한 피를 흘릴 필요는 없다는 거지? 하긴 약한 이를 괴롭혀 봐야.
“무슨 소리야? 적의 병력인데. 적병에 약자가 따로 있어? 창으로 찌르면 누구나 죽는 법인데.”
-그럼 굳이 왜? 그냥 밀어버리면 될 것을.
“그랬다간 어떤 식으로든 소식이 새나가잖아. 우리가 적인 줄 모를 때 자연스럽게 지나가야지 앞으로 모르지.”
-그럴 바에야 그냥 밀어버리면? 전멸시키면 소식이 샐 염려도 없잖아? 나중에 속았다는 걸 알게 되면 우리 뒤를 쫓지 않을까?
“전부 몰살시키고, 시체까지 치우자고? 그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생각해 봐.”
-아. 그렇군. 과연.
카레네의 지휘에 따라 기사들이 속도를 줄였다. 관문을 완만히 통과하려니 길 가운데를 막고 선 이가 있었다.
시엔이 고삐를 채 앞으로 나섰다.
“너는 누구지?”
“함메발 힘데 3중대 부중대장입니다. 방문 목적과 소속, 성함을…….”
“부대장이라고?”
시엔이 짐짓 거만을 떨었다.
“내가 이끄는 이 기사들이 안 보이는가? 나는 저들의 수장이나, 너는 뭐지? 부중대장? 네 대장은 어디 가고?”
“그, 그것이…….”
함메발이 진땀을 흘렸다. 중대장은 근처 마을에 용무가 있다며 자리를 비운 참이었다. 말이 좋아 용무지, 실상은 여인의 품을 찾아 마실을 나갔으리라. 하필 이런 때에 기사들이 찾아오다니.
“왜 대답을 못 하느냐?”
“그것이, 대장이 중요한 용무가 있어서.”
“지금은 전시가 아니더냐? 전시에 대체 무엇이 중요하여 대장이 모습을 보이질 않지?”
“그, 송구하기 그지없습니다…….”
“하. 갈푼의 군기도 알 만하군.”
“나, 나으리……!”
함메발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시엔이 씩 미소를 지어 보였다.
“되었다. 대장의 잘못이지 네 잘못은 아니겠다마는, 내가 입을 놀리면 상전을 잘못 두어 공연히 너만 욕을 보겠구나. 내 못 본 것으로 해두마.”
“정말이십니까? 아니! 감사합니다!”
“그보다, 계속 길을 막고 있을 셈이냐?”
“아닙니다!”
함메발이 안도했다. 이름 모를 기사 나리의 마음이 바뀌기라도 할 세라 우렁하게 구호를 붙여 명령을 내렸다.
나팔을 불고 깃발을 곧게 들어올리니 관문에서 높은 이를 맞아 통과시켜 보내는 예식이었다. 적이 지나감을 모르고 환영하는 꼴이었다.
기사들이 어이가 없어 이를 드러내고, 이에 관문의 병사들은 상대가 웃어주니 좋다고 목소리를 높여 함성까지 내질렀다.
“개판이네.”
적의 대대장이 자리를 비워 쉬이 통과하긴 했지만, 그렇지 않았더라도 결과는 다르지 않았으리라.
부대 대부분이 신병이나 노병이니 트집잡을 거리는 얼마든지 있었을 테니까.
그도 아니면 최후의 수단이 있었다.
-야, 너. 내 얼굴도 몰라?
어지간한 주문보다 효과적인 말이었다. 겨우 일개 중대장은 비키지 않고 배길 수가 없다.
제국과의 전쟁 초기 흑마법사가 포위망을 종종 빠져나가곤 했던 수법으로, 그 효과가 가공할 만한 것임을 알았으니까.
시엔과 기사들이 다시 속도를 높였다.
목표는 발발반덴, 갈푼 백작의 영주성이 자리잡은 도시였다.
짬짬이 쉬며 하루 밤과 낮을 달렸다.
다시 해가 지고 나서야, 시엔과 기사단이 비로소 발발반덴의 근처에 이르렀다.
마음 같아서야 당장 무방비한 도시를 공격하고 싶었다. 아마 순식간에 점령을 마칠 수 있으리라.
그러나 전쟁에도 지켜야 할 선이 있었다.
상대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위해 지켜야 하는 최소한의 규칙이었다. 그걸 어기고 나면, 상대 역시 똑같이 응수해올 테니까.
그래서 명예라는 이름으로 서로를 옭아맸다. 비열한 방식으로 이룬 승리가 독이 되어 돌아갈 수 있도록.
