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 얼어붙은 대지, 춤추는 사람 [4] >
“이게 무슨.”
케렌 찰신이 당황했다.
항복을 위해 무너진 요새의 입구로 나온 참이었다. 별안간 떨어진 우박이 떨어져 내렸다,
우박이란 본디 더운 날에나 쏟아지는 것이니 어째 이러한 때에.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우박 중 알이 굵은 것이 섞여 있기는 했지만, 요새로 향하던 적진이 완전히 와해될 정도는 아니었으니까.
당황하던 케렌이 적진에 솟아오르는 붉은 기를 보았다. 하나, 둘, 셋, 넷. 붉은 깃발들이 계속해서 솟아 펄럭거렸다.
총공격의 신호였다.
케렌이 그제야 일이 완전히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젠장, 전원 전투 배치! 전원 전투에 대비하라!”
당황한 와중에서도 판단은 빨랐다.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공격 깃발이 올랐으니 인제 와서 대화는 불가능하리라.
그때, 누군가 어깨를 붙드니 오래 함께한 노기사였다.
“영주님, 피하셔야 합니다!”
“오룬비 경!”
“그저 요새 하나일 뿐입니다. 영주님께서 영지를 지키셔야 하지 않으십니까!”
케렌이 입술을 깨물었다.
그저 요새 하나일 뿐이라니. 애초에 함락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니, 여기서 죽겠다는 말과 같았다.
“지휘는 제가 맡겠습니다! 영주님께선 피신하여 훗날을 도모하십시오.”
“큭.”
케렌의 인상이 일그러졌다.
그러나 기사의 말이 맞았다. 영지의 군대가 대부분이 요새에 모였으니, 이후 영주가 없으면 영지가 어떤 꼴이 될까. 패배했더라도 그 주인이 자리에 있어야 하는 때였다.
“알, 뾰족턱, 영주님을 모셔. 혼란한 때니 오히려 큰 인원은 이목을 끈다.”
“알겠습니다, 단장님.”
기사단의 젊은 정예들이었다.
케렌이 허리를 폈다.
“오룬비 경. 그대를 현 시간부로 요새의 방어 사령관으로 임명한다. 이후 직접 경과 보고하도록. 자네가 직접 말이야. 명령일세.”
“목숨을 바쳐 명을 받들겠습니다.”
기사가 희미하게 미소지었다.
* * *
“돌파! 제 1진 거창!”
“멍청한 놈들! 앞만 봐! 앞만! 투구는 멋으로 쓰고 있냐! 눈 좀 맞는다고 안 죽어! 이것들아!”
“눈이 아니라 우박이잖습니까!”
“그냥 좀 크고 날카로운 눈이지, 멍청아! 간다! 백호단 출겨억!”
“백호단 출격!”
정규군과 징집병의 차이였다.
얼음송곳에 맞아 뒹굴거나, 엎드려 머리를 땅에 처박고 덜덜 떨거나. 사방으로 흩어지고 절규하는 징집병들과는 달리, 공격 신호를 확인한 정규군들은 점차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머리 위로 송곳이 쏟아지고 있으니 일단은 범위에서 벗어나는 것이 우선이었다. 각개의 지휘관이 저마다 돌격을 외쳤다.
총돌격. 부대가 최후의 순간 힘겨루기를 할 때나 쓰는 수법이었다.
넓게 퍼진 1왕자파의 군대가 모래가 새는 모양으로 빠져나갔다. 자리에 남은 것들은 정신을 차리지 못한 징집병들이나, 추스를 여유도 없었으니.
“아직 요새는 건재하다! 자리를 사수하라! 궁수들이 자리를 잡을 때까지 버텨야 한다! 죽어도 서서 죽는다! 찰신을 위하여!”
“위하여어!”
찰신 백작가의 제 2성벽에 집결했다. 완파된 외벽은 포기, 일부 파손된 내벽의 구멍마다 촘촘히 서서 방패를 앞세워 인간의 방벽을 세웠다.
병사가 침을 꿀꺽 삼켰다.
