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법사는 전장의 꽃 [1] >
용. 마법사들의 가장 끔찍한 악몽이었다.
용이 마법사들에게 딱히 피해를 입히거나 하는 것은 아니었다. 굳이 끔찍한 이유라면, 존재 그 자체에 있었다.
용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 마법사는 없다.
심지어 고전 제2기 시대에는 한 지방마다 다수의 용이 인간과 어울려 살았다는 것이 학계의 정설이었다.
그러나 그 용들이 전부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대륙에선 이미 그 자취조차 찾아볼 수가 없다. 그나마 바다 저편, 바닥 없는 깊은 물의 세계에서나 간혹 관측될 뿐이었으니. 그나마도 파도등대의 일방적인 발표뿐이라 다른 마탑 입장에선 별로 믿기지 않는 이야기였다.
그래서 마법사의 악몽이었다.
세상에 실존하나 찾을 수 없는 존재. 관측 불가능한 실존이니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속이 막히고 답답한 노릇이었다. 어쩌면 인류 전체가 만들어낸 어떤 환상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마저 끌어내는 그런 생명.
그러던 와중 티란디스의 대공자가 용을 사역한다는 기상천외한 소식을 들었다. 마법사들이 앞다투어 달려온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자 시엔은 1호 시약병, 가장 작은 용기에 제 피를 뽑아 담았다. 어차피 그 피가 그 피니까 상관은 없으리라.
그렇게 뽑은 피가 시약병 네 개 분량이었다.
그리고 시엔이 전선으로 향하기 전에 로우드에게 맡겼다. 네 개 마탑이니 하나씩 가져다 팔라는 뜻이었다.
“이게 그렇게 가치가 있다고?”
로우드가 고민에 빠졌다.
팔 기회가 있을 때 가장 비싸게 판다. 재화를 파는 이의 기본이었다. 하지만 이걸 얼마에 팔면 좋은가. 팔 물건의 가치를 파는 이가 모르니 도통 알 수가 있어야지.
그렇다면, 살 사람이 그 가치를 스스로 증명하도록 할 수밖에는.
결국, 로우드가 마법사들을 불러모았다.
“나는 티란디스의 재무관으로, 상단이 관리하는 모든 품목의 품질을 관리할 책임도 가지고 있다. 용의 피라는 것이 들어왔는데 말야. 나는 마법 같은 건 모른다. 그러니 용의 피인지 뭔지 증명할 방법이 없으니, 그건 전문가에게 맡기겠다.”
이후, 마법사들의 논의가 이어졌다.
한 병이라 해도 1호 시약병 하나의 미묘한 분량.
오랜 토의와 높아지는 목소리, 그리고 몇 번의 멱살잡이가 이어졌다. 그 결과, 마탑을 불문한 공개 실험을 통해 혈액 특성 분석이 이루어졌다.
실험 결과가 각 마탑에 전달되었다. 그리고 네 마탑 모두 같은 답장을 전했다.
어떻게 해서든 최대 수량을 확보할 것.
이후 나머지 세 병의 경매가 열렸다.
로우드가 기분 좋게 잠자리에 들었다.
계속되는 끔찍한 재정 적자 속, 대체 얼마 만인지 모르는 달콤한 평온이었다.
* * *
루우트다렌 함락.
루우트다렌이 어떤 요새인가. 굳건한 외벽과 세 겹의 내벽, 그리고 고립 항전 가능한 본채를 가진 왕국 최고의 요새였다.
함락전에서 요새의 본채가 반파되었으며, 방어측 지휘관이었던 케렌 찰신 백작은 후방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다.
문제는 그 와중에 쓰인 수법이었다.
거짓 항복으로 공성측을 불러들여 큰 피해를 입혔으니, 그 분노는 이루 말할 수 없으리라. 게다가 이후 요새가 무너지고 지휘관이 부재하니 사태를 수습할 책임자도 없었다.
분노한 1왕자파의 군대가 칼을 휘둘렀다. 산발적 항복이 이어졌으나, 이미 험한 꼴을 보고 눈이 뒤집힌 상황이었다.
당연한 수순으로 학살이 이어졌다.
루우트다렌의 참화가 왕국에 퍼졌다.
요새를 아예 무너뜨리고, 이미 전의를 잃고 항복한 수비군의 집단 처형이 이루어졌다는 소식이었다.
