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작가의 망령재림-154화 (152/268)

< 32. 마법사는 전장의 꽃 [4] >

발상 자체는 단순했다.

가문의 최정예 기사들, 최고의 기병을 추려 야습을 감행. 적진을 한 바퀴 휘감고 돌아나오는 임무가 전부였다.

그리고 마법사로 구성된 별대를 적 주둔지 가까이에 배치한 후, 아군 기마대의 복귀를 엄호하기로.

그러나 쉬이 볼 수 없는 기책이었다.

군대는 황금을 삼키는 괴물이며, 그중에서도 제일은 기병이다. 기병 중에서도 기사단의 유지비는 상식을 초월했다.

그런 기사단을, 개중에서도 최정예들을 적진으로 밀어넣으리라 누가 생각하겠는가.

전쟁사에 몇 번 등장한 전술이긴 했다.

일만 가까운 대군에 돌진하는 오십인의 기사단. 기사라면 누구나 한 번쯤 꿈꾸는 전설적인 전공이었다.

물론 가장 명예로운 최후라는 뜻에서.

그러나 마법사의 적진 근접 잠입은 달랐다.

병법에 마법사란 가장 안전한 곳에서 호위하다 거시적 국면에 쓰이는 전략병기이니, 그런 고급 병력이 주둔지 코앞까지 잠입한다는 것이 대체 말이나 되는 소리랴.

애초에 마법사 본인이 거절할 일이었다.

마법사와 영주의 관계란 군신이 아니라 고용 혹은 파견에 지나지 않았으니까. 귀족이라 해도 위험한 임무를 강제할 방도가 없다.

그러나 화염탑의 방화광들은 그렇게 했다.

시엔이 용의 피를 살랑살랑 흔들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부탑주 알렌 앞에 은근슬쩍 세올을 들이밀기까지 했으니 순정 소년의 방심에 불이 붙었다.

객기와 만용은 소년에게 허물이 되지 않는 법이었으니까.

다만 그 마음이 너무 흘러넘치고 말았다. 그게 아니라도 방화광이 괜히 방화광이라 불리겠는가. 화염탑의 방화광들이 전쟁에 나서는 이유는 대개 비슷했다.

그저 거기에 태울 것이 있으니까.

“너무 신났구만.”

휘유. 성벽 위에 서서 어두운 밤을 꿰뚫고 기사단을 유도하던 시엔이 휘파람을 불었다.

화염이 솟구쳤다.

달도 별도 가려진 깜깜한 밤. 그 모든 어둠을 살라먹고 낮처럼 밝은 태양이 밤의 대지 위에 밝았다.

어디 보자. 스물, 스물일곱.

시엔이 눈을 가늘게 떴다.

불길에 휩싸여 맞이하는 임종을 소사라고 했다. 그렇게 죽은 이를 소사자라 불렀다.

소사야말로 가장 고통스러운 죽음이라 하던가. 육신이 아프면 세상이 원망스럽고, 이따금 소사자 중 특별히 더 원망이 깊어 영에 스미는 자들이 있었다.

버닝 신, 소사자들의 망령이었다.

마침 시엔이 개중 강력한 것을 품에 기르고 있으니, 이를 먹여 더욱 그 힘을 불릴 수 있었다.

시엔이 속으로 세는 숫자가 마흔에 이르렀다. 버닝 신이 그리 귀한 망령은 아니지만, 애초에 불에 타 죽는 이 자체가 드물지 않던가. 이럴 때에 먹여두면 두고두고 도움이 될 터였다.

“영원히 불타오르거나, 혹은 사라지거나라면야. 뭐.”

세월에 빗겨가 영원히 불타 고통받는 신세보단, 차라리 망령에 먹이로 주어 소멸시키는 것이 자비가 아닐까.

시엔이 손을 내젓자, 불타는 그림자가 아직 밝은 밤을 가로질러 빛을 향했다. 생각이야 어쨌든, 굳이 자비라거나 하는 이유는 아니었다.

어차피 산 자와 죽은 자는 다르니, 이미 죽어 혼이 된 이를 가여워할 이유가 없음이라.

그냥 먹여두는 것이 이득이니 그렇게 했을 뿐이었다.

“뭐. 예상치 못한 부수입이 있긴 했는데.”

시엔이 적진이 있던 곳을 바라보았다.

순진무구의 놀이 이후 어둠마저 꿰뚫어보던 그 눈이었다. 마찬가지로 밝은 빛 속에서도 부시지 않고 온전히 광경을 비추었다.

불놀이가 너무 과했다. 방화광들의 임무는 언제까지나 카레네 부대의 복귀를 엄호하라는 것이지, 적을 몽땅 태워버리라 하진 않았으니까.

부탑주 그 어린 녀석. 방화광에게 불이 어떤 의미겠는가. 이 창대한 불길은 세올에게 보내는 연서와 같을 터였다.

물론 세올 녀석이야 별생각 없겠지만.

