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작가의 망령재림-149화 (147/268)

< 31. 얼어붙은 대지, 춤추는 사람 [3] >

성문 하단이 깔끔하게 날아갔다.

성문을 고정하던 강철 사슬이 갑작스레 실린 하중에 비명을 질렀다. 하중을 견디지 못한 마디마디의 고리가 서서히 벌어지다, 개중 약한 것이 탕, 부러져 튕겨 나갔다.

성문의 상단이 휘청거리자, 하나 남은 사슬에 더욱 하중이 걸렸다. 당연한 수순으로 사슬이 깨졌다. 성문의 상단부가 지상으로 떨어져 내렸다.

쿠웅!

요새의 열린 입구만 덩그러니 남았다.

“세상에.”

알리아가 입을 가렸다.

폭발이건 타격이건 발화건 간에, 공격 마법이란 부수거나 태우거나 하는 효과가 있었다.

무언가가 부서지면 그 파편이 남고, 불타오르면 재가 되는 법. 그러나 그 어떤 마법도 아예 소멸시켜 버리는 일은 없었다.

단 하나를 제외하면.

“그림자인가.”

“그림자? 그게 뭐 어쨌단 말인가?”

“그냥 그런 게 있어요. 헤헤.”

“사람 참 싱겁기는. 그나저나 이제 전투 배치인가? 곧 공격해 오겠어. 문제는 없겠지?”

“그럼요. 히힛, 저만 믿으시면 된다니까요.”

알리아가 눈을 빛냈다.

영원한 저변.

관념 세계의 천체는 거대한 바다로 이루어졌다. 천해라 부르는 파도잡이들의 원천이었다.

그 천해의 심부, 얼어붙은 바닥이 존재했다.

그 표면이 매끈하여 어떤 잔금조차 존재하지 않는, 완전무결한 그러한 바닥이었다.

그러한 천심해의 심지를 모사하여 세상에 들이는 마법이었다.

그저 거대한 빙판이 형성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실상 발을 디디면, 미끄러져 멈출 수가 없는 지형이었다.

“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허우적대면 그것도 재미있을 거예요. 그렇죠?”

알리아가 해사한 미소를 지었다.

* * *

“당장 진격해야 합니다!”

“아직 적들의 반응이 없지 않소. 적의 증원이 온다는 첩보부터 취하고 나서 움직여도 늦지 않는데······.”

“그러면 늦습니다! 요새를 점령하고 나면, 성문이 없는 것은 우리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적이 재탈환에 나서면 이후 수성이 가능하겠습니까!”

“빨리 점령해 성문을 수리해야 합니다.”

진격하느냐 마느냐로 의견이 팽팽한 상황.

그래도 사령관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와중이었다. 서로 핏대를 세우며 가네 마네 하는 꼴이 참으로 가관이었다.

엘와즈 백작이 간이 책상을 쾅쾅 두드렸다.

“그만, 그만들 하세요! 진격은 없습니다.”

그러자 주전파의 반응이 거칠었다.

“하지만 지금이야말로 공격하기에 가장 적기이거늘······.”

“평온을 가장한 허세가 아니겠습니까! 그저 시간을 버는 수작에 불과한 겁니다!”

“상대의 노림수가 무엇인지 파악하기 전에 섣부른 행동은 금물입니다.”

엘와즈 백작은 단호했다.

그러나 주전파 역시 물러나지 않았다.

“우리의 병력에 일만 오천에 달하고 적은 사천이 채 되지 않소. 정문이 뚫려 방어는 무력화되었으니, 이대로 진격하면 바로 요새를 점거할 수 있는 기회가 아닙니까!”

모랭 백작이었다.

백작 본인이 직접 이끌고 온 군대가 삼천에 이르렀다. 모랭 가에서 이번 내전에 단단히 투자하겠다는 의지였다.

“그럼 문제가 없지 않습니까? 애초에 전술 목표가 적의 집중이었으니. 시간을 벌어 원군을 청한다면 성공이니.”

