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3. 얄밉게 더 얄밉게 [5] >
과거 대륙을 뒤흔든 흑마법사는, 사실 전술적 소양이 딱히 뛰어나지는 않았다.
물론 제왕학에 전술 과목이 있어 왕국 제일가는 현자에게 전수 받기는 했으나, 그리 훌륭한 학생은 아니었으니까.
흑마법사의 전쟁이란 일인군단, 결국 혼자 치룬 것이라 일반적인 전술 감각과는 상당히 차이가 났다.
흑마법사가 땅을 탐하지 않았으니 점령에 대해서 모르고, 홀몸으로 휘저었으니 전선을 짤 줄도 몰랐다.
그러니 흑마법사의 전쟁은 상대적 소모에 지나지 않았다. 아군보다 적의 소모가 크면, 결국 시간이 지나 무너지게 되어있다. 흑마법사의 결론이었고, 스스로 결말짓지는 못했다 해도 결과적으로 그렇게 되었다.
흑마법사가 가진 전쟁의 개념이 일반적인 전술가들과 다르니, 겨루는 입장에선 대체 이게 뭔가 싶을 수밖에는.
킬지언 흐레이그가 그랬다.
1왕자파의 군대가 나타났다.
얼마 되지 않는 군대. 이백 정도 되려나. 사실 군대라고 하기에도 미묘한 숫자였다.
전원 말을 탄 적의 군대가 얄렘방의 성벽을 따라 크게 돌았다. 동문 밖 먼 지점에 자리잡더니 이내 연기가 피어올랐다.
식사 준비였다.
일만이 넘는 병력이 주둔하는 성을 앞에 두고 참으로 대담한 짓거리였다. 너무 대담해서 문제였다.
“저들의 의도를 모르겠군요.”
“얄렘방을 포위하겠다는 것이 아닙니까?”
“포위 말입니까? 이걸 포위라고 합니까?”
귀족 하나가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포위란 수적으로 우세한 부대가 적의 완전한 섬멸 혹은 그에 준하는 달성을 위해 행하는 전술이었다.
서로 대등한 병력이기만 해도 성립되지 않는 전술이기도 했다. 그냥 포위당한 측에서 한 점을 기준 삼아 돌파해버리면 그만이 아닌가.
“양동이겠지요. 이쪽의 이목을 끌고, 그 사이에 공격하겠다는.”
“그편이 옳겠습니다만.”
귀족들이 침묵했다.
반란군이 수성중일 때도, 그러니까 숫자가 세 배 많을 때도 함부로 공격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반대. 양동이고 뭐고, 주력 부대의 반절이 마실을 나가더라도 반역도들의 숫자로는 공성이 쉽지 않을 터였다.
“그냥 밀어버리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그 시엔이 하는 일이 아닙니까?”
이미 한 대 맞았다. 그것도 대단히 아프게.
맞아서 아픈 줄 알게 되면, 다음부터는 두려움이 따르기 마련. 다른 말로는 신중해진다고도 했다.
적의 지휘관의 용병술을 짐작할 수 없다는 사실이 귀족들을 번민케 했다. 그리고 이내 결론을 내렸다.
결정은 총사령관이 할 일이다.
귀족들의 시선이 상석으로 향했다.
킬지언 흐레이그가 고민했다.
가만히 놔둘 수는 없고, 대응하자니 무언가 노림새가 있을 것 같았다. 혹여 저번처럼 마법사들을 매복시켜 놓은 것은 아닐까.
황당한 것도 정도가 있는 법이었다. 상대가 오히려 당당하게 나오니 오히려 이쪽이 더 고민이 될 수밖에.
“일단 조금 지켜보도록 합시다.”
* * *
세계수의 나뭇가지를 들고 집중하려면 트리예에게 시엔이 문득 말을 걸었다.
“벤트리데아 루니시아스. 누구신지 알아?”
“그게 누구신가요? 소녀는 모르겠습니다.”
트리예가 대답했다.
시엔은 모시기에 좋은 스승이었다.
까탈스럽지도 않고, 가르침이 인색하지도 않았다.
“심연탑이 이제 위아래가 다 없어졌네. 대모님을 모른단 말이야?”
“지워진 과거가 너무 많답니다.”
심연탑이 남아있는 것만도 기적에 가까웠다. 기록에 따르면, 과거 흑마법사 사후 대륙적으로 일어난 흑마법 추방은 광기에 가까웠다고.
그런 이유로 트리예가 눈을 빛냈다. 마법사란 기본적으로 탐구자들이며, 시엔은 그 정점에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으니까.
“그런데, 대모님이라 하시면.”
“전설적인 선배님이시지.”
트리예가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시엔은 이미 전설이었다. 그 전설적인 선배님의 또 전설적인 선배님이라니.
“실생활에 유용한 흑마법을 연구하시는 분이었지. 그와 별개로 여섯 학파의 원로 자격을 동시에 가지기도 하셨고.”