시엔이 송수신기를 다시 들어 올렸다.

* * *

야습은 당했더라도 적 기병대를 살려보낼 수는 없는 노릇, 흐레이그 직속의 정예병들이 장창과 방패로 대기병 방진을 일사분란하게 짜 맞췄다.

덕분에 적을 등지고 아군을 향해 창과 방패를 겨운 기이한 꼴이 되고 말았지만.

왕당파 군대의 총사령 킬지언의 지휘는 칭송받을 만한 것이었다. 아닌 밤에 야습을 맞이해, 빠르게 사태를 수습하고 직속 병력을 배치하지 않았던가. 적어도 여기까지는.

마법사들의 존재를 알았다면, 그들에게 절대 등을 비추지 않았을 터였다.

불이다. 스물의 방화광이 피워낸 큰 불이다.

불길에 중심에 있던 자들은 차라리 운이 좋았다. 뜨거움을 느낄 새도 없이, 곧바로 불타 사라져 제 죽음조차 모르고 사라질 수 있었으니까.

어설프게 휘말린 병사들이 불붙은 몸뚱이를 어쩔 줄 몰라 땅을 구르고 절규했다.

누군가는 어미를 찾고 누군가는 신을 찾았다. 그러나 구원을 바라는 자는 오히려 소수였다.

대개는 사람의 말이 아닌, 그저 처절한 괴성을 토해냈으니까.

화르륵!

화염이 타오르는 거대한 소음이 모든 소리를 삼켰다. 왕당파의 군대는 그저 입모양으로 소리칠 뿐이었다.

-도망쳐. 살려줘. 으아아악.

서로 밀지고 밀리며 타오르고 굴렀다. 현상 세계에 그야말로 참상이 펼쳐지는 꼴이었다. 예상치 못한 재앙 속에서 군인은 없고 그저 개인이 남았다.

차라리 제대로 된 회전 중이었다면 이렇게 흐트러지진 않았을 것이다. 충천된 사기를 업고 독전관을 등지고 돌격 중이었다면, 피어오르는 불길에도 적에게 닿기 위해 다리를 움직였을 터였다. 그것이 군대의 의미였으니까.

그러나 이미 야습으로 혼란한 상황에서 갑자기 터진, 게다가 스물의 마법사가 피워낸 화염구는 어지간한 대저택과 비슷한 규모였으니.

그리고 방화광들은 자신들의 작품을 넋 놓고 바라보았다.

온통 화광으로 발그레한 낯을 하고, 눈동자에 담긴 것은 온통 이글거리는 불길뿐이었다.

번득한 눈과 멍히 벌어진 입을 하고서. 세상 가장 경이로운 장면이라도 바라보듯, 눈조차 깜박이지 않고 타오르는 세상을, 불타는 적병들을 집요하게 응시했다.

나비가 방화광들을 보며 생각했다.

‘쟤낸 뜨겁지도 않나?’

발화점에서 제법 거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후끈하게 얼굴이 익는 기분이었다.

애초에 눈이 부셔서 뭐가 무언지, 그저 시야 가득 피어오르는 불, 불, 그저 붉고 푸르고 흰 넘실거림뿐이건만.

그때, 나비의 송수신기에서 음성이 샜다.

-나비. 거기 방화광들 좀 말려. 불장난은 끝내고 이제 집에 돌아오도록.

“알겠습니다, 시엔 님!”

또 계시가 왔구나. 열렬히 숭배하는 분께.

나비가 박수를 짝짝 치며 말했다.

“이제 돌아갈 시간이랍니다. 여러분들.”

그러나 불이 타오르는 소리가 굉음이 아니던가. 거기에 방화광들은 누가 박수를 치는지 말을 거는지 어쨌거나 불이나 보자는 식이었고.

“집에 가야 한다구요. 그분께서 부르세요!”

나비가 방화광들을 쿡쿡 찌르며 소리쳤다.

* * *

밤중에 큰 난리가 있더라도 다시 태양은 뜨기 마련이었다.

새벽 중에 태양이 대지 위에 한 번 나타났으니 오늘만은 특별히 해가 두 번 떴다 말해도 틀린 말은 아니었겠지만.

흐레이그 공작가를 중심으로 모인 왕당파 연합군 귀족이자, 저마다 군대를 이끌고 참가한 지휘관들이 침통한 기색으로 눈알만 이리저리 굴릴 뿐.

지휘 막사엔 정적만이 감돌았다.

총사령을 맡은 킬지언이 먼저 말을 꺼냈다.

“……피해가 얼마나 됩니까?”

귀족들이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이쪽은 일흔 둘이 실종되었소.”

귀족 하나가 대답을 붙였다.

실종. 말이 실종이지 거의 사망이라 봐야 했다. 습격이 바로 간밤이라 아직 그 수습이 제대로 되지 않아 실종이라 부를 뿐이었다.

