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 얼어붙은 대지, 춤추는 사람 [2] >
왕실의 혼사가 발표되었다.
사내는 여인을, 여인은 사내를 곁에 두어 서로 즐거움을 누리며 또한 근심을 나누는 것이다. 이를 바로 반려라 한다.
그러나 드리엔 프라임 페벨룬 왕세자에게 반려가 없으니, 이는 왕국의 우환이라 할 것이다.
그리하여 용단을 내리노니, 왕국의 명문이자 오랜 충신이며 개국 공신 가문인 뱅가 공작가의 3녀 케이트 뱅가를 왕세자비로 맞이한다.
꽤 충격적인 발표였다.
드리엔 왕세자가 올해 스물여섯.
뱅가 영애의 나이가 올해 열셋이었다.
연치로만 두 배 차이가 나니, 빈말로도 어울리는 한 쌍이라 할 수 없으리라.
그러나 정략이란 본디 비정한 것이었다.
게른베스트에 자리 잡은 상단 사령부에서 시엔이 고개를 끄덕였다.
서부 귀족 연합은 사령부를 둘로 나누어 운영했다.
티란디스를 중심으로 전선 상부를 이루는 상단 사령부. 그리고 올랭 백작을 사령관으로 전선 하부를 이루는 하단 사령부였다.
“이렇게 나오나? 하긴. 동부 입장에서도 이 정도 이득은 있어야 적극적으로 나오겠지.”
왕세자가 흐레이그의 핏줄이었다.
동부가 왕당파에 합류하더라도, 이후 국면에서 불이익을 당할 것은 뻔한 일이었다.
그러니 왕세자를 뱅가 공작에게 쥐여줌으로써 동맹과 더불어 서로를 견제하도록 만들겠다는 것이다.
누구의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현재 국면에선 참으로 절묘한 한 수였다.
불리한 내전 국면을 뒤집고, 더불어 흐레이그를 견제하여 왕가가 보다 힘을 얻었다.
흐레이그 입장에서야 분통이 터지겠지만, 어쨌거나 현 내전 국면에서 동맹이 절실히 필요한 참이 아니던가.
결국, 받아들일 수밖에 없을 테고.
“이건 꽤 커. 시엔. 동부 전체가 왕당파로 돌아섰다는 뜻이잖아.”
“늦건 빠르건 어차피 일어날 일이었어. 남부가 델피르 전하를 지지하는 상황에서, 동부가 가만히 있지는 않았을 테니까.”
시엔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뭐. 왕세자비에 제 사람을 들여놓는 데에 성공했으니 이제부턴 적극적으로 나올 테긴 하겠지만.”
“그럼 이제 어쩌려고?”
“바뀌는 건 없어. 일단 전선을 밀어서 진격로를 확보하고, 그 후에 흐레이그로 진격해야지.”
페시번은 아주 살판이 났다.
티란디스의 호화 별장에서 신혼 살림을 차렸으니 오죽할까. 게다가 둘이 죽고 못 사는 사이이 더욱이.
“시엔 좀 진지하게.”
“나는 항상 진지하거든? 일어난 일은 일어난 거니까. 어차피 동부를 상대하는 건 남부가 맡아줄 테니까.”
시엔이 손뼉을 쳤다.
새 소식에 저마다 떠들던 귀족들이 자세를 바로 하고 앉았다.
“일단 저희는 최북단으로 향하겠습니다. 올랭 백작님께서 루우트다렌을 향해 진격하고 계시니, 상대적으로 병력이 빠진 북단을 빠르게 점령하면 좋겠죠. 더불어 적의 병력 집결을 방해할 수도 있겠지요.”
엘와즈 백작의 전략이었다.
하단 사령부에서 병력을 집결하여 루우트다렌으로 향했다.
루우트다렌은 왕도를 둘러싼 최종 방어선상에 있는 요새였다. 그러니 루우트다렌을 함락하고 나면, 왕성의 코앞까지 이르는 셈이었다.