시엔이 이야기를 풀었다.
벤트리데아의 연구 분야는 실생활에 유용한 흑마법으로, 심연탑이 가진 부정적인 평판을 지우고자 노력했다. 그런 헌신의 결과, 좋은 선배이자 좋은 후배, 속성과 상관없이 존경할 만한 마법사로 대륙에 이름을 떨쳤다.
더불어 그녀는 그 결벽증으로도 유명했다.
그녀의 연구실은 항상 먼지 한 톨도 찾아볼 수 없다던가. 그리하여 그녀의 최대 고민은, 청소를 해도 해도 나타나는 그 먼지들을 어떻게 하면 깔끔하게 처리할 수 있을지에 대한 것이었다.
치워도 치워도 나타난다면, 이미 치운 것들이 몰래 되돌아오는 것이 아닐까.
벤트리데아의 생각에, 세상의 먼지를 치운다 해도 그 총량은 일정한 것이었다. 그러니 치우고 또 치워봐야 무용. 박멸을 위해선 아예 세상에서 없애버려야 하지 않을까.
“그래서 선배님께선 먼지들을 아예 허수 세계로 전송해 세상에서 추방하고자 했지.”
“소녀는 잘 이해가 되지 않네요. 세상에 먼지가 그리 많은데, 조금 추방한다 한들.”
“그런 부분이 존경스러운 선배님이지. 우리하곤 생각부터가 달라. 아주 조금씩이라도 없애가다 보면, 본인뿐만 아니라 세상에 이로운 일이 되지 않겠느냐고.”
“아.”
“그래서 술식을 만드셨는데 말이지.”
먼저 허수 세계와의 연결을 현상계에 발현시킬 필요가 있었다. 고도의 연산을 통해 만들어진 열쇠가 그 핵심이었다.
그 열쇠를 목표 지점의 투사, 음차원 특이점을 형성했다. 특이점을 통해 자연상 음차원 에너지가 고속으로 빨려들어아고, 그 결과 한 지점으로 강력한 압력이 발생했다.
그렇게 한 지점으로 먼지를 모두 모은 후에, 마침내 자연 소멸한 특이점이 허수 차원으로 이동하는 원리였다.
“아. 그렇다면. 영원한 밤의 창날이 바로 그……”
시엔이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는 청소 마법이었어. 범위도 아주 좁고, 모아둔 먼지 위에 시전해 치우는 자잘한 청소 마법이었는데.”
세상의 순환은 절대적인 것.
산 것과 죽은 것. 지성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을을 통틀어 모든 것은 살고 죽어 땅으로 돌아가고 다시 살아가는 거대한 원에 속했다.
벤트리데아가 청소를 위해 만든 주문은, 실상 위대한 순환에서 존재 자체를 추방하는 마법이었다.
“언젠가 주문을 완성한 녀석에게 선배님 이야기를 같이 들려주겠다고 생각했거든.”
“아아.”
트리예는 감격한 표정이었다.
네가 영원한 밤의 창날 주문을 완성했으니 들려주었다는 뜻이 아닌가. 비록 지금은 세계수의 힘을 빌려야만 사용할 수 있긴 하지만.
“됐고. 준비됐으면 바로 쏴.”
트리예가 다시 정신을 집중했다. 사악한 진언이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세상이 편애하는 언어, 개인의 의지가 깃든 말 아닌 말.
한참이나 후에야, 검은 창날이 겨우 허공에 모습을 드러냈다. 창머리가 잠시 방향을 헤메이다, 이내 한 지점을 가리켜 우뚝 멈춰섰다.
얄렘방의 성문을 향해서.
뒤이어 창날이 검은 선을 그리며 날았다. 성문에 구멍이 뻥 뚫렸다.
트리예가 가쁜 숨을 내쉬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아직은 힘에 부친 고위 마법이었다. 그나마 세계수의 나뭇가지가 아니었다면 백파이어로 정신 세계가 날아갔으리라.
“좋아. 성공적이네.”
시엔이 트리예에게서 세계수의 나뭇가지를 회수했다. 잠시 후, 거창 몇 개가 연이어 허공을 갈랐다.
수많은 경첩 중 대다수를 잃은 성문이 쾅 소리를 내며 쓰러져 내렸다.
* * *
공성 파괴자.
단신으로 성문을 빵빵 날려버린다고 했던가.
전해듣는 것과 직접 경험하는 것은 달랐다. 어떠한 전투도 없이 성문이 활짝 열렸다.
적이 소수라 망정이지, 만약 비슷한 숫자였다면? 오히려 더 많다면?
팔퓌유 자작이 항복한 것도 이해가 갔다.
자작령치고는 기이할 정도로 넓으며 옥토와 생산량으로 영민의 숫자가 많다 한들, 국법으로 정해진 군대의 숫자를 어쩌지는 못했다.