원형으로 커다랗게 뚫린 성벽 바깥으로, 적들이 점차 가까워지고 있었다. 하필이면 왜 우리 대대가 맨 앞이냐고. 젠장, 나도 활이나 배운다 할 걸 그랬네.
병사가 욕설을 중얼거리며 철렁 나앉은 심장을 달랬다. 지금이라도 방패를 버리고 도망치고 싶은 심정이나, 어쩌랴. 군인이 그렇지 뭐.
그리고 나면 신을 찾을 수밖에는.
천신이시여, 앞으로는 군종 예배도 빼먹지 않고 봉헌도 착실히 할 테니 기적 한 번만 보여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그리고 기적이 일어났다.
* * *
1왕자군 총돌격의 가장 선두, 스반델 엘와즈가 있었다. 와이번의 뼈를 격자로 짜고 깃털로 덮은 타워 실드를 비스듬히 들어 앞세운 채였다.
그렇게 만든 특제 방패는 무게랄 것이 없는 수준인 만큼, 솔직히 방어력은 크게 기대할 것이 아니었다. 아닌 게 아니라, 튕겨내는 것은 절반이 조금 넘고, 나머지 얼음송곳들은 푝푝 소리를 내며 박혀들고 있는 와중이었다.
“나를 따르라!”
스반델이 방패를 큰 동작으로 떨치며 소리쳤다. 얼음 송곳들이 우수수 떨어져 바닥에 흩어졌다.
전장에 어울리지 않은 얇은 목소리. 그러나 선봉의 용맹을 깎아 먹을 정도는 아니었다.
적들이 내벽의 구멍을 메우며 방어선을 구축하는 것이 보였다. 설치식 초중형 방패를 땅에 박아넣고, 오중 육중으로 사람이 기대 막아내는 임시 방벽.
이대로라면 외벽 도달까지 약 이십 초.
도착하고 나면 돌파할 방법이 있을까?
밀어서는 승산이 없으니, 아예 근접하여 적의 초중형 방패를 잡아당겨야 할 터다.
전략적 판단이라 하나 돌격 중에 다른 생각을 하던 탓이었을까. 힘차게 내밀어 대지를 디딘 앞발이 그대로 쭉 미끄러졌다.
미끄러운 빙판이라도 밟은 것처럼.
왼다리와 오른다리가 일자로 쭉 찢어졌다. 다행히, 평소에 하던 체조 동작이니 허벅지 안쪽이 콱 당기는 정도에 그쳤지만.
그러나 그녀의 부관은 크게 다졌다. 근력 위주로 무식한 힘을 추구하던 부관이었다. 다리가 앞뒤로 찢어지자, 육중한 체중에 허벅지 힘줄도 곧장 반쯤 찢어지고 말았다.
스반델의 그대로 쭉 미끄러졌다.
어느새인가 바닥에 하늘이 비쳤다. 대지 위를 덮은 광활한 빙판에 비치는 하늘이었다.
얼음송곳이 내리는 종심을 우회하여 기동하던 기사단들이 일제히 무너져내렸다. 중갑을 두른 군마가 미끄러운 바닥을 만나니 그 즉시 미끄러져 바닥을 굴렀다.
군마가 일제히 뒤집히고, 일부 기사들은 하늘을 날았다. 운이 좋은 기사들이었다. 강철로 무장한 군마에 깔리는 것보다는, 차라리 내동댕이쳐지는 편이 나았으니까.
돌진하던 1왕자군 전체가 중심을 잃고 넘어졌다. 창칼을 앞세우던 터라, 적을 향해야 할 창검이 전우를 찌르는 일은 예사였다. 넘어지고, 미끄러지고, 발에 걸리고, 서로를 붙잡아 허우적거렸다.
일어나려 손을 뻗어 땅을 짚으면 손이 미끄러졌다. 넘어진 몸이 그대로 쭉 밀리니 몸은 아찔하고 세상이 빙빙 돌았다.
비명과 아우성이 대지 위에 짙게 깔렸다.
* * *
빙판이 깔렸다.
말의 뒷다리가 밀리고, 그대로 엉덩이가 주저앉았다. 그 위에 탄 시엔이 빙판으로 추락하고, 뒤이어 중심을 잃은 말이 그 위로 쓰러져 내렸다.