그러나 루우트다렌이 어떤 요새랴. 왕국 최종 방어선에 있는 견고한 요새이니, 서부 병력 전체가 모이면 모를까, 반으로 나눈 군대로 함락시키기에는 무리였다.
그러나 왕당파 입장에서는 필사적으로 지켜야 하는 거점이었다. 어쩔 수 없이 방어 병력을 증원할 수밖에 없으리라
이때 병력이 빈 왕국 서북북 지역으로 공세를 가한다. 현재 서부가 취한 전략이었다.
“저는 하부 사령부에 지원을 다녀오겠습니다. 엘와즈 백작님께서 요청을 보내셨으니까요. 확실히 제가 루우트다렌으로 향하는 것이 전략 목표에 더 가까울 테죠.”
현재 시엔의 이름값이 하늘로 치솟은 상황이었다. 도시 세 개를 그 위명만으로 무혈 입성하였으니 오죽할까.
그러니 시엔이 루우트다렌 공략 방면에 합류하면 적의 병력을 더욱 끌어들일 수 있을 테고, 상대적으로 상부 전선의 확장이 수월해질 테니까.
* * *
루우트 평원은 왕국 최대 규모의 채석장이었다. 다만 석질이 썩 좋지는 않은 탓에, 규모에 비해 그다지 가치 있는 땅은 아니었다.
그 가치와는 상관없이, 이러한 지형에서의 전투는 초지와는 다른 양상을 띠었다.
넓게 트였으나 지형이 평탄하지 않고, 이리저리 솟은 바위들이 무성했다. 장창병과 방패수들이 방진을 짜기 어려운 지형이었다.
방진 사이로 적의 돌파가 들어오면 이후 진형이 무너진다. 진형이 무너지고 나면 일단 절반은 패배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시엔이 기사 한 개 조를 이끌고 루우트 주둔지지에 도착하자마자 든 생각이었다.
왕국 최후 방어선이라는 중책에 걸맞은 거대 요새를 앞에 두고, 1왕자파의 군대가 평원을 점거하고 천막을 펼쳤다.
지형을 고려하면 요새와의 거리가 너무 가깝다. 적들이 요새를 뛰쳐나와 급습하면 그 대처가 쉽진 않을 텐데.
시엔이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주둔지에서 한 무리의 군인들이 우르르 몰려나왔다.
일사분란하게 좌우로 펼쳐져 포위를 짜는 모양새가 능숙했다. 훈련이 잘 된 부대였다.
시엔 일행이 멈춰서 기다리는 사이, 중앙에서 지휘관이 앞으로 나섰다.
“신원과 목적을 밝히십시오.”
“시엔 티란디스입니다. 엘와즈 백작님께서 지원을 청하셨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제가 청했지요. 적당한 때에 오셨습니다. 스반델 엘와즈입니다.”
카레네와 비슷한 종류, 그러나 장난기가 싹 빠진 듯한 여인이었다. 이전 연회에도 엘와즈 백작과 함께 찾아왔었기도 하고.
“지원 병력은 이분들이 전부입니까?”
“병력을 요청하신 것은 아닐 텐데요.”
“맞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용과 용의 마법을 청했습니다만.”
그런데 용이 보이지 않는다는 소리였다.
파린이 콧방귀를 뀌었다.
“용을 보고도 용인 줄을 몰라. 얼간이.”
“어허. 못 써.”
“왜, 내가 틀린 말했어?”
“초면에 실례야.”
“인간 따위에게 실례는 무슨.”
뭐. 하루 이틀 일도 아니니, 새삼.
시엔이 스반델을 향해 슬쩍 머리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정신이 좀 아픈 아이라서.”
시엔이 머리를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
스반델이 떫은 표정으로 되물었다.
“전장에 아이를 데려오셨습니까?”
“뭐. 피치 못할 사정이 있다고 하죠.”
“뒤에 계신 여성분들께서는······”
“아. 그쪽은 제 전속 하인들이네요.”
“어린 아이가 하나, 애인이 셋이라. 어디 연회라도 참석하십니까?”
스반델이 결국 인상을 찌푸렸다.