왕당파가 일제히 비난에 나섰다.
이러한 무도한 행위를 자행하며 어찌 왕국을 위한 일이라 지껄일 수 있냐는 것이었다.
1왕자파 역시 맞불을 놓았다.
거짓 항복이라는 비열한 수법에 마땅한 응징이었다는 것이었다.
1왕자파의 피해도 적지 않았다.
특히 지휘관급의 피해가 컸다.
지휘관들이 말에 타고 있었던 점이 치명적으로 작용했다. 빙판 위에서 말이 균형을 잃자, 지휘관들의 낙마가 이어졌다.
본디 낙마는 위험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빙판이 펼쳐지자마자 부대를 이끈 본인들이 부러지고 깨져나갔다. 개중 두 명이 목숨을 잃었다. 한 가문의 주인이 바뀌었고, 한 가문이 후계자를 잃었다.
내전의 국면이 변화하는 순간이었다.
지금까지의 내전이 냉정한 손익 계산에 따른 파벌 간의 싸움이었다면, 이제부터는 서로의 섬멸을 목표로 한 총력전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양측 모두 대대적 징집이 이루어졌다.
더불어 전선의 대치 상황 역시 심각한 긴장 상태에 빠졌다. 징집으로 증원된 군대가 전투 배치에 들어간 것이다.
패배가 곧 약탈로 이어지는 상황이었다. 전선에 자리 잡은 영지의 군대가 방위를 위해 이탈하고, 지원군 역시 귀족의 사정으로 저마다 흩어져 자리를 잡았기 때문이었다.
시엔이 상부 전선 사령부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병력의 반절이 빠져나간 상태였다.
이 상황에서, 낯익은 얼굴들이 시엔을 반겼다.
파도등대의 차석 등대지기인 셀시와 화염탑의 부탑주 알렌이었다.
“그간 잘 지내셨나요, 도련님?”
“셀시? 여긴 무슨 일이죠?”
“티란디스에 수준급 마법사를 파견하기로 했으니. 제가 직접 나섰답니다.”
“차석 등대지기가 직접이요?”
“도련님이시잖아요. 파도등대의 은인이신데. 안 그래요?”
영 설득력이 떨어지는 소리였다.
비구름의 사용 조건으로 금화와 더불어 수준급 마법사의 가문 파견을 걸기는 했다. 그래도 부탑주가 직접 나서는 일은 전례가 없는 일이리라.
시엔이 미심쩍다는 눈빛을 보내자, 셀시가 뒷목어림을 북북 긁었다. 그러다 이내 한숨을 푹 쉬며 말했다.
“사실대로 말씀드릴게요. 이번에 용의 혈액 낙찰에 실패하는 바람에 직접 오게 되었어요. 혹시 이후 분량이 있으면 배정을 부탁드린다는 인선이랍니다.”
“낙찰에 실패했다구요?”
시엔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마탑 당 하나씩 돌아가도록 피를 무려 네 병이나 뽑아두고 왔건만. 이건 또 무슨 소리람.
셀시가 한 편을 바라보며 이를 갈았다.
“누구네가 아주 싹 쓸어가는 바람에 말이지요.”
“흠.”
시엔이 셀시의 시선을 쫓았다.
“어, 그, 헤위 누나, 그. 잘 지냈는지······”
“알렌? 아. 참. 일전에도 말했지만, 헤인트는 이제 없어. 나는 세올이야. 티란디스의 세올.”
“그, 그러면 세올 누나라고 부르면 될까?”
“그건 상관없지만, 이미 네가 아는 여인은 없어. 내게서 그 헤인트인지 하는 여인을 찾으려 하진 말아주겠니?”
“그, 그런 게 아냐. 나는!”
알렌이 세올의 손을 덥석 쥐었다.
“어머머, 얘가 왜 이런담.”
세올이 곤란한 듯 말했다.
다만 표정 관리가 전혀 되고 있질 않으니, 입으로는 곤란한 척 해도 그 음흉한 미소가 슬금슬금 번지는 와중이었다.
셀시의 눈이 가늘어졌다.
“하. 저건 또 무슨 꼴이람? 저 싸가지, 아니, 버르장머리 없는 부탑주가······”
“과거를 버린 여인과 미련을 못 버린 전 연인? 뭐 그런 사이네요.”
