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작가의 망령재림-160화 (262/268)

< 33. 얄밉게 더 얄밉게 [6] >

“일주일 전만 해도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해방군이니 뭐니 하더니 먹을 것만 싹 긁어가고. 이젠 집까지 허문다니까요.”

“반역도들이 있을 때가 더 좋았는데.”

“어허이, 이 사람. 큰일 나려고. 영주 나리께서 들으시면 경을 칠 게야.”

“크흠. 못 들으셨으면 그만 아닌가.”

얄렘방의 주민들이 수군거리는 소리였다.

더불어 팔퓌유 자작의 마음도 편치 않았다.

“영주님. 영민들의 표정이 어둡습니다.”

“나도 알고 있다.”

“아무리 저희가 항복했다고는 하나, 이는 너무한 처사입니다. 오늘은 영민들의 집을 강제로 허물었다 합니다. 물론 성문을 보강하는 것이 우선인 것은 압니다만, 그래도 영주님에게 먼저 양해를 구하는 것이 순서가 아닙니까?”

안델센 경이 분통을 터뜨렸다.

팔퓌유 자작에 대한 왕당파 귀족들의 태도가 문제였다. 그들이 팔퓌유 자작을 바라보는 시선에 기본적으로 경멸 비슷한 것이 섞였다.

반역도에게 싸워보지도 않고 항복한 겁쟁이라는 거지. 게다가 군대를 재무장하느라 물자를 빌리기까지 했다.

욕 먹을 만한 일이었고, 팔퓌유 자작이 왕당파 귀족의 입장이라도 그럴 수 있었었다, 그럴 수는 있지만.

팔퓌유 자작이 쓰게 웃었다.

“어쩌겠는가. 그저 지나가길 빌어야겠지.”

반역도에게 영지를 순순히 내어주었으니, 내전이 끝나도 그가 얻을 수 있는 것은 없다고 봐야 했다.

논공행상에서 빗겨갔다 뿐이지, 그래도 뺏기지는 않을 터. 먼 선대부터 오랫동안 북부 귀족의 일원으로 지내온 역사가 있었으니까.

팔퓌유 자작이 이제 와서 바라는 건, 그저 지나가는 것뿐이었다.

그러니 적어도 내 영지에서 치고받고 하지는 말았으면 했다.

왕당파의 군대가 서부로 확 치고 들어갈 줄 알았건만, 제 반절에도 못 미치는 반역도들에게 발이 묶여 이 꼴이라니.

“아니면 차라리…….”

팔퓌유 자작이 중얼거렸다.

1왕자파가 북부 귀족 영지 깊숙하게 전선을 형성했다면 또 달랐을 터였다.

시엔 티란디스. 대공자를 겪어보니 그랬다. 말투만 약간 거들먹거릴 뿐, 점령군의 수장으로서 피점령지의 영주에게 단 한 번도 무례하게 굴지는 않았으니까.

“영주님?”

“……아닐세.”

말은 아니라 했지만, 문득 다른 생각이 스쳤다. 굳이 흐레이그를 계속 섬겨야 하는가 하는 그런 생각이었다.

어차피 왕당파에 남아 얻을 것이 판돈을 보전하는 것뿐이라면. 차라리 어쩌면.

1왕자파는 팔퓌유의 군량을 빼앗고 무장을 해제했다. 왕당파는 돌아와 재무장을 베풀어주었다.

사실 누가 손해를 끼치고 도움을 주었는지는 명확한 일이었다. 그러나 사람 마음이란 것이 본디 한 번 상하면 어긋나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본디 정복자의 권리란 군량과 무장해제는 기본에도 못 끼는 것이었다. 막대한 피해 배상과 약탈까지 챙길 수도 있었을 텐데, 티란디스의 대공자는 권리를 포기하며 배려를 해준 셈이었다.

그에 반하면 왕당파가 재무장을 해 준 것은 사실 응당 받아야 할 보상이었다. 그리고 그 대가로 팔퓌유의 병사들이 내전에서 가장 험한 곳에 내몰릴 것도 뻔했으니 마냥 도움을 받았다 할 것도 아니었다.

팔퓌유 가문은 그간 북부 귀족 연합의 일원으로 흐레이그의 가신 가문으로 오래 지내왔다. 그러니 1왕자파의 진격에 앞서 왕당파의 군대가 진작 지원하여 도와주었어야 했다.

