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 얼어붙은 대지, 춤추는 사람 [1] >
지휘관의 성향은 그 식사에서부터 드러났다.
누구는 전쟁통에도 요리사를 들여 화려한 만찬을 즐기는가 하면, 병사와 같은 것을 먹고 마시는 이도 있었다.
어느 쪽이건 나름 장단이 있는 법이었다.
사실 후자의 경우는 무턱대고 미담으로 치부하는 경향이 있었다. 진정한 지휘관이라면, 이러한 로망의 한 가지로 취급되곤 했다.
카레네가 인상을 찌푸렸다.
“이게 다 뭐야?”
“뭐가?”
칠면조 다리를 썰던 시엔이 되물었다.
구운 칠면조에 묽은 스프와 세 가지 샐러드를 곁들인 저녁 식사였다.
“지금 몰라서 물어? 전쟁 중에 이렇게.”
“이 정도면 검소하지, 뭐.”
티란디스의 저녁 식사는 가족이 모여 정찬을 즐기는 것이 오랜 전통이었다. 그러니 이 정도면 상당히 간소한 편이었다.
“지금 그걸 말이라고······! 병사들이 보고 어떻게 생각하겠어?”
“흠. 글쎄? 맛있겠다?”
“시엔!”
카레네가 언성을 높였다.
시엔이 고개를 저었다.
“오늘 부대 식사는 고기가 반절인 스튜인데, 거기에 쌀까지 넣어서 푹 끓인 거더라구. 맛도 좋고, 든든하니 참 만족스러운 식사일걸. 기사단 식사에는 스튜에 쌀이 들어가지 않는 대신에, 구운 빵 한 덩어리와 버터 한 스푼, 그리고 땅콩 한 줌이 추가될 거고. 흠.”
시엔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럼 기사단 식단을 따라야 하나? 아무래도 그쪽이 좀 더 잘 나오잖아? 아니면 병사식을 같이 먹으라는 거야?”
“그건······.”
“기사단 식단하고 병사 식단은 또 다르잖아? 애초에 기사들이 더 잘 먹는다고 불만 있는 녀석도 있나?”
카레네가 입을 다물었다.
기사들에게만 더 좋은 식사를 제공한다 해서, 거기에 불만을 가질 병사는 없었다.
전장의 꽃, 전장의 가장 날카로운 창날이자 단단한 방패가 아니던가. 병사가 싸우기에 기사단이 함께하는 것만큼 든든한 일이 없었다.
같은 부대에 기사단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기꺼이 여기는 상황이었다.
“그런 논리라면 내가 더 잘 먹는다고 누가 불만이겠어?”
“그래도 존경받는 지휘관이라면 모름지기.”
“지휘관이 지휘만 잘하면 존경은 알아서 따라오는데 뭘. 굳이 식사를 함께하지 않아도 말야.”
“하. 말이 안 통하는구나? 말을 말지.”
할 말이 없어진 카레네가 등을 돌렸다.
시엔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리고 세올이 눈치를 보았다.
“저, 선배님.”
“왜?”
“그게요.”
세올의 시선이 잘 구워진 칠면조에 닿았다.
트리예며 누렁이 등등 전부 제 앞접시에 큼지막히 한 덩이씩 가져다 놓고 먹는 데 비해, 세올의 접시에는 그저 야채만 한가득이었다.
“누가 또 사고 치래?”
“저기 그게요, 제 의도가 아니었습니다······”
“결과가 있으면 의도가 무슨 상관이야?”
“윽.”
세올이 움찔했다.
시엔이 상냥한 미소와 함께 말했다.
“그럼 굶을래?”
“아뇨. 이 세올, 제일 좋아하는 것이 풀입니다. 역시 건강은 채식이죠.”
“그래. 많이 먹고 건강해야지. 정신도 좀 건강해지고.”
“네······.”
세올의 어깨가 축 처졌다.
어깨뿐이랴. 눈꼬리도 입꼬리도 아래로 향했다. 식사를 앞에 두고 참으로 처연하기 그지없는 모습이었다.
물론, 시엔이 이미 세올의 사고가 고의가 아니었음을 알았다.
저번에 대죄인을 불렀을 때와는 달랐다. 그때는 제멋대로 일을 도모하다 큰일이 터졌을 뿐이었으니까.