물론, 이 선이라는 것에 명확하게 정해진 바가 없었다. 그에 대해선 대개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기는 편이었다.
시엔의 군대가 관문을 통과한 일이 그랬다.
시엔의 언행에 딱히 속였다 할 태도가 없었다. 대장이 어디 갔느냐 물었을 뿐이 아닌가. 기사들이 느끼기에 어이가 없고 우스운 일이었다. 시엔의 행동이 비열하다 느끼진 못했다.
왕당파에서 나중에 주장하기로도 속았다 하기에 너무나 창피한 작태가 분명했다. 소리 높여 비난하기엔 오히려 제 체면이 상할 터이니 입을 다물 테고.
그러면 이 건에 대해서는 선을 넘지 않았다고 합의가 되는 것이다. 목소리 큰 쪽이 이기는 판에 상대가 침묵을 지킬 테니까.
그러나 성의 공략은 달랐다.
제아무리 기습이라 해도 통보 없이 군대가 무방비한 성을 털어먹는다면, 당장 시엔을 따라나선 기사들부터 불만이 터져나오리라.
시엔 혼자였다면 모르겠으나 이끄는 군대가 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시엔이 몇몇 인원들을 따로 불러 지시를 내린 후에, 전령을 보내 통보했다.
갈푼 백작가의 대공자, 한센트 갈푼이 깜짝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늦은 저녁 식사를 즐기던 중이었다.
“그게 무슨 소리요! 적이라니!”
“전언이 도착했습니다. 도련님.”
편지를 받아든 한센트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델피르 전하를 모시는 시대의 진정한 충신들이 그 뜻을 행하고자 하니, 해가 밝는 순간 공격을 시작할 것이오.
“적의 규모는?”
“송구스럽사오나, 알 수 없습니다.”
“그게 무슨…….”
“적들이 이미 어두운 때에 당도하였고, 또한 진지에 횃불을 켜지 않아 그 숫자를 파악할 수 없는 상태입니다.”
“아니. 잠깐, 잠깐 기다려 보시오.”
한센트가 제 머리칼을 흐트러뜨렸다.
“적들이 하늘을 날거나 공간을 뛰어넘은 것이 아닐 텐데, 코앞에 당도한 이때까지 적의 접근조차 모르고 있었단 말입니까?”
“보고가 있었다면 가장 먼저 대공자님이 알고 계셨을 겁니다.”
“그렇지. 맞는 말이에요. 병사는 모조리 전쟁터에 나섰는데 땅은 그대로이니, 적이 침입해도 알아채지 못해도…… 못할 수도…….”
한센트가 말끝을 흐렸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게 말이 되나?
적의 영지에 들어섰을 테니 반역도들의 군대가 길을 피해 움직였을 터. 영지 내에서 움직이는 수상한 무리라면 당연히 신고가 들어올 일이었다.
그러나 시엔과 기사들은 대로를 타고 당당하게 내달렸다. 그 당당함 덕분에 오히려 의심을 면했다.
관문에서 봉화를 피웠더라면 또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그러지 않았으니 그냥 기사단이 어딜 급히 가는구나 하고.
물론, 개중에 기사님들을 보았다 순찰자들에게 고한 이들도 있기는 했다.
그러나 순찰자들이 제아무리 빨리 보고를 올린다 한들, 잘 닦인 도로를 따라 내달린 기사들보다 빠르게 도착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아무래도 말이 안 됩니다.”
“말이 되는가는 문제가 아닙니다. 이미 공격하겠다 전언을 받지 않았습니까. 도련님. 당장 군을 정비하여 수성 준비를 하고, 동시에 파발을 띄워 영주님께 알려야 합니다.”
“반역도들의 간계일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몰래 첩자를 보내 전언 하나만 전했다면? 사실 적의 군대는 없거나, 아예 소수일 수도 있겠지요.”
“옳으신 말씀입니다.”
“모르는 새에 적이 도달했다 하면 군의 사기가 떨어지고 영민들이 공포에 떨겠죠. 적이 노리는 바가 바로 그것이라면…….”
그러나 기사가 고개를 저었다.
“공자님. 항상 최악을 생각하셔야 합니다. 만약 적이 어떤 수단으로 정말 당도하여 공성 준비에 나서고 있다면, 해가 뜬 후에는 이미 늦게 됩니다. 만약 도련님의 말씀이 옳다면 저희가 잃을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사기와 민심은 다시 바로잡으면 되는 것입니다만.”