“호오. 확실히 저래도 소년은 소년인 모양이네요. 좋은 때다. 좋은 때야.”
쯧. 셀시가 크게 혀를 찼다.
이 대찬 물길잡이에겐 아무래도 눈꼴사나운 싫은 광경이었던 모양이었다. 그녀의 나이가 적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미혼인 점이 크게 작용하지 않았을까 하고.
“어쨌든, 화염탑이 용의 혈액을 전부 구매했다는 뜻으로 들리네요. 다른 마탑의 재정이 그렇게 나빴던가요? 아니면 화염탑이 그렇게 돈이 많았던가?”
“······도련님께선 모르고 계셨군요.”
셀시가 한숨을 푹 쉬었다.
“로우드 도련님께서 세 병 모두 화염탑에 전부 매각하셨어요. 사실 어느 마탑이고 예산은 넉넉히 마련한 상황이었는데, 하필이면 이런 상황에 방화광과 입찰 경쟁이 성립되지 않으니.”
“세 병이요? 매물로 네 병을 준비했을 텐데.”
“한 병은 품질을 검증해 보라면서 거저 주셨죠, 합동 분석에서 극소량이나마 원형 상태에서 중성 반발을 띄는 아케인 에너지 재분열 패턴이 관측되는 바람에.”
시엔이 눈을 빛냈다.
원형 상태에서 중성 반발을 띄는 아케인 에너지 재분열 패턴. 줄여서 다차원 아케인 원소라고도 했다.
아케인 에너지의 네 패턴, 네 가지 속성으로 분화되기 전의 순수한 마력 형태를 이르는 말이었다.
다만, 지금까지는 이론상으로만 존재하는 마력 패턴이었다.
만약 다차원 원소가 존재한다면, 아케인 에너지의 속성 변화 역시 분석하여 재현할 수 있으리라.
그렇다면 마법사가 가진 마력과 상관없이 모든 원소 마법의 사용이 가능해진다는, 허무맹랑하나 꿈같은 이론이었다.
한술 더 떠 다차원 원소. 아케인 에너지뿐만 아니라 음차원 에너지와 신성을 어우르는 원형 패턴에 대한 이론 역시 존재했다.
이전 시엔이 대충 만들어 온 대륙의 마탑을 낚은 서적의 제목이 바로 그러한 것이었듯이.
“아. 도련님께선 잘 모르시겠지만, 저희 마법사들이 가진 숙원 비슷한 것의 단서가 발견되었다고 생각하세요. 애초에 적당히 타협하여 값을 치르고 나눠 가지자 이야기가 되었던 건데.”
샘플 분석에서 너무 값진 것이 발견되고 말았고, 덕분에 담합하여 가격을 좀 깎아보자는 얄팍한 수작 역시 한 방에 박살이 났다.
막상 들여다보니 이건 나눌만한 것이 아니다 싶었을 터.
그러한 이유로 치열한 경매가 이어졌다.
화염탑에서 재화와 더불어 부탑주를 포함한 방화광 스무 명의 파견을 내세웠다는 것이다.
마탑이 한 세력을 비호하여 전쟁에 적극적으로 가담하는 셈이었다. 비난을 받아도 할 말이 없는 만행으로, 용의 피 확보를 위해 감수하겠다는 강력한 의지의 반증이었다.
뭐, 애초에 방화광이 욕 먹는다고 눈이나 깜짝할 치들이던가. 좋은 별명 놔두고 굳이 방화광이란 멸칭으로 굳어진 이유가 따로 있지 않았다.
“장사 잘하네.”
로우드의 수완이 만들어낸 결과였다. 하여간 황금이 관련된 일엔 참 믿음직한 녀석인데 말이지.
“어쨌든, 다음 물량은 언제쯤 확보될지 알 수 있나요?”
“흠. 용의 성격이 보통이 아니라서. 애초에 피 몇 방울이라도 받아낸 걸 기적이라고 해야 할까.”
“물론 그렇겠죠. 도련님, 혹시나 다시 또 물량이 나오게 되면, 어떻게 저희 몫만 좀 남겨 주십사 한답니다. 물론 정당한 대가를 치러 드리겠지만, 등대에 당장 여유 자금이 많지 않아서······.”
시엔이 키득거리며 물었다.
“특식을 줄였나요?”