수성도 안 되고, 군대의 숫자도 모자란다면 싸워서 죽기보단 항복할 수밖에는.
킬지언이 이를 으득 갈았다.
뚫린 성문을 방치할 수는 없다. 하부 전선에서 병력을 충원받았으니, 저 반역도들 역시 그럴 수 있었다. 그 전에 성문을 다시 막아놓아야 했다.
일단 적들의 처리부터.
성문까지 적 마법이 닿았다. 적을 치워 버리지 않으면, 성문을 수리하는 병사들을 공격할 것이 뻔했다.
물론 마법사도 무한히 마법을 부리지는 못하니, 병력을 계속 충원하여 수리한다면야 가능하겠지만. 그렇게 수리를 하고 나면? 또 부수지 않는다는 보장이 있던가?
“적들을 처리해야 합니다. 의견들 있으십니까?”
“병력을 보내 물리쳐야겠지요. 저들은 한 줌밖에 안 되니.”
“우리의 숫자가 일만입니다. 일만.”
“상대도 안 될 것들이 성가시게 구는군요.”
성가시다. 왕당파 귀족들의 평가였다.
애초에 병력의 절대적 우위를 가진 상황이었다. 병사들의 상태가 조금 아니라서 적의 본대를 공격하기에는 무리가 있었지만, 겨우 삼백을 상대로 위기감을 느낄 정도는 아니었다.
당장 병력을 보내 토벌하자는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다음은 누가 얼마나 병력을 보낼 것인지 의논을 하려던 때였다.
막사 안으로 전령이 뛰어 들어왔다.
“적들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 * *
얄렘방의 동문을 박살을 낸 시엔이 기사들을 이끌고 북쪽으로 향했다.
멀리 가는 것이 아니라, 완만히 원호를 그리다 어느 순간 멈춰서니 저 멀리 얄렘방의 북문이 보였다. 서문에서 왼쪽으로 돌아 북문 방면에 자리를 잡은 것이었다.
다음에 한 일도 간단했다.
영원한 밤의 창날. 검은 거창이 성문을 향해 쏘아져나가고, 경첩을 여럿 잃은 성문이 제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스스로 쓰러지고 말았다.
기사들은 어깨와 어깨를 맞댄 채로 정연히 서서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몇 번을 봐도 참으로 신기한 구경거리이긴 했다.
그리고 이 적은 병력의 하나뿐인 천막 안에서, 기사들이 열심히 땅을 파헤치고 있었다.
땅을 파 공간을 만들고, 나무를 엮어 덮개를 짰다. 그 위로 떼를 엮은 땅가죽을 둘렀다. 주변을 정리하고 나서 다시 천막을 거두니 감쪽같은 은신처가 뚝딱 만들어졌다.
은신처가 완성되고 기사단이 서쪽으로 향했다. 이번엔 서문이 멀리 보이는 자리였다.
그러나 이미 해가 져서 어둑하니, 곧장 천막을 치고 불을 피웠다.
* * *
아침에 동문이, 오후에 북문이 쓰러졌다.
그 후에 왕당파가 공병을 동원해 성문을 복구하기 시작했다. 시엔의 군대가 지켜보지 않고 떠났으니 당연한 수순이었다.
먼저 쓰러졌던 동문을 다시 매달았으며, 북문은 야간까지 작업하여 내일 아침에는 다시 서게 될 터였다.
덕분에 사기가 바닥을 쳤다.
당연한 일이었다.
병사 입장에서는 곡소리가 나올 수밖에.
안 그래도 배앓이가 심해 밤낮으로 시달리는 와중이었다. 군의는 단순한 배탈이라고 했다.
병사들이 생각하기에 단순한 배탈은 아닌 것 같았다. 일단 귀족들이나 기사들을 제외하면 한 명도 빠짐없이 배앓이를 하는 데에다, 도대체가 차도가 없었다. 나아지기는커녕 나날히 심해지는 것 같았다.
그늘병에 걸린 곡식은 먹더라도 배앓이에 그쳤다. 장복하면 모르겠지만, 당장 사단이 나지는 않을 테니 왕당파가 모른 척 계속 군량을 소모한 까닭이었다.
귀족들과 기사들은 변질된 곡식을 먹지 않아 멀쩡했다. 개중에 배앓이를 한 이도 있었지만 곡식을 끓어 금방 나아졌다.
곡식이 상했다면 고기를 먹으면 되는 일이었다. 영민에게 징발한 멀쩡한 곡식도 있었다.
그러나 병사들까지 그리 먹일 수는 없었다. 애초에 뭐가 있어야 먹이든 말든 하지.
이 와중에 적은 당당하게 나타나 성문을 박살내고, 그 뒤처리가 또 병사의 몫이었다.
그뿐이랴. 성문을 고치고 보강하는 자재가 따로 있을까. 급한 대로 도시의 집을 허물어 보충하니, 민심 역시 사납기 그지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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