그랬다면 항복할 일도 없었을 테고.

그런 사정은 생각지도 않고, 왕당파 귀족들이 가하는 이 모멸감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오늘 밤만 해도 그랬다.

밤에 무언가 일을 치를 모양이나, 팔퓌유 자작은 작전 회의에 부르는 이가 없었다.

밤에 치를 것이야 야습뿐이겠고, 적의 군대. 그걸 군대라고 부를 수 있다면. 기이하기 짝이 없는 기사들의 소수 집단이었으니까.

어쨌거나 성공하여 티란디스의 대공자를 잡던지 죽이던지 혹은 큰 피해를 주기만 해도 그 공로가 보통이 아니었다. 적의 가장 정예이자 강력한 패를 짓밟는 것이고, 전황을 바꿀 공로가 될 수 있을 테니까.

그런 회의라서 부르는 이가 없는 것이다.

대규모 회전이나 필사의 수성전이라면 팔퓌유의 병사를 사용하기 위해 불렀겠지만, 공로를 차지하는 데에 있어선 끼워주고 싶지 않을 테니까.

팔퓌유 자작의 고민이 깊어졌다.

* * *

“말씀드렸던 대로, 빠르면 오늘 밤이 될 수도 있을 거예요.”

여섯 기사단의 단장들이 천막 안에 자리를 잡았다. 하나같이 이름을 떨치는 기사들이었다. 시엔이 뺨을 긁적거렸다.

기사단장들의 눈빛이 부담스럽기 그지없기 때문이었다. 먹이를 찾는 아기새가 연상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지휘관에게 있어 전쟁이 합리라면, 기사들에게는 로망이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전투에서 기사단장은 지휘관의 자리에 섰다. 사실, 기사들이 단장보다 부단장을 선호하기도 했는데, 머리 아픈 정치나 지휘와는 어울리고 싶지 않다는 속내였다.

그러나 1왕자파에서 모인 이백의 기사들, 이 정도면 한 개 정규 기사단 숫자에 지나지 않았다. 시엔이 단장 역할을 맡았으니 그들은 전장에 나서기만 하면 되었다.

그냥 전장이 아니라, 영광이 약속된 전장이었다. 단장들로서도 오랜만에 기사의 피가 끓어올라 있었다.

시엔 입장에서야 사실 조금 한심해 보이기는 했다. 무모한 작전을 영광과 용맹으로 포장했을 뿐이 아닌가.

그러나 기사들이란 본디 이렇게 키워진 이들이니 이해하지 못할 이유도 없었다. 이렇기에 기사들이 영주의 가장 날카로운 검이자 전장의 주인으로 꼽히는 것이고.

“준비는요?”

“북측 방면은 완료, 남측 방면 역시 조만간 완료될 거야.”

카레네의 말에, 시엔이 고개를 끄덕였다.

홀로 전쟁을 치렀던 흑마법사에겐 조금 어색한 일이었으나, 동시에 그 편안함에 놀랍기도 했다.

* * *

“팔퓌유 자작께선?”

“뭔가 일이 있으신가?”

사실 왕당파 귀족이 팔퓌유 자작을 따돌리거나 하지는 않았다. 물론 얕잡아보기는 했지만, 그래도 오래 보아온 북부 귀족의 일원이었으니까.

그러나 애초에 야습 작전 자체가 정규 회의를 통해 나온 것이 아니었다.

전황을 보고 이야기하던 도중 묘책이다 싶어 그 자리에서 결정되었다. 그러니 다들 누군가 팔퓌유 자작에게 알리겠지 하고 생각했으며 또한 전부 생각만 하고 말았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러한 오해에 대해 서로 억울해할 필요는 없었다.

“쯧. 사람이 그렇게 되셨구려, 한 번의 실수야 공을 세워 뒤집을 수 있는 것을.”

“애초에 그런 위인이라 홀랑 영지를 내주셨겠지.”

“되었고, 마침내 복수의 시간이 왔습니다.”

귀족들의 생각이 이러했으니 부러 따돌리진 않았다 해도 다를 것은 없었다.

야심한 밤을 틈타, 얄렘방의 북문과 남문이 빼꼼 열렸다. 그 사이로 기사들이 줄줄이 빠져나오기 시작했다.