애인이라. 사실 그렇게 보이는 것도 사실이었다. 귀족가의 도련님이 미모의 여인을 하인이랍시고 끌고 다닌다면야.
십 중 팔구는 애인 아니면 첩이 아니던가.
그러나 시엔의 경우는 십 중 하나였다.
“둘은 마법사고, 하나는 뛰어난 전사입니다. 모두 상당한 실력자들이라 제 호위를 겸하고 있습니다만.”
“흠. 그러시다면야. 알겠습니다.”
스반델이 눈을 가늘게 떴다.
말이야 알겠다고는 하지만, 전혀 믿지 않는 태도였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실력 있는 마법사는 귀족이 초대하여 가문에 모시는 법이고, 뛰어난 전사라면 서임하여 기사로 들이는 것이 보통이었다.
애초에 실력에 자신이 있는 치들이 일개 하인을 자청하여 따를 리가 없을 테니까.
뭐. 믿거나 말거나. 어쨌거나 알겠다고 했으니 그걸로 된 일이었다. 굳이 시엔이 그녀를 납득시킬 이유가 없었다.
“하아. 어머님께선 이런 사내를.”
스반델이 한숨을 푹 쉬었다.
시엔이 키득거리며 한마디 툭 던졌다.
“여기가 맞선 자리는 아니지 않던가요?”
스반델의 표정이 한층 더 구겨졌다.
무어라 쏘아붙일 듯 입술만 달싹거리다, 이내 못마땅한 표정을 지우며 말했다.
“······백작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시엔이 스반델의 뒤를 따랐다.
가면서 살펴보니, 주둔지의 규모가 보통이 아니었다.
무장으로 보아하니 징집병이 섞인 모양으로, 대개 그렇듯이 베테랑들을 조장으로 어설픈 징집병들을 묶어놓은 꼴이었다.
“빨리빨리 움직여!”
“군화는 벗을 수 있을 때 최대한 벗어 말려 놓도록! 날이 추울수록 군화를 신경 써서 말려야 해! 여름이면 발에 버섯이나 좀 피고 말지, 이렇게 추우면 발가락 잘린 병신이 되는 거다!”
“거기, 너! 창은 어디 두고 나왔어! 옆구리에 단단히 끼란 말이야! 네 마누라처럼 생각하라니까!”
군인들이 연신 목청을 높이고, 징집병들이 움찔거리며 그 말에 따랐다.
“병력이 얼마나 되죠?”
“총 일만 사천입니다.”
“정규군의 숫자는요?”
“정규군이 사천. 열두 개 용병단 병력이 이천입니다. 공성단 네 개가 포함되었고, 마법사 아홉이 동원되었습니다.”
“공성단은요?”
“투석기가 여덟, 공성탑이 마흔 개가 준비되었고. 공성추는 일단 예비로 돌렸습니다만, 요새 규모로 보아 성문 돌파는 어렵다고 판단되기 때문에.”
“흠. 적의 병력은요?”
“그 부분이 조금 기묘합니다만.”
스반델이 고개를 저었다.
“일단 사령부에 가서 이야기를 듣도록 하십시오.”
일만 사천이 주둔하고 있으니 그 넓이 또한 보통이 아니었다. 한참이나 들어가서야 비로소 지휘부의 천막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개중 하나, 스반델이 딱히 특별할 것 없는 천막 앞에 섰다. 엘와즈 백작의 천막이었다.
“백작님, 시엔 티란디스 대공자께서 도착하셨습니다.”
“들라 해.”
그렇게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준엄한 호령이 시엔에게 날아들었다.
“여기가 전장인지, 아니면 야유라도 나왔는지 모르겠군. 자네가 제정신인가?”
“안녕하셨습니까, 백작님.”
시엔이 공손히 인사를 붙였다.
기실 인사가 아니라, 어째 보자마자 호령이냐는 뜻이었다.
엘와즈 백작이 혀를 찼다.
“쯧쯧. 능력이 있어 무혈입성을 몇 번 하더니, 전장이 그리 만만하던가?”
“굳이 말씀드리자면, 이 여인들은 생각하시는 바가 아니라 제 호위를 겸한 실력자들이라 설명을 드려야겠네요.”