그 뒤로도 저마다 귀족들이 한 마디 더해 실종의 숫자가 천에 가까웠다.

귀족들의 목소리에는 불만이 스며들어 있었다.

군대의 공을 지휘관이 가져가듯이, 과실 역시 지휘관의 몫이었다. 총사령관이 바로 킬지언이었다.

그러니까 내 잘못이다 이거지.

킬지언이 이를 으득 갈았다.

시엔 티란디스. 바로 그놈이다.

미친놈인 줄이야 왕실에 뻗댈 때부터 알아봤다. 뒤이어 공주를 챙기고 심지어는 왕자를 빼돌려 내전을 일으키기까지 했으니 미쳐도 제대로 미친놈이리라.

하지만 그 누가 이런 짓을 벌일까 생각이나 할 수 있었을까. 일만에 가까운 군대에 소수의 습격조를 보내다니.

게다가 단순한 습격조가 아니었다.

주둔지를 크게 휘돌며 앞에 걸리는 것들을 몽땅 갈아버릴 정도의 최정예 기병들이었다.

기병? 기병으로는 어림도 없는 전술이었다. 아마도 기병이 아니라 기사들.

젠장, 기사를 사지로 내몰았다고?

거기에 마법사들은 또 어떻게…….

킬지언이 이마를 거칠게 주무르며 목소리를 깔았다.

“……본가에선 삼백이 넘는 정병이 보이지 않는 상황입니다.”

“헛.”

“크흠…….”

귀족들이 헛기침하며 공연히 딴 곳을 바라보았다. 흐레이그를 중심으로 모였고, 또 흐레이그의 피해가 제일 컸다. 게다가 총사령의 실책이라기엔 그들 중 누구 하나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 여기서 불만을 대놓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흐레이그의 병사들은 정예병이어서 더 피해가 컸다. 습격자들의 퇴로를 막은 탓에 거대한 화염에 휘말렸다.

그 혼란 속에서도 지휘체계를 잡고 빠르게 명령을 따를 정도로 훈련된 영지의 정예병이었다.

그 정예병들이 시체조차 없이 재가 되어 흩어지고 말았다. 분한 마음에 얼마나 이를 갈았는지, 회의 전에 이빨 조각 몇 개를 뱉어낸 킬지언이었다.

“당분간 피해 수습에 집중하여 주셔야겠습니다.”

“앞으로 어떻게 하실 생각이시오? 이대로 계속 대기하다간 사기가 땅바닥에 떨어지고 말 것인데.”

콧수염을 멋지게 기른 귀족 하나가 물었다. 킬지언이 고개를 저었다.

“저 반역자들이 노리는 것이 바로 저희들의 공세입니다. 반역자들의 숫자는 삼천에 불과하고, 저희는 피해를 감안하더라도 두 배가 훌쩍 넘는 상황이 아닙니까.”

공성을 위한 지원군이 도착하고 나면, 저들은 패배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아닙니까. 사기 문제는, 음, 사망자를 수습하고, 병사들을 분노로 독려해 주시지요.”

“그럼, 또다시 이런 습격이 있으면 어쩔 것이오? 아주 악독한 습격이었소. 애초에 죽음을 각오하고 달려든 놈들일 터인데, 두 번 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있겠소이까?”

킬지언이 잠시 침묵했다.

듣고 보니 맞는 말이어서다.

킬지언이 금방 해답을 내놓았다.

“병사를 세 조로 나누어 낮에 눈을 붙이고 밤에 깨어있도록 하면 어떻겠습니까? 군대의 삼분지 일만 깨어있어도 반역자들의 숫자와 비슷하니, 어떠한 습격도 쉬이 막아낼 수 있을 겁니다.”

병사들의 고생문이 활짝 열리는 소리였다.

“그래서야 군대의 피로도가 너무 심하지 않겠소이까?”

“두 배. 파발을 보내 두 배 이상의 지원군과 공성 병기가 도착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필요하다면 하부 전선의 군대까지 동원하겠습니다. 도착하는 대로 총공격에 나서지요. 이 참상의 복수는 그때 배로 갚아줄 것입니다.”

킬지언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는 공작가의 후계자였다. 덜떨어진 형제와는 달리, 들끓는 분노를 가슴에 품고도 차가운 이성을 유지할 수 있는 성정이었다.

“지원군이 도착하고 나면, 저 빌어먹을 반역자들을 한 놈도 빠짐없이 불태워 버리겠습니다. 항복도 자비도 없을 겁니다.”

킬지언이 선언했다.

* * *

얄렘방, 영주 저택 대회의실.

각자 군대를 이끌고 있는 1왕자파의 귀족들은 화색이 만연했다. 시엔을 바라보는 시선들이 참으로 고왔다.

그 가운데에서, 시엔이 말했다.

“이제 철수하도록 하죠.”

특유의 악동 같은 미소와 함께.

< 32. 마법사는 전장의 꽃 [4]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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