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 둑이 무너지고 [4] >
검은 돔이 대지 위에 피어올랐다.
강력한 흡입력으로 종심에 쌓인 병사들을 집어삼키고는, 뒤이어 언제 그랬냐는 양 세상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남은 것은 반구형으로 파인 크레이터뿐.
거대한 스푼으로 떠내기라도 한 모양새였다. 그 위에 존재하던 인간은 물론, 잡초 한 줌 남지 않은 대지의 상처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오히려 참혹한 것은 파인 땅의 가장자리였다.
바람에 휩쓸리는 몸을 땅에 붙어 저항하던 이들이었다. 크레이터의 가장자리를 따라 제 신체의 일부를 잃었다.
누군가는 허리가, 누군가는 무릎 아래가, 심지어 어떤 이는 머리와 두 팔만 덩그러니 남았을 뿐이었다.
“맙소사.”
누군가 탄식했다.
이해할 수 없는 상황 앞에, 누구 하나 나서지 못하고 그저 황망히 서 있을 수밖에는.
“비켜, 비켜 봐!”
그 때, 병사들을 헤집고 로브를 입은 이가 앞으로 나섰다. 마법 병단장 알름 포르델하이드였다. 마법의 폭심을 직접 확인한 그가, 눈을 부릅떴다.
“어떻게.”
닳고 닳은 마법사인 알름조차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마력 방패를 통과하여 들어온 마법이었다. 그러나 그 마법이 일으킨 결과는 더욱 불가해한 것이었다. 아예 세상에서 지워 버리다니?
그저 한 가지. 그간의 마법 체계와 완전히 분리된 어떤 고도화된 다른 어떤 것이 있음을 알았다.
아케인 에너지가 아닌, 그렇다고 신성이나 오러도 아닌 다른 성질의 어떤 마력이라 방패를 통과했겠지.
베사렌 흐레이그가 병단장을 알아보았다.
아직 피해 집계는 되지 않았지만, 최소 수백의 병사를 잃었다. 심지어 시체조차 남기지 못한 채였다.
그러니 베사렌은 무슨 일인지 알아야 할 의무가 있었다.
“병단장님!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당장 군대를 물러야 하오.”
알름이 단호하게 말했다.
베사렌이 하얗게 질렸다.
“그럴 수는, 그럴 수는 없습니다. 여기서 군대를 무르면 그때는.”
“그렇다면 마법 병단은 여기서 빠지겠소.”
“폐하의, 폐하의 명을 모르십니까? 여기서 패배한다면 폐하께서 절대 용서하시지 않을.”
“젠장! 병단이 전멸당하는 것보단 살아서 패배하는 것이 낫다 하실 것 아니오!”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적의 마법, 마법······ 젠장, 그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현재는 막을 수단이 없단 말이오. 그걸 여기로 날렸어. 여기로 날렸다고!”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왜 하필 여기를 노렸겠소? 마법 병단 위에 떨어졌더라도 막지 못했을 것이고, 그럼 손쓸 도리도 없이 전멸이었겠지. 그런데 왜 여기일까. 정말 모르겠소?”
마법 병단의 전략급 마법 한 방이면 요새의 방어를 한순간에 무력화시킬 수 있었다. 적의 숫자가 열세이니, 그들에겐 가장 피하고 싶은 상황일 터.
그럼에도 마법 병단을 전멸시키지 않고 다른 곳을 공격하는 것을 택했다.
엄중한 경고였다.
이 공격을 보아라. 너희가 막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굳이 너희를 해하지 않았다.
이만 단념하고 빠지라는 뜻이 아니겠는가.
게다가 그 수법이 일회에 그치고 말 것이라면 굳이 경고를 위해 소모하진 않았을 터. 이후 얼마든지 후속 타격이 가능하다는 자신감의 발현이기도 했다.
알름이 혀를 찼다.
“대공자. 잘 들으시오.”
“경청하겠습니다.”
“둘 중 하나요. 마법 병단만 없으면 승리할 수 있다는 그런 뜻이거나, 그게 아니면.”
문득 알름이 인상을 찌푸렸다.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심계가 보통이 아니구만.
“하지만 병단장님? 둘 중 하나라 하셨는데.”