그런데도 굳이 육식을 금지한 것은, 벌이라기보단 특단의 조치였다. 용의 사념이란 애초에 상정하지도 않았지만, 알고 보니 꽤 지독한 것이었으니까.
문득 세올의 표정이 바뀌었다. 비굴한 듯한 웃음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낯선 얼굴이 자리 잡았다. 표정만으로도 아예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다.
“크악! 못 참겠다! 나는 용이다! 세상 가장 고귀한 존재란 말이다! 감히 용에게 이딴 풀조각이나 먹이려 들다니!”
세올이 소리 질렀다.
파린이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한심하다는 표정이었다.
좋아하는 샐러드를 팍팍 퍼먹고 있던 중이었다. 어린 용은 의외로 야채를 좋아했다.
“저거 또 지랄이네.”
“어허. 못 써. 그건 또 어디서 배웠어?”
“인간의 언어 따위 안 배워도 알거든?”
“흠. 그래서. 저건 언제까지 저 꼴이야?”
“나도 몰라.”
파린이 고개를 저었다.
“당장 고기를 가져, 컥.”
세올의 포효가 중간에 뚝 끊겼다. 목이 졸리면 누구라도 어쩔 수 있으랴.
어느새 세올의 등 뒤에 선 나비가 목을 감아 꽉 죄었다.
“억, 잠깐, 놔, 이거, 놔······.”
“시엔 님께서 식사하시는데 소란 피우지 마세요. 알겠죠?”
“알았, 알았으니까. 커억…….”
세올이 그대로 눈을 까뒤집으며 축 늘어졌다. 나비가 그제야 팔을 풀어주며 의자에 잘 기대어 두었다.
이러니 채식을 시킬 수밖에.
파린의 조언이었다.
용의 성분이 영혼에 섞인 것이라, 한동안 구박해서 용의 인격을 계속 끄집어내면 결국 전부 소모되고 말 것이라고.
“아직 남았을까?”
“이번이 마지막이었어. 이제 안 느껴져.”
“흠. 용의 사념이라. 생각지 못한 변수인데.”
“용이니까.”
“애초에 설명이 안 되잖아. 이미 영혼이 소멸했는데도 불구하고 남은 유해에 자아가 남아 있다고?”
“용이잖아.”
시엔이 눈살을 찌푸렸다.
용이니까 그렇다는데 뭐 할 말이 있으랴.
세올이 정신을 차린 것은, 식사가 거의 끝나갈 즈음이었다.
“어, 선배님? 설마 제가 또.”
“이제 괜찮을 거라던데.”
“정말요? 그럼 저 고기 먹어도 되는 건가요?”
“내일부터?”
“어, 어째서 내일부터인가요?”
“다 팔렸거든.”
시엔이 칠면조의 뼈 무더기를 가리켰다.
세올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 * *
초봄이라 아직 낮이 짧고 밤이 길었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나자 이미 해가 떨어진 이후였다.
해가 지기 전까지 항복하라 전언을 보냈으니, 아직까지 소식이 없음은 응전하겠다는 대답과 같았다.
시엔이 전열에 나서자, 병사들의 존경 어린 시선이 콕콕 날아와 박혔다.
오오, 대공자님께서 날 보셨어. 눈이 마주쳤다고. 이 눈은 평생 안 씻어야지.
멍청아, 널 본 게 아니라 날 보신 거거든? 그리고 넌 원래 안 씻잖아. 시발, 냄새. 이새끼야, 좀 씻으라고.
그간 티란디스의 군대는 이미 두 번의 공성전을 치렀다. 한 번은 시엔이 등장하자마자 백기를 올려 항복했으며, 또 한 번은 용의 마법이 적의 성문을 지워내고 난 후에 항복을 받았다.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두 개의 도시를 함락시킨, 용의 주인인 대공자를 보는 병사들의 마음이 어떠하랴.
잠시 후, 영원한 밤의 창날이 날았다.
이미 사위가 어두웠다. 최상의 공격 마법의 검은 투사체는 거의 보이지도 않았다. 소리 없이 날아간 검은 창날이 성문에 틀어박혔다.
이내 성문이 사라지고, 성문이 있던 자리만 남았다.
“최후통첩을 보내. 항복하지 않으면 다음은 성벽이 날아갈 거라고.”
