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작가의 망령재림-163화 (160/268)

< 34. 알고 맞으나 모르고 맞으나 [1] >

엘딘 허슨드는 아직 정정한 노인네였다.

나이로 따지자면 허리가 굽고 관절이 시릴 때가 되었다. 그러나 끊임없는 단련으로 만들어진 신체는 탄탄하기 그지없었다.

오히려 젊은이보다 더 튼튼했다. 더 빨리 뛰고, 멀리 보고 들을 수 있었다.

그러니 일행 중 이상한 소리를 가장 먼저 눈치챈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저쪽에서 무언가 사단이 난 모양이구나.”

“저쪽 말씀이십니까?”

“들어 봐라.”

엘딘 일행이 말을 멈췄다. 엘딘을 따르던 젊은이들이 귀를 기울였다. 숲의 소음을 뚫고, 먼 곳에서 악다구니나 비명이 아련히 울렸다.

“도적놈들이 아니겠습니까?”

내전으로 나라가 혼란하니 여기저기 도적이 나타났다. 그러니 산길에 만나는 일도 요즈음엔 드물다 하기 어려웠다.

“어떻게 할까요?”

“에잉. 쯧. 어떻게 하기는. 탈영병 신세가 되었더라도 한 때 왕국의 녹을 먹었잖느냐. 고작 도적 따위를 보고 그냥 지나치려고?”

엘딘, 검위공에게도 결단이 필요했다.

국왕이 그를 동부 국경을 지키는 사령관으로 보냈으나, 실상 1왕자파에 합류할 것이 뻔한 그를 서부 귀족들과 멀리 떨어뜨려 놓으려는 수작이었다.

그럼에도 국경을 지키고 있던 것이 왕국에 대한 충성 때문이었다.

그런데 상황이 바뀌었다.

동부 국경의 병사들이 빠져나가기 시작하니, 동부 귀족들이 내전에 힘을 쏟기 위해서였다.

내전이 더욱 더 커지고 있으니, 차라리 시엔에게 합류하여 빠르게 이 혼란을 끝내는 것이 왕국을 위한 일이라 결단을 내렸다.

그래서 검위공이 함께 쫓겨난 제자들, 이전 왕실근위대를 이끌고 움직였다.

결국 탈영병이 맞기는 했다.

“이것들아, 당장 움직이지 뭣들 해?”

검위공이 즉각 말을 몰아 달려 나갔다. 제자들이 그 뒤를 따라 달리며 검을 뽑아들었다.

도적들이라 해봐야 말 탄 병력 앞에서 무얼 할 수 있겠는가. 마주치면 혼비백산 도망이나 칠 놈들이니 애초에 별 걱정거리도 안 되는 녀석들이었다.

검위공은 그렇게 생각했다.

점점 전투의 소음이 진해지며 마침내 굽이친 산길을 지나 고개 위에 오르자, 저 아래에 상황에 눈에 들어왔다.

검위공이 즉각 고삐를 채며 손을 들어올렸다. 말이 머리를 크게 들며 자리에서 멈췄다.

그 뒤를 따르던 제자들이 동시에 말을 멈추니 여간 훈련되지 않고는 보일 수 없는 모습이었다. 검위공에게 잔뜩 굴려진 왕실근위대의 실력이었다.

“이런, 젠장.”

그러나 마주치고 보니 산적 따위가 아니었다.

호화스럽게 치장된 마차 몇 대를 두고, 그 호위병들이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전투? 검위공이 생각을 정정했다. 전투가 아닌, 일방적인 학살이었다.

전신에 검은 갑옷을 두른 기사들이 마차의 호위병들을 뎅겅뎅겅 썰어대고 있었으니까. 보아하니 검은 기사들의 실력이 여간내기가 아니었다.

호위병들은 얼마 남지 않은 상황. 검위공이 인상을 찌푸렸다.

“어떻게 할까요?”

“맨 그 소리밖에 못 하느냐? 보아하니 괜히 말려들어 좋을 일이 없겠다만은.”

아마도 귀족간의 행사인 모양이었다.