“전술이란 상황에 맞춰 운용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성문을 뚫고 대기하는 공성계가 세상에 어디 있단 말입니까!”

엘와즈 백작이 눈살을 찌푸렸다. 변경백 앞에서 전술을 운운하니 가소롭기도 하고 어이도 없으리라.

그러나 상대 역시 같은 백작이었다.

게다가 이끌고 온 병력이 많으니 함부로 대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보시오, 백작님. 적들의 반응이 어떠합니까. 성문이 뚫렸는데도 불구하고 별다른 행동을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마치 이쪽에서 진격하길 기다리기라도 하는 모양이 아닙니까.”

“그러면 엘와즈 백작께서 요새를 수성중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소? 네 배의 군대를 맞아, 그토록 단단하던 요새의 방어가 이미 뚫렸다면. 허둥대며 적들에게 당황한 모습을 보여주시겠소?”

“그건.”

엘와즈 백작이 주춤거렸다.

모랭 백작의 말도 맞았다.

이미 열세가 확실하다면, 허세를 부리며 시간을 끄는 것이 최선의 전략일 터였다. 있지도 않은 함정이 있는 시늉을 하면서.

“게다가 함정. 그래 함정일 수도 있소. 그렇다 칩시다. 일만 오천의 병력을 앞에 두고, 백작께선 어떤 함정을 준비하실 수 있겠소이까? 그리고 그게 얼마나 효과가 있겠소?”

엘와즈 백작이 입을 다물었다.

사실 전략적 판단이라면, 지금 진격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아군의 사기가 치솟고 적의 방어가 무너진 때다.

그러나 무언가 석연치 않다.

엘와즈 백작은 손해를 보더라도 신중하여 병력을 온존하는 것이 낫다 생각하는 유형이었다.

“백작의 말씀이 틀리지 않습니다만. 그럼 일단 진격 준비에 들어가도록 하면. 그리고 적의 반응을 보아 이후 판단하여 다시 논의하는 건 어떠시오?”

엘와즈 백작이 한발 물러났다.

모랭 백작이 동의했다. 저쪽에서 먼저 한발 물러났으니, 예의상 하루는 따르는 척이라도 해야 하는 법이었으니까.

“그럼 금일은 전투 배치에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투석기를 조립하여 전열에 두고, 진격 대형을 갖추는 데에 신경을 써 주십시오.”

“아. 잠시만요.”

그때였다. 시엔이 손을 들었다.

좌중의 시선이 모여들자, 시엔이 말문을 텄다. 어쩐지 장난스러운 미소와 함께였다.

“진격이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니지 않을까요? 요새의 함락을 떠나 승패의 문제에서, 제게 좋은 방법이 하나 있는데. 들어보시겠어요?”

* * *

1왕자파의 군대가 진격 준비를 마쳤다.

투석기를 보란 듯이 전열에 세우고, 보병이 중앙에 밀집했으며, 대형 방패가 이미 열을 맞췄다.

정문이 뻥 뚫렸으니 이대로 방패를 앞세워 들어오겠다는 뜻이었다. 그러면서도 기병과 경기병이 지원 태세를 갖췄으니 요새에서 역공에 나서는 것에 대비한 것이리라.

그러나 알리아의 기대와는 달리, 전투 배치가 이루어졌을 뿐. 그저 그뿐이었다.

자리를 지키고 서서 요새를 겨눌 뿐이었다.

그러한 상태로 한나절이 지났다.

해가 떨어질 즈음이었다.

영원한 밤의 창날이 노을 아래 시커먼 형상을 드러냈다. 창이 날고, 뒤이어 성벽에 구멍이 뻥 뚫렸다.

해가 지고 해가 다시 떠올랐다.

눈부신 여명 사이로, 순수한 어둠이 몰려들어 긴 창날을 이루었다. 창이 날자, 성벽에 구멍이 하나 더 뚫렸다.

그리고 또 노을 아래 창이 날았다. 그렇게 하루가 가면, 어김없이 해가 떠오를 적엔 성벽에 구멍이 뚫렸다.

