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 둑이 무너지고 [5] >
브레스가 창공을 양분하는 선이 되어 날았다. 그 색이 거뭇하니, 사룡이 뿜어내는 강산의 숨결이었다.
적들의 입장에서는 불행 중 다행이리라. 대지로 직격하지 않고 머리 위 하늘을 향해 쏘아진 것이었으니.
그러나 또 하필이면 산의 정수, 애시드 브레스였다. 추진력을 잃은 애시드 브레스가 창공에서 잘게 부서졌다. 무게를 가졌다면 아래로 떨어지는 것이 순리가 아니던가.
방울방울 뭉친 강산이 후두둑 떨어져내렸다.
당연한 순서로 난리가 났다. 성벽 위에서 바라보니, 적 군대의 좌익이 완전히 와해되고 있었다.
병사가 대열을 버리고 사방으로 튀어 나갔다. 물맞은 개미 떼처럼 저들끼리 버글버글 뒤엉키는 꼴이었다.
사실 강산이 비처럼 내린다 해도 일회, 한 차례 떨어져내리는 호흡에 그치는 것이었다.
값싼 피혁 재질이라 해도 투구와 갑옷을 차려입은 이들이 입을 피해는 크지 않으리라.
그러나 공포란 바로 이런 것이었다.
“끝났네.”
시엔이 고개를 저었다.
저 상태에선 전투를 강행할 수 없었다. 패닉에 빠진 군대를 수습하는 데에만 한참의 시간이 걸릴 터.
게다가 용의 위력을 이미 보았으니 저들 중 누가 선봉에 서서 싸우려 할까.
연합군이란 오로지 제 군대만 소중하여 아끼고자 하는 지휘관들의 모임이었다.
-크하하핫. 이것이 바.
광소하며 무언가 말하려던 용의 음성이 뚝 끊겼다. 시엔이 세올의 영혼을 거둬들인 탓이었다.
용을 장악했던 영혼이 빠져나갔다. 껍데기만 남았다. 그러자 비늘이 자취를 감추고 뒤이어 속에 들어찬 근육들이 빠르게 분해되기 시작했다.
용골의 통제권이 되돌아왔다. 시엔이 급한 대로 뼈를 부려 성벽 뒤편으로 치웠다.
용의 살이 녹아들며 검은 뼈를 드러내는 광경에, 일부 병사들이며 귀족들이 신기함 반 걱정 반이 담긴 눈길로 바라보았다.
특히, 마법사들. 1왕자파의 마법사들이 전부 성벽 뒤편에 매달려 용의 유해를 내려다보는 중이었다.
그 반짝반짝 빛나는 눈빛이란!
마법사들은 숨 쉬는 것조차 잊어버린 채로 용을 향해 열렬한 구애의 시선을 보냈다.
그러거나 말거나.
시엔이 예법 선생의 어깨를 톡 두드렸다.
예법 선생이 급히 마법사를 찾았다. 누네드 다인이라는 천문관으로, 아까 전 목소리 증폭을 담당했던 이였다.
성벽 뒤편에 매달려 용을 내려다보던 누네드가 아쉬운 눈빛을 감추지 못한채 어기적 어기적 다가왔다.
뒤이어 예법 선생의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보아라, 찬연히 고결하신 용께서 도우심을.
이는 정의를 숭상하는 지고한 이가 보증하는 선의 증명이다! 선한 이를 수호하는 용께서 말씀하시는 정의의 증명이다.
그러나 용께서 자비를 베푸시었다.
반란군을 휩쓸어 한 줌 핏물로 만드시지 아니하고 그저 힘을 보이실 뿐이었으니. 이는 인간이 잘못을 뉘우쳐 바로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너희는 물러가 진정한 충의가 무엇인지 고심하여 왕국을 위해 헌신하는 참 신하가 되어야 할 것이다!
보아라! 정의는 승리한다!
우리는 승리하였다!」
병사들이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우리가 이겼다는데? 그럼 이겼나 보다.
그저 한 일이라고는 마법 구경, 용 구경, 사람 죽는 구경뿐이었지만 어쨌거나 이겼단다.