순간, 빙판 위로부터 검은 창들이 솟았다.
세 개의 창날이 말을 꿰었다. 숨이 반쯤 끊어진 말이 피를 뿜으며 허공에서 버둥거렸다.
쉐도우 스토커가 제 주인의 그림자에 깃드는 이유였다. 살아 헌신하였으나 배신당한 이는 죽어 악령이 되어 맹목적인 충성만 남았으니까.
악령이 주인의 위험에 즉시 반응했다.
시엔이 엉덩방아를 찧은 채 뒤로 쭉 미끄러졌다. 유쾌한 경험은 아니었으나, 멈추기 위해 짚은 손이 아무렇지도 않게 미끄러지고 나선 예사 빙판이 아니구나 깨달았으니까.
대신 쉐도우 스토커에게 힘을 실었다.
시엔의 사방으로 가시가 솟자, 제멋대로 밀려나던 몸이 장애물에 막혀 속도를 잃었다.
가시를 돌려보내고 나자, 걱정 가득한 음성이 날아들었다.
“시엔 님! 괜찮으신가요! 어디 다치신 건.”
“나는 괜찮은데.”
시엔이 나비를 바라보았다.
말이 미끄러지자마자 등자를 박차고 뛰어오른 나비였다. 한없이 미끄러운 빙판 위였으나, 전직 암살자의 균형감으로 쉽게 중심을 잡았다. 나비가 당당히 두 발로 서서 우아하게 시엔의 주위를 선회하는 중이었다.
저 뒤편에서 무릎을 꿇은 베른닐이 보였다. 썰매라도 타듯 검을 빙판에 박아넣으며 시엔을 향해 미끄러져 다가오는 중이었다.
그러다 나비를 보곤, 어색한 동작이나마 흉내내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허우적거리고 비틀대는 것이 볼품없는 품새였으나, 금방 요령을 익히기는 한 모양이었다.
제1기사단인 창공에서 쫒겨나도 할 말이 없는 불량한 행실을 그저 재능 하나로 어떻게 버틴 베른닐이었다.
그런 것 치고는 그 후로 실력이 너무 안 늘어서 문제였지만. 행실이 바로잡히면 재능도 줄어드나?
“나는 됐고. 저거나 좀 어떻게 해 봐.”
시엔이 손가락을 뻗었다.
“꺄악! 선배, 어떻게 좀 해봐요!”
“악! 내 머리! 다 뽑힌다아!”
“놓지 말아요, 꺅! 선배!”
둘이 한 덩어리가 되어 저 멀리 미끄러지고 있는 한 쌍의 흑마법사들이 보였다. 허우적거리는 세올과, 그 머리카락을 꼭 쥔 채로 함께 밀려나가는 트리예였다.
“네! 잠시 다녀오겠습니다!”
나비가 쾌활하게 말하며 탁탁 발을 굴렀다. 마치 얼어붙은 호수 위에서 미끄럼을 타고 노는 아이 같은 모양새였다.
속도를 높여 멀어지나 싶더니, 재주 좋게 트리예의 발을 붙잡고 크게 선회하여 되돌아오는 것이 아닌가.
얼마 지나지 않아 일행이 전부 모였다. 쉐도우 스토커의 그림자 창을 붙든 채, 이리저리 밀리는 몸을 고정시킨 참이었다.
겨우 진정한 트리예가 제가 꽉 쥐고 있는 한 움큼의 머리카락을 보고 깜짝 놀랐다. 급히 품속에 우겨넣고 세올의 눈치를 살폈다. 뒤이어 안도의 한숨이 이어졌다.
시엔이 킬킬 웃음을 터뜨렸다.
그나마 파린을 누렁이한테 맡겨둔 채로 대기를 시켜둔 것이 다행이었다.
그 건방진 꼬마 용은 어떤 위험이라도 시엔이 전부 막아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으니까. 그 신체가 인간 아이와 전혀 다른 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건 처음 보는데. 그간 새로 만들어진 마법인가?”
두 흑마법사가 고개를 저었다.
천 년 동안 흑마법은 몰락했으나, 다른 마탑은 계속해서 발전해 왔을 터. 그간 이러한 마법이 완성되었다 해서 이상할 것은 아니었다.
“저는 처음 보는데요. 애초에 이 정도의 대규모 마법이 가능할 거라 생각하지도 않았는데.”
“소녀 역시 마찬가지랍니다.”
시녀들이 고개를 저었다.
시엔이 턱을 쓰다듬었다.
마력의 유동이 보통이 아니었으니, 이 정도 규모의 마법이라면 아귀가 맞았다.
그런데 물길잡이라. 파도등대는 절대 시엔의 적이 될 수 없었다. 파도등대의 가장 큰 사업을 시엔이 단단히 틀어쥐고 있었으니까.
파도등대의 뜻과 상관없이 움직이면서도, 이러한 수준의 주문을 부릴 수 있는 마법사라.
시엔이 자신의 적을 떠올린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성유해라 불리는 물건이 마법사의 수준을 몇 단계나 끌어올리는 신물이었고, 곧 시엔의 적들이 가진 수단이었다.
도대체 안 끼는 곳이 없군.
왜 가는 곳마다 나타나서 훼방이야?
시엔이 인상을 찌푸렸다.
“어떻게 할까요?”
“어떻게 하긴. 요새째로 날려 버려야겠지.”
* * *
요새의 뒤편.
끼릭끼릭끼릭끼릭. 차르르르르!
도르래가 연신 삐걱거리고, 쇠사슬이 감기는 소리가 요란했다. 그러나 요새의 굳건한 성문은 도통 열릴 기색이 없었다.
애초에 사람의 힘으로 열 수 없는 육중한 것이라. 도르래 수십 개를 연결하여 사람 하나가 열고 닫도록 만들어 놓은 비상용 개폐 장치였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전부 열리려면 적지 않은 시간이 필요하리라.
심지어 내부에서 개폐 장치의 쇠사슬을 끊더라도, 수십 개의 안전장치가 발동하여 그 즉시 기관이 잠겼다.
어차피 현수교란 아래서 위로 닫히는 것이다, 반의반만 닫아도 적들의 침입은 요원했다. 대신 빠져나가기 위해서는 완전히 열어야 하는 단점이 있었다.
루우트다렌은 최후 방어선이었다. 당연히 쪽문도 비밀 통로도 없었다. 함락당하는 순간 왕도로 적이 들이치는 최후 거점이었으니, 옥쇄할지언정 도주가 가능한 설계가 아니었다.
그때였다.
도르래를 돌리던 기사의 머리에 별안간 얼음창이 돋았다. 머리가 반쯤 날아간 기사가 나동그라져 바닥을 굴렀다.
“앗. 영주님께서 도망치시면 안 되죠!”
성문 위로, 제 옆구리에 손을 척 붙인 소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머리 위에 일곱 개의 얼음창을 띄운 채였다.
“귀족다운 행동이 아니잖아요! 가서 안 싸우시고 뭘 하시는 거예요?”
“너, 네 년이!”
“아. 입도 험하시고. 어쩜 이렇게 가련한 소녀에게 그런 더러운 말씀을 하세요?”
“네가, 네가 어떻게, 전부 네년의 수작이로구나! 이 개 같은, 당장 죽여 버리겠다!”
소녀가 팔을 척 뻗어, 검지를 좌우로 흔들었다.
“에헤이, 그럴 능력도 없으시잖아요? 영주님은 아래, 나는 위. 어떻게 죽여주실 셈이세요?”
“감히! 무엄하다!”
“피. 기사 아저씨들은 왜 항상 똑같이 말하나 몰라. 됐으니까 이쯤 퇴장하세요.”
“영주님, 위험합니다!”
기사가 급히 몸을 던졌다. 거칠게 밀려난 케렌이 엉덩방아를 찧었다. 케렌의 눈앞에 거대한 얼음 창에 꿰인 기사가 눈을 부릅뜰 뿐이었다.
“너, 어째서······.”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이시네요? 음. 가시는 길에 설명을 해 드릴까요? 하나.”
알리아가 싱긋 웃었다.
“제 물주에게 돈을 뜯으려면 이렇게 온전히 영지를 넘길 수는 없거든요. 차라리 요새가 파괴되고 죽이고 죽여 군대의 소모가 있는 편이 나으니까요.”
“흐레이그 공작!”
“그리고 두 번째로. 뭐. 간단하잖아요? 그분의 대업을 위해선 원하시는데요. 타국의 군대 따위야 한 명이라도 사라지는 편이 낫잖, 아잇, 야! 내가 이야기하잖아!”
알리아가 얼음창을 쏘아 보냈다.
찰슨 백작의 몸에 구멍이 뚫렸다.
알리아가 손을 탁탁 털며 말했다.
“하여간. 사람이 말을 하면 들어야지.”
그 때였다.
요새의 중단, 허리 부근에 검은 구체가 피어올랐다.
“명예 성자님이신가? 그런데 왜? 요새를 무너뜨리기라도 하시려고? 에이, 겨우 저걸로 요새가 무너질 리가 없잖아?”
알리아가 키득거렸다.
요새는 그렇게 쉬이 무너지지 않는 시설이었다. 투석기의 포격을 사나흘은 거뜬히 버틸 수 있는 구조물이 아니던가.
물론, 지금까지 해왔던 것처럼 계속해서 야금야금 요새를 뜯어먹을 생각이라면 모르겠지만은.
아무리 그래도 당장은 무리. 빙판에 미끄러지는 군대를 구원하기에는 턱도 없는 화력이라 할 것이다.
“게다가 오전 오후 겨우 하루에 두 발 밖에는 못 쏘는 주제에 말이에요.”
강력한 마법이니 그만큼 마력을 소모하리라.
정말로 용이 있다면 모를까, 용이 있을 리가 없다.
익숙한 마력, 그림자라 불리는 흑마법사의 상위 마법이리라. 용의 마력은 인간의 것과는 완전히 다르다. 인간의 마력을 느꼈다면 용의 마법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성유해를 가진 흑마법사가 페벨룬 왕국 공작에 실패했다고 했던가.
개중 배신자가 있어 명예 성자에게 붙었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기도 했고.
그때였다.
알리아의 비웃음음 가득한 얼굴이, 순간 멍하니 풀렸다.
도려내진 요새의 단면 사이로, 칠흑의 창날이 한 발 더 날아들어 속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하, 한 발 더 쏠 수 있었나? 전력을 감추고 있었구나. 아무리 그래도 요새를 무너뜨릴 수는······”
그러나 그도 잠시. 쩌적, 쩌적. 불길한 파열음이 선명하게 사방으로 울려퍼지기 시작했다.
* * *
“시엔 님, 괜찮으세요! 앗, 코피가!”
가능한 최대 출력으로 두 발을 연거푸 쏜 참이었다. 제국 오브는 아직 충전되지 않았으니 온전히 시엔의 마력을 이용한 포격이었다.
세계수의 나뭇가지는 마법을 증폭할 뿐이니, 최대 출력의 파괴력을 배가시킬 뿐 마력 소모 자체를 줄여주진 않았다.
버틸 수 있는 한계를 넘어버린 주문의 백파이어가 신체를 덮쳤다.
속이 진탕되어 내장 중 쓰리지 않은 곳이 없었다. 파괴된 점막으로 출혈이 일어나니 입안이며 혓바닥 따위로부터 쇠 비린내가 진동했다.
“괜찮아.”
시엔은 성향은 절대 무리하지 않는 편이었으나, 주변에 당장 적이 없으니 이쯤은 괜찮겠지 싶었다.
무엇보다, 이런 실험이 필요한 참이었다.
한 번은 주문의 백파이어를 받아 볼 필요가 있었다. 인간을 초월한 신체가 주문의 백파이어에 얼마나 저항할 수 있는지 알아야 했으니까.
나비가 급히 다가와 시엔을 휘감고 앞섶을 들어 시엔의 코 아래를 톡톡 찍었다.
코피라니. 조금 모양은 빠지지만, 이 정도면 상당히 양호한 편이었다. 내부가 욱신거리긴 해도 그뿐, 그나마도 빠르게 통증이 가라앉고 있었다.
인간을 초월한 육체라고 했던가. 그 회복력도 인간을 초월했다.
“할바르토의 단련 이론이 아예 의미가 없진 않았네.”
“예? 그게 누군가요?”
“있어. 그런 미련퉁이가.”
할바르토 주른. 마법사가 신체를 단련하여 마법의 백파이어를 버틸 수 있다고 주장하던 천문관이었다. 덕분에 마법 실력보다 그 강철 같은 육체로 유명했다.
마법사이면서도 체술의 대가에 올라 무관의 주인으로 여러 제자를 키워내기도 했으니.
물론 그 강인한 육체 역시 백파이어의 후유증을 이겨내진 못했다. 노년에 치매로 못 볼 꼴을 전부 보여주다 마침내 똥통에 빠져 죽고 말았으니까.
신체를 단련할 시간에, 차라리 마력 용량을 조금이라도 올리는 것이 낫다는 사실을 본인이 직접 증명한 멍청이었다.
마법사가 아무리 단련한다 한들, 오러나 신성의 도움 없이 초인의 경지에 오를 수는 없었으니까.
시엔처럼 화끈하게 신체 구성이 갈려버리지 않는 한에야.
“역시. 한 발 더 쏴야 하나?”
시엔이 요새를 바라보았다.
어떤 건축물이건 전체를 지지하는 중심이 있기 마련이었다. 그 부분이 파괴되면, 아무리 견고한 요새라도 버틸 재간이 있으랴.
그리고 천 년 전, 흑마법사가 즐겨 쓰던 수법이기도 했다. 요새를 아예 파괴해버릴 참이라면, 중심을 파악하여 깔끔하게 지워버리기만 해도 충분했다.
다만, 그간 건축이 발전하였으니 시엔이 보는 중심이 맞지 않을 수도 있었다. 아니면 다른 건축술로 중심을 보강하는 설계일 수도 있겠고.
“어, 선배님. 그럼 제가 써 봐도 될까요? 영원한 밤의 창날이요.”
시엔이 눈을 가늘게 떴다.
단순히 마력의 제어 및 응용으로 발동이 가능한 주문이라면 모를까. 연산이 복잡한 주문은 그 궤가 완전히 달랐다.
마수학이나 병독학이 대체적으로 전자에 속했다면, 원한회귀나 영원한 밤의 창날 같은 주문은 자체로 뛰어난 마법적 지능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세올이라면, 음. 아무래도 무리가 아닐까.
“네가?”
“헤헤, 수식은 전부 외웠는데요······.”
“이해는?”
“윽. 그게.”
“그럼 안 돼.”
“하지만, 제 생각에 불필요한 부분이 많은 수식이라······. 그러니까 마력 제어 부분에 딱 기본값을 적용하면 어떻게든.”
“그건 네 생각이고.”
시엔이 콧방귀를 뀌었다.
그러자 이번엔 트리예가 나섰다.
“시엔 님, 소녀가 한 번 시도해 보아도 괜찮을까요?”
“흠. 백파이어는?”
“미분식을 적용하면 실수가 있더라도 불발에 그치지 않겠어요? 실사용에서 있어서의 변수를 직접 구해야 할 것 같답니다.”
“좋아.”
시엔이 세계수의 나뭇가지를 내밀었다.
세올이 펄쩍 뛰었다.
“선배님, 저는 안 되고, 쟤는······ 꺅!”
빙판 위에서는 몸가짐을 조심해야 하는 법이었다. 펄쩍 뛰다 중심을 잃고 넘어지고 말았다. 도대체 신뢰가 가야지, 신뢰가.
허우적대며 멀어져가는 세올을 바라보며, 시엔이 나비에게 눈짓을 보냈다.
그때였다.
쿠르릉······!
요새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첨탑이 서서히 기울고, 금이 번진 기둥과 벽면이 붕괴하여 무너져 내렸다.
뒤이어 먼지가 자욱하게 피어올라 공간을 장악하니, 뒤이어 요새가 선 방향을 완전히 뒤덮여 보이는 것이 없었다.
< 31. 얼어붙은 대지, 춤추는 사람 [4]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