“그게 아니라도 병단만은 물러나야 할 상황이 되겠지. 후자라면 대공자께서도 꽤 골치 아프게 되겠구려.”
“그건 또 무슨 말씀이신지······”
그때, 마력으로 증폭된 목소리가 요새 방향에서 크게 울려 퍼졌다.
「지금의 왕국을 보아라.
왕실의 적통께선 적을 피해 몸을 숨기셔야 했다. 왕국의 어머니께선 터무니없는 모함에 투옥되어 제 피붙이조자 한 마디 나눌 수 없구나.
이 모든 것이 국왕 폐하께서 사특한 무리의 꾐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시는 까닭이라.
그렇다. 사특한 자들이 있다.
이 사특한 자들은 입으로 충성을 담으나 뒤로는 오로지 제 안위를 위할 뿐이며, 또한 백성을 입에 담으나 또한 온전히 제 가문을 위한 수탈만을 계속할 뿐이다.
그저 달콤한 사탕발림으로 폐하의 귀를 막고, 왕국의 어려움 속에서 호의호식하며 제 부를 불려갈 뿐이니 이 얼마나 무도한가.
진정한 충신이 어떤 이인가.
맹종은 충성이 아니다. 진정한 충성은 그 주인이 바른 길에, 정도를 걷도록 아래를 받히는 것이다.
그저 제 영화를 위해 주인을 꾀어 수렁으로 이끈다면, 그것은 불충이며 또한 반역이다.
명백한 반역이다.
그리하여 우리가 검을 든다.
사악한 간신들의 반역 행위를 피로 처단하여, 폐하께서 건강한 이지로 다시 영명하신 위엄을 온 대륙에 떨치도록 할 것이다.
왕실의 군대와 왕실의 병기는 그만 물러나 폐하의 곁을 지키시오. 우리가 폐하를 도모하고자 할 뿐이니, 그대들과 우리가 피를 볼 이유가 없기 때문이라.
그러하지 않는다면, 왕실에 속한 가운데서도 제 영화만을 쫒는 반역자로 간주하겠다.
지금의 왕국을 보아라.
땅은 메마르고 곡식은 죽어갔으며, 굶주림이 온 거리와 집안에 들어 백성의 앓는 소리가 끊임없이 번진다.
이것이 모두 부덕에서 온 것이며, 또한 너희 반역자들이 가져온 재앙이다.
이에 왕국의 진정한 충신들이 바로잡고자 한다. 이는 당연한 의무이자, 또한 유일한 정의이다.
반역자가 지금의 참상으로 너희의 부덕을 증명하였듯, 우리는 하늘의 뜻으로 우리의 정의를 증명하겠다.
보라!
이 땅에 정의가 있음을 증명하겠다!」
우아한 목소리였다.
발음은 분명하여 뭉개지는 소리가 한 군데도 없고, 높지도 낮지도 않은 목소리는 분명하여 귀에 착 감겨들었다.
왕자의 예법 선생이 마법사의 도움을 받아 열변을 토했다.
시엔이 고개를 돌려 저편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작게 중얼거렸다. 혼자 하는 말이 아니라 송수신기를 통해 전달하는 말이었다.
“실수하지 말고. 잘해.”
-네. 선배님! 나만 믿으세요!
세올의 목소리가 되돌아왔다.
영 믿음직하지 못한 소리였다.
시엔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뭔가 위화감이 드는데. 뭐지?
* * *
“젠장! 빌어먹을!”
베사렌 흐레이그가 거칠게 욕설을 토해냈다.
병단장이 한 말을 이제야 이해한 탓이었다.
제대로 말려들었다.
왕실을 적대하는 것이 아니라, 왕실을 조종하고자 하는 반역자를 처단하려는 것뿐이라고.
1왕자파가 제대로 된 명분을 갖게 되는 순간이었다.
게다가 마법 병단과 왕실 무기고의 병기와 그 운용병들이 전부 떠나 버리고 나면?
세 배의 병력이나 적은 요새를 끼고 있으니 적에 비하여 우세라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징집병을 끌었어야 했다.
공성전의 기본은 징집병의 소모로 적의 방어를 파괴하는 것이 아니던가. 요새의 전투배치란 결국 한정된 것이라, 소모 가능한 전투력을 적의 방어력과 교환하는 것이 정석적인 전략이었다.