도적 토벌은 워낙에 선악이 확연하고 여신께서 이르는 정의를 행사하는 일이니 망설일 것이 없다. 그러나 기사와 호위가 보이는 장소에 끼어드는 것은 달랐다.

검위공이 검은 기사를 바라보았다. 다른 녀석들과 달리 투구에 뿔이 두 개 달린 것이, 아마 놈들의 대장이리라.

둘의 눈이 마주쳤다.

검위공이 한 손을 들어 손바닥을 보였다. 끼어들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검위공도 믿는 바가 있었기에, 좋게 넘어갈 심산이었다. 왕국 기사 중에 검위공의 얼굴을 모르는 이가 얼마나 되던가.

그사이, 마차의 호위병들이 전멸했다.

그러고 나자 뿔 달린 검은 기사가 고개 위로 이내 팔을 들어 삿대질을 했다. 뒤이어 손목을 뒤집어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저 족보도 없는 게 감히! 야! 너 어디 소속이야?”

“새끼야! 눈깔 안 깔아?”

“어디서 삿대질이야? 손가락 잘리는 꼴 보고 싶어?”

제자들이 거친 욕설을 내뱉었다.

검위공이 클클 웃는 소리를 흘렸다.

“한 번 붙어보겠다는데, 그럼 그렇게 해줘야 하지 않겠느냐.”

검위공과 제자들이 말에서 내렸다. 전투마가 아닌 탓에 오히려 싸움에 방해만 되는 것들이었다.

개중 가장 앳된 녀석이 말을 지키고, 나머지가 발을 굴러 자리에서 뛰쳐나갔다.

검은 기사들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여 진형을 짰다. 말 한 마디 없이 저들끼리 눈빛을 보아 대처하니 여간 훈련된 놈들이 아니었다. 정예 중에서도 정예들.

그러나 상대가 나빴다.

검위공이 검을 휘두르자 검은 기사의 일곱 군데에서 피가 흘렀다. 검은 기사가 비틀거리더니 이내 다시 자세를 잡았다.

“이것 봐라?”

검위공이 다시 검을 휘둘렀다. 밝게 빛나는 검이 복잡한 궤적을 그리더니, 뒤이어 검은 기사가 쿵, 쓰러지고 말았다.

검은 기사가 다시 일어서려 허우적거렸다.

“힘줄을 베었으니 몸이라도 보전하려거든 가만히 있는 게 좋을……”

검위공이 말끝을 흐렸다.

검은 기사가 비척비척 일어나고 있었다. 발목의 힘줄을 베이고서도 설 수 있는 인간은 없다.

“스승님! 이것들 좀 이상합니다!”

왕실근위대라 하면 역시 검의 달인들이었다. 그러나 팔다리를 베어도 다시 검을 휘두르는 적들을 맞아 당황스러운 말들이 새어 나왔다.

“마물들이로구나! 목을 쳐!”

마물을 상대로 손속에 자비를 둘 이유가 없다. 적을 베는 것보다 제압하는 것이 어려웠다. 굳이 제압할 이유가 없어졌으니 오히려 일이 쉬워진 셈이었다.

검위공이 검을 가로로 그었다. 검은 기사의 목이 툭 떨어져 바닥을 굴렀다. 검위공에게 이 정도야 그리 큰 수고도 아니었다.

검위공이 죽이고자 하니, 검은 기사들의 목이 전부 떨어지는 데에는 얼마 시간이 걸리지도 않았다. 뿔 달린 검은 기사 역시 마찬가지였다.

“스승님, 보기엔 사람 머리통 같습니다만.”

“사람이 어찌 그러겠느냐. 제아무리 지독한 놈이라도 사지를 베이고 움직일 수는 없는 노릇인데.”

“음…….”

“왜 마려운 표정이냐?”

“어쩐지 낯이 익은 것도 같아서 말입니다.”

그때였다.

“꺄아악!”

비명이 터지는 통에 온 시선이 마차로 몰려들었다. 마차의 문을 붙잡은 채로 자지러진 아이가 눈에 들어왔다.