북쪽에 이백, 남쪽에 삼백. 무려 오백의 기사를 동원한 야습 작전이었다.

기사가 이 정도 규모로 단독 행동에 나서는 작전이 전에 없었으며, 그 단독 부대가 야습에 나서는 것은 지난 참사 이후 역사에 두 번째가 될 터였다.

첫 번째의 발상이 어렵지, 두 번째로 따르는 것이야 그리 어렵지 않은 법이었다.

거기에 보강해, 야습은 두 방향이었다.

흐레이그의 태성 기사단과 그 외가 북문으로 빠져나가 우회하여 적의 북쪽에서, 나머지 가문의 기사단이 남문으로 빠져나와 남쪽에서 공격하는 양면공격이었다.

저번 참사 때처럼 날이 완전히 어두운 것은 아니었다. 사실, 그때는 애초에 물길잡이가 마법으로 끌어온 구름이었으니 자연에서는 매우 드문 깜깜한 밤이었다.

왕당파 입장에서야 일이 안 되려니 날씨까지 안 돕는다. 생각을 하고 말았지만.

갑주와 검, 말과 사람의 얼굴까지 검은 칠을 한 기사들이 성문을 빠져나와 대형을 이루었다. 모두 지난 참사에서 배운 것들이었다.

“모두 출발한다. 전원 속보.”

“전달, 속보.”

“전달, 속보.”

그리고 그걸 지켜보는 이가 있었다.

얄렘방의 북쪽, 시엔의 군대가 몰래 파투었던 개인호 밖으로 머리통 하나가 슬그머니 삐져나왔다.

전직 암살자 나비였다. 지금은 전직을 깔끔하게 떨쳐버리고 새로운 신앙에 눈을 뜬 상태였다.

그녀가 적 성문 방면에서 움직이는 불빛들을 바라보았다. 이르면 오늘에라도 당장 반응이 나타날 것이라 했던가.

“역시 시엔 님이시다. 다 알고 계셔.”

나비가 송수신기의 버튼을 눌렀다.

* * *

-시엔 님, 여기는 땅두더지 넷. 적의 습격입니다.

송수신기를 통해 전해 들은 시엔이 옆을 바라보았다.

“적의 습격이라는데?”

“윽. 시엔. 첫날은 아닐 거라며?”

“나도 이렇게 급하게 나올 줄은 몰랐지. 설마 하긴 했지만.”

“젠장.”

카레네가 인상을 찌푸렸다.

각 기사단이 모인 이유가 그러한 것처럼, 누가 선봉에 설 것이냐로 단장들끼리 서로 신경전을 벌였다.

창공 기사단은 오늘의 선봉이 아니었으니까.

애초에 적의 습격이야 예정된 바였다.

도시를 바깥으로 크게 돌며 성문을 파괴하다 보면, 결국 적의 입장에서는 무언가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반응이라고 해봐야 셋 중 하나였다.

시엔이 가장 걱정한 것은 적의 총공세였다. 소수로 편성된 부대가 대군에게 깜짝 피해는 입힐지언정, 숫자의 차이는 여실한 법이다.

다만, 총공세로 나올 확률은 희박했다. 곡식은 변질되어 병사들이 온전치 못할 테고 후방에서 보급을 조달하며 부대를 정비하고자 할 테니까.

아픈 군대 일만과 유리한 관문에 자리를 잡은 삼천의 군대. 승기는 반반, 서로 소모하여 승자도 패자도 없는 양패가 되리라.

두 번째로는 성문 밖에 주둔하여 시엔 무리가 아예 얄렘방 근처에 얼씬거리지 못하게 만드는 방법도 있었다.

왕성 수비를 하면 모를까, 겨우 자작령의 도시 하나를 지키고자 그러할 이유가 없으니 이 또한 아니리라.

결국 남은 방책은 세 번째. 시엔이 했던 것처럼 습격에 나서는 것뿐이었다.

이미 따라해 보라 직접 때리면서 가르쳐 주었다.

거기에 살살 약을 올리기까지 했다.

기사가 이백. 종자까지 하면 그 배이긴 해도 여전히 한 줌 소수의 병력이었다. 그리고 그 소수가 정예 중 정예이니 치워버리고 나면 얼마나 후련하겠는가.

문제는 그 시기였다.