“……그 말이 맞습니다.”
그리하여 급히 편성된 파발들이 발발반덴의 성문을 빠져나와 어둠 속으로 달려나갔다.
북문으로 빠져나온 파발이 한참 말을 재촉해 속도를 높였다. 책임의 막중함을 몇 번이나 강조해 듣고 나왔다. 파발의 마음이 급했다.
푸드득 날짐승 나는 소리가 귓전을 스쳤다. 깜짝 놀라 손에 든 횃불을 붕붕 휘두르고 보니, 달리는 말의 대가리 위에 오리 한 마리가 용케 중심을 잡고 선 것이 보였다.
말을 탔으니 위아래로 흔들리는 말 대가리 위에서 오리의 몸통이 같이 흔들렸다. 쭉 뻗은 모가지만 유연하게 움직여 새대가리만 못 박힌 듯 고정된 꼴이었다.
이게 대체 뭔 상황이람. 야간 파발이라 한 손에는 고삐를, 나머지 손에 횃불을 들었다.
그게 아니었다면 한 손으로 잡아채 나중에 잡아먹어야지 횡재했다 싶었겠지만, 적습을 알려야 하니 일단 쫒아야겠다 싶어 대충 횃불을 휘둘렀다.
홰를 치며 날아오른 오리가 전령의 손을 콱 물었다. 장갑을 낀 손이 아프지는 않았지만, 그 서슬에 깜짝 놀란 전령이 횃불을 놓쳤다.
횃불이 땅에 떨어지고, 말은 기수를 태운 채 달려나가니 어둠 속에 녹아들어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사악한 주문이 어둠 속에 울려 퍼졌다.
* * *
-시엔 님, 서문으로부터 보고 드립니다. 적의 파발을 제거했습니다.
“잘했어.”
-시엔 님을 따르는 것이 이 늙은 종의 유일한 삶의 목적입니다. 이만한 일에 치하하실 필요가 없사오니, 부디 개나 소처럼 자유로이 부려 주십시오.
언제나처럼 충직한 답변에 시엔이 쓴웃음을 지었다. 누렁이는 항상 이런 식이었다.
광신자.
삿된 믿음이라 하나 그것이 순수한 진심이니 스스로 신성을 일깨웠다. 어지간히 미치지 않고서야 사람이 그럴 수가 있을까.
누렁이와 나비가 주인을 따르는 것이 굳이 시엔의 뜻은 아니었다. 그러나 저네가 좋다고 스스로 자처하는 일이니 굳이 막지는 않은 결과 제정신 아닌 노예 둘을 가지게 되었지만.
-도련님. 동쪽에서 나온 전령을 잡았고, 확인도 마쳤습니다. 이제 돌아가서 쉬어도 되지 말입니다. 지난밤에도 꼬박 날을 새웠는데 피곤해 죽겠습니다. 아주.
뒤이어 송수신기에서 베른닐의 보고가 이어졌다.
도착하자마자 셋씩 짝을 지어 미리 성문과 이어지는 길목에 보내놓았다. 크고작은 성문에 대로와 소로가 도합 일곱 개라, 티란디스의 주구들이 차단 임무에 나섰다.
지나가는 파발을 잡아야 했다.
적의 편지가 발견될 때까지 지나가는 기수를 전부 주살하라는 비정한 임무였다. 비정한 만큼 중요한 일이기도 했고.
“이제 세올 녀석만 남았는데.”
북문 방면은 너무 멀어 급한 데로 일단 보내기는 했다. 그런데 그게 세올이라 도무지 믿음이 가야 말이지.
얄렘방은 남쪽이라 적이 북문에까지 파발을 내놓을 가능성은 반반이리라. 세올이 놓칠 확률도 반반이었다. 결국, 넷 중 한 번은 사달이 나는 꼴이 아닐까.
그러나 사람 하는 일이 결국은 여신의 뜻대로 되는 법이었다.
과거 흑마법사가 복수에 실패하여 다시 이루고자 했으나, 정작 다시 눈을 뜨고는 이미 공허한 역사로 지나쳐 버리고 만 것처럼.
성공하면 성공하는 대로, 실패한다면 또 실패하는 대로 계속 궁리하여 최선을 다할 수밖에.
시엔이 그렇게 세올의 귀환을 기다렸다.
그리고 먼 곳에서 날갯짓 소리가 들려왔다.
< 34. 알고 맞으나 모르고 맞으나 [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