엘와즈 백작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 표정이 스반델과 똑같았다. 과연 혈연이란 속일 수가 없다더니.
“그걸 믿으라?”
“믿지 않았다가 호된 꼴을 당한 이들이 한둘이 아닙니다. 굳이 보여드려야 할까요?”
“그리 당당하게 나오니 내 일단은 믿겠네.”
백작의 표정이 조금은 누그러졌다.
“그런데 그 아이는 뭔가? 자네 자식인가? 아직 성혼하지 않았을 터인데?”
“이 아이는. 음.”
“나는. 읍.”
시엔이 파린의 입을 틀어막았다. 시엔의 미소가 조금 어색해졌다.
“사정이 있어 데리고 다니는 중이니, 이 아이에 한해서만 양해를 부탁드리겠습니다.”
“흠. 사정이 있다라. 뭐. 좋네.”
“그런데 이리로 부르셨습니까?”
시엔이 주변을 둘러보며 물었다.
도착했다면 응당 지휘부로 향했어야 하는 일이었다. 엘와즈 백작 역시 사령관으로 지휘부에 있어야 했을 테고.
굳이 개인 천막으로 불렀으니 그러한 이유가 있으리라.
엘와즈 백작이 쓴웃음을 지었다.
“대공자가 그래도 눈치는 있군 그래.”
“문제가 있으시군요. 대강 알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내전이니까요.”
타국의 침략을 받지 않는 한에야, 귀족의 움직임이란 언제나 제 이득을 최우선으로 했다.
당연한 의무였다. 귀족은 항상 제 가문과 영지, 영민을 위해 움직여야 했으니까.
더군다나 내전이 아니던가. 딱히 열세에 있는 상황이 아니니, 서로 더 큰 공로를 차지하고자 열을 올리는 와중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사령관이라고 해도 이름뿐, 군세를 온전히 장악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눈치뿐만 아니라 꽤 노련하기까지 한 모양이야. 자네도 알다시피 내가 가진 군대가 많다 하나, 국경을 수호하는 이들을 함부로 쓸 수는 없지 않나.”
“이번엔 얼마나 동원하셨습니까?”
“정병들로 두 개 대대일세.”
약 팔백여 명이라. 따로 언급이 없으니 징집병을 모으진 않은 모양. 만 사천의 군대 중 고작 팔백여 명이니 사령관의 입김이 약한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그러나 백작의 말대로, 변경백이 변경의 군대를 함부로 돌릴 수는 없는 노릇이기도 했다.
“그래서 저를 청하셨습니까?”
“자네의 용이 공성에 일가견이 있다 들었거든. 성문을 일거에 날려 버린다던가. 아무리 대장이 여럿인 부대라 해도, 성문이 없는 성을 점령하는 데는 무리가 없을 터이니.”
“무리가 없다 하시네요.”
“이상한 일이지.”
백작이 간이 책상을 톡톡톡 두드렸다.
시엔이 다시 물었다.
“이상한 일이라 하십니까?”
“적의 병력은 약 사천 정도. 물론 저만한 요새를 끼고 있으니 뛰어난 지휘관이 있다면 능히 이만의 군대를 막아낼 수 있을 것이네만.”
“성문을 지워버리고 나면 이야기가 좀 달라지겠지요.”
“그러니까. 그게 이상하단 말일세. 사실 요새를 함락시키는 것이 전략 목표가 아니잖은가. 적의 병력을 이리로 집중시키고, 약해진 상부 전선에서 이득을 보기 위함이 아니던가.”
“그렇습니다.”
“그런데 병력의 움직임이 관측되질 않고 있네. 심지어 요새에 증원도 없는 상황이야. 자네가 여기에 도착했는데도 말이네.”
금화 몇 개면 평범한 영민도 첩자가 되곤 했다. 시엔이 움직였으니 그 사실을 적이 모르지 않을 터였다.
“기만책임을 알았거나, 혹은 기만책이겠군요.”