이겼는데 나도 살고 너도 살고 내 전우가 몽땅 살았으니 이 얼마나 기쁜 일인가.
뒤이어 우레와 같은 함성이 터져 나왔다.
* * *
1왕자파의 함성에, 왕당파의 사기가 땅에 처박혔다. 땅에 처박힌 수준이라면 다행이리라. 땅 아래 지하로 파고들어 간 상황이었다.
지휘부에서 귀족들이 고개를 저었다.
“졌군.”
“싸워보지도 못하고 졌어.”
“철수합시다. 총력전으로는 승산이 없게 되었습니다.”
베사렌 흐레이그가 당황했다. 흐레이그의 대공자로서 부대의 총사령을 맡았다. 패전의 책임은 기본적으로 총사령에게 있는 법이었다.
이대로면 싸워보지도 않고 패배의 책임만을 물게 될 상황이었다.
“잠깐, 잠깐만 기다려 주십시오. 영명하신 영주님들, 아직 저희는 싸울 수 있습니다. 아직 왕실 무기고의 전략 병기들이 수중에.”
“쯧쯧. 모르겠나? 이번 싸움은 졌네.”
“아직 유성투가 남았습니다! 유성투 편대를 운용하면 제아무리 용이라 해도 요새를 지키진 못할 겁니다!”
귀족들이 고개를 저었다.
개중 한 명이 앞으로 나섰다.
“대공자. 용은 그렇다 치고. 젠장, 용이라니. 용이 없더라도 마찬가지야. 요새가 무너질 것 같으면 저들은 미련 없이 후퇴하고 말 걸세.”
“그게 어쨌다는 말씀이십니까?”
“이 토벌의 목적을 모르겠나? 압도적인 병력으로 호되게 후려쳐 본보기를 보이고, 중립파 귀족들을 꼼짝 못 하게 묶어놓는 것이 그 목적이 아니었나.”
“하시면.”
“이미 글렀네.”
이제는 상황이 바뀌었다.
지금까지 소극적으로 눈치를 보는 이들이 모두 적극적으로 참가할 길이 열려버린 것이었다.
“그러니 오히려 지금이 기회입니다! 바로 지금 공격해서 1왕자를 확보해야 합니다! 지금 끝낼 수 있단 말입니다!”
귀족들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맞는 말이었다. 1왕자만 처리하면 모든 명분을 지워버릴 수 있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이 자리에서 내전을 마무리 지을 기회였다.
“용의 수호를 뚫고 1왕자를 확보할 수 있겠나? 정 안되면 용을 타고 도망치면 끝이 아닌가. 무엇보다, 그렇게 왕자를 놓치고 나면 어떻게 할 셈인가? 이 군대가 반의반이라도 상하고 나면.”
위험이 크면 이득이 커진다.
반대로 말하자면, 이득이 크면 위험 역시 커지는 법이었다.
여기서 1왕자를 확보하면 내전을 바로 끝낼 수 있겠지만, 실패하고 군대가 상하면 오히려 불리해지는 것이 왕당파였으니.
“물러나세. 용이 강력한 수단이라 해도, 결국 병기 하나일 뿐이야. 중립파를 끌어들이고, 전선을 넓혀 국지전으로 가야 할 때네.”
* * *
후작저에서 연회가 열렸다.
승전 축하 연회였다. 때가 때이니만큼 연회는 소박하게 준비되었다. 그러나 그 객이 예전과는 사뭇 다른 규모였다.
카레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알시드 백작님에. 하, 호눌란 남작께서도 오셨네? 병중이신데도 말야.”
“서부 전체가 다 모였으니까.”
대답하는 로우드의 표정이 밝았다.
아닌 게 아니라, 축하한다 들고 온 선물들이 벌써 한가득이었다. 로우드의 표정이 밝으면 재정 역시 청신호라는 뜻과 같았다.
연회장 한 편에 사람이 구름처럼 몰렸는데, 델피르 왕자가 자리 잡은 곳이었다.