“아예 빼버렸죠, 뭐. 저야 어차피 파견을 나왔잖아요? 아. 후작가에서 식사는 잘 나오겠죠?”
셀시가 킬킬거리며 대답했다.
특식은 안 된다며 절규하는 물길잡이들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대체 특식이 어떻길래 그리들 집착하나 모르겠지마는.
“아. 그전에. 셀시. 물어볼 게 있는데요.”
“자문이겠죠? 차석 등대지기의 자문료는 꽤 비싸니까, 항상 염두에 두시고 이후에 물량이 나오면 좀 감안해 주시면.”
던전에서도 집요하게 마법서에 대해 캐묻던 여인이 아니던가. 이번엔 대상이 마법서에서 용의 혈액으로 바뀐 것뿐이니, 아마 천성이 그러한 모양이었다.
“루우트다렌 전투에서 왕당파 측에 물길잡이가 하나 있었죠.”
“그럴 리가요. 도련님에 대한 적대 행위는 계약으로 일절 금지되었는데요. 현 페벨룬의 왕당파에 고용된 물길잡이들도 자기방어 및 인도적인 용도가 아니면 마법을 자제하라 이미 전파한 상황이랍니다.”
“목격자야 저 말고도 수천 명이 넘을 테니까요. 처음 보는 마법이었는데요.”
시엔이 루우트다렌 요새에서 펼쳐진 마법에 대해 설명했다. 셀시가 눈썹을 모았다.
“영원한 저변? 그럴 리가.”
“영원한 저변? 최상위 마법인가요?”
“심천해의 빙지를 소환하는 마법인데. 애초에 그만한 역량을 가진 물길잡이는 등대의 역사를 통틀어 몇 되지 않는. 이런, 젠장.”
셀시의 표정이 와락 찌푸려졌다.
“뭔가 짚이는 게 있나요?”
“알리아. 그 개 같, 아니, 빌어먹을 도둑년이 거기에 있었군요. 일단 말씀드리지만, 저희 파도등대와는 무관한 일이랍니다.”
“아는 이인가요?”
“알리아 아스데니아. 제 동생년인데, 아. 이런 젠장. 어디 숨었나 했더니 하필이면…….”
* * *
물길잡이들은 파도등대의 수천 년 역사에 걸쳐 대륙 바깥의 대양을 탐색했다.
대양은 인외의 마경이었다.
“대륙에서 멀리 나갈수록, 자연법칙 자체가 통용되지 않는 기괴한 바다가 펼쳐진답니다. 한여름의 폭염과 한겨울의 혹한이 시간 단위로 변화하고, 해수면 아래에 위치한 육지를 상상할 수 있으시겠어요? 바다가 움푹 파이고 그 안에 대지가 자리 잡은 광경을요.”
바다는 매 순간 변화했다. 수천 년 동안 존재한 탐사 지점이 다음 방문에 사라져 있다거나 하는 일 역시 빈번하게 일어났다.
“개중 발견한 것이 바다의 심장이에요. 수계 아케인 에너지를 수백 배 증폭시켜 주는 오브 형태의 구슬로, 파도등대의 운용성능을 다섯 배 이상 향상시켜 준 신물이랍니다.”
왜 이러한 것이 존재하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그러나 파도등대의 탐사가 이런 식이었다.
바다는 육지와 다르고, 또한 세상의 법칙으로 설명할 수 없는 미지의 세상이기도 했다.
특이점이 발견되어도 특이점으로 남을 뿐, 명확히 규명된 것은 개중 반절이 채 안 되었다. 그러니 물길잡이들은 이러한 미지를 받아들이는 데에 있어서 이미 익숙해진 치들이었다.
바다의 심장 역시 그러했다.
그저 이 신물이 본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물질로 이루어졌다는 것. 그리고 이 신물이 수계 아케인 에너지를 받아 말도 안 되는 증폭을 해내는 원리 따위를 알아내는 것이 고작일 뿐이었다.
“그런데 알리아 고 년이. 그걸 홀랑 빼다 도망쳐버리는 바람에. 아마 바다의 심장을 가지고 있다면, 영원의 저변 같은 최상위 마법을 쓰고서도 마력이 꽤 남았겠지요.”
“알리아라…….”