“전자라면 문제가 없겠지만 후자라면 문제가 좀 있지. 한데, 도통 말을 듣질 않는단 말일세. 당장이라도 요새를 함락시켜야 한다 주장하고 있으니 내 골치가 아파서.”
1왕자파의 전략은 일종의 기만책이었다.
전선 하부에서는 대규모 긴장 조성으로 적을 끌어모으고, 상부에서 주공에 나서는 전략이었으니까.
적이 이를 알고 병력을 보내지 않는다면, 사실 그건 그 나름대로 이득이었다. 그냥 요새를 함락시키면 그만. 왕성으로 진출하는 교두보를 마련할 수 있었으니까.
그러나 후자, 적 역시 기만책을 준비했다면 이야기가 달랐다.
요새에 무언가 비장의 한 수를 배치하여 수성 가능한 능력을 갖췄다면, 함부로 공격하여 오히려 손해가 막심하리라.
“일단 그렇게 알고, 일단은 여장을 풀게나. 늦은 밤에 전략 회의를 소집할 터이니, 그때까지 편히 쉬고 있으면 될 것이야.”
* * *
지휘 막사는 소박하기 그지없었다. 다르게 표현하자면 초라하다 해도 좋았다.
적습이 가능한 지형이고, 지휘관이란 주요 전략 목표였다. 지휘 막사가 화려하면 내가 여기에 있다 소리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러한 천막이라면야 적습이 있어도 지휘관이 주요 목표가 되는 일은 없으리라.
물론 장단이 있는 법이라, 이름 높은 명장이 지휘하거나 혹은 우세한 상황에서는 가장 화려한 천막으로 치장하여 군의 사기를 높이고 적의 사기를 깎기도 했다.
귀족들이 전략 지도가 놓인 원탁에 둘러앉았으나, 자세히 보면 두 파로 갈린 상황이었다. 다닥다닥 붙어 앉은 이들과, 중간에 어중간하게 빈 공간을 보니 딱 그런 꼴이었다.
열두 개 가문의 지휘관 중 사령관인 엘와즈 백작에게 붙어 앉은 이가 고작 셋이었다.
나머지 아홉이 당장 공성에 나와야 한다 주장하는 이들이리라.
그 외 격식 없는 복장을 한 이들은 용병단의 대장들이리라. 사실 한눈에 보기에도 알겠는 것이, 회의에는 전혀 관심 없다는 태도였으니까. 애초에 용병이야 돈 받고 싸우면 그만인 치들이었다.
“마침 대공자가 도착했으니, 지금이라도 당장 공세에 나서야 합니다!”
“적의 증원이 늦어지고 있는 참이 아닙니까. 다들 제 영지를 사수하는 데 바빠 증원 병력을 보내지 않는 중인 것을 모르겠습니까?”
“허어. 애초에 전략 목표를 지켜야지. 주공은 상부 전선에서 맡기로 한 것이 아닌가.”
“이미 전략 목표가 들통이 난 겁니다. 적의 증원이 없다는 것이 그 증거가 아닙니까!”
대개 귀족 본인이 참석하거나 혹은 동원한 병력이 적은 이들이 엘와즈 백작을 두둔했다.
반대로 가문의 대표로 참석한 젊은 지휘관이나 대규모 병력을 이끈 이들이 공격을 주장하는 중이었다.
시엔이 보기에 양측 모두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이미 기만책이 먹히지 않은 상황이니, 계속해서 주둔한다면 그 유지비를 어떻게 감당하랴.
특히나 큰 병력을 이끈 입장에서는 하루하루 금화가 녹아나는 꼴이었으니, 요새 공격에 나서 결판을 보고 싶을 터였다.
그러나 엘와즈 백작의 신중함 역시 무시할 수는 없었다. 적이 무언가 준비하여 함정에 끌어들이려는 수작이라면, 함부로 공성에 나설 수도 없는 노릇이 아닌가.
“대공자는 어떻게 생각하시오?”
시엔이 도착하기 전부터 계속 대립해오던 이들이었다. 그러니 새로 온 이가 어느 편인지 알고 싶을 수밖에.