델피르는 제게 쏟아지는 관심이 영 불편한 모양이었다. 사실, 그간 이러한 일을 겪은 역사가 없던 탓이었다.
예법 선생이 곁에 있지 않았다면 진작에 도망쳐버리고 말았으리라. 틈틈이 연회장의 한구석을 훔쳐보는 것이 바로 시엔이 선 방향이었다. 아무래도 곁에 두고 싶은 모양이었다.
그러나 시엔 역시 퍽 많은 수의 손님을 상대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저기 몰린 것들은 누구야? 귀족들은 아닌 것 같은데. 시엔이 이럴 때 전하 곁에 있어야지.”
“마법사들이야.”
“마법사?”
“인근의 이름난 마법사들이 전부 몰려왔거든. 용을 연구할 수 있게만 해 주면 공짜로 일하겠다는데.”
카레네가 인상을 찌푸렸다.
마법사를 초대한 기억이 없는데 여기에 있는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초대하지 않은 손님이 찾아오는 것이 예의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아니, 무슨 생각으로 연회장에 함부로.”
“너무 그러진 마. 공짜로 일해주겠다잖아.”
“너는. 공짜라면 독도 주워다 마시겠다?”
“독만 아니면 못 마실 것도 없지.”
카레네의 생각은 상식적이었다.
그러나 마법사를 얕잡아 본 순진한 생각이기도 했다. 용이 여기에 있다는데 제정신인 마법사가 있을 리가 있나.
“도련님, 용을 만나볼 수는 없겠습니까?”
“그건 제가 결정할 일은 아니네요. 용께서 본다 하셔야지요.”
“그러니까 잘 좀 말씀을 해 주시면.”
“흠. 글쎄요.”
용이 있다 듣고 한달음에 달려온 이들이었다. 정치적 감각이 있는 이라면 이리 막무가내로 들이치진 않았을 터이니, 하나같이 순진하여 제 연구나 보던 이들이었다.
시엔이 미소 지었다.
“용을 뵙고 뭐라고 하실 생각이십니까? 연구하고 싶으니 피라도 한 방울 달라 하시려고요?”
시엔이 마법사들을 둘러보았다.
“여러분 같으면 뭐라 대답하시겠어요? 개미 떼가 달려들어 피 한 방울 달라 한다면요. 용에게 인간이란 그 정도에 지나지 않을 겁니다만.”
“크흠.”
마법사들이 곤란한 낯빛을 했다.
시엔이 말을 이었다.
“하지만, 여러분들의 청을 모른척하기도 좀 그렇네요. 용을 달래드릴 만한 공물이 있다면 혹시 몰라요. 용께서는 귀한 보석을 사랑하십니다. 희귀하고 이름난 것들 있잖아요.”
마법사들의 표정이 밝아졌다.
용의 연구를 할 수 있다면, 마탑에서 흔쾌히 지원하고 나서리라. 귀한 보석이라 해도 마탑의 재력이 여간이 아니니 희망이 있다 볼 것이 아닌가.
시엔이 장사를 시작했다.
재화야 벌 수 있을 때 벌어야 하는 법. 이참에 바가지를 씌워 팔 요량이었다.
어차피 저들이 용을 연구한다 해서 손해를 볼 일이 하나라도 있어야지.
새로운 마도구나 마법의 발명으로 이어지면? 어차피 재료를 쥔 것이 세상에 시엔 혼자뿐이었다. 석연치 않다 싶으면 공급을 끊어버리면 그만이 아니던가.
용에 대한 새로운 이론이나 발견이 이루어지면 오히려 시엔 입장에선 반가운 일이었다.
시엔 역시 한 명의 마법사이니, 그러한 발견은 기쁜 마음으로 축하해 줄 수 있었다.
“다만, 용의 심미안이 인간과는 비할 데가 아니죠. 어설픈 공물로는 오히려 화만 돋우게 될 걸요? 아주 까탈스러운 용이라서요. 제대로 정성을 표시하셔야 할 거예요.”
그러니까 알아서 비싼 거로 바쳐라.
시엔이 덧붙였다.