“내가 그래서 그년을 조심해야 한다고 몇 번이나 말했는데. 아버지는 듣지 않았죠. 남 속이는 데는 아주 도가 튼 속이 시커먼 년이라. 아버지도 홀랑 속아 넘어가서 좀 모자란 꼬맹인지나 알았으니까요.”
셀시의 표정이 험악했다.
“그런데 다 속여도 난 못 속여요. 바보 행세나 하는 년인데. 하. 바보 행세라니. 그거 얼마나 편리한 일인지 알겠어요? 걔가 뭘 해도, 무슨 실수를 하고 무슨 허무맹랑한 만행을 저질러도 다 설명이 되는 거랍니다. 쟤는 원래 바보니까. 원래 좀 모자라잖아.”
“꽤 시달린 모양이네요.”
“뭐. 지금도 사실 비슷하네요. 알리아라면 별 이유 없이 바다의 심장을 훔쳤을 거라고들 하니까. 그냥 예뻐서 가져갔다가 겁이 나서 도망친 게 아니냐는 건데. 하. 참. 내 원.”
셀시가 빙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마침 파견도 나왔겠다, 할 일이 하나 더 생기고 말았네요. 이참에 아예 머리끄댕이 잡고 끌고 가서, 아니 아예 다 뽑아버려야지. 민머리를 하고서도 밖에 나돌진 못하겠지요?”
“셀시. 그 알리아가 신물을 통해 할 수 있는 일이 어디까지죠? 영원한 저변? 그 의외에도 주의해야 할 최상위 마법이 있던가요?”
“영악하긴 해도 있는 것을 이용할 줄이나 알지, 마법을 창작할 년은 못 된답니다.”
결국, 창작은 못 해도 존재하는 모든 수계 마법을 사용할 줄 안다는 뜻이었다.
시엔이 아는 것 중에서도 치명적인 마법이 벌써 몇 개랴.
“그 정도의 전력이라면, 최우선 사살 목표로 지정해야겠네요. 셀시에겐 미안한 부탁이지만. 화가를 보내줄 테니, 그 알리아라는 마법사의 초상을 완성해 주세요.”
셀시가 멈칫했다.
이년 저년 해도 같은 피가 흐르는 혈육이었다. 아무리 미워도 가족이 아닌가.
“그, 도련님. 최우선 사살 목표라 하시면.”
“셀시. 그만한 마법사를 생포하기 위해서 몇 명의 희생이 필요할까요? 수백? 아니면 천이 넘어갈지도 모르죠.”
“그건.”
“게다가 이미 늦었어요. 거짓 항복으로 방심한 부대에 마법을 퍼부었고, 그 직접적인 결과로만 귀족 두 명이 사망했네요.”
“하지만, 도련님. 마법사가 자의로 한 판단이 아닐 겁니다. 분명 명령을 받아서 한 일일 테니······.”
“정 걱정되면, 그건 셀시가 알아서 해봐야 할 거예요. 저야 그 마법사가 저항하지 않으리라 보장받은 것도 아니니, 더 큰 피해를 보기 전에 치워버려야 하지 않겠어요?”
셀시의 표정이 굳었다.
앞에서 년이니 머리카락을 뽑으니 이야기하긴 했어도, 제 가족임을 밝히지 않았던가.
그 면전에 대고 동생을 죽여야겠다고 당당히 말하리라 생각하지 못했다.
그제야 문득 깨달음이 찾아왔다.
그러고 보니 이 명예 성자가 보통 인물이 아니었다.
던전 속, 사람이 죽고 팔다리가 튀며 순환수로가 온통 핏빛으로 물든 와중에서도 키득거리며 말장난을 걸어오던 인물이었다.
나이에 비해 작은 체구와 동안, 그리고 일견 유순해 보이는 인상을 가진, 소년과 같은 청년이었다. 게다가 귀족답지 않은 소탈함과 붙임성에 아무 생각 없이 무해한 이라 판단하고 있었던가.
“그, 너무 가혹한 말씀이셔서······.”
“굳이 내키지 않는다면 다른 물길잡이의 파견을 요청할게요. 다만, 파도등대 입장에서도 좋은 소식은 아니겠죠? 탑주의 직계가 비소속 마법사에, 전범이기까지 하니.”
이젠 은근한 협박이었다.
일이 알려져서 좋을 게 없지 않으냐 하고. 시엔이 해사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 협조를 부탁드릴게요, 셀시.”
< 마법사는 전장의 꽃 [1]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