“제 생각을 말씀드리자면.”
시엔이 운을 뗐다.
모두의 시선이 시엔에게 쏠렸다. 시엔이 미소 지었다. 이 기대하는 눈빛들이라니. 연회의 주인공인 만큼이나 재미있는 순간이 아닌가.
“일단 성문부터 치우도록 하겠습니다. 판단은 그 이후에 적이 어떻게 나오느냐로 알 수 있겠죠.”
급히 증원하는 움직임이 보인다면 바로 요새를 공격하면 될 터였다. 그렇지 않다면 뭔가 함정을 놓았다고 보면 될 테고.
* * *
다음 날 정오. 1왕자파의 전령이 평야를 가로질렀다.
항복을 권하는 전령이었다.
그러자 루우트다렌 요새에서 화살이 쏟아졌다. 전령이 말과 함께 고슴도치가 되어 바닥에 쓰러졌다. 대답 대신이었다.
전령이란 본디 아무리 언짢은 내용을 전하더라도 살려 돌려보내는 것의 관례가 아니던가.
1왕자파의 귀족들이 격분하는 사이, 성벽 위에서 소녀, 알리아가 툴툴거렸다.
“쳇. 용이 안 보이네요? 명예 성자가 용을 끌고 다닌다면서요?.”
“크흠. 그 이후로 용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네.”
“에이, 좋은 구경을 하나 했는데. 아깝다.”
“용이 정말로 나타나면 답이 없다고 하지 않았나!”
“그건 그렇죠. 용이 괜히 용이게요? 이딴 요새 하나, 작정하고 불을 뿜으면 반의 반은 날아갈 텐데. 그럼 두 번 뿜으면 반절, 네 번 뿜으면 저언부 잿더미잖아요?”
그 옆에서 요새 방어 사령관인 케렌 찰신이 인상을 찌푸렸다.
“애초에 용이 사람을 따른다는 게 말이 안 돼요. 용이 무슨 애완동물인 줄 아세요? 애초에 뭔가 수작을 부린 거라구요.”
“나는 내 눈으로 용을 직접 보았단 말이다! 그건 용이었어! 금빛 용!”
“흠. 그러면 또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젠장! 그러면 용이 나타나면 어쩐단 말이냐!”
“헤헤. 튀죠.”
“튀다니! 그게 무슨 소리냐!”
“그럼 어떻게 해요? 용하고 싸워요?”
“싸우라고 여기에 온 것이 아니냐!”
“아. 그것도 그렇네. 흐음. 큰일이네.”
“큰일이라니, 대책을 마련해야지!”
“에이, 아니겠죠. 용이 괜히 용이게요?”
무려 흐레이그 공작이 보내준 마법사였다.
그 실력을 공작이 직접 보증하기도 했고, 요새의 마법사가 기절초풍하며 감히 판단이고 뭐고 할 수가 없는 강대한 이라 증언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행실을 보면 도저히 신뢰할 수가 없었다. 애초에 이렇게 멍청한 녀석이 제대로 마법을 부릴 수나 있을까 싶을 정도인데.
길길이 뛰는 케렌을 보며, 알리아가 키득거렸다.
알리아는 바보였다. 그녀는 줄곧 바보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바보는 무슨 일을 해도 의심받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은 이후로부터 바보가 되었다.
바보란 얼마나 편리한 변명인지.
타국의 중요 방어 거점에 들어와 그 시설을 파악하고, 또한 군대의 신호와 체계를 눈으로 보고 익히는 와중에도 어떤 의심조차 날아오지 않았다.
쟤가 왜 저기서 저러고 있지? 놔둬. 쟤는 원래 저러니까. 아무 생각 없는 애라서 그래.
세상 오로지 알리아만 아는 사실이었다.
심지어 알리아의 사랑스러운 연인조차 그녀의 실체를 알지 못했다.
물론. 알리아가 겉으로 보이는 것보다는 두 배 이상 나이를 먹었다는 사실은 알고 있겠지만. 바보인 척 실수인 척 슬그머니 알려주었으니까.