그렇게 닷새가 지나자, 성벽에 뚫린 구멍이 열 개에 이르렀다.

“아. 이 생각을 못 했네.”

알리아가 떫은 표정으로 말했다.

성문을 뚫었으니 바로 진격을 해올 줄 알았다.

물론 증원도 없고, 성문을 수리하는 모습도 보여주지 않았으니 함정이 있습니다 밝힌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요새가 아닌가.

요새란 가장 강력한 방어 시설이고, 점령하여 차지하면 이후 유리한 고지를 점할 수 있었다.

하지만 요새 자체를 포기하고 파괴할 셈이라면?

“마법사, 다른 수가 없나?”

“적들이 오지 않으면 저라고 해도 뭐 어떻게 하란 말이에요?”

“젠장, 항복밖엔 없나.”

케렌이 머리를 쥐어뜯었다.

‘이러면 안 되는데.’

알리아가 속으로 생각했다.

흐레이그 공작의 의뢰는 어떻게 해서든 적의 병력을 격퇴하라는 것이었다. 정 상황이 여의치 않다면, 적의 병력을 갉아먹는 한편 요새를 파괴해서라도 넘겨주지는 말아야 한다고 했다.

‘실패는 안 돼.’

알리아의 사랑스런 연인은 냉혹하기 그지없는 인물이었다. 절대 실패를 용납하지 않으니, 일이 잘못되기라도 하면 다시 만화원의 시녀 후보로 강등되리라.

‘그건 안 되지.’

알리아의 눈동자가 위험한 빛깔로 물들었다.

* * *

요새는 참혹한 꼴이었다.

외벽의 반은 무너지고, 그나마 선 성벽에도 구멍이 뚫려 적을 저지할 능력을 완전히 상실했다.

외벽이 박살나자 다음은 내벽이었다.

사중 구조로 견고하게 선 루우트다렌이었지만, 아예 공간 자체를 소멸시키는 마법적 포격에는 버틸 재간이 없었다.

이윽고 2성벽의 반절이 날아가고 나선, 마침내 백기가 올랐다.

항복의 뜻이었다.

“무혈입성이라.”

“엘와즈 백작께서 수성하신다면 어찌하시겠습니까?”

“끔찍한 소리 말아요. 요새를 버리고 떠나는 것 이외에 다른 답이 있을까.”

엘와즈 백작과 모랭 백작이 혀를 내둘렀다.

“티란디스가 말도 안 되는 힘을 얻었군요. 이건 전쟁의 성립을 막아버리는 꼴이니.”

두 백작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용의 마법이 가진 위력을 보름이나 지켜보았다. 요새의 방어를 이렇게 간단하게 무력화시키는 방법이 세상에 어디에 있단 말인가.

“허허, 모든 공과를 눈 뜨고 빼앗긴 꼴입니다.”

모랭 백작이 허탈하게 웃으며 말했다.

지금이야 같은 편이니 그렇다 치고. 귀족 간의 동맹이 언제까지고 유지가 될 수 있을까.

아예 티란디스의 휘하의 가신 가문이 되어 영화를 누리던가, 그도 아니면 다른 수를 찾아야 할 터.

엘와즈 백작이 혀를 찼다.

“공과라니. 애초에 병력이 우세에 있지 않았다면 될 일이 아니었습니다.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허허. 병사들의 반응을 보시란 말이오. 누가 아니라 생각하겠소?”

“대공자가 이미 생각이 미쳐 이탈하지 않았습니까. 정말로 그러할 셈이었다면 가장 선봉에 진입하였겠지.”

요새로 행진하는 1왕자파의 군대가 깃발을 높이 들었다.

누구도 피를 흘리지 않은 승리라, 얼떨떨한 와중에서도 또한 기쁨이 피어오르니 병사들 모두 활짝 웃는 상이었다.

* * *

시엔은 백기를 확인하자마자 바로 여장을 꾸렸다. 케렌 찰신 본인이 수비에 나서 항복을 하지 않았던가.