검위공과 그 제자들이 보기에는 눈살이나 찌푸리고 말겠지만, 사방이 온통 뼈와 살과 피로 난장판이니 아직 덜 여문 아이가 보기에는 세상 끔찍한 광경이었다.

검위공이 여아를 감싸안았다.

아는 얼굴이었다. 케이트 뱅가. 뱅가 공작의 어린 딸이 아닌가.

“케이트? 케이트가 아니냐. 옳지. 이제 괜찮다. 괜찮으니, 정신 좀 차리거라.”

“검위공 할아버지?”

“그래. 알아보는구나. 어찌 여기에, 아니다. 일단 눈을 꾹 감고 있으려무나.”

검위공이 아이를 달랬다.

아직 어린 아이가 얼마나 두려웠을까. 마음을 놓았는지 품속에서 까무룩 잠든 여아를 보며, 검위공이 난처한 얼굴을 했다.

“스승님, 그 아이를 알고 계십니까?”

“조금 아는 아이다만은.”

으레 늙은이가 그러하듯이, 손녀뻘 되는 아이라면 조금만 알아도 정이 깊은 법이었다.

탈영한 신세에 뱅가 공작에게 아이를 데려다 줄 수는 없는 노릇. 들르는 귀족령 어딘가에 심부름꾼을 시켜 보낼 수는 있겠지만.

뱅가 공작가의 영애가 관련되다보니 검은 기사들도 마물이라 하기엔 의심스럽기 짝이 없다.

귀족 간의 암투라면, 섣불리 아이를 맡겨 봐야 그 목숨만 내어주는 꼴이 되리라.

검위공이 결정을 내렸다.

“어쩔 수 없이 이 아이도 데려가야겠구나.”

* * *

얄렘방에 주둔중인 왕당파의 군대에겐 이제 식량이 얼마 남지 않았다.

“보급은 언제 도착한답니까?”

“늦어도 보름 정도일 것이오.”

“보름이면 너무 늦습니다만…….”

“늦어도 보름이라 하지 않았습니까.”

왕당파의 지휘소에 음울한 분위기만 가득했다. 전투다운 전투 한 번 없이 두 번이나 대패를 거듭했다. 와중에 적의 손실은 거의 없고, 아군의 피해만 막대했다.

“차라리 처음부터 공성에 나섰다면……”

“그걸 누가 모르오? 지나간 일에 답하는 거야 누구라도 하지.”

“그렇다면 지금이라도 총공세를 펼치는 것이 나서는 것이 낫지 않습니까?”

“사기가 떨어질 대로 떨어진 와중에 총공세를 말입니까? 반역도들이 숲을 끼고 방어를 구축했습니다. 병력의 충원이 있었는지 어떤지 알 수도 없는 상황입니다.”

“그럼 어찌하면 됩니까? 이대로 있으면 나머지도 이탈할 텐데. 여기에 병력이 붙들려봐야 손해만 보는 것 아니오.”

“적의 군대를 묶어둔다 생각을 해야지.”

“구천으로 삼천을 묶어둔다는 게 말이 되기나 하나……”

“뭐요?”

귀족이 쌍심지를 켰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문이 열리고 킬지언이 들어서자, 귀족들이 저마다 입을 다물고 침묵을 지켰다.

이 상황에서 총사령관에게 의견을 말해봐야 좋은 일이 없었다. 괜히 의견대로 했다가 또 안 되면? 책임이 총사령에게 있으니 굳이 의견을 보태 나눠가질 필요가 없지 않은가.

킬지언 역시 이를 알았다.

치미는 화를 억지로 삼키며, 킬지언이 입을 열었다.

“반역자들의 별동대가 다시 움직였습니다.”

기마로 구성된 별동대, 아마 기사들로 꾸렸으리라. 어설프게 병력을 투입해 격파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

“적의 움직임이 어떻습니까?”

“얄렘방을 북으로 멀리 돌아 우회하고 있습니다만, 마지막으로 발견된 위치가 여기입니다.”

킬지언이 지도 위에 말판을 올려놓았다. 얄렘밤의 북쪽으로 꽤 거리가 있는 지점이었다.

그런데 그 위치가 절묘하기 짝이 없었다.