적이 습격에 나설 것은 뻔한데, 그럼 그게 언제란 말이냐.

시엔의 답은 단순했다.

그럼 매일 준비하면 되는 일 아닌가.

그래도 이왕이면 티란디스의 기사단이 앞장서는 것이 보기 좋지 않은가. 카레네에게 대충 사흘 나흘 지나서 공격해오지 않겠느냐 귀띔을 해주기는 했다.

“기왕 야습을 벌이겠다면, 아직 준비되지 못한 첫날이 낫다는 거겠지.”

“사나흘이나 있어야 될 거라며?”

“생각보다 더 약이 올랐나 봐.”

적 지휘관의 판단은 나쁘지 않았다. 시엔도 당장 첫날에 이리 습격해 올 확률은 낮다 여겼으니.

시엔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래도 성급하면 될 일도 안 되는 법이야.”

* * *

달이 하늘을 절반쯤 움직였을 때였다.

불화살 한 대가 지상에서부터 하늘로 치솟아, 포물선을 그리며 떨어져 내렸다.

공격 신호였다.

“가자! 전원 돌격!”

“돌격하라!”

시엔의 진지 북쪽과 남쪽으로부터 두 기사단이가 짓쳐들어오기 시작했다.

아프란 경은 태성 기사단의 단장이었다.

흐레이그 하면 창성 기사단을 떠올리겠지만, 세 번째 기사단인 태성 역시 실력이 떨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선두에 서서 돌격하던 아프란 경은, 갑자기 앞으로 휙 쏠리며 몸이 날아가는 것을 느꼈다.

어찌해 볼 새도 없이 안면에 강렬한 충격을 받았으며, 그의 인생 마지막 순간이었다. 목이 꺾이고 나서도 살아있는 이는 없었으니까.

바닥에 단단히 말뚝을 박아둔 뒤, 튼튼한 줄로 서로 엮어둔 대기병 함정이었다. 설치한 입장에선 당해주면 좋고, 아니면 회수하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보란 듯이 걸리고 말았다.

기사를 통한 야습 작전을 생각해낸 이가, 그에 대응책을 생각해 내지 못했을까.

선두에 선 기사들이 우수수 낙마했다. 기사는 튕겨 사방으로 날아가고, 말이 바닥을 뒹굴며 쓰러졌다.

그 위로 기사들의 2진이 내달렸다. 쓰러진 말과 기사들이 걸림돌이 되어 2진 역시 우수수 무너져내렸다.

시엔이 야습을 창성 기사단의, 그것도 소수만으로 진행한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카레네가 심심하면 진행하는 것이 훈련이었고, 그렇게 단련된 기사단의 합을 알기에 벌인 일이었다.

거기에 단단히 일러두기까지 했으니.

기마는 일렬로. 낙오자는 구하지 말고 버릴 것. 돌파만을 목적으로, 적 섬멸에 절대 신경쓰지 말고 크게 한 바퀴 돌아 나온다고 생각해라.

야간 기마 운용이란 대규모로 벌일만한 일이 못 되었다. 사람은 밤눈이 밝을 수 있지만, 말까지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일 테니까.

적의 기사단이 벌써 반쯤이나 붕괴했다.

돌격에 선두에 선 이는 기사 중에서도 특출한 실력자들이자, 지휘관들이었다. 그런 이들이 순식간에 줄줄이 죽어나갔다.

문제가 계속 이어졌다.

어두운 밤이라 상황 파악이 되지 않는 상황에서 난리가 벌어졌다. 명령을 내려야 할 지휘관은 이미 낙마해 죽거나 신음했다.

절반이 넘는 기사가 순식간에 전투에서 이탈했고, 남은 기사들은 목적 없는 돌진을 이어갔다.

그리고 그 둘이 마침내 시엔의 진영을 덮쳤다. 아무도 없는 진영이었다.

이미 빠져나와 후방에 돌격 준비를 마친 후였으니까.

“오우. 그래도 양쪽에서 칠 줄은 몰랐는데.”

시엔의 눈이 어둠 저편, 저 너머 진영이 있던 자리를 바라보았다.

밤은 누구에게나 취약한 시기였고, 특히나 숫자가 모자란 이에게는 더욱 그랬다.

시엔이 나팔을 들어올렸다.

< 33. 얄밉게 더 얄밉게 [6]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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