찰신 영지를 점령했으니 왕당파 입장에서는 군대를 모아 방비할 수밖에 없으리라.

이제는 상부 전선이 밀고 나가야 할 때이니, 여기에 더 남아있을 이유가 없었으니까.

게다가 귀족들의 사기 문제도 있었다.

병사들이야 그저 제 목숨 온전히 보전하고 승리하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그들을 이끄는 귀족들에겐 또 다른 법이었다.

적당히 활약하면 영웅이 될 수 있어도, 너무 과하면 오히려 경계하여 배척받는 법이 아닌가.

그 속도 모르고, 짐을 옮기는 베른닐의 표정이 밝았다.

“싱거운 전투로군요. 앞으로도 이렇게만 갈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만.”

“글쎄. 어차피 공성계야. 병력이 우위에 있으니 먹혔지, 아니면 대판 싸웠을 걸.”

만오천 대 사천으로 붙어봐야 승산이 없으니, 막아줄 성벽이 무너지는 순간 백기가 올랐다.

병력이 대등했다면 이야기는 달랐으리라. 요새의 수성을 포기하고 공격해왔을 테니까.

“그런데 대체 어떤 준비를 했기에 그리 당당하게 나왔는지는 결국 알 수가 없겠군요?”

이미 요새의 문이 활짝 열리고도 들어오라 배짱을 부리지 않았던가. 확실히 무언가 준비한 바가 있음은 분명했다.

“땅지기들을 데려다 대규모 함정이라도 파 놓은 게 아닐까?”

“그래도 만오천 전부를 함정으로 상대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어차피 수성을 할 셈이라면, 한 번이면 충분하지.”

대규모 함정이 한 번만 발동되어도, 공성측 입장에서는 크게 데인 채로 물러날 수밖에 없으리라.

함정이 하나 있으면, 두 번째 세 번째가 있어도 이상하지 않을 테니까.

“뭐. 알아서들 하겠지. 슬슬 출발하자구.”

뭐. 나중에 물어보면 알 일이었다.

백기가 올랐으니 찰신 백작을 확보하게 될 테고, 패배한 수성 사령관이 굳이 감추려 들 이유도 없어 보였으니.

시엔 일행이 차례로 마차에 올라탔다.

시엔 역시 마차의 발판 위로 한 발을 걸쳤을 때였다.

“음?”

쏴아아. 바람이 불었다.

평범한 바람이 아니었다. 난폭한 아케인 에너지의 파형이 만들어 낸 후폭풍이었다.

“선배님!”

“시엔 님!”

두 흑마법사가 급히 시엔을 찾았다.

시엔이 대답 대신,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몰려든 검은 구름이 하늘을 완전히 가렸다.

쏴아, 투투투투투툭!

대지 위로 얼음덩이들이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큰 것은 주먹만 하고, 작은 것은 손가락 한 마디 만한 우박이었다.

시엔이 즉시 방어 주문을 일으켰다.

시엔의 이름으로. 무지는 축복이나니. 썩어버린 바다 앞에 차라리 내 눈을 가리라. 어둠이야말로 가장 달콤한 기만이여라.

의지가 곧 주문이 되었다. 검은 장막이 시엔의 머리 위로부터 넓게 펼쳐졌다. 우박과 장막이 부딪혀 콩 볶는 듯한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와! 시엔 님이 하신 거예요? 저희 우박 맞을까 봐서요? 헤헤, 역시. 자애로우신 나의 님이셔.”

나비가 슬그머니 시엔을 휘감았다. 시엔이 뿌리치는 대신 나지막히 말했다.

“송곳 폭풍.”

“예? 시엔 님?”

송곳 폭풍. 말 그대로 일정 지역 내에 얼음송곳이 비처럼 쏟아져 내리는 마법이었다.

이름만 들어도 어쩐 주문인지 알 것 같으니, 참으로 절묘한 작명이었다.

사실 얼음송곳이 떨어지는 범위는 넓지 않으나, 그 주변부로 멀리까지 우박을 내리는 부작용이 있었다.