-참모부, 전령을 보내겠습니다.
송수신기를 통해 복창이 되돌아왔다.
깃발을 쓰지 않고서도 더 정확한 명령이 가능한 마도구라. 익숙해지니 세상 이렇게 편한 물건이 없었다.
뒤이어, 한 기의 기마가 도시로 향했다.
* * *
“얄렘방이 함락되었습니다.”
“적의 피해는?”
“전무합니다. 성문이 날아가자 그대로 항복했다고······”
“이런 젠장! 또야? 빌어먹을 티란디스!”
흐레이그 공작이 서류 더미를 집어던졌다.
집무실에 종이들이 펄럭거리며 휘날렸다.
“벌써 세 개야! 도시 세 개가 그대로 날아갔다고. 빌어먹을, 화살 한 발을 안 쏘고 그대로 가져다 바친 게 벌써 세 개라고!”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기사가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흐레이그 공작이 시뻘건 얼굴로 심호흡을 했다.
기사의 잘못이 아니었으니, 화를 내 봐야 전부 무용이었다. 물론 알고 있으나, 사람 마음이 쉬이 다스려지진 않는 것이었다.
티란디스의 손에 넘어간 것이 벌써 도시 세 개였다. 전부 전투 없이 넘어간 것이었다.
적의 피해는 고사하고, 도시의 전투물자까지 고스란히 빼앗기고 말았다.
“전선은 어떻지?”
“대치가 이어지고 있습니다만, 아시다시피.”
“젠장, 빌어먹을 티란디스!”
징집으로 증편된 부대가 수성에 나서고 있으니, 1왕자파의 공세에도 좀처럼 전선이 밀리지 않는 상황이었다.
문제는 티란디스군이었다. 이리저리 오가며 주요 거점도시만을 골라 함락시키니, 전선이 뒤로 물러나는 것도 시간문제였다.
공작이 다시 물었다.
“신부행은 아직인가?”
“아직 보고된 바가 없습니다.”
흐레이그 나이트를 운용해 막아내야 했다.
그러나 뱅가 공작 영애의 신부행이 언제 이루어질지 몰랐다.
공작 영애의 신부행이니만큼 엄중한 경계가 있을 터, 때를 맞춰 습격해 혼약을 무효화시키기 위해선 곁에 두고 대기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때였다.
하인이 급히 찾아와 손님의 방문을 알렸다.
“누구라고 하더냐.”
“만화원에서 찾아왔다 하십니다만.”
공작이 멈칫했다.
만화원. 헤인트와 트리예를 파견해 준 단체의 이름이었다.
“일단 들라 하게. 자네도 일단 물러나고.”
공작이 기사를 물렀다.
잠시 후, 키가 작은 소녀 하나가 집무실에 들어섰다. 온갖 보석으로 치장하여 반짝반짝 빛나는데, 그 장식이 과하여 오히려 꼴불견이었다.
“꽤 곤란하신 모양이세요, 공작님.”
“용건이 뭐지? 그간 연락 한 번이 없더니. 오랜만에 찾아와서 하는 말치곤 뻔뻔하기 짝이 없군.”
“저희도 그간 큰일이 있었거든요. 불이 나서 집이 홀라당 타 버리는 바람에 여러모로 고생이 많았다구요. 그러니까 너무 섭섭해 하시진 마세요.”
“그래서 지금 찾아온 이유가 무엇이지?”
“뭐, 사업 이야기에요. 저희도 화재로 잃은 게 너무 많아서, 재건을 위해 도움을 좀 부탁드립사 이렇게 찾아온 거예요. 마침 공작님께서 도움이 필요하신 것 같으니 서로 돕고 살면 좋잖아요?”
흐레이그 공작이 콧방귀를 뀌었다.
“흥. 너희가 일을 제대로 처리한 적이 있더냐? 역병으로 쓸어버리겠다더니 별 소득도 없이 끝나버리고, 아니, 그 티란디스의 애송이만 이득을 봤지. 헤인트와 트리예 둘 다 그저 그렇게 죽어버리지 않았나.”
“이번엔 다를 거예요.”
“내가 어떻게 믿지?”
“음, 제가 직접 왔으니까요?”
소녀가 제 가슴을 탁탁 두드렸다.
일견 귀엽기까지 한 동작이나, 공작이 처한 상황에서야 좋게 봐줄 수가 없는 꼴이었다.