이제 선택지는 둘 뿐이었다.
이대로 진격하거나, 혹은 물러나거나.
진격하여 승리하거나 패배하거나 바로 내전의 종식이었다. 총력전이니만큼 승리하는 이가 원하는 것을 얻으리라.
만약 물러나면?
그 때는 본격적인 내전의 시작이 되고 말 터였다. 1왕자파의 명분이 탄탄하고 또한 그 승산을 충분히 보여주는 꼴이 될 테니, 지금껏 눈치를 보던 무수한 가문들이 합류하고 말 테니까.
“젠장, 어떻게 해야.”
베사렌이 반란군 토벌대의 총사령이었지만, 이번엔 어느 쪽이건 그가 결정할 일이 아닌 것 같았다.
승리가 불 보듯 뻔한 일이라 흐레이그의 대공자가 사령을 맡았을 뿐이 아니던가.
차라리 아버지께서 직접 나서셨다면.
“젠장, 쟌프 경, 부대장들을 소집해 주세요.”
베사렌이 결정을 포기했다.
독단으로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고, 결정한다 해서 군대를 이끌고 합류한 귀족들이 순순히 따를 것 같지도 않았다.
그러니 상의해 보아야 할 일이었다.
그러나 쟌프의 대답이 없었다.
충성스럽기 짝이 없는 기사가 어째서?
베사렌이 다시 물었다.
“쟌프 경?”
베사렌이 제 호위기사를 돌아보았다.
쟌프는 그저 입을 멍청히 벌린 채, 고개를 들어 먼 하늘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제야 베사렌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땅 위에 선 모든 이들의 시선이 한 데 뭉쳤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서야, 그 역시 고개를 돌려 먼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거기에 용이 있었다.
* * *
황금빛으로 번쩍이는 용이 네 장의 날개를 활짝 펼쳤다.
사실, 황금빛으로 번쩍이는 것이 당연했다. 실제로 황금을 발랐으니까.
용의 뼈 안에 세올의 강신체를 심은 후에, 마력으로 인공 살을 붙이고 비늘을 덧댔다.
실상 그 안에서 용의 것은 뼈뿐이었다.
장기는 만들지 않았고, 겉과 속을 새의 근육으로 몽땅 채웠다. 그리고 비늘은 물고기의 것을 모사하여 황금을 사용해 구성했다.
실상 용의 비행은 시엔의 마력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세올이 맡은 부분은 용이 정말로 살아있는 것처럼 만들어내는 일었으니까. 꼬리나 날개의 움직임, 유려하게 움직이는 긴 목의 구동, 그리고 용의 울부짖음 따위의.
황금의 용이 모습을 드러냈다.
우아한 날갯짓과는 달리 꽤 거칠게 창공을 노니며 요새 위를 맴돌았다.
-선배님, 이거 좀 어지러운데요······.
“참아. 용이 그 정도는 날아야 될 거 아냐.”
-아니, 정말로요. 으윽······. 나는.
“좀만 참아. 좀 천천히 날 테니까.”
시엔이 인상을 찌푸렸다.
여기서 용이 구토하는 모습을 보여줄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시엔의 손에 들린 제국 오브에서 빠르게 음차원 에너지가 소모되었다. 오브에 깃든 검은 수위가 위에서부터 꿀렁꿀렁 빠져나가는 것이 눈에 보일 지경이었다.
다른 것도 아닌 용의 뼈를 부리니 그 마력의 소모가 보통이 아니었다. 게다가 순전히 용의 뼈 뿐만 아니라, 그 위에 살점과 비늘을 붙여놓았으니 세 배는 다루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용이 적의 머리 위를 크게 선회했다.
마침내, 용이 성문 위에 내려앉았다.
네 장의 날개를 활짝 펴고, 긴 목이 부드럽게 요동치며 그 대가리가 땅을 훑어보고 또 우주를 바라보며 입을 벌렸다.
[그오오오오오오······!]
용의 울부짖음이 길게 이어졌다.
시엔이 그 짧은 사이에 벌써 저장량이 반이나 소모된 오브를 트리예에게 건넸다.
어쨌거나 이제 할 일은 다 했다.