“아. 저기 저 사람이 명예 성자인가봐요.”
“또 성문을 날릴 셈인가.”
“오오. 재미있겠다.”
알리아가 눈을 반짝였다.
케렌이 불을 토했다.
“젠장! 재미있겠다니! 막아야지! 막으란 말이다!”
“쳇. 좋은 구경거리였는데. 어쩔 수 없지.”
“어쩔 수 없다니! 막을 수 있으면 당연히.”
“예이예이, 잔소리는 그만! 엘 알리아 루운 샤이링. 아, 사, 레, 일 리에나······”
알리아의 주문이 이어졌다.
파도잡이의 노래와 같은 주문이었다. 소녀의 고운 음색이 흐르는 여울 소리가 되어 낭랑히 울려 퍼졌다.
* * *
영원한 밤의 창날을 준비하던 시엔이 눈살을 찌푸렸다.
저 멀리, 성벽 위에서 마력의 유동이 느껴졌다. 워낙에 거리가 있으니 은은하고 미약한 아케인 에너지일 뿐이었지만, 파도잡이가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은 알았다.
그런데, 이 거리에서?
파도잡이의 마법은 질량계에 속했다. 즉, 세상의 법칙을 거스르지 못하니 그 사거리에 한계가 명백했다.
투석기조차 닿지 않는 거리였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파도잡이가 세계수를 통째로 매개로 사용하더라도 이 거리에서의 공격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영원한 밤의 창날을 요격할 셈인가?
시엔이 눈살을 찌푸렸다.
비질량계 마법은 눈에 보이기만 하면 일직선으로 목표를 향해 날아갔다. 사거리에 제약은 없으나, 도중에 충돌하면 바로 발화에 이르는 약점이 있었다.
얼음창 따위의 마법으로 영원한 밤의 창날을 맞추면, 그 자리에서 바로 발화하여 구체로 화해 애먼 공간을 지워버리고 마는 것이다.
마법 병단의 해결책인 모양. 제법 판단이 좋았다 할 수 있으리라.
시엔이 그렇게 생각하는 참이었다.
완성된 마법이 시엔을 향해 쏘아졌다.
거대한 얼음창.
사거리의 한계에 부딪혀, 반도 못 오고 바닥에 처박혀 산산이 조각나 깨어지고 말았다.
“이건 또 뭐야?”
시엔이 황당한 눈빛을 쏘아 보냈다.
* * *
“아. 맞다. 안 닿지.”
“안 닿는다니!”
“아. 그게. 무슨 수를 써도 저기까지는 마법이 안 닿는다구요. 저는 파도잡이거든요!”
알리아가 당당히 선언했다.
케렌이 입만 뻐끔거렸다. 사람이 너무 기가 차면 오히려 말문이 막히는 법이었다.
그나마 젊다는 것이 다행이었다. 만약 늙은이였다면 뒷목을 잡고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았으리라.
“그, 그럼 애초에 마법을 쓰지 말았어야지.”
“헤헤. 제 실수. 깜빡했어요.”
“아니, 하, 아니. 빌어먹을, 아니.”
케렌이 말을 잇지 못했다.
알리아가 키득거렸다.
약이 오르겠지만 지가 뭐 어쩌겠어.
내가 바보라서 그러는데.
그리고 성문을 내어줘야 하는데 그걸 막을 수는 없는 노릇이잖아?
어쨌거나 바보 행세는 재미있는 일이었다.
만화원의 시녀 중 하나인 히네는 알리아의 경우를 보며 지적 발달 수준과 마법적 연산 능력이 관계가 없다는 논문을 작성하기도 했다. 그 때는 이리저리 어울려 주느라 꽤 고생했었다.
“아. 오네요.”
“오다니, 뭐가 온단 말이냐!”
“저거요, 저거.”
알리아가 손가락을 펴 저편을 가리쳤다.
케렌이 고개를 돌렸다.
요새 바깥, 거대한 암흑의 창이 검은 꼬리를 길게 늘어뜨리며 날아들고 있었다.
< 31. 얼어붙은 대지, 춤추는 사람 [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