그때였다. 집사가 급히 다가와 시엔을 찾으니, 뒤이어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대공자님, 손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만, 연회에 찾아오신 분은 아닙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어떤 분이시죠?”
“오린 살사스 공자님이십니다.”
“이리로 모시도록 해.”
시엔이 미소지었다.
살사스 후작가. 예전에 연이 있어 잠깐 본 적이 있었던가. 남부를 손에 쥔 제후급의 대귀족이었다.
이때 찾아왔다면, 아마 승리 소식을 듣고 바로 출발했으리라.
아마 연회를 알고 오진 않았을 때지만, 마침 자리가 참 잘 깔리지 않았나.
“여러분. 예기치 못한 귀한 손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먼 걸음 하셨으니, 여러분들께서 기꺼이 반겨주시기를 청하겠습니다. 살사스의 오린 공자님께서 드십니다.”
* * *
“용이라니! 용! 그게 말이 되나! 살다살다 별 희한한 게 튀어나와 날 괴롭히냔 말이다!”
국왕이 팔받이를 내리쳤다.
요정목으로 만들어진 왕좌가 늙은이의 손길에 파손될 리가 없다. 무언가를 쳐서 부서지지 않으면, 그 충격이 고스란히 돌아오는 법.
국왕이 급히 제 손을 주물렀다.
“송구합니다. 폐하.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그래,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겠지. 티란디스의 애송이가 그런 걸 감추고 있었음에도 추호도 몰랐으니까.”
흐레이그 공작이 고개를 숙였다.
사실 황당하기로는 공작 역시 마찬가지였다.
용이라니?
티란디스의 애송이가 꾀를 부려 봐야 교단을 끌어들이는 것이 고작이겠거니 했다. 그런데 갑자기 용이 어디서 튀어나왔단 말인가.
그러나 목격자가 만 명이 넘었다.
용은 현실이고, 이제는 대책을 마련해야 할 때였다.
“젠장, 용이라. 용이라니. 젠장!”
“고정하십시오, 폐하.”
“내가 고정하게 생겼나?”
“이미 벌어진 일입니다. 일단 제가 마법 병단을 방문하겠습니다. 용에 대해선 아무래도 마법사들이 알고 있지 않겠습니까?”
“젠장. 그래서, 어떻던가?”
국왕이 묻는 것이 무엇인지 안다.
분명 또 화를 내겠지만, 그래도 대답할 수밖에는 없지 않겠는가. 흐레이그 공작이 입을 열었다.
“남부 귀족들의 대부분이 1왕자를 지지하고 나섰습니다. 서부와 남부가 연합했습니다.”
“남부가? 어떻게 그놈들이……!”
“살사스 후작이 돌아섰습니다. 아시다시피 남부를 틀어쥔 인물이지 않습니까.”
“정녕 충신이 이리도 없단 말인가!”
국왕이 탄식했다.
흐레이그 공작이 고개를 숙였다.
“폐하, 신이 있지 않습니까. 신 흐레이그, 세가 불리하다 하여 굴복하는 일 없이 폐하를 섬길 것입니다.”
“마음으로 될 일인가? 애초에, 용을 막을 방법이 있기는 한가?”
“폐하. 그 부분은 심려치 마시옵소서. 소신이 준비한 것이 있습니다.”
흐레이그 공작이 눈을 빛냈다.
용이 제아무리 강대하다 해도 결국 산 것이라. 치명상을 입히면 쓰러져 죽고 말리라.
그러나 공작에게는 불사의 군대가 있었다.
흐레이그 나이트. 죽음에서 자유로운 최강의 기사들이었다. 제아무리 용이라도 죽지 않는 군대 앞에서는 오래 버틸 수 없으리라.
자신만만히 대꾸하는 흐레이그 공작을 보며, 왕이 눈을 가늘게 떴다.
저리 자신에 차 말하니 분명 숨겨둔 한 수가 있기는 한 모양. 그러니 오히려 괘씸하게 느껴졌다.