여기까지 했는데 적들이 물러가지 않고 배길 수 있을까.
만오천의 군대라도 그 소속 가문이 다르니, 개중 몇몇은 이탈하고 말리라. 그리고 나면 나머지도 어쩔 수 있을까. 지금은 물러나 이후를 도모해야겠지.
시엔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문득 드는 의문이 하나.
리치 녀석이 어지럽다고 했었나? 분명 용의 뼈 위에 살을 덧대면서, 감각 기관은 설계하지 않았을 텐데?
* * *
“그오오오오오오······!”
세올이 용의 울음소리를 흉내냈다.
흉곽 안에 긴 울림통을 설계하고, 구멍을 두 개로 빼내 최대한 깊고 웅장한 소리가 나도록 구성했다.
밖에서 듣기에는 오금이 저릴 정도의 포효였지만, 세올 입장에서야 되도 않는 짐승 소리를 내고 있는 셈이었다.
‘뭔가. 기분이 이상해.’
세올이 요새 바깥, 적의 군대를 바라보았다.
거대한 두려움이 느껴졌다.
적의 두려움이 보이고, 적의 두려움을 귀로 들었다. 또한 적의 두려움을 코로 맡고 또한 혀로 맛보았다.
세올의 모든 감각이 적의 두려움을 전했다.
‘날 두려워해.’
짜릿한 전류가 꼬리로부터 머리로 통하는 기분이었다. 세올의 기분이 좋아졌다.
‘당연하지. 미물 따위가 위대한 것을 보아 두려워하지 않으면 대체 세상에 두려울 것이 무어겠어.’
나는 위대하다. 위대한 용이다.
그때 문득 느껴지는 것이 있어 세올이 고개를 돌렸다.
요새의 첨탑, 그 위에 뚫린 작은 창문이 보였다. 거기에 어린 용이 있었다.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미물의 모습을 하고 미물의 품에 안겨 있는 상태였지만.
세올이 보자마자 알았다. 직관이었다.
진실로 강대한 용이로구나. 아직 아이이나, 자라 세상 가장 강력한 용이 되리라. 그 권능은 신조차 닿지 못한 영역에 닿으리라.
그야말로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통틀어 가장 아름다운 용이었다.
기꺼운 일이었다. 저 아이야말로 용의 정점, 용을 용의 세계로 인도할 이였다. 이 저급한 세상에서 벗어나 위대한 창공으로 이끌겠구나.
그러자 가장 아름다운 용이 말했다.
“뭘 봐? 끔찍한 병신 주제에.”
독설을 쏟아낸 파린이 말을 이었다.
“쯧. 네가 스스로를 용이라 여기는구나. 너는 용이 아냐. 여기저기 기워 붙인 볼품없는 살덩이에 불과하지.”
시엔과 세올이 예상치 못한 일이 일이었다.
리치의 강신체에 용의 잔재가 섞이고 말았다. 뼈에 남은 잔재에 불과하나, 그조차도 인간의 여린 영혼은 감히 감당할 수 없는 것이었다.
-나는, 그렇지, 않다.
송수신기를 통해, 세올의 것이 아닌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시엔이 인상을 찌푸렸다.
“방금 뭐라고?”
-나는 위대하다. 위대한 용이다.
“세올?”
-선배님? 뭔가 잘못. 나는 증명한다! 내가 증명한다! 몸이 말을 안 듣는데요! 내가 증명하겠다! 꺄악!
황금빛 용이 그대로 공중으로 떠올랐다.
용의 비행이었다. 용이 하늘을 나는 데에는 어떤 동작도 필요 없었음으로. 그저 날고자 하여 날 뿐이었다.
시엔이 황당한 눈빛으로 날아오르는 용을 바라보았다. 마력도 쓰지 않았는데 용이 저 혼자 움직이고 있었다.
게다가 세올은 혼자 용을 움직일 능력이 없었다.
“저건 또 왜 저래?”
용이 입을 쩍 벌렸다.
시엔의 표정이 굳었다.
뒤이어 용의 입으로 점점이 검은 것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브레스.
오로지 용에게 허락된 가장 포악한 숨결이 터져 나왔다.
< 30. 둑이 무너지고 [4] > 끝