공작의 표정에, 소녀가 허리에 손을 척 얹으며 말했다.
“이래보여도 저는 그분의 시녀라구요!”
“이전에 왔던 마법사들도 같은 소리를 했지.”
“에이, 걔네는 시녀가 아니었어요. 시녀 후보였죠. 주어진 임무를 훌륭히 완수하고, 그 실력을 명백히 증명해 내야 비로소 그분께 닿아 시녀가 되는 것이랍니다.”
공작이 인상을 찌푸렸다.
헤인트나 트리예 모두 완숙한 여인이었다. 그러나 딸보다 어려보이는 소녀가 나타나, 그녀들보다 더 실력이 있다 해봐야 믿음이 갈 리가 없지 않은가.
“네가 뭘 할 수 있지?”
“아. 그럼 보여드릴게요. 엘 알리아 예르예르 미이······”
소녀의 입에서 노래와 같은 주문이 흘러나왔다. 곧바로, 한기가 휘몰아치며 방 안이 얼어붙기 시작했다.
공작이 정신을 차렸을 때는, 어느새 책상 주변과 소녀를 감싸는 좁은 공간을 제외하곤 전부 얼음으로 가득 찬 이후였다.
“혹시 잘 모르실까봐 말씀드리는 건데요, 등대지기가 직접 와도 이렇게는 못 하거든요? 제가 세상 제일, 대륙 최고의 물길잡이라는 사실! 엣헴.”
공작의 간담이 서늘했다.
삽시간에 주변이 얼어붙었다. 소녀가 나쁜 마음을 먹었다면, 저항조차 못 하고 그대로 당하고 말았을 터였다.
겉모습으로 판단하다니. 아직도 멀었구나 하는 반성과 함께, 공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더 보여드려야 하나요?”
“이 정도면 충분해.”
“그럼 도와주시는 건가요? 한 달에 황금 다섯 수레. 그분께서 원하시는 보수랍니다. 물론 황금으로 지불받기는 저희도 쉽지 않으니, 그만큼의 보석이나 희귀 시약으로 부탁드릴게요.”
마법 실력은 뛰어날지 몰라도, 교섭에는 형편없는 소녀였다.
알려줄 필요도 없는 만화원의 상황을 나불나불 떠들 뿐만 아니라, 도움을 주겠다는 것이 아니라 받겠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
공작이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이번엔 후불로 지급하도록 하지. 그간 계속 실패했으니, 믿음이 가야 말이지.”
“앗, 그럼 더 보여드릴까요? 엘 알리아.”
“그만. 여기서 마법을 아무리 구경해 봐야 그게 무슨 소용이란 말이냐.”
“읏. 그러면요?”
“여기까지 찾아왔다면 상황은 알고 있겠지? 마법 실력은 내 앞이 아니라 전장에서 증명해야 할 것이야. 전장에서 전과를 올리면, 그 공로를 따져 보수를 지급하도록 하지.”
“앗. 그러면 안 되는데.”
“솔직히 말하자면, 난 너희를 신뢰하지 않아. 애초에 정체를 모르는 세력을 믿는 놈이 있을까. 너희가 그 쓸모를 증명하지 않는다면, 나 역시 너희와의 거래를 유지할 이유가 없지.”
“으으.”
소녀가 울상을 지었다.
그렇게 한참을 망설이는 듯 하다, 이내 결론을 내린 모양이었다.
“알겠어요. 그분께서 어떻게든 벌어오라 하셨으니까. 그렇게 할게요.”
“좋아. 그럼 이제 마법은 좀 풀지. 나이를 먹으니 한기가 참으로 고역이야.”
공작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방 안이 온통 얼음으로 가득 차, 사방에서 한기가 밀려드는 참이었다.
“저는 얼리는 것만 할 수 있어서요. 녹이는 건 방화광에게 맡기셔야죠.”
“여기 갇혀 있으란 말이냐!”
“아.”
소녀가 제 머리를 콩 두드렸다.
“헤헤, 실수. 대신 문밖에 물로 글씨를 쓰는 건 할 수 있거든요? 일단 도움을 요청할게요.”
공작이 선택을 심각하게 재고하기 시작했다.
< 31. 얼어붙은 대지, 춤추는 사람 [1]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