동쪽으로는 베넨바스령과 북쪽으로 갈푼 영지 어느 쪽으로도 향할 수 있는 자리였다. 둘 중 어디로 향해도 이상하지 않으니 오히려 종잡을 수 없는 딱 그런.

갈푼 백작과 베넨바스 대공자가 자리에서 벌쩍 일어났다. 이대로라면 제 영지로 적이 밀고 들어오게 생겼으니까.

“당장 저놈들을 깨부숴야 하오!”

“맞습니다! 이대로라면 북부로 진입하고 마는 것이 아닙니까!”

발등에 불이 떨어진 둘이 외쳤다.

“진정들 하시오. 적의 별동대라 한들 그 숫자가 얼마나 되겠습니까? 저만한 병력으로 영지가 함락되기라도 한단 말입니까?”

“공성 파괴자! 젠장, 그 티란디스가 저기 있으면 어떡합니까? 성채를 그냥 무너뜨린 놈이란 말입니다!”

“설마, 부대의 수장이 그렇게까지는……”

“꼴랑 오십으로 일만 군대를 습격한 놈입니다! 저번에도 성문을 박살을 낸 것이 그놈 아닙니까!”

“일단 진정 좀 하시고.”

“진정? 갈푼이 뚫리면 다음은 어디일 것 같습니까? 제우사이란 남작? 스나덴 후작 대리?”

호명된 두 귀족이 침울하게 눈을 맞췄다. 우리는 동의하니 계속하라는 뜻이었다,

“별동대라 하나 결국 소수잖습니까! 전 병력을 길게 펼쳐 포위하여 섬멸하면 그만인 것을, 어째 두고 본단 말입니까!”

“적들의 기동력이 워낙 좋아 현실적으로는 힘든 작전입니다. 다들 조금만 머리를 식혀 주십시오. 적들은 전원 기병들이고, 따로 보급을 운용하지 않고 있습니다. 기동력을 위해 유지력을 포기한 것이니 오랜 작전엔 나서지 못합니다.”

“그렇지 않소. 적이 소수이니 약탈로 보충하겠다는 것이지.”

“허나, 소수의 병력으로 할 수 있는 작전의 한계가…….”

“시엔 티란디스! 그자가 있지 않소!”

젠장. 킬지언이 욕설을 삼켰다.

강력한 소수 정예 부대가 공성 병기까지 갖춘 셈이었다. 그것도 개중 가장 강력한 것으로.

킬지언이 어물어물 대답을 하지 못하니, 마침내 갈푼 백작이 선언했다.

“갈푼의 병사들은 영지로 돌아갈 것이오.”

“갈푼 백작! 이러셔도 되겠습니까!”

“이천의 군대를 이미 왕성 수비에 보냈소.”

전선이 하나가 아니었고, 적의 주공을 맞아 하부 전선에 주 병력이 모였다. 여기 모인 귀족들 모두 이미 군대를 보내고 따로 이끌고 참여한 이들이었다.

“여기에 또한 천을 직접 이끌고 왔소이다. 영지의 모든 병력이 나섰으니 지키는 이는 늙거나 병든 약자들뿐이라오. 그럼 내 어찌해야 하겠소?”

“적의 간계에 넘어가는 꼴입니다. 보급이 함께 도착할 터이니, 그때 총공격에 나서면 적의 별동대라 한들 무엇 이루지 못하고 되돌아갈 것입니다.”

“보급이 도착한다고 해서……!”

문득, 갈푼 백작이 무언가 깨달았다는 듯 눈을 치떴다.

“보급, 보급이라 하셨소? 보급을 호위하는 부대는? 오백? 천? 그 숫자는 얼마나 되오?”

“갈푼 백작님?”

“젠장, 보급 부대, 보급을 끓어놓을 작전인 게야! 굶게 만들겠다는 심산이라고!”

갈푼 백작이 계속 소리 질렀다.

안 그래도 건량으로 겨우 끼니를 때우는 와중이었다. 이때 보급이 끊긴다면?

지휘소의 귀족들이 새하얗게 질렸다.

< 34. 알고 맞으나 모르고 맞으나 [1]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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