그 한 수를 진작에 드러내 일전을 치렀다면 일이 여기까지 오지는 않았을 터. 끝까지 숨겨두고 어디에 쓰려 했을까.
“용을 제외하더라도, 남서부가 한데 뭉쳤으니 북부 혼자선 막을 여력이 없겠지. 단순히 두 배의 전력차가 아닌가.”
“왕도의 수비는 굳건합니다. 왕도를 넘져주지 않으면, 적의 병력이 많다 하더라도 절대 패배하지 않을 것입니다.”
“패배하지 않는 것으로는 안 돼! 이겨야지! 승리해야지! 저 반란군 놈들을 쓸어버려야지!”
왕이 호통쳤다.
흐레이그 공작이 움찔하는 사이, 왕이 매서운 눈빛으로 다시 말했다.
“며칠 전에 뱅가 공작이 왕성에 다녀갔네.”
“뱅가 공작이 말입니까?”
흐레이그 공작의 표정이 굳었다.
뱅가 공작가. 왕국 동부를 쥔 대제후였다.
“왕세자가 나이가 찼음에도 아직 내자를 두지 못한 것을 걱정하더군. 그렇지 않은가? 장성하였으니 이미 손을 보아도 이상하지 않은 나이임에도 말일세.”
왕세자비를 가문에 두게 되면, 뱅가 공작가에서도 적극적으로 내전에 참여하게 될 터였다.
남서와 동북으로 병력에 동수를 이루는 셈이니, 기울어진 힘의 균형을 단숨에 맞출 수 있는 묘수이기도 했다.
흐레이그 공작에겐 날벼락 같은 소리였다.
왕국에 공작이 둘 뿐이었다.
당연히 흐레이그와는 앙숙이었다. 어떻게든 서로를 견제하려 힘쓰는 사이였으니까.
“요즘 같은 때일수록 왕실의 행사를 과시하여 그 건재함을 보여줘야 할 때일세. 전례는 없으나 왕세자의 혼인은 서둘러야겠어.”
“하오나 전하, 혼약이란 살아 죽음까지 함께 할 여인을 맞이하는 일입니다. 이토록 급하게 추진하신다면…….”
“꼭 그렇지만도 않더군. 공작.”
왕이 흐레이그 공작의 말을 잘랐다.
단호하지 그지없으니, 꼭 그렇게 하고 말겠다는 의지를 내보인 셈이었다.
국왕 입장에서는 한 수로 두 개의 이득을 보는 수였다. 당연히 무를 이유가 없다.
반란군에 비해 열세인 전황을 뒤집고, 또한 흐레이그의 독주 또한 견제할 수 있었다.
지금까지 흐레이그가 차후 왕세자의 왕위 계승만을 바라보고 있는 것을 뻔히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왕세자의 방어벽이며, 또한 그 세력이 워낙에 강성하니 어쩔 수 없이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 벽이 흔들려 균열이 간 지금은 아니었다. 맹수를 하나 더 끌어들여 서로 견제하도록 만든다면, 왕실의 권위는 더욱 높아지리라.
그렇게 따지면, 오히려 현 정국이 더 도움이 되고만 모양새였다. 이제 반역자들을 처치하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으니.
“공작은 이만 물러나게. 피곤하군.”
“예, 폐하.”
흐레이그 공작이 순순히 물러났다.
그러나 속은 부글부글 끓었다.
당했다.
흐레이그 공작이 생각했다.
늙은 왕의 잔머리가 여간내기가 아니었다. 하필이면 지금 치고 들어오니 반대할 명분이 없었다.
어쩌면 신부행에 불미스러운 일이 일어날 수도 있고, 그것이 저 반역자들의 수작일 수도 있지 않겠는가.
그러고 나면 뱅가 공작이 어쩌겠는가.
제 혈육을 살해한 반역자의 편을 들 수도 없고, 중립을 지켜도 가문의 명예에 먹칠하는 꼴이리라.
그러면 남은 선택은 한 가지뿐이리라.
거처로 돌아온 공작이 명령을 내렸다.
“흐레이그 나이트를 준비시켜.”
< 30. 둑이 무너지고 [5]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