“그 파도잡이. 얼간인 줄 알았더니.”

제 주문의 사거리도 파악하지 못한 채 공격을 날리던 녀석이었다. 그러니 덜떨어진 수련생인가 싶었다.

하지만 그게 전부 위장이었던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적의 반응 역시 이해가 가는 일이었다. 그만한 마법사가 있었다면야.

그렇다 해도.

“거짓 항복이라. 더러운 수법을.”

전쟁에서도 최소한의 약속이 있는 법이었다.

항복한 상대를 공격하지 말 것.

그리고 거짓으로 항복하지 말 것.

최소한으로 신뢰할 수 있는 어떠한 선의 문제였다. 이러한 신뢰를 저버리고 나면, 그저 서로 죽고 죽이는 섬멸전만이 이어질 뿐이었으니까.

게다가, 시엔이 느낀 아케인 에너지는 송곳 폭풍의 수준을 한참 뛰어넘었다.

분명 무언가 달리 준비한 것이 있으리라.

* * *

갑자기 사위가 어두워지자, 병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병사가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먹구름이 낀 하늘에 인상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비가 오려나?”

병사의 마지막 말이었다.

손가락만 한 얼음송곳이 떨어져, 눈알을 뚫고 머리 깊숙이 틀어박히고 말았으니까.

병사는 재수가 없었다.

원래 본디 크게 살상력이 높은 마법은 아니었다. 투구에 맞아 튕기고 갑옷에 맞아 튕기는 것이었다. 방패를 들어 충분히 막을 수 있는 그러한 마법이기도 했고.

그러나 이미 항복을 받아 점령을 위해 진군하던 참이 아니었던가. 일부는 투구를 벗어 손에 들고, 서로 기쁨에 취해 웃고 떠들며 나아가는 와중이었으니.

어둑해진 사위에 비명이 들어차기 시작했다.

재수 없는 이는 머리뼈에 제대로 박혀 숨이 끊어지고, 대개는 깨진 머리를 붙든 채, 계속해서 몸을 두드리는 송곳들에 비명을 지르며 어쩔 줄을 몰랐다.

특히 징집병들의 피해가 심각했다.

제대로 철제로 무장한 정규군이야 맞아 우그러지고 터지고 멍드는 정도에 그쳤다. 그러나 솜옷 위로 겨우 가슴 가리개만 걸친 징집병들에겐 너무나 가혹한 마법이었다.

사지에 박힌 얼음송곳에 솜옷 위로 붉은 얼룩이 번져나갔다.

엘와즈 백작은 천성이 무인이었으니, 전장에서 한 번도 무장을 함부로 해제하는 일이 없었다.

그러나 그녀의 말은 아니었다. 얼음송곳을 뒤집어쓴 군마가 날뛰자, 엘와즈 백작이 이내 중심을 잃고 바닥을 굴렀다.

스반델이 급히 뛰쳐나가 쓰러진 백작을 제 몸으로 가렸다. 등을 두들기는 송곳에, 스반델의 몸이 연신 떨렸다.

“어머님!”

“나는 괜찮, 괜찮단다. 애야.”

“방패, 방패를 가져와! 젠장, 거기 너!”

떨어지면서 머리를 부딪친 모양이었다, 괜찮다고 하는 말과는 달리, 백작의 초점이 흐렸다.

“어머님, 빨리 안전한 곳으로.”

“아니야!”

엘와즈 백작이 스반델의 팔목을 움켜쥐었다.

“적습, 적습이야. 공격기를 들어, 이 씹어먹을 것들, 적을 섬멸해! 거짓 항복이라니, 개 같은 놈들.”

“어머님!”

“공격기를 들어야 해. 지금 후퇴하면 결국 패배나 다름없다. 병력이 우세이니, 공세에 나서, 빨리······.”

“큭, 젠장!”

뒤이어, 기수가 붉은 기를 높이 들었다.

총공격의 신호였다.

< 31. 얼어붙은 대지, 춤추